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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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꾜만에서 불어오는 누기진 바람이 한낮인데도 옷깃을 축축히 적신다. 희뿌연 안개가 내려앉은 도시는 저기압에 짓눌려 무거운 표정을 짓고있다. 사람들의 모습이 안개속에서 헤염치는것 같이 보인다.

일본사람들의 민족옷인 기모노가 아열대성기후에 적응되기 위해 만들어 입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남자도 녀자도 아래우가 펑하니 열린 꼭같은 차림새인걸 보면 가을철 농가의 덕대에 세워놓은 벼단을 방불케 한다. 바람이 잘 통해야 낟알을 말리우듯 사람도 몸을 건조시키려고 편리한 옷을 생각해냈을수도 있는것이다. 리면상은 느닷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걷다가 소리없이 웃었다. 기모노를 입은 사람과 벼단모양이 신통히도 비슷하다. 묶은 줄을 풀어놓으면 벼단이 헤쳐지듯 오비를 풀면 알몸뚱이가 드러나게 된게 기모노이다. 기후조건에 맞게 만들어 입었다는것보다 편리하게 행동을 할수 있는 옷이 기모노라고 생각하니 배꼽이 흔들거렸다.

벗나무와 백송이 듬성듬성 뒤섞인 산언덕을 따라 돌계단이 우불구불 뻗었고 고풍의 사찰을 배경으로 옛성과 문루가 바라보인다. 거리를 뒤덮은 안개가 성문을 향해 꾸역꾸역 기여오르고있다. 밋밋한 등성이를 오르자 꼬리를 저으며 황황히 입을 벌린 성문에 빨려들어가는것이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뒤따라 해볕이 찾아들며 안개를 녹여내자 나무줄기와 잎새들이 땀을 떨구었다.

두서없는 생각을 이어가며 걷던 리면상은 강무현의 말이 귀전에서 살아나자 멎어섰다.

《래일… 만나세. 그… 성터를 알지? 언젠가 한번 가보지 않았나. 거기서… 비자나무가 있는 곳에서 만나자구. 요꼬도 오네.》

친구가 만나자기에 가지만 그 자리에 요꼬는 무슨 일로 오는가. 반갑지 않은 인물이 그 처녀다. 강무현의 말을 듣고보면 그도 알고있었겠는데 어제저녁 련습실에 같이 있었지만 알은척도 안했다. 여느때 같으면 재간좋은 말솜씨로 재부랑거렸을 그가 별스럽게 랭담했다는 생각이 지금에야 들었다. 부지중 의혹이 고개를 쳐들자 요꼬의 모습이 살아났다.

강당같이 넓은 련습실은 각종 악기음향으로 소란스러웠다. 그속에서도 리면상은 바이올린연주를 하였다. 조용한 곳도 찾을수 있지만 그는 학생들이 다 모여 련습할 때면 일부러 찾아와 지금과 같이 훈련했다. 복잡한 음향속에서 자기의 선률을 잃지 않고 청각의 집중성을 높이는것이 필요했으며 그와 같은 요구가 연주의 형상수준을 올리는데 필요했기때문이였다.

피아노연주곡 《엘리제를 위하여》는 분명 요꼬를 위한것이고 자기도 그 곡을 련습하였다. 가네다가 학원졸업공연종목으로 선정하여준것이다. 피아노협주곡이니 응당 요꼬가 관심해야 할것이다.

리면상은 피아노의 선률을 들으며 요꼬가 마지못해 타고있다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언제나 유연한 곡상을 잘 유지하였는데 어떤 음정들은 매우 불안정하게 울리기까지 하였다. 베토벤이 평생 이루지 못한 사랑을 어떤 녀성에게 선률의 편지로 남겼다는 명곡이다. 작곡가는 자기 심장의 피방울로 그지없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음정들을 따스한 감정에 담아 음악의 화원을 만들어내고있었던것이다. 달빛어린 밤, 숲의 오솔길을 따라 한줄기 바람인양 홀로 걸으며 사랑하는 님을 불러 간직한 노래를 부르는 선률은 자기의 넋에 취하여 끝없는 고백을 알리고있다. 잎새가 되고 별빛이 되고 잔물결을 이루다 새날을 알리는 종소리마냥 맑은 격정을 터뜨리는것이다.

《누구도 이처럼 아름다운 선률은 만들어내지 못할거예요. 누구였을가요, 음악의 신이 사랑한 사람은 말이예요. 설사 이루지 못했어도 그 녀자는 행복할거예요.》

요꼬는 흥분에 뜬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군 하였다. 황홀한 감정을 안고 연주하던 명곡인데 웬 일인지 그의 건반들은 감정없이 메마른 음향만 울리고있었다. 그 소리마저 멎기에 돌아보니 두손으로 턱을 고인 그가 그린듯 앉아 움직일줄 몰랐다.

《웬 일이요, 어데 아픈게 아니요?》

걱정해서 묻는데 대답은 역시 요꼬다왔다.

《자신에게 물어야지요.》

쳐다보지도 않으며 턱을 살레살레 저어대는 모습이 얄미웠다. 어떤 대답을 바라는것인가. 그렇지도 않았다. 언제나 준비되여있던 미소는 쳐들린 가는 눈섭아래 차거운 얼굴속에 묻혀버렸다. 이전의 모습을 일신한것 같이 보였다. 지금같이 랭담하기만 했더라면 개성이 뚜렷했을거야. 리면상은 입귀로 웃었다.

《난 훈련을 그만하고 가겠소.》

《저한테 승낙을 받으려는가요?》

《아니, 함께 가지 않겠소?》

요꼬는 고개를 떨구며 지친듯 한 어조로 대답했다.

《가세요.》

하숙집에 돌아오니 강무현이 기다리고있었다. 그의 행동거지가 의심을 자아냈다. 여느날 같으면 한잔 마시자는 소리를 입에 올릴텐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서둘러댔다.

《매일 오늘처럼 늦게까지 공부하나?》

《아니, 졸업공연준비를 하느라구.》

《음, 요꼬도 같이했나?》

《그렇네.》

고개만 주억대던 강무현이 일어나더니 쭈밋대며 말했다.

《래일… 만나세. 그… 성터 알지? 언젠가 한번 가보지 않았나. 거기서… 비자나무있는 곳에서 만나자구. 요꼬도 오네.》

당부라기보다 약속을 다짐받는 말같은 느낌을 받자 리면상은 강무현의 팔을 잡아세웠다.

《내가 왜 그곳에 가야 하나?》

《나한테 묻는건가?》

강무현은 정색하여 마주보았다. 대답을 하라고 재촉하는 눈빛앞에서 리면상은 아연해났다. 만날 장소까지 알려준 사람이 제편에서 물으니 이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요꼬를 알면 자기가 더 잘 안다고 해야 할것이다. 이렇든저렇든 한학교에서 공부하지 않는가. 그것도 두해나 되게.

《허참, 무슨 판인지.》

《난 요꼬의 도움이 필요하네. 얼마전 길가에서 우연히 만났네.》

강무현은 한손을 쳐들어보이고나서 가버렸었다.

밤새 잠을 설치며 생각해보았지만 리면상은 뻔드름한 일인데도 수수께끼를 종시 풀지 못했다. 자기와 강무현사이에 끼여든 요꼬란 처녀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수 없었던것이다. 필경 나타날건 뻔하다. 그러니 두사람이 약속했단 말인가. 그런데 어느쪽에서도 내비치지 않으니 까닭이 무엇인가. 두사람이 짜고들어 자기를 골탕먹이려는게 아닌가 의심도 해보았지만 강무현의 성격으로써는 도저히 할수 없는 일이여서 부정해버렸다. 결국 약속한 곳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가늠도 못한채 가고있었다.

요꼬는 아무모로 보나 미묘한 처녀였다. 강무현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것자체가 남다른 기질의 한 측면을 암시하기도 하였다. 오늘과 같은 자리에 그가 나타난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리면상은 그 어떤 예감을 안고 성문을 지났다.

강무현과 이곳을 두어번 찾은 일이 있었다. 여름의 향기를 느낄수 있었다. 여기저기에 장미꽃들의 마지막모습이 보인다. 돌틈을 비집고 자란 풀들이 발에 밟히였다. 세월에 풍화된 돌길을 따라 올라가던 리면상은 걸음을 멈추었다.

비자나무 그늘아래 앉아있는 두사람이 보였던것이다. 바위에 걸터앉은 강무현의 모습이 웅크린 한마리 곰과 같다면 젊은 사람치고 넓은 공간을 만든채 비자나무줄기에 기대여 허공만 바라보는 요꼬의 자태는 매우 불안스럽다. 오늘따라 검은색옷을 입은탓에 서글픈 감정까지 불러왔다. 오랜 침묵으로 시달린다는게 한눈에 알렸다.

《내가 늦었는가? 시간을 어길줄 모르는데…》

일부러 늘어진 소리를 내자 강무현의 화가 치민 눈길이 날아들었다.

《기다리는 재미도 있을텐데.》

《아무렴! … 무슨 행차나 하는것 같이…》

강무현은 요꼬의 앞이라 간신히 참으며 나무리지만 눈에서는 불만이 이글거렸다.

《오라고 해놓고 인사가 그럴듯하군.》

《뭐? …》

높아지는 목소리를 애써 누르며 강무현은 요꼬에게 눈길을 돌렸다. 두사람의 말을 듣고있던 처녀가 그제야 가벼운 한숨을 내그으며 턱을 돌렸다.

《아마 오늘 이 자리는 내가 마련했다고 하는게 옳겠어요. 무현씨에게는 말했고 알려주라고 했어요. 옳지요?》

강무현을 바라보는 요꼬의 눈은 의미있게 웃고있었다. 그 웃음에서 교활한 빛을 발견한 리면상은 얼마든지 거절할수 있는 자리에 왔다는것을 깨달았다. 아마 자기를 통하여 강무현을 부르려 했다면 목적을 이룰수 없었을것이다.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고 리용하였다는데 이 녀자의 웃음뒤에 자리잡은 교묘성이 있는것이다. 요꼬라는 일본처녀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는 사람은 속지 않고서는 안된다.

《난 시간이 없소. 무슨 일로 이렇게 성의를 다하여 찾아주었는지 어서 이야기하오.》

자리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는 리면상의 거동을 잠시 지켜본 요꼬가 치마자락으로 무릎을 가리우며 말했다.

《시간이란 뭔가요? 숨막히는 공간속에 존재하는 우리가 몇시간이라는 시간의 지배까지 받는다면 산다는 의미가 있겠어요?》

요꼬의 비상한 말재주가 시작된다고 생각한 리면상은 화를 내듯 말했다.

《오늘은 일요일이요. 나같은 고학생에겐 옹근 하루를 일해야 한다는걸 알아줘야 하지 않겠소.》

《우에노공원에 간 날도 일요일이였다는걸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요꼬의 반문이 많은 의미를 담고있었지만 리면상은 불쾌한 일만 상기시킨다는 생각을 앞세우며 감정을 드러내고야말았다.

《요꼬, 조선사람을 너무 비웃지 마오!》

《유감이군요. 이 자리에서까지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어요.》

요꼬의 목소리가 진정제처럼 두사람의 마음을 이상할만큼 안정시키였다. 어쨌든 요꼬는 녀자였다. 녀성의 청을 받고 와서 괴롭힌다면 사나이의 처사라고 할수 없다. 내키지 않는 자리에 주저앉은 리면상이 강무현에게 화를 냈다.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모든게 자네탓이네.》

《그 부탁은 나만이 들어줄수 있는 일인걸요.》

요꼬의 대답에 리면상은 씁쓸한 웃음만 지어보였다.

《어떤 부탁인가를 왜 묻지 않는가요?》

《내가 알아선 안될 일일지 알겠소?》

《편견이 심하군요.》

《편견이 없는 사람도 있소?》

요꼬는 강무현에게 눈길을 돌려 말없이 묻고나서 두손을 마주잡았다. 자기의 진정을 표시하는 행동이였다.

《무현씨는 귀국할 배표를 부탁했어요. 전보로 친척에게 알렸어요. 대답이 왔어요.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나보다 더 잘 알리라고 생각해요.》

정수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때처럼 리면상은 고개를 무릎우에 떨구었다. 강무현의 결심을 알고있는 그였다. 친구와 헤여질 순간이 왔다는 생각과 함께 죄스러움이 온몸을 칭칭 휘감았다. 말이 친구지 도와줄 생각조차 못한 자기가 아닌가. 제 일 걱정만 앞세우고 살다나니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찌 보면 노상 베보퉁이를 둘러메고 방랑살이를 하기에 별수없는 인생이라고 여겨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자기가 입으로 외우는 우정이란 너는 너, 나는 나라는 말이나 무엇이 다른가.

《요꼬씨가 도와줘서 다행히도 며칠후엔 배를 타게 됐네.》

아무 말도 없이 있던 강무현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석별의 감정으로 조용히 떨리였다. 여기서 목적지까지 가려면 완행렬차로는 며칠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며칠후라는것은 오늘이 리별의 날이라는 말이라고 하여도 과언으로 되지 않는다. 이국만리에 사랑하는 동생을 묻고 떠나는 강무현이다. 가슴에 안은 원통함을 터뜨리지 못하는 심사를 무슨 말로 위로하랴.

《나 같은걸 친구라고…》

리면상은 다른 말을 찾을수 없었다.

《샌님같으니, 살아있으면 만나지 않으리. 한숨소리는 그만 내게. 난 그저 자네가 성공하기만 바라네.》

《무현군! …》

강무현은 리면상과 함께 숲속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고나서 요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두사람은 동시에 멎어섰다. 풀판우에 요꼬의 정성이 어린 음식들이 차려져있었던것이다.

요꼬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음식은 어머니가 만든건데 성의로 받아주세요.》

언젠가 그의 집에 갔을 때와는 다른 감회로 하여 두사람은 눈물이 솟구치는것을 겨우 참았다. 어느 누가 불우한 자기들을 이같이 대해주겠는가. 그들은 깨끗한 인간의 진정을 받아안으며 요꼬가 펴주는 자리에 앉았다.

《요꼬씨, 어머님께 무슨 말로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소.》

강무현이 대범한 마음을 가지고 갈린 소리를 냈다.

《어머닌 무현씨가 고맙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번 하는지 몰라요. 내가 그때 야꾸자들에게 짓밟혔다면…》

요꼬는 말꼬리를 삼키고나서 두사람을 바라보았다. 다 같은 조선청년들이지만 서로 다르게 비쳐오는 모습이다. 한사람은 음악리상으로 동정하게 되지만 다른 사람은 알수 없는 두려움을 자아냈다. 이또 히로부미가 누구의 손에 죽었는가. 천황의 마차에도 폭탄을 던진 조선사람들이다. 강무현의 저 기상은 일본에 항거하여 칼을 뽑아든 무사의 모습을 보게 하지 않는가. 요꼬는 무릎을 꿇고 앉으며 잔에 술을 부었다.

《고맙소!》

잔을 든 강무현이 요꼬를 바라보며 말했다.

《요꼬씨도 함께 듭시다.》

《그러지요. 부디 모든 일이 잘되기만 바라요.》

술잔을 낸 강무현이 두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고맙다는 표시로 고개를 숙여보이고난 요꼬가 리면상에게 말없는 시선을 보냈다. 이 자리에서 자기가 목적한것을 펼쳐놓을가말가 바재이는 눈빛이고 몸가짐이였다. 리면상이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말하오. 나보다 무현군이 석연한 마음을 가지게 해야 하오.》

그는 요꼬를 더 잘 알고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요꼬가 망설이다 결심을 내렸다.

《며칠전 가네다의 부인 도모미를 만났어요.… 놀랄거예요. 면상씨는 내 말을 사실로만 믿어주세요. 난 괴로운 마음을 안고 이야기해요.》

리면상도 알고있는 그날 요꼬는 가네다의 집으로 갔다. 벽돌담장을 한 2층양옥은 호화롭다기보다 위압감을 주었다. 대문이 열리자 관리인인 색안경낀 사나이가 나타났다. 야꾸자의 두목같은 인상을 풍기지만 녀주인을 찾아온 손님이라는것을 확인하자 공손히 도모미의 방으로 안내하였다.

《요꼬, 어서 오세요. 반가와요. 볼수록 매력있거던. 어서 앉아요.》

화려한 실내옷을 입은 도모미가 요꼬의 손을 잡아 이끌어다 장식을 한 흑단나무쏘파에 앉히였다.

《절 찾으셨다기에…》

《오, 보고싶어서… 요꼬, 우리 커피를 마실가, 아니면 샴팡?》

줄곧 요꼬의 얼굴과 몸매에 시선을 모은채 도모미는 사랑을 주지 못해하는 언니처럼 살뜰하게 굴었다.

《아이, 선생님도 안 계시는데 술이야 어떻게…》

《부재니까 더 자유로운거지. 그렇지 않아?》

요꼬는 도모미라는 녀자의 내면을 어렵지 않게 읽으며 부유한 가정의 생활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투시할수 있었다. 남편이 시끄럽게 생각된다는 중년부인의 말의미가 새겨지자 가네다의 입김이 얼굴을 휩쓰는것 같아 온몸이 금시 졸아드는듯싶었다.

실내옷자락을 주단우로 끌며 도모미가 문을 열고 나갔다 인차 들어왔다. 그의 몸에서는 진한 향수내가 풍기였다. 명문대학의 교수인 도모미가 동경의 대상이기도 하였지만 오늘 자세히 보니 이도 다를바없는 경망과 방종을 체질로 한 일본의 일개 귀족부인에 불과했다.

《저분은 누굽니까?》

일본도를 짚고 선 장군이 사진속에서 굳어진채로 방안에 앉은 두 녀성을 외면한채 엄격한 시선을 먼곳에 보내고있었다.

《나의 할아버지야. 날 무척 사랑해. 륙군대신이 될수도 있는분인데 허약한 번의 출신이여서 기회를 마련하고있어. 일본사나이들은 칼을 휘둘러 살아가고 녀자들은 봉사기교로 자기 세계를 마련하지. 요꼬, 난 말이야. 요꼬가 지나치게 도고한게 결함이라고 늘 생각해와. 허지만 일없어. 호호호.》

출입문이 가볍게 열리자 도모미의 눈길이 예리한 칼날처럼 하녀에게 날아가박히였다. 머리를 짧게 깎은 곱게 생긴 처녀인데 낯색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요꼬는 순간적으로 이 처녀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가네다가 자선병원에서 데려왔다는 환자일것이라는 그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하녀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도모미는 그가 차반을 차탁우에 내려놓자 어데 감추어두었던 무기인지 피아노선같이 가는 회초리로 치포자락사이로 드러난 그의 고운 다리를 후려갈겼다. 처녀의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자 동시에 요꼬의 입에서도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옷을 갈아입지 못하겠어? 내 눈앞에 다시 지금처럼 나타나면 용서치 않을테다!》

급격히 표독스러운 녀자로 변한 도모미가 휘파람소리를 내는 회초리를 다시 휘둘러대자 하녀의 얼굴과 목에 빨간 피방울이 맺혀올랐다.

하녀는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숙여보이고나서 물러갔다.

《언니, 너무 가혹하지 않아요?》

부지중 흘러나온 요꼬의 그 말에 도모미는 눈으로만 웃으면서 수정잔에 샴팡술을 부었다.

《누군가고 왜 묻지 않아?》

《난 커피를 마시겠어요.》

《중국계집애다. 내가 입으라는 기모노를 거절하니 별수있어?》

담담한 도모미의 어조에는 노예주와 같은 잔인성이 비껴있었다. 자선병원의 환자인 중국처녀를 데려다 하녀로 부리면서도 무엇이 불만스러운가. 샴팡을 한모금 마시고난 도모미는 폭신한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우리 일본이 구상하는 대동아땅에는 일본사람과 일본사람을 닮은 민족만이 남아있어야 돼. 그러니 연구를 해야지? 식민지를 가져보지 못한 우리가 아니야.》

도모미는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녀자로서 자기식의 식민지관을 가지고있었다. 대동아라는 광대한 령토안에 살고있는 민족과 종족들을 렬거한 그는 제나름의 말살방법을 설명하였다. 방금전의 중국처녀도 심리실험대상으로 선택되였는지 모른다. 자선병원이 어떤 곳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수 있었다.

《우린 먼저 조선을 잘 길들여야 해. <내선일체>, <동조동근>이라는 멍에를 씌워 조선사람이 일본말을 하며 일본의 력사와 문화만을 알게 하여야 하는거야. 반도땅을 평정해야 대륙을 가질수 있다는걸 잊으면 안돼. 참, 면상은 요즘 뭘 하니?》

리면상의 이름이 튀여나오자 요꼬는 내심 긴장되였다.

《열심히 공부해요. … 련습도 하면서…》

《어떻니, 그가?》

《무슨 말씀인지…》

《재능이 있지?》

《선생님이 잘 알겠는데요.》

《무재에겐 채찍을 휘두르지만 인재는 아껴주어야 해. 일본의 재산이나 같지 않아. 그렇지?》

가네다와 도모미의 흉심이 어렴풋이 안겨오자 속이 떨려났으나 요꼬는 어정쩡하게 웃어넘기려 하였다. 그 모습을 도모미는 제나름으로 해석하며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리면상을 잘 키워 일본음악계에 내세우면 가네다와 나의 작품이 완성되는거야. 그에게 일본이름을 가지고 명성을 떨치게 해봐. 얼마나 고맙게 여기겠어. 재능은 아껴주어야 하거던. 그가 바라는것이 성공일테지?》

《글쎄요. …》

《그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거야.》

《확신하는군요.》

《그렇지 않구. 그의 소원이란 작은거다. 성공에로 이끌어줄 손길만 바라거던.》

도모미는 자신심을 가지고 말하고있었다. 그것이 요꼬의 의문을 자아냈다.

《주인에게서 전화가 왔어. 이를테면 요꼬가 숭배하는 스승에게서.》

요꼬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왜 못 오신답니까? 어데 계시기에…》

《아따미… 온천놀이를 하고있는가봐. 일본남자들의 속성을 잘 알테지?》

《공연한 의심을 마세요.》

《괜찮아, 생활에도 등가보상의 원리가 적용되거던. 모든건 상대적이야. 요꼬, 리면상을 놓치지 말고 잘 돌봐주라는게 너희 선생의 부탁이다. 그걸 알려주자고 찾은거야.》

요꼬는 가네다부부의 목적을 드디여 알았다. 자기보고 감시하라는 지시를 주는것이다. 이쯤되면 그들이 리면상을 어떻게 리용하려고 하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

참으로 가혹한 진실이였다. 요꼬의 말을 믿어야 하는 지금 리면상과 강무현의 심리는 형언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있었다. 그것은 믿음이 허물어지는것이나 다름없었다.

성미가 과격한 강무현은 울분같은 기염을 내뿜었다.

《대답하라구, 면상! 너는 어떤 사람인가? 가네단지 도모미인지 한 년놈들에게 무슨 약속을 했나? 일본놈의 가죽을 쓰자고 바다를 건너온건 아닐테지?!》

리면상의 두뇌는 폭발직전에 놓였다. 그저 신음소리만 터져나올뿐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자기가 불쌍했다. 남의 나라 땅에 와서 배 곯고 추위에 떨어서가 아니라 제정신을 버리고 살았기에 불쌍했다. 사람은 사람인데 한쪼각의 존엄마저도 스스로 버리고 살았으니 아무리 불쌍해도 동정조차 바랄수 없는 자기를 보았다. 가네다에 대한 환상이 한 인간을 어느 지경에 이르게 하였는가. 교양있는 녀성이라고 여긴 도모미는 과연 어떤 모습을 드러냈는가. 자선병원에서 데려왔다는 중국인처녀가 강요당하는것이 무엇인가. 일본기모노를 입어야 하는것이 그 처녀의 운명이라면 일본을 위해 노래를 부르지 않을수 없는 운명이 자기를 기다리고있었던것이다. 너는 그것을 받아들일수 있는 인간이라는것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음악이냐 민족이냐, 운명의 갈림길에 너는 서있다.

《자네가 대답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교야! 너는 조선사람이라고 말하지 말라!》

강무현이 주먹으로 바위를 내리쳐 손에서 선혈이 뚝뚝 흘렀다. 요꼬는 눈을 감은채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리면상은 품속에 가지고 다니던 돈 200원을 내놓았다. 생각 같아서는 찢어내치고싶지만 도모미의 얼굴에 내던져주어야 했던것이다. 자기라는 인간을 얼마나 하찮게 여겼으면 이 돈을 몸값으로 여겼겠는가.

《나를 용서하게! … 나는 분명 민족의 피를 더럽힌 놈일세. … 내 이제 무슨 낯을 들고 고국의 하늘을 보겠나. 넋을 팔아 저 하나의 명예를 얻으려 한 비굴한 인간이 이놈이니 다시는 돌아보지 말라구! …》

사람이 민족과 떨어지는 티끝만 한 잘못으로도 한생 속죄해야 한다는것을 뼈에 사무치게 느끼는 리면상이였다.

요꼬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회유를 목적한 인간이 저주를 받아야 하는거예요. 면상씨를 괴롭히는것은 너무해요. 나 역시 도모미까지 그런 녀자인줄은 몰랐어요. 제 생각엔 두분이 함께 떠나는것이 좋겠어요, 가네다가 나타나기전에.》

강무현은 피칠갑이 된 주먹을 움켜쥐고 리면상을 바라보았다. 음악공부를 하겠다고 무슨 고생인들 안했는가. 오늘같은 일이 생길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으리라. 불쌍한 조선청년들이다. 언제면 이 원한을 풀겠는가.

《결심하라구.》

련민의 정을 품은 강무현의 말이 울리자 리면상은 고개를 숙이고 요꼬가 있다는것도 잊고 사나이의 울음을 터뜨리였다. 고향을 떠나 이국만리를 헤매며 눈물을 모르고 산 사람이 가슴을 두드리며 울고있기에 그 정상이 더욱 처절했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겠나? 일본놈들이 어떤 종자들인가를 알았으면 정신을 차려야지!》

요꼬가 술을 부어 리면상에게 내밀었다.

《진정하세요. 리성을 잃지 않는거예요. 생각을 옳게 하면 행동할 기회는 있어요.》

《고맙소!》

《오늘은 떠날 준비를 갖추는게 어떻겠어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요꼬가 묻는 말에 두사람은 말없이 긍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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