제 3 장

27

 

봄비가 내렸다. 구슬알같은 물방울들이 초록색잎새에 맺혀 하늘하늘 춤을 추다가 반짝거리며 땅우로 구울러내린다. 가없이 펼쳐진 푸른 들에 핀 꽃들은 하늘에서 날아내린 작은 새마냥 바람결에 꽃깃을 살랑살랑 저어대며 노래를 부른다.

여기는 도원의 한복판이다. 금시 망울을 터친 배꽃같은 구름을 머리에 이고 파릇파릇 돋아난 아기풀을 밟으며 한 처녀가 두팔을 벌리고 헤염치듯, 날듯 달려온다. 환희의 폭발인양 어데서인가 아름다운 선률이 울려오고있었다. 목가적인 음악의 단조로운 리듬이 행진조로 변하고 처녀는 하늘을 향하여 기도를 드리는듯 한무릎을 꿇고 앉으며 무엇이라 애절하게 하소한다.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 무거우면서도 장중한 음악과 함께 번개의 창끝이 번쩍이고 뢰성이 진동하자 폭우가 쏟아져내린다. 도원의 꽃들은 락화로 날려가고 검푸른 물결이 처녀의 온몸을 삼켜버릴듯이 휘감는다. 눈을 꼭 감은 처녀는 순종의 미소를 지은채 움직이지 않는다. 거친 물결은 마침내 삼켜버리고야만다. 물속에서 석상처럼 굳어져있던 처녀가 몸부림치며 솟구쳐 일어섰다. 숨이 막혀 견딜수 없었던것이다. …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진옥련은 손더듬으로 탁상등을 찾아 켰다. 벽에 새겨진 자기의 그림자를 이윽토록 바라보던 그는 소리없이 웃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꿈도 늙기마련이다. 밤새 하늘을 날아다니느라 너무 곤하여 자리에 오줌을 누면 어머니가 들려주는 키짝을 들고 소금 꾸러 가던 어린시절의 꿈같은것을 꾸었으니 젊어지려는게 아닌가. 어이없는노릇이다. 세월은 무정한것이여서 한번 가면 되돌려오지 못한다.

한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일어난 진옥련은 희미한 불빛을 밟으며 방안을 오가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덴가. 하루밤 잠자리를 옮겨도 서먹서먹한감을 지울수 없었는데 마음편히 깊은 잠에 들지 않았는가. 평양에 온것이다. 인생의 시계를 보며 초조했었는데 용단을 내렸다. 모든 일이 잘되리라는 평온을 느끼며 그는 걸음을 멈췄다.

추억의 재너머에서 노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절렁절렁 가슴이 미여지게 하는 방울소리를 따라 가마채를 멘 사람들이 줄레줄레 걸어가는 모습이 눈앞에 밟혀온다.

《나보구 장가가래. 난 가기 싫어. 너하구 헤여지기 싫단 말이야.》

《오빠야, 장가가면 못 오나?》

장가간다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철부지계집애는 량반집 담장밖에 찾아가군 하였다. 대문을 빠금히 열고 들여다보면 우스운 광경이 나타나군 하였다. 자기 동무인 사내애가 큰언니벌이 되는 녀자의 손에 이끌려 세수를 하며 칭얼댔던것이다. 저 언니가 새각시나. 어쩜 저렇게 무섭게 굴가. 머리를 감겨준 서방의 엉덩짝을 때려주기까지 했다. 너무도 그 모양이 우스워 캐드득거리다 새각시 눈길에 걸려들어 종주먹을 쥐고 도망쳤다.

그들이 산 마을에는 밤나무가 많았다. 가을철이 오면 둘은 이 산, 저 산을 찾아다니며 밤줏기에 해저무는줄도 몰랐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등판에는 다박솔숲이 우거지고 금잔디가 비단이불처럼 덮이여 어린것들이 딩굴기에는 그저그만이였다.

어느날이였다. 잔디밭에 앉아서 다람쥐같이 생밤을 맛있게 먹던 그들은 솔숲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여우가 우는 소린가 하여 겁에 질려 옹크리고 귀를 도사렸는데 사람의 숨소리가 이상하게 들려왔던것이다. 장난세찬 사내애가 소리나는쪽으로 기여가자 철없는 계집애도 따라갔다.

우거진 솔가지를 헤치니 그들로서 처음 목격하는 인간세상의 생활이 펼쳐졌다.

《이젠 그만해요. 저녁은 안 짓고 나돌아친다고 시어미가 야단하겠어요.》

《래일 또 오지?》

《오겠어요. … 막 미쳐버릴것 같아요. 기저귀 채워야 할 애기서방 시중들기가…》

계집애는 눈이 올롱하여 어른들을 바라보았다. 저건 무슨 놀음일가. 남자의 가슴팍을 떠밀어버린 녀자가 황급히 머리를 다듬질하고나서 《래일은 일찍 와요. 아무리 일이 바쁘대도…》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총총히 내뛰였다.

《오빠야, 저 언닌…》

사내애의 손이 계집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사내애는 계집애를 데리고 그 산으로 다시는 가지 않았다. 무엇때문인지 만나기만 하면 잔뜩 찌프리고 노려보는게 무섭기도 했다. 장난꾸러기였는데 자기는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놀기도 싫어하였다. 계집애의 머리속에서는 다박솔산에서 보았던 인간그림자가 꿈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초겨울 싸락눈이 부실부실 내리던 날 량반집 담장옆에서 기웃거리던 계집애는 누군가의 손에 머리끄뎅이를 틀어잡히였다. 어찌나 기운이 센지 마구 휘둘러대여 얼굴조차 가려볼수 없었다. 억울한 봉변을 당하는 판이였다.

《내 집 대문앞에 나타나지 말아, 거렁뱅이같은 계집애! 썩 사라져!》

말 한마디 못하며 내딩굴린 계집애는 물동이를 인 녀자를 쳐다보았다. 자기가 오빠라고 부르는 사내애의 새각시여서 이름모를 미움이 치밀어올라 소리내여 울었다. 그것이 고작해서 할수 있는 항거였다.

《왜 때리는거야, 죄없는 애를. 더러운 년!》

대문을 열고 뛰여나와 선 사내애가 주먹을 부르쥐고 고함을 질렀다. 제 색시라고 해야 할 녀자에게 사정없이 욕을 퍼붓는 얼굴에서는 울분이 떨고있었다. 어푸러진채 울고있는 계집애를 안아 일으켜준 사람은 아버지였다. 제 자식이 억울한 매를 맞았지만 땅을 부쳐먹고 사는 주인집의 며느리여서 한마디 말도 못한채 한숨만 쉬였다.

그해 동지달 어느날 계집애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마을을 떠났다. 짚신발을 끌며 뒤를 돌아보지만 바래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동구앞 뼈만 남은 느티나무뒤에서 사내애가 불쑥 나타났다.

《오빠야! …》

사내애는 말없이 손에 뭔가 쥐여주고나서 말했다.

《옥련아, 너를 꼭 찾아가마. 기다려.》

고개를 끄덕인 계집애는 마을쪽으로 사라지는 사내애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가 줌에 쥔것을 내놓으라고 했지만 입을 옥물고 도리머리만 저었다. 나무가지우에 덮인 눈이 바람에 날려 입김을 내부는 얼굴에 차겁게 내려앉았다.

《나 안 갈래, 오빠하구 놀겠어. 아버지, 우리 가지 말자.》

《그 오빠는 량반집 자식이다. 이 마을에서 살다가는 화를 당할지도 모른다.》

얼마나 원망스럽던 아버지였는가. 철이 들어서야 아버지를 알았다. 일찌기 엄마를 잃은 딸자식을 위해 자신을 깡그리 바친 아버지였다.

조랑복을 벗었다는 말은 그들부녀의 생활을 두고 생겨난듯싶었다. 가난뱅이가 부자로 되였던것이다. 성천고을을 떠난 아버지는 서울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하였다. 어린 딸의 작은 줌안에 들었던 금가락지가 밑천이였다는것을 아버지는 한번도 입에 올린 일이 없었다. 재산을 모은 어제날의 광대는 자기의 과거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딸을 공부시키리라 마음먹었으며 당시 서울에서는 이름이 있었던 숙명녀고에 다니게 하였다. 지지리 못살았던 생활에서 벗어난 처녀는 부러운것 없이 자랐다. 딸자식이 바라는것이라면 아버지는 무엇이나 다해주었다.

어느날 처녀는 류행되고있는 서양가구 한개를 샀으나 집으로 날라갈 짐군을 만나지 못하여 길가에 서있었다. 가구래야 자기 키보다 작은 경대인데 이고 가기 불편한 짐이니 어쩔수 없었다.

한동안 걸려서야 키꼴이 장대한 젊은이와 맞다들었는데 군소리없는 흥정이 이루어졌다. 막로동에 거칠어진 젊은 남자인데 베보퉁이에서 바줄을 꺼내더니 질바를 하고나서 가리켜주는 길로 씨엉씨엉 걸어댔다. 무슨 말이든 나누며 가고싶지만 상대가 너무도 괴벽하여 말을 비칠 틈도 없었다.

혼비중천할 일은 자기 집 대문을 열고 들어선 다음에 벌어졌다. 짐을 받으려고 마주 나오던 아버지가 짐군을 보자 죄지은 사람처럼 온몸을 떨어대고 젊은이의 입에서는 가슴찢는듯 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던것이다.

《도련님… 이런 짐까지 지다니…》

아버지의 입에서 아연해하는 말이 두서없이 흘러나오지만 처녀는 무슨 영문인지 알수 없었다.

《짐승만도 못한 놈인데… 그렇게 찾지 마시우!》

품값을 받고 가면 그만인 짐군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고함소리는 처녀를 질겁하게 하였다.

《내 말을 좀 들어보시우. … 실은 내가…》

《사람의 운명이란… 내 발로 이 집의 문턱을 넘어서다니… 이 수치를 죽어도 잊지 않겠소!》

짐군은 있는 힘껏 발을 굴러대고나서 대문을 차고 나갔다. 처녀는 단 한가지 품값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따라나갔지만 그 또한 젊은이에게 겹쳐주는 모욕이 될줄은 몰랐다.

《이봐요, 돈을 받으세요.》

마주쳐오는 눈길은 사납게 번쩍거렸다. 움켜쥔 두주먹으로 가슴을 들부실듯 쥐여박는 기상은 참을수 없는 모멸감을 이겨내는 몸부림이였다. 어인 일로 초면인 사람앞에서 이러는지 알수 없어 기가 눌린채 바라보기만 하였다.

《몰라보겠구려. 세상에 돈이 못하는짓이 없다는 말은 들었어도 이런 치욕을 내가 당할줄은 몰랐소!》

청년은 울분을 하늘에 대고 터뜨리고나서 가버렸다. 우리가 무슨 죄를 졌기에 한이 맺힌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가. 처녀는 토방마루에 앉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한숨섞인 개탄이 울려나와서야 두손으로 얼굴을 싸쥔채 주저앉았다.

《옥련아, 너를 꼭 찾아가마. 기다려.》

철없던 시절의 약속이 살아서 들려왔던것이다. 감감히 잊고 산 그 말이 왜 이리도 가슴을 뒤흔드는가. 너무도 철이 없어 언약이라고 할수 없는 어린 약속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지 않았던가.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하기로손 어찌되여 자기가 성천고을에서 함께 산 오빠벌 남자를 알아보지 못했는가. 겨끔내기로 사금파리를 모아들고 누구의것이 더 많은가고 세여보던 시절, 모래로, 흙으로 집을 짓고 너는 밥을 하고 나는 나무를 팬다면서 세간살이놀음으로 시간가는줄 모르던 시절, 개울을 건늘 때면 업어주던 오빠, 가둑나무잎에 싸서 주던 산딸기와 가을이면 함께 줏던 노랗게 윤기돌던 밤알들… 마을에 하나였던 량반집 자식인 오빠였다. 부자집 아들이 어찌하여 막벌이군이 되여 헤매는것인가. 철부지때 사귀여 몇해 함께 지내였지만 잊은지도 오랜 사람을 기막히게 만났으니 이 어인 운명인가. 처녀는 인간세상의 천변만화하는 생활의 첫 도전앞에서 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무엇이 자기가 오빠라고 찾으며 따라다닌 청년에게 한을 남겼는지 알수조차 없었던것이다.

사람의 한생에서 망각으로 소실된 생활은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저지른 수치는 얼마며 자신이 미워지는 일은 그 얼마나 빚어내는가. 모멸스러운 그것들이 모두 기억된다면 인간의 뇌수는 견디여내지 못할것이다. 그러나 잊을수 없는 사연과 운명의 곡절은 땅속에 묻히는 날까지 가슴속에 살아있는 법이다. 설사 뼈저린 후회라 할지라도 심혼에 남아있는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진 이야기이기때문일것이다. …

상념에서 깨여 방안을 둘러본 진옥련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창가로 걸어갔다. 날이 밝으려는가. 동녘하늘에 새벽빛이 감돌고있다.

평양이다. 속으로 벼르고벼르다 마음을 먹고 찾아왔다. 이국의 하늘아래서 북두칠성만 바라보며 그려왔던 땅에 몸을 부리우고 첫날밤을 보낸것이다. 오면서도 찾아봐야 할 사람들을 만날수 있을가 얼마나 근심이 많았던가. 헤여진지 스무해가 되여오지 않는가.

항공역에 내린 그는 놀라운 마중을 받았다. 이게 누군가. 왕년에 음반의 녀왕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왕성실이였다.

《언니, 오셨군요. 보고싶었어요!》

꽃송이를 안겨준 왕성실은 진정 찾고찾은 언니의 품처럼 뛰여들었다. 울고웃으며 부둥켜안고 보고보고 또 보는데 반가운 사람들이 더 나와있었다.

《위원장동무, 왕성실은 왜 데리고 나와 앞치기를 하게 만드는거요? 나로 말하면 옥련동무와는 류다른 인연이 있다는걸 모르오?》

자기 인사차례가 늦어진다고 조령출은 옛시절처럼 익살을 부렸다. 참으로 인연이라 해야 할것이다. 저 시인이 지은 노래를 얼마나 많이 불렀던가.

《선생님! …》

진옥련이 절을 하려고 허리를 굽히자 조령출은 서둘러 두손을 잡아 흔들었다.

《반갑소! 정녕 꿈만 같소그려.》

목메인 조령출의 그 말에 진옥련의 두볼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흐려난 시야로 안겨드는 또 한사람은 잊을수 없는 모습이였다.

《조국방문을 축하합니다!》

격식을 차린 인사지만 귀에 익혀둔 리면상의 목소리를 들으니 무작정 반가왔다.

《얼마만이예요? 건강한 선생을 뵈니 기쁩니다!》

《나 역시 지금의 심정을 무엇이라고 말할수 없소!》

리면상에게 두손을 맡긴 진옥련은 자기의 가슴속에서 만시름이 녹아내리는것만 같았다. 무엇이라고 말하기 힘든 오늘의 이 감정은 뿌리가 깊은것이였다.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사랑을 주지 못한 짓밟힌 순정이 평생 가슴에 자리잡고있는것이다. 자신이 혐오스럽고 저주로울 때 마음을 의지하고 산 사람들을 만난것이다.

아침밥을 먹고나니 왕성실이 나타났다.

《오늘은 내가 안내하겠다고 자진했어요. 좋지요?》

《언제부터 안경을 꼈어? 성실이 눈이 더 고와보여.》

《멋을 부려보자는거예요. 속은 아직 살았으니까요.》

《호호, 여전해. 주인은 무슨 일을 하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처녀애마냥 눈을 올려뜨고 뒤짐을 진 왕성실은 몸을 흔들며 일부러 입을 내밀었다.

《글뒤주. 대학 교원이예요.》

《교수선생?》

《나보다 광석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예요. 지금도 산속을 헤매고있거던요. 그래서 잠자리에 채취한 시료덩어리를 놔주었지요 뭐. 돌이나 안고 자라구 말이예요.》

《그런걸 두고 행복한 투정질이라고 하지.》

진옥련은 진정 부러웠다. 사랑이란 얼마나 소중한것인가를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는 그였다. 외로운 밤이 오면 세상에 없는 사람과 마음속 이야기를 나눈다. 이번의 조국방문도 그 사람의 넋이 가리켜서 온것이다.

왕성실은 기념비들과 박물관, 유적들이며 백화점에 안내하며 성의를 다해 편의를 도모해주려고 애썼다.

《언니! 우리 예술인들과 상봉모임이 있어요, 언니의 조국방문을 축하하여.》

《성실이, 저기 큰 건물을 참 잘 지었구나.》

《대극장이예요. 우리 예술단이 자리잡고있어요. 상봉모임도 저기서 해요.》

리면상은 대극장 현관에 나와 진옥련을 맞아 모임장소로 안내하였다. 도라지꽃모양의 벽등들이 현란한 빛을 뿜었다. 의례원처녀들이 상냥한 미소를 짓고 탁마다 차잔을 놓아주고는 물고기처럼 사라졌다. 상우에 놓은 장식생화에서 싱싱한 향기가 풍기였다.

자리를 정한 예술인들은 진옥련이 나타나자 박수로 환영하였다. 리면상이 한사람한사람 소개까지 하여주었다. 극진한 환대에 진옥련은 몸둘바를 몰라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낯익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좌석이 정돈되자 리면상은 격식없이 환영인사를 대신하여 몇마디 하였다.

《나는 이 자리를 빌어 자기의 심정을 말합니다. 오늘은 해외에서 예술활동을 하고있는 진옥련선생을 만나지만 래일은 북과 남의 예술인들이 한자리에 앉아 민족음악의 발전을 위해 축배를 들기를 바랍니다. 망국의 수난속에서 민족의 넋을 지켜 피눈물을 뿌리며 노래를 부른 우리의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고있습니다. 겨레의 땅은 외세에 의하여 동강났어도 우리의 말, 우리의 노래는 갈라놓지 못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노래를 위하여 좋은 이야기들을 나누기 바랍니다!》

진옥련의 곁에 앉은 왕성실은 틈만 생기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언니, 흥분하지 말아요. 묻는 말은 성의껏 대답하면 돼요.》

혈육의 정이 넘쳐나는 자리에서는 화기애애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음악가동맹 한 일군이 공화국북반부의 민족음악예술발전방향과 현 실태를 통보하자 많은 사람들은 남조선예술인들의 예술활동정형을 알고싶어했다. 진옥련은 자기가 알고있는것을 그대로 펼쳐보이기 위해 애썼다. 남조선이 미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술의 생태도 변하지 않을수 없다. 자기의것들은 뒤골목으로 밀려나고 미국식자유민주주의옷차림을 한 음악이 어데서나 판을 치며 모더니즘의 광풍을 일으키고있다. 다른 나라에 가서 음악을 배우고 오지 않은 사람들은 무대에 오르재도 자리가 없다. 구경은 살길을 찾아 락엽처럼 세상천지에 몸을 내맡기는 길을 택한다. 나 역시 그런 인생길을 걸어오고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북녘의 문예인들을 많이 만나며 그들을 통하여 민족음악을 향수하기를 바란다.

한 남자가 모임장을 둘러보고나서 희색에 넘쳐 말했다.

《오늘은 정말 기쁩니다. 감개무량한 이 자리에서 노래로 한생을 살고있는 이 사람이 노래를 한곡 부르렵니다.》

흥분에 사로잡힌 좌중에서 박수소리가 울려나왔다. 가수인듯 한 남자는 반주도 없이 성량이 풍부한 저음으로 흥겨운 곡조를 넘기며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가 교감하는데 자연스러운 동작이였다.

《언니, 노래가 어때요? 생활을 반영하는 감정이 진실하지요? 선률이 얼마나 흥겨워요. 저 선생이 작곡한 노랜데 인기가 대단해요.》

왕성실은 노래에 맞춰 손벽장단을 치며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젊은 시절의 정열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보면서 진옥련은 깊은 생각에 잠기였다. 자기의 인생을 더듬는것이다.

진옥련이 서울을 떠난것은 1961년 가을이다. 빛을 잃은 나무잎들이 애처롭게 떨어져 길가에서 나딩구는 그 계절에 락엽같은 운명이 차례졌다. 서울의 한 예술단에서 가수생활을 하던 그는 이름만 들어도 몸서리를 치게 되는 백운남과 또다시 대면하게 되였던것이다. 리승만이라는 권력에 이어 군사독재정권의 어용예술인이 된 백운남은 청와대의 문턱도 어렵지 않게 넘나들며 예술계의 옥좌를 차지하고 온갖 전횡을 다 부리였다. 이 지꿎은 인간은 진옥련의 뒤를 그림자같이 따라다니며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하는것이다.

나이 60을 넘기여 머리털은 훌렁 다 빠져버리고 량쪽 귀바퀴우에만 몇오리 남아 사무라이들의 투구를 방불케 하는 얼굴엔 여전히 렴치를 모르는 처세군의 웃음만 흘렀다. 군사독재시기 류행이라고 생각하는지 얼룩무늬가 간 특공대원군복을 얻어입어 옛것과 오늘것이 한데 어울린 모양으로 하여 보는 사람들이 폭소를 터칠 차림새를 하고도 부끄러운줄을 몰랐다.

대세에 따라 허울을 재빨리 바꾸고 나설줄 아는 현명한 인간추물은 만나자부터 위세를 부리며 조만간 일본의 정계에서 큰 인물이 서울에 나타나는데 하늘이 주는 기회라면서 좋은 노래를 몇곡 준비하라고 하였다. 종목을 보니 모두 일본노래였다.

백운남이라는 걸작품과 시비를 따지기 싫어 헤여지기를 서둘렀다. 하지만 끈질기게 자기 함정에 몰아넣으려는 백운남의 간계는 그치지 않았다.

진옥련은 더는 견딜수 없어 출국결심을 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땅은 애초 그가 정착하려는 곳이 아니기에 다시 로스안젤스로 인생의 기약없는 노를 저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이국에서 이국에로의 방황은 오늘까지 계속되고있었던것이다. …

《옥련동무… 이렇게 부른다고 나무람마오.》

왕성실의 옆자리에 앉은 조령출이 미소를 짓고 바라보았다.

상념에서 깨여난 진옥련은 조용히 머리만 저어보이고나서 눈으로 어서 말하라고 했다.

《이번 방문기간에 성천에도 가보려오?》

조령출의 물음에 진옥련의 얼굴색이 금시 변했다. 어두운 빛으로 굳어지더니 서서히 창백해졌다. 자기의 심정을 들여다보고있는 눈길을 느꼈던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말할수 없기에 웃어넘기며 왕성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선이가 보고싶구나, 류진씨도…》

진옥련은 자기가 무심히 한 말이 자극제가 될줄은 몰랐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발랄하던 왕성실이 흠칫 놀라며 어깨를 솟구더니 황황히 리면상에게 구원을 바라는 눈길을 보내는것이였다.

방금전 남의 속마음을 넘겨짚던 조령출조차 슬며시 얼굴을 돌리며 옆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딴전을 부리는것이 알렸다.

착잡한 생각이 진옥련의 머리속에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오일선이 어떻게 되였을가. 그의 신상에 불행이라도? 류진은… 서울에 어머니와 녀동생을 남겨두고 북으로 오지 않았던가. 외곡되고 날조된 풍설이겠지만 북조선에서 《숙청깜빠니야》라는 바람이 자주 분다고 했다.

진옥련은 좌석의 주최자나 같은 리면상의 얼굴을 찾았다. 직함이 음악가동맹 위원장이라고 했다. 그게 어떤 벼슬인지는 모르지만 류진과 오일선의 소식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있어야 할 사람이다. 노상 웃어가지고있던 리면상은 무슨 말이 오갔는지 모르는 사람같이 제 생각만 골몰하고있었다.

지금과 같은 침묵은 불길한것에 대한 암시이다. 진옥련은 대답을 바라지 않으며 억지로 웃음을 짓고 말머리를 돌렸다.

《성실이, 재미있는 이야기나 좀 하지.》

고개만 서둘러 끄덕인 왕성실이 안경낀 눈을 허공에 들어올리는데 리면상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옥련, 지금도 노래를 부르오?》

《나… 말인가요?》

무슨 약속이나 하듯 눈을 감았다 떠보인 리면상은 미소를 지었다.

《이따금 무대에 나설 때도 있어요.》

《어떤 노래를 부르오?》

《그건… 그저 부르지요, 주로 유럽의 고전명곡들을. 나한텐 잘… 어울리지는 않지만…》

두손을 깍지껴 마주잡고 턱을 약간 든 진옥련은 리면상의 눈길을 피하며 더듬거렸다. 남의 나라 땅에서 남의 노래를 부르며 산다. 마음은 서글프고 애수가 가슴을 누르지만 달리는 살수 없었다.

《음악에는 국경이 없다고 하오. 지어는 사랑에도 국경이 없다고까지 말하는 사람들이 있소. 그건 민족을 모르기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니겠소. 난 음악을 민족의 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요. 민족의 노래는 외세에 빼앗길수 없고 사대와 외색외풍에 병들어서는 안되는 정신이라고 말하고싶구만.》

진옥련의 입가에 회의의 미소가 피여났다. 지당한 말이지만 어덴가 주입하는듯 한감이 들었던것이다. 자유롭게 자기가 부르고싶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가수이다. 지난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굳이 민족과 노래를 이어놓는다면 가수는 살아있는 실체이지만 민족이란 추상적개념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됐던것이다. 민족안에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와 풍습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제 좋은 노래를 부르며 살지 않는가. 그는 리면상이 류진과 오일선의 운명을 설명하기 난감하여 화제를 돌린것으로 여겼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어떤 사상에 충실해야 한다는것인가요?》

묻고나니 후회가 따랐다. 성의껏 마련해준 즐거운 자리에서 야박한 질문을 한것 같았던것이다.

《물론 순수 돈을 벌기 위해 노래를 파는 가수도 있을거요. 그러나 류진에 대해서 들으면 어느 정도 리해를 하리라고 보오.》

리면상은 류진과 오일선이 강선으로 내려가게 된 자초지종을 사실그대로 설명하였다. 놀라왔다. 진옥련으로서는 별세상을 사는 음악가들을 만난것이다. 충격은 크지만 로동판에 외국류학까지 하고온 작곡가가 무엇을 배우러 내려갔다는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세상모양을 제나름대로 보아온 자기도 모르게 갖춘 진옥련의 지혜가 이 순간에 발휘되였다.

《옳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지 않소. 우리 기회를 보아 강선에 가보기요. 옥련을 만나면 그들도 무척 기뻐할거요.》

리면상의 그 말에 왕성실의 안경속 눈동자가 예리한 빛을 뿜었다. 어떻게 저런 장담을 할수 있는가. 진옥련이 조금이라도 실망하게 된다면 실책이 아닌가. 그의 우려를 누르며 진옥련의 목소리가 울렸다.

《위원장선생님, 래일이라도 그들을 만나고싶어요.》

《좋소, 그러나 며칠간 말미를 주겠소?》

《준비가 필요한가요?》

시종 웃어가지고있는 리면상으로 하여 왕성실은 신경이 팽팽해났다. 일본음악가 후지무라 요꼬의 방문까지 꺼내놓기때문이였다. 리면상은 그가 도착하면 다같이 류진네를 찾아가자고 약속하는것이다. 복잡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쩔려고 그러는지 알수 없었다.

《요꼬… 아, 그가 평양에 오다니… 이건 정말 행운의 기회예요!》

진옥련은 의혹의 감정을 말끔히 밀어내고 차오르는 흥분으로 하여 숨쉬기조차 힘들어했다.

모임이 끝난 후 리면상이 진옥련을 호텔까지 바래다주었다. 평양의 밤거리를 걷는 두사람의 감회는 류다른것이였다. 진옥련은 조용히 물었다.

《부인은 잘 있겠지요?》

《옥련의 소식을 듣고 요즘 우리 집사람이 만나지 못해 막 앓소. 우리 집에도 갑시다.》

《고마와요. 밤하늘에는 별이 흐르고 땅우에는 인생의 시간이 흐르는군요. 세월은 가도 잊을수 없는것이 사랑조차 받아보지 못하고 간 그분이예요. …》

밤하늘은 유난히도 맑고 고요하다. 촘촘히 수를 놓은 별무리들이 은빛을 뿌린다. 하늘 저 멀리 어데인가 그들의 젊은 시절이 잠들어있는지 몰랐다. 수난의 세월속에 흘린 눈물자욱이 이밤 저 별들이 되여 이야기하고있는것은 아닌지. …

《전 그분의 유골을 가지고왔어요.》

리면상이 걸음을 멈추었다. 세상풍파를 다 겪으며 이국땅에 살지만 마음만은 이 나라의 녀인으로 고이 남아있는 모습이 앞에 서있었다. 가슴벅차게 차오르는것은 참답게 사랑할줄 아는 고결한 인격에 감동된 선률이였다.

진옥련은 주저하며 말했다.

《고향에 묻어주고싶었어요. 그럼 소원이 풀릴텐데… 도와주시겠어요?》

《고맙소, 옥련! … 우리 함께 그 사람 고향에 가기요.》

그들은 추억의 배에 몸을 싣고 노를 젓고있었다. 눈물도 많이 흘린 그 기슭을 찾아가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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