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23

 

류진은 방금전까지 베토벤의 교향곡을 감상했다. 축음기는 빈 바퀴만 돌리고있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나는 음악을 왜 사랑하는가. 배울건 다 배웠노라 자처한 그였지만 지금은 무대가 아니라 로동현장에서 살고있다. 강선에 온지도 어느덧 1년이 지났다. 전기로앞에서 창작된 선률이 아니라 로동의 음악을 들으며 인생의 귀중한것을 배우고있다.

축음기는 여전히 빈 바퀴만 돌고있다. 큼직한 사기그릇에서 타버린 종이가 마지막 연기를 실오리처럼 늘이며 재빛으로 변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선지였다는 흔적을 찾을수 있다. 류진은 이사짐에 묻어온, 아니 버릴수 없었던 자기 교향곡 총보를 태우며 베토벤을 찾았던것이다. 그의 음악계시는 무엇인가. 나를 찾으라, 나는 너를 기다린다! 음악의 신은 손을 내밀고 부를뿐 재능의 열매는 던져주지 않는다. 영원히 베토벤을 찾으며 그 자리에 있으라는것인가. 그렇다. 알았다는 인식의 웨침이 창조라는 행동으로 되자면 자기것을 만들어내기 위한 노력이라는 공간을 가져야 한다. 바로 그 공간이 고심어린 사색과 탐구의 과정인것이다. 그와 같은 창조도 옳바른 제정신을 가져야 한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류진은 조용한 방에 홀로 앉아 상념에 잠겼다. 안해만은 평양에 남겨두고 노래를 계속 부르게 하려고 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오일선의 고집을 꺾을수 없었던것이다. 안해는 강철직장에서 통계원으로 일하고있다. 얼마나 깐깐하고 부지런한지 온 직장이 칭찬한다.

류진은 벽에 걸린 사진에 시선을 보냈다. 부부가 나란히 앉아서 웃고있다. 류학을 마치고 돌아와 찍은 사진이다.

《부탁한대로 일기를 써주어 고맙소. 전쟁을 이겨낸 우리 인민이 복구건설에 바친 땀이 어떤것인가를 알게 되였소.》

《일기를 쓰라고 할 땐 나를 못 믿어서 그러는줄 알았어요.》

《나야 당신을 너무도 잘 알지 않소.》

《당신이 <화화시>가 아니라는걸 증명해야 해요. 내가 바라는건 그것뿐이예요.》

까맣게 잊고 산 《화화시》가 안해의 입에서 명랑하게 흘러나오자 류진은 폭소를 터뜨리였다. 해방전 지금 못지 않게 이름이 쟁쟁했던 녀가수에게 반하여 련애편지를 보냈다가 《화화시》라는 대답을 받았다. 또박또박 쓴 세 글자가 편지의 웃머리에 시험점수처럼 자리잡고있었다.

《화화시》, 그앞에서 얼간이처럼 서있던 제모습이 지금도 보이는것만 같다. 악단에서 어느 악기에나 정통하고있다고 자처하는 그였지만 생활로 풀어야 할 음부의 비밀은 알수 없었다. 밤이면 골을 동이고 악보우에서 《화》와 《씨》를 짚어가며 머리를 짜보았지만 허사였다. 세상에 이처럼 까다로운 말이 있는줄은 모르며 살았다. 마침내는 신음소리를 내지르며 나딩굴고말았다. 오일선, 너는 사람이 아니라 마녀다라고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감정을 가진 인간일진대 사랑의 고백앞에서 귀신이나 알 대답을 보내왔으니 이보다 더한 조롱이 어데 있는가.

그 일은 우연히 생겨난것이였다. 지금은 유치하게 여겨지는 작품이지만 그때엔 부푸는 가슴을 안고 자기가 처음으로 편곡한 민요련곡을 가지고 리면상을 찾아갔었다.

《민요련곡?! 네가 편곡했단 말이지, 괜찮아!》

리면상은 반가와하면서 악보를 받아 보기 시작했다. 코노래를 부르며 손끝장단을 치는 모습앞에서 시험지를 바친 학생처럼 서있던 류진은 리면상의 물음에 껑충 놀랐다.

《그런데 이건 뭐냐?》

리면상이 내보이는 악보의 한구석에 귀신의 말인 《화화시》가 락서처럼 자리잡은것이 아닌가. 이런 실수라구야 하며 이마를 쳤을 땐 이미 늦었다.

《<화화시>라, 너 벌써 점수를 받았구나.》

《예? … 아 그건…》

《일선이가 봤니?》

오일선의 이름이 튀여나오자 그만 아연해지고말았다.

《아니요, 절대로…》

《네 대답이 수상하구나. 일선이 뒤를 따라다닌다는 말을 들었다.》

《아, 안되나요? … 아니, 그런게 아니라… 내가 그 처녀의 코대를 꺾어놓고야말겠어요.》

《그건 왜?》

류진의 《절통》한 심정을 듣고난 리면상은 악보를 두드리며 웃어댔다. 그러니 《화화시》에 담긴 비밀을 알고있는것이 분명했다.

《<화화시>만 알려주세요.》

류진은 간청하였다.

《너 지금은 일선이 상대가 안돼. 말도 통하지 못하면서 무슨 련애냐?》

《<화화시>만 알면 물러나겠어요.》

《남자라는게, 쯧쯧. 일선인 보기엔 그렇지만 지성이 높은 가수다. 잘 생긴 그에게 너만 반한줄 아니? 다들 <화화시>에 코를 떼웠다. <화화시>를 모르다니… <꽃 화>자와 <보일 시>자는 쓸줄 알겠지?》

《아, 그러문요.》

음부로부터 한자로 급변하는통에 류진은 눈이 뎅그래졌다.

《이쯤 알려줘도 풀기가 힘들걸. 꽃만 보지 말고 <화>를 알라는 뜻인데… 여기서부터는 네가 맞춰보렴.》

리면상의 벙글웃음조차 《화화시》로 보였다. 꽃을 보지 말고 《화》를 알라? 요지경속에 들어선 꼴이 되였다. 무슨 녀자가 겉다르게 이다지도 까다로운가.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고 하면 될 일인데 시험이나 받아내듯 하는지 모르겠다.

《왜 멍청히 보기만 하는거야?》

《쓰거워서요.》

《흠, 속은 살아가지구. 꽃을 찾기 전에 음악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뜻이 깊지? <화화>가 나란히 놓였지만 하나는 <꽃 화>자고 하나는 <도레미화쏠라씨>의 화음을 가리키는거다. 이젠 알겠니? 네 련애편진 불합격이다.》

세상에 났다 이렇게 멋들어지게 녀자에게 채운 남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류진은 흘러간 세월속에서 첫사랑의 상심을 안아보며 마음속 건반을 눌렀다. 《화화시》의 불협화음을 들으며 머리를 쳐들고 웃었다. …

얼마나 훌륭한 안해인가. 남편은 그 녀자에게 있어서 사랑의 전부였다. 조용한 웃음으로 표시하는 리해, 음악이라는 하나의 리상을 안고 살면 더 바랄것 없는 만족, 안해는 그런 녀성이다. 깨끗한 그 진정에 나는 어떻게 보답하고있는가. 내 만약 음악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리라.

그는 고성기에서 울려나오는 《옥류교원무곡》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안해가 최근 나온 노래중에서 제일 좋다고 하는 선률을 음미해보았다. 밝은 생활, 밝은 미래가 랑만적인 장단과 리듬을 타고 서정적으로 울린다. 자기가 왈쯔의 모방이라고 비난한 음악이다. 제것을 모르니 기준은 항상 남의 자였다. 사랑하는 안해, 민요가수와 살면서도 민족음악의 숨결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으니 얼이 빠져나간 사람이 분명했다.

그는 이 순간 안해의 가수생활도 다난했다고 생각하며 옛 모습을 다시 그려보았다. 《동아의 맹주》를 꿈꾸어온 일제가 마침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패망의 길로 줄달음치기 시작하던 1942년부터 조선에 대한 놈들의 탄압과 수탈은 횡포성과 야수성에 있어서 상상을 초월하였다. 징병과 징용으로 청장년들은 죽음의 싸움터에 끌려갔으며 일본본토에서 가혹한 노예로동을 강요당하였다.

그무렵 류진은 흥행악단을 따라 중국관내에 들어가 돈벌이를 위한 공연이라는것을 끝내고 돌아왔다. 암흑의 세상에서 그는 날이 갈수록 음악에 대한 환멸을 느끼였으며 악단에서 뛰쳐나오고말았다.

서울거리는 일장기를 휘두르며 미친듯이 고아대는 왜인들과 일본군대의 군가소리로 하여 전쟁미치광이들만 모여사는 곳처럼 되여버렸다. 제국의 잔인무쌍한 남아들은 죽음을 향한 부나비떼마냥 남쪽바다를 찾아 밀려가고 바래는 일본녀자들도 《천황페하》를 위하여 《옥쇄》할 일념으로 《반자이》를 부르짖어댔다. 히로히또와 도죠가 미치니 그 후예들도 모두 리성을 잃어버리고 날뛰였다.

어데라 정한 곳도 없이 류진은 발가는대로 걷다가 부민관이 자리잡은 앞거리에 멎어섰다. 벽이며 전주대들에 되는대로 써붙인 글들은 남방전선으로 가는 《황군》용사들을 위한 공연을 한다는 안내광고였다. 공연시간이 되지 않았는데도 일본군 장졸들이 찾아들고있었다. 그속에서 일본녀자들이 소매통이 넓은 기모노자락을 흔들며 게다짝소리에 맞춰 갑삭거리면서 웃어댔다.

돌미륵처럼 서서 사방을 둘러보던 그의 눈길이 한곳에서 뚝 멎었다. 먼지를 피워올리며 달려온 군용차가 부민관앞에서 요란한 제동소리를 내며 멎었다. 악기들을 들고 멘 사람들이 줄레줄레 내리자 운전칸에서 번들이마가 나타나 소리친다.

《어이 조심조심, 우리 아가씨들 다쳐!》

류진의 눈에 비껴든 사람은 백운남이였다. 친일예술인으로 제세상이나 만난것처럼 활개치는 인간이다. 두팔을 벌리고 녀자들을 안아 내리다싶이 하며 흐억거렸다. 저게 누군가?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며 몇번이나 감았다 다시 떴다. 진옥련의 뒤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내리는 사람은 오일선이였다. 꼬리치마자락을 한손에 쥔채 앞선 사람들을 멍청히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나보고 《화화시》라고 비웃은건 언제인데 일본놈들앞에 나서서 노래를 팔아? 과시 일류급가수야.) 류진은 부글부글 괴여오르는 경멸감을 안고 저도 모르게 그의 길을 막아섰다.

고개를 숙이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오일선은 류진과 부딪치고야 외마디소리를 냈다.

《누구세요? …》

《<화화시>요. 벌이가 잘되오?》

류진을 알아본 오일선은 금시 잦아들듯 휘청거렸다. 마치 보복이나 할 기상으로 나타나서 이글거리는 눈총을 쏘아대는 사나이의 물음에 눌려 할 말을 찾지 못하며 더듬거렸다.

《오래간만이예요. …》

《반갑구려. 이젠 백운남의 수하에 들었소?》

《너무 그러지 말아요. …》

《굉장한 무리들이 여기에 모여드는 까닭이 뭐요?》

《태반은 강박에 못이겨 온 사람들이예요. …》

《변명마오. 노래도 강박해서 부른다는거요? 이제야 알겠소. 남보고 <화화시>라고 타이를 땐 유쾌했겠소! 흥, 당신은 <도도시>요!》

류진은 힘껏 모욕을 주려고 마음먹고 말하였다. 두손으로 얼굴을 싸쥔 오일선은 흐느낌을 터쳤다. 이때 백운남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게 누군가? 응, 류진군! 마침일세. 자네를 내가 왜 생각 못했을가. 어서 가자구. 트럼베트독주를 자네에게 맡기네.》

친일의 면사포를 깨끗이 차려입은 더러운 몸뚱이가 거품을 물고 침방울을 튕기는 바람에 류진은 화가 꼭두까지 치밀어올랐다.

《여보, 당신 골통을 내주면 내가 북통으로 두드려주겠소!》

《흐하하… 요시요시. 자, 쳐보라!》

허연 두눈을 흡뜬 백운남은 뒤통수에만 남은 머리카락을 날리며 고함을 질렀다. 그 몰골은 악마를 방불케 하였다.

어느새 왔는지 진옥련이 오일선을 부축하고 서서 황황히 말했다.

《류진씨, 어서 가요! 어서요! …》

《이놈! 경찰을 부를테다, 당장!》

백운남은 발을 구르며 미쳐날뛰였다.

진옥련에게 의지한 오일선은 류진을 향해 손만 저어댔다. 빨리 사라지라는 의사를 표시하는것이였다.

그날 오일선은 위문공연에서 일본노래가 아니라 조선민요를 불러 헌병대에까지 끌려갔다. 옹근 이틀동안 취조를 받으면서도 자기는 가수로서 일본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부를수 없었다고 대답하였다. 무지막지한 놈들은 연약한 그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헌병대 구류장에서 오일선은 누워서 나왔다. 매맞은 상처가 너무 심하여 진옥련의 집에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느날 거리에서 류진은 진옥련을 만났다. 오일선의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를 후회하였다.

《일선인 외로워해요. 병문안 오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내가 간다고 무슨 위로가 되겠나요.》

《옆에 성실이 혼자서 돌봐요. 어제 면상선생이 오셨구요.》

왕성실은 류진도 잘 안다. 가창력이 좋아 인기있는 가수로 알려졌다. 어찌 보면 불행한 녀자들이다. 류진은 오일선을 찾아보는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며 진옥련을 따라섰다.

두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남산으로 가는 야산등성이 길옆에는 나팔꽃에 휘감긴 강냉이가 개꼬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숲덤불속에서 풀벌레들이 숨을 죽여가며 스르륵스르륵 울어댄다.

나이가 우지만 아래사람들에게 반말을 모르는 진옥련은 대문을 열자 《성실이 있니? 류진씨가 왔어.》 하고 알렸다.

방안에서 동그란 얼굴의 웃음이 떠도는 눈동자가 마주 나왔다.

《오랜만인걸… 그 속통머리에 용켄 왕림하셨어.》

웬간한 사내들은 손바닥에 올려놓고 다루는 왕성실의 성미를 아는지라 류진은 가타부타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왕성실은 들어가보라고 손짓해보이고는 진옥련과 부엌으로 들어갔다.

아래방에서 혼자 환자를 만나기 멋적어 주밋거리던 류진은 왔다는것을 알리느라 큰소리쳤다.

《성실누님, 나 물이나 좀 주우.》

《일선이한테 들어가면 있지 않으리. 누님, 누님 개올리긴…》

류진은 큰숨을 들이키고나서 문지방을 넘어섰다. 벽쪽에 엷은 이불을 덮은 오일선이 반듯이 누워있었다. 눈을 감은 창백한 얼굴이 바늘처럼 심장을 찔렀다. 한무릎을 꺾으며 앉은 그는 애꿎은 입만 실룩댔다.

《고마와요, 찾아주어서.》

눈을 감은채 오일선이 먼저 말했다. 난감해하는 심중을 알아주는것이 제편에서 고마웠다.

《며칠전 일은 내가… 안됐소.》

《정신이 번쩍 들었는걸요.》

《어떻소? 몹시 앓는다기에…》

《마음이 아파요. 그뿐이예요.》

류진은 오일선의 말뒤의 말을 들었다. 의지할 곳없는 이 나라 가수들이다. 제 나라 노래마저도 마음대로 부를수 없는 굴욕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하겠는가.

《그때 저보고 뭐랬지요?》

《아무 말이나 막 지껄여서 생각이 안나오.》

《<도도시>… 무슨 뜻인가요?》

류진은 속이 찔려 대답을 찾을수 없었다. 사내라는게 《화화시》를 품고 살다나니 그런 말까지 생각해냈다. 사랑이 질투라는 말도 하기에 당치않은 소리로 여겼지만 지내보니 그른 말도 아닌듯 하다. 궁리해낸 《도도시》란 심술이 아니고 뭔가.

《우리 지나간 일들은 다 없었던것으로 합시다.》

《그렇게 될가요?》

《내가 경망했소.》

《류진씬 내 눈에 이상하게만 보였어요. 이 악단, 저 악단… 볼 때마다 새 악기… 하나를 전공해야 하지 않겠어요? … 불만이더군요.》

오일선의 이 말만은 접수되지 않았다.

《난 더 많은 악기를 다루자고 하오.》

《불쾌하게 들렸는가요?》

《모든 악기의 소리색갈과 음역을 알자는게 나의 수업이요.》

《세상 악기를 다요?》

《그러고싶소.》

《사람마다 제나름의 취미가 있겠지요. <도도시>를 생각해보았어요. <도>… 멋없이 도고한 녀자, 저밖에 없는것 같이 턱을 들고다니는 코대높은 녀자… 거기다 <거꿀 도>를 세워놓으면 이런 감춘 말이 될수 있더군요. 제 코를 보라, 높다고 생각말고 거꾸로 내려다보라. … 낮은 <도>와 높은 <도>, 신통해요.》

류진은 《화화시》를 풀지 못해 맥을 뽑던 생각이 나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도도시》는 《화화시》의 숨김법, 표현법을 반복했으니 지금의 처지에 놓일수밖에 없다. 리면상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예술은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창작가의 모방은 자기의것을 찾기 위한 습작과정이다. 반복은 예술에서 죽음이야.》

그는 오일선의 이야기를 통하여 다소나마 창작의 본성을 리해할수 있었다.

《좋은 말을 해주어 고맙소.》

오일선이 눈길을 돌리더니 류진을 바라보았다.

《내가 틀렸나요?》

《유치한 작품을 비평해주어 고맙다는거요.》

《작품이라는건 또 무슨 말인가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있은것 같군요.》

《<화화시>와 <도도시>를 통해 배운게 있어서… 허허.》

《참, 별난 성격이예요.》

《괴상한 인간임을 나자신도 인정하오.》

오일선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가 웃는 모습을 보며 류진은 이 녀자가 이렇게도 아름다웠던가 하는 생각을 어쩔수없이 하였다.

《류진씨, 묻고싶어요. 제가 노래를 계속 불러야 하나요? 연약한 우리 민족의 노래마저 시들어가요. 눈물겨워요. 왜놈들은 조선사람 이름마저 빼앗으려들지 않나요. 진정 내 민족의 노래를 지켜낼수 있을가요?》

가슴을 두드리는 통분이였다. 민요가수의 마음속에서 울고있는 아픔이 심장을 파고들었다. 아! 노래마저 잃는다면 이 민족의 앞날을 어데서 찾아야 하는가. …

문소리가 나서야 류진은 먼곳에서 헤염치던 생각을 돌려세웠다. 안해와 함께 김형숙과 왕성실이 들어서는것이였다.

《류도련님, 새집들이 턱을 내야지 않아? 이런줄은 모르고 합숙을 찾아갔으니…》

방안에 들어온 왕성실이 가방을 놓으며 입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형수님, 왔다가신지 열흘도 안되였는데…》 하고 인사를 대신하여 말한 류진은 김형숙이 든 짐을 받아쥐고는 《누님도 오셨수? 그 기상은 여전하구려.》 하고 벌씬 웃으며 왕성실을 바라보았다.

《집을 꾸리느라고 수고들을 했구만.》

김형숙이 방안을 둘러보며 다심한 어조로 말하자 오일선은 그를 앉히며 속삭였다.

《온 마을이 도와주었어요. 참말 좋은 이웃들이예요.》

제 집에 온것처럼 부엌에 나가 찬물을 떠온 왕성실이 김형숙에게 권했다.

《날씨가 더워지는군요. 형님, 물마셔요.》

《날랜 그 동작은 못 따르겠소. 허? 물대접도 못하는 우리로 만드니.》

류진이 일부러 툴툴대자 왕성실이 손가락총을 쏘아대며 《이 챠이꼽스끼주의자가 아직도 빠다독을 못 뽑았구나, 속이 살아있는걸 보니.》 하여 모두를 웃겼다.

《창성 지방식료공장에서도 빠다를 생산한다고 신문에 나옵디다 원.》

류진이 지지 않을 심산으로 엇서자 왕성실은 김형숙이 가져온 단지를 앞에 밀어놓으며 열을 올렸다.

《형님이 담군 토장이야. 이 맛을 다시 알며 정신을 차려.》

《예예, 장복하리다. 전기로 쇠물하구 같이.》

오일선은 김형숙의 손을 쓸어만지며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은 앓지 않으시나요? 오실 때마다 보면 피곤이 무척 실린 얼굴이였어요. 우리때문에 마음을 쓰시는탓인가봐요.》

《걱정말라구. 며칠전 대표단과 함께 외국출장을 떠났어. 가면서 나보구 자주 일선이를 찾아보라구 이르더구만.》

《어느 나라에요?》

대답은 왕성실이 제꺽 하였다.

《동유럽나라들을 다 간댔어.》

류진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단장으로 갔겠지요?》

《그야 물론, 류도련님에게 마쟈르포도주를 가져다 줄지도 몰라. 혼자 마시면 그냥 두지 않을테야. 어렸을 때부터 말눈깔사탕 하나를 놓고도 동생 연이와 억척같이 버티던 심술통을 몰라서?》

《내 두살이 모자라 누님이라 부르오만 어떻게 그리도 자상히 아시우?》

《그것도 모를가? 무현오라버니는 연이를 제일 고와했어. 어쩌다 사탕이 생기면 오빠 몰래 먹으라구 하더라니 알았지. 틀렸어?》

그들의 비틀고 꼬아대는 다정한 이야기를 들으며 김형숙은 말했다.

《외국으로 떠나기 전날 연이에 대한 소식을 알려주더구만.》

류진과 오일선의 눈길이 김형숙에게 성급하게 옮겨갔다. 남녘땅에서 살고있는 사람이 아닌가. 헤여진지 스무해가 되여온다. 그리움은 눈물로 되였고 상처로 번져가고있었다. 긴긴 세월 편지 한장 주고받지 못하며 사랑하는 동생의 이름만을 마음속으로 불러보는 류진이였으며 며느리로서 시어머니에게 더운물 한그릇 대접하지 못한 오일선이였던것이다.

류연은 민주와 자주통일을 주장하는 기자로서 언론계의 이름있는 인물이였다. 서울대학에서 교편을 잡고있던 그는 4. 19인민봉기에 참가하였으며 《군사정권》의 폭정으로 1년간 감옥살이까지 하였다. 그가 쓴 글들은 언제나 민족의 통일문제를 절박하게 제기하고있어 민중의 사랑을 받았다. 리면상은 이번 외국출장기간 해외교포들과도 만날수 있는 조건에서 해당 부문이 보내준 자료를 통하여 류연의 현재생활을 알수 있었다.

《연이가 써내는 글에는 어머니의 말씀이 언제나 자리를 잡는다는거야. 아들을 만나고싶은 심정이겠지. 그러니 어머님은 건재해계신다는걸 알수 있어. 꼭 만나게 될거야. 통일은 민심이고 천심이 아니겠어.》

김형숙은 남녘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알리고있지만 그속에 자기의 간절한 심정을 담고있었다.

미아리고개에 서서 손저어 바래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류진이였다. 어머니는 오늘도 이 아들을 찾으며 겨레가 일일천추 고대하는 통일의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하고계시리라. 불효막심한 자식이 나라의 은덕을 잊고 산 잘못을 속죄하고있으리라는것은 차마 생각도 못할것이다. 독재의 철창에 갇히우면서도 진리의 필봉을 놓지 않은 사랑하는 녀동생이 나를 안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는가. 내 전기로 쇠물처럼 끓어넘치는 열정을 다시 안고 통일교향곡을 민족에게 안겨주지 못한다면 사랑하는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영원히 부르지 못하리라. 류진은 고개를 숙인채 목이 메여 말했다.

《형수님, 고마와요! 이놈은 자기를 너무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

민족분렬의 가슴아픈 현실을 보고있는 세 녀성은 소리없는 눈물을 흘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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