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11

 

강화화문석을 깐 방안은 정갈했다. 유난히 눈에 뜨이는것은 벽에 걸린 족자에 자리잡은 성삼문의 시 《절명가》였다. 바탕그림인 대나무가 광풍에 몸부림치고 날리는 이파리들은 사6신들이 뿌린 피방울처럼 보였다. 힘있게 휘갈겨쓴 서체가 웅건한 맛을 주었다.

김형숙은 큰 붓에 먹을 듬뿍 찍어들고 한자한자 새기던 아저씨의 모습을 생각했다. 그날은 언니의 생일이여서 족자는 자기가 만들고 글은 아저씨가 써서 선물로 주기로 하였던것이다.

《생일선물의 글치고는 너무 엄숙하지 않아요?》

《<인간의 목숨은 초불처럼 꺼져도 지조는 남아서 불길처럼 타번지는것이리라. 사람이면 다 사람이랴, 사람답게 살아야 사람이라 할것이다.>, 난 이런 의미를 언니한테 주자는거다. 왜, 싫으냐?》

시보다 엄숙한 아저씨의 모습에 김형숙은 고개를 기웃했다. 공감되는가 하면 불만도 자아내는 아저씨였기때문이다.

《언니는 명백하고 직선적인것을 좋아해요. 성격이기도 하거던요.》

에두르지만 일종의 요구이고 묻는 말이여서 아저씨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만사나 사람이나 두고봐야 안단다.》

족자를 받은 고화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인간답게 살아야 해. 녀자도 사람이라는걸 알게 해야 할텐데…》

고화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중얼거리고나서 고맙다고 했다.

김형숙은 창턱을 닦던 손길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은초사창가림을 헤치고 금빛알갱이로 이루어진 해볕이 스며든다. 당반우에 놓은 화분의 꽃잎새에 내려앉아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그의 눈길을 끄는것은 봉선화였다. 점점이 꽃잎을 떨구었지만 아련하게 웃고있다. 울밑에서 비바람에 처량히 울었는데 고마운 주인을 만나 꽃을 피운다고 속삭이는것만 같다.

무릎을 꿇고 앉은 김형숙은 방금 닦았다는것도 잊고 돗자리구석을 걸레질했다. 눈앞으로 리면상의 얼굴이 다가왔다. 언니가 아저씨의 말을 듣더니 다방에 바이올린연주가가 왔다고 하여 호기심이 동했다. 이상한 인연을 맺은 바이올린이다. 어떤 사람인가 보려고 갔더니 헤여져 한장 소식도 보내지 않은 사람이 앉아있었다. 당황하여 어쩔바를 모르던 모습, 자기를 올려다보던 두눈동자… 함께 있던 녀자는 누구인가. 애인일가 아니면… 사진광고에 내면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할지도 모를 녀자였다. 헌데 면상씬 왜 그랬을가. 누군지 소개도 안했고 쫓기는 사람처럼 다방을 나섰다. 래일저녁 어데서 만나자는 말만 얼버무려대고는 허둥거리며 가버렸다. 같이 온 녀자가 고개까지 숙여보이며 인사했었다.

《면상씨의 친구랍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부드럽고 은근한 목소리가 지금도 들려오는것만 같다.

김형숙은 봉선화를 쳐다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함께 온 그 녀자는 가수라고 언니가 알려주었다. 음악을 사랑하는 두사람이 만난것이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리면상이 인생길에 리상을 같이하는 반려를 가지게 되였다면 축복해주고싶은 그였다. 우정은 우정대로 남고 사랑은 사랑대로 흘러가면 되는것이다.

《야 형숙아, 너 이 언니 욕을 먹이자고 온건 아니냐?》

김형숙은 소스라쳐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친형제는 아니여도 어머니 다음가는 언니가 옳다. 사랑만 준것이 아니다. 글을 가르칠 때는 회초리까지 들군 하였다. 그래서 더 존경이 가는것이다.

30대를 넘겼어도 보름달같이 환한 언니의 얼굴뒤에 안경낀 아저씨의 장난기어린 웃음이 보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너 방걸레질을 몇번 할셈이니?》

《오죽하면 그러겠소.》

《전에 없던 잔소리를 하면서 화를 돋구겠어요?》

김형숙의 동네에서 봉건을 박차고 학문의 대문을 제일먼저 열어제낀 녀자다. 리화녀전을 졸업하고 녀성계의 인물이 되는가 했는데 실망하게 하는 사람도 이 언니다. 덕을 보았다면 자기도 사범학교를 졸업하게 영향을 미친것이다.

《성들은 왜 내세요? 청소야 하면 좋은건데.》

《그렇지 않구.》

아저씨의 응수가 언니의 심사를 한층더 건드렸다. 문지방을 넘어와 방걸레를 빼앗더니 창턱에 내던지듯 놓았다.

《이애가 서울바람에 얼쳤어요. 네가 어제 만난 연주가가 교원생활을 같이했다는 그 사람이지?》

《어마어마, 왜 그다지 요란하게 물어요?》

《흠, 짝사랑이냐? 련애했어?》

생긴 그대로 개방적인 언니는 변명할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지 연방 물어댔다.

《사랑은 뭐구 련애란 무슨 왕청같은 소리예요? 아저씨, 이럴 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요?》

《내가 지원사격을 해주지. 네 언닌 의심병을 앓고있다. 나까지…》

《그만해요, 실없이. 이실직고해. 네 걸음이 아무리 빨라도 전보만 날리면 집에 들어서기 전에 일이 나.》

《언니, 여기가 옛날 포도청은 아닐테지요?》

김형숙이 빈정거리며 묻자 아저씨가 뒤를 달았다.

《난 노상 곤장을 맞아가지고 산다.》

울상을 해보이는 아저씨의 얼굴을 본 김형숙은 오른손주먹을 쳐들며 웨치듯 말했다.

《가정에서 남성해방운동을 해야지요 뭐!》

마침내 언니도 기가 막힌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네가 교원살이를 몇해 하더니 입이 되겐 깠구나. 호호호, 녀자들은 해방해도 남자족속들은 멍에를 씌워야 한다. 난봉병을 고칠 때까지!》

무슨 구호나 부르듯 하는 언니의 엄숙해진 모습에 김형숙도 폭소를 터치고야말았다.

《그럼 녀성해방도 난 반대요, 바람쟁이녀자들을 숙청할 때까지!》

아저씨도 주먹을 쳐들어보이며 자못 정중하게 말하는통에 두 녀자는 마른날 우뢰소리에 놀란 사람들처럼 마주보았다.

《방금 뭐랬지요?》

전광석화와 같은 반격에 얼이 나갔는지 언니가 기죽은 소리로 물었다.

《난봉이란 어렵게 만난다는 말인즉 그것은 남난봉과 녀난봉의 밀회오이다. 혼자서 이룰수 없는 신성한 행위를 우리측만 책임이라 하니 어불성설이 아닙니까.》

언권을 받은 아저씨는 법관같은 표정을 짓고 류창하게 엮어대는데 듣는 사람이 의문을 가질수 없게 하는 기가 막힌 해학이였다.

《아유 형숙아, 저 말씀을 들었지. 붓을 꺾은 풍류시객이 얼마나 천연스럽니. 비위가 저쯤되니 눈에 들면 일사천리란다.》

《아저씨, 제 말을 듣겠어요?》

웃사람들사이에 든 김형숙이지만 교단에 선 때처럼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형숙선생의 말이라면야…》

량손으로 안경다리를 번갈아 춰올리며 아저씨는 능청스럽게 마주보았다. 자기 청백성을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는 지어낸 당당한 몸가짐이 요절하게 할 지경이다.

《정말이예요?》

《물론.》

《약속해요?》

《그만 조이렴.》

《언니만을 사랑하세요.》

안경속의 눈빛이 떨렸다. 충격을 받은 난색이다. 달변도 무기가 아님을 느낀 모양인가. 김형숙은 아저씨를 언니보다 더 좋아했다. 박식하고 선량한 남자기때문이였다.

《하늘에 맹세한다.》

《심장이면 돼요.》

《난 심장이 없단다, 언니가 가졌으니까.》

아저씨는 두손을 쳐들어보이며 자기를 믿으라는 무언의 암시를 했다. 언니에게 말 못하는 어떤 사연이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형숙아, 네가 언니를 진정시키렴.》

어딘가 측은한감을 주는 어조로 말한 아저씨가 안경다리를 추스르며 나갔다.

《아저씬 좋은분이예요.》

《심야의 등불이 밝아 부나비가 많이 끼는가봐.》

《난 거리구경을 하고 오겠어요.》

김형숙이 일어나자 언니가 말했다.

《찾지 않게 제때에 들어와.》

《언니는 왜 이름을 고쳤어요?》

《나쁘니? 고화, 난 외롭게 피는 꽃이다. 질 때도 홀로 질거야.》

종로를 벗어난 김형숙은 미아리고개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리면상이 들었다는 하숙집을 찾아간다. 어떻게 생활하고있는지 예까지 왔다 보지도 않고 갈수 없다고 생각했다. 객지살이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교편을 함께 잡고있을 때 성미가 온곱지 못해 노상 속에 걸리는 말만 하였다. 돌이키면 후회가 된다.

김형숙은 류진의 집을 힘들지 않게 찾았다. 어머니를 만나니 제 집에 온것만 같이 생각되였다. 자기를 이상하게 할깃할깃 곁눈질해대는 연이도 귀엽게만 보였다. 마당에 앉은 어머니는 가을남새 푸성귀를 다듬으며 곁에 앉아 말없이 일손을 돕는 김형숙을 슬며시 돌아보았다. 저고리고름을 어깨뒤로 넘긴 처녀의 모습이 이를데없이 단정했다. 남새의 묵은 잎을 골라가며 재빨리 뜯고 뿌리를 잘라내는 손길이 여간만 빠르지 않았다. 곱게 탄 가리마, 반듯한 이마와 유순한 눈섭, 덕이 실린 코마루와 가벼운 숨결이 흘러나오는 입술은 연지를 바르지 않았어도 물오르기 시작한 복숭아빛이다.

《우리 면상이와 학교일을 했다지?》

하숙집 주인이면 세를 받고 집을 내주는 사람인데 들인 손을 아들처럼 부르기에 김형숙은 내심 놀라며 대답했다.

《네, 한해가 좀 넘게. 면상선생은 서울에 와서 줄창 이 집에 있었어요?》

《그럼, 지난해 초겨울 서울복판에서 하숙 잡기가 힘들어 우리 동네에 찾아오지 않았겠나. 난 누굴 들일 생각이 없었는데 사람이 하도 진중하기에 큰아들삼아 맞았다네.》

《엄만, 오빠를 데려온건 나였지 뭐야.》

연이가 입을 쪽 내밀고 토달거렸다.

《그래, 네가 옳다. 깽깽이 잘 타는 오빠라면서 같이 손을 잡고 왔었지. 집을 구하지 못하니 행길에서 그걸 탄 모양이네.》

빨래를 다 넌 연이가 자기도 앉을자리라고 여기는지 김형숙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오빤 고생해도 꿈이 큰 사람이예요.》

《애두, 어른들 말하는데…》

어머니의 핀잔에 몸을 옴츠린 연이가 어리광을 부리며 그냥 재잘거렸다.

《흥, 우리 오빠니깐 그러지…》

《저런… 어이구, 저것들이 너무 정이 들어 그런다네.》

사람이 사람을 잘 만나는것보다 큰 복은 없다는 말이 있다. 김형숙은 이상야릇한 감정에 휩싸였다. 마음이 편안해나는것이다. 무슨 근심을 안고 온것도 아니지 않는가. 가슴속에 자리잡은게 있다면 옛정뿐이다. 음악에 뜻을 둔 리면상이 성공하기만 바란다. 오늘도 학교에서는 그가 고심해서 완성한 교가를 부르고있다.

《다듬은건 김치나 담그지. 연이야, 냉큼 들어가 소금하고 단지 내오너라. 그 사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라네. …》

어머니가 연이를 독촉하고나서 말했다.

리면상의 하루가 눈에 보이는것만 같다. 이른새벽에 서울골목을 누비며 신문을 나르고 돌아서서는 국수배달, 우유배달로 고역을 치른단다. 얼마전에는 제 동무를 만나 화물역에서 짐부리는 일을 며칠이나 했다는것이다. 하숙비를 물려다 된꾸중을 들은 후 쌀을 사들고 들어오지 않는가 하면 학교에 다니는 류진의 신발이며 학습장을 마련해가지고 나타나 어머니를 울리기까지 했단다.

《눈치살이에 속병 들가봐 걱정이네.》

어머니의 한숨소리에 김형숙은 저고리고름으로 눈을 가렸다. 리면상이 당하는 고생에 눈물이 나왔고 오가는 인정에 가슴이 후더워났다.

《발길 돌리기 싫은 일본땅이지만 배우자니 가야겠는데 돈을 벌기가 어디 쉬운가. 그 정상은 못 보겠네. …》

목멘 탄식과 가슴속 소리없는 눈물이 흐를 때 류진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김형숙이 고개를 돌리니 더벅머리가 낯선 사람앞이라 마뜩지 않은 얼굴을 실룩거렸다.

《인사해라, 원산에서 온 선생님이다. 형님과 함께 너희 같은 아이들을 가르쳤단다.》

리면상의 말이 나오자 류진의 얼굴은 금시 밝아졌다.

《그래요?! 형님이 말하군 했어요. … 야, 우리 집을 어떻게 아셨나요?》

《피? 그것도 몰라? 오빠를 만났지 뭐.》

연이가 옹배기의 물로 푸성귀를 씻으며 난딱 끼여드는 바람에 류진은 어처구니없다고 웃었다.

《선생님, 형님이 지은 노래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보실래요?》

김형숙은 남자가 든 방이여서 보자는 말을 할수가 없었는데 류진의 그 말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책보자기를 토방우에 내던진 류진이 웃방문을 열어제끼고 큰 자랑거리라도 있는듯 바라보았다.

김형숙이 문가에 오자 류진은 방안에 들어가 종이뭉테기를 가져다 펴놓았다. 연필로 그린 오선지들이였다.

《이건 형님이 수집하는 우리 나라 민요예요. 그리고 여기것들은 작곡한 노래들이구요.》

《제법인데, 민요수집이라는 말도 다 알고.》

《오빤 바이올린도 잘 타요.》

연이가 삐쳐들지 않는데가 없다.

김형숙은 그제야 벽에 걸린 바이올린을 보았다. 순간 그의 심장은 그리움과 만남이라는 박자에 맞춰 높뛰였다. 얼마나 보고싶었던 활이고 현이였는가를 처음으로 느끼고있었다. 그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된것이였다.

류진이 바이올린을 타기 시작했다.

김형숙은 파도소리를 듣고있었다. 련두산마루에 비끼던 무지개를 보았다. 추억으로 남은 흘러간 모든것들이 지금은 바이올린선률과 함께 가슴속으로 흘러들며 그윽한 향수에 잠기게 하였다.

《정말 잘 타는구나.》

《형님이 배워주었어요.》

《좋겠구나.》

이렇게 말한 김형숙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그었다. 마음은 까닭없이 쓸쓸해났다. 밀려드는 조수를 타고 심리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신도 어쩔수없는 결심으로 변했다. 래일 내려가자, 원산으로. 이상한 초조감이 떠밀어대는것이다.

류진의 집을 나선 김형숙은 약속한 시간에 리면상을 만났다. 어제 낮에는 느끼지 못한 측은한 모습이 눈뿌리를 달구었다. 사색적이던 눈은 충혈되여있었고 꺼칠한 얼굴엔 고달픈 그늘이 비꼈다. 로동복으로 덧입은 아마직저고리가 볼썽사납게 구겨져 한층 람루하다. 검은물이 다 날아 희끄무레해진 로동화코숭이도 가는 쇠줄로 기웠다. 다방에서 보았을 땐 얼굴만 찾았지 차림새는 눈에조차 두지 않았다는것을 깨달은 김형숙은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형숙선생을 다방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요.》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리면상은 먼저 말해야겠기에 중얼거려댔다.

《제가 다방에 나타난게 이상해요? 호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이 서울에 있어요. 한마을에서 살았어요. 잘 생기고 총명하고… 녀자치고는 일찌기 개명했다고 해야 할거예요. 인물이 되는가 했는데 그만에야 주저앉았군요. 녀자는 제한성이 있는가봐요.》

다방 녀주인에 대해 이야기하고있지만 리면상은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전약속보다 그렇게 만나는편이 좋지요. 잘 알수 있으니까요.》

자기를 본대로 리해하라는 의미를 담았다. 김형숙은 눈길을 들어 멀리 앞만 바라보며 걸었다. 내가 본 무엇을 말하라는걸가. 함께 왔던 가수라는 녀자를 념두에 둔것인가. 내가 알고있는 리면상은 속이 좁은 남자는 아니다. 굳이 그 방향에서 이야기를 하려 한다면 한마디로 대답해줄수 있다. 사랑의 선택은 각자의 권리라고.

《저기가 남산이요. 산마루에 올라가보는게 어떻소?》

리면상은 지친듯 한 얼굴로 손을 들어 가리켰다.

《좋아요, 련두산을 찾아보던 심정으로…》

두사람은 남산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소란스럽게 울어댔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처서가 지난 계절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모래불을 차며 학생들과 뜀박질하던 생각이 나세요?》

김형숙은 리면상의 무거워진 마음을 돌려세워보려고 말했다.

《나오. 그때가 정말 그립소. …》

《왜 그리 심각해요?》

《아, 아니요. 보다싶이 내 형편이… 사실 보이고싶지 않은거지요.》

자존심이 없다면 남자랴. 고행을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리해도 못할 녀자로 아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빈곤한 생활은 고생과 함께 지혜도 준다고 했다. 배부른 인간들이 향락에 빠져 추물로 되는것은 피할수 없는 세상리치이다. 하물며 사나이 한번 태여나 제 할바를 깨달았으면 서슴을게 무언가.

《전 방금전 면상선생이 하숙하는 집에 갔다오는 길이예요. 어머님도 류진이와 연이도 만났어요. 왜 놀라세요?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어요.》

리면상은 다방에서 만난 일이 지금도 믿어지지 않았다. 꼭 꿈을 꾼것 같이 생각된다. 진옥련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이 상기될 때면 순간과 기회속에 인간의 수치와 파멸도 숨어있다는것을 통감하게 되는 그였다.

《정말 좋은 어머니요.》

《연이가 총명해요. 그 어린것의 추리능력에 놀랐어요. 배워만 주면 수재가 될텐데…》

《형숙선생은 훌륭한 교육자의 안목을 가졌소. 어려운 살림에도 어머니는 래년부터 연이를 공부시키겠다고 하오. 남편은 의병으로 떠나가버린 후 소식이 없소. 하지만 언제건 돌아온다고 믿으며 자식들을 키우고있소.》

두사람은 산마루에 올라섰다. 서울시가지가 내려다보였다. 꾸물꾸물 뱀처럼 종로로 기여가는 전차, 조선식집들을 비집고 들어앉아 얼룩투성이를 만들고있는 일본과 서양건물들, 탄식가락같은 기적소리가 서울역쪽에서 들려온다.

《바다를 보기만 못하군요.》

《경치가 아니라 수치를 보게 되기때문이요.》

김형숙은 실눈을 지으며 물었다.

《우리가 저쪽에서 왔지요?》

《그렇소.》

《그럼 우린 빙 돌면서 왔군요. 인간이 원을 발견한건 사실 대단한거예요. 이고 지고 로동하던 사람들이 원의 리치를 깨닫고 바퀴를 만들어냈거던요. 바퀴가 없었다면 증기기관도 나오지 못했을거예요. 사람은 뭔가 깨달으면 실천하는 성질을 가지고있어요.

면상선생, 이번에 올라와 이렇게 만나니 전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요.》

《고맙소.》

리면상은 바퀴에 대한 김형숙의 이야기가 담고있는 의미를 풀어보았다. 생존을 위한 인간의 로동이 없었다면 바퀴를 만들어내려는 노력도 하지 못했을것이다. 고생을 이겨내고 자기의 리상을 실현하는 사람만이 성공의 기쁨도 맛볼수 있다.

김형숙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한손으로 쓸어누르며 숲속길을 걸었다. 리면상에게 작은 힘이라도 보태여주고싶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면상선생, 부탁이 있어요.》

《말하오. 내가 들어줄수 있는 일이라면…》

《첫 노래를 지으면 편지를 해주세요. 학생들이 기다려요.》

리면상은 걸음을 멈추었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걸으라는 말이다.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가. 자기가 기다린다는 말을 못해 학생들이라고 표현했을것이다. 떠밀어주는 마음은 참으로 귀중했다.

《고맙소. …》

《전 래일 내려가겠어요.》

《그렇게 빨리…》

리면상은 만류할수도, 아쉽다고 말할수도 없는 자기의 마음을 펼쳐보일수 없어 괴로웠다. 이렇게 헤여지면 언제 다시 만나겠는가. 그보다는 오해를 품고 가는것 같아 짧은 순간에 말마디들을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김형숙에게는 진실만이 대답인데 할수 없었다. 그것은 가슴속에 오래도록 남아있을 고민이였다.

김형숙이 원산으로 내려간 한달후 리면상도 부산을 향해 떠났다. 그는 드디여 고향을 떠난 생활로부터 다시 이국땅을 밟아야 했다. 오직 하나, 음악을 찾아가는 길이였다. 그것은 리상일뿐 정신적지탱점은 아니였으니 인생의 방황은 계속되는것이다. …

《여보, 아직은 날씨가 찬데 여기 앉아서…》

안해의 목소리를 들으며 리면상은 깊은 상념속에서 깨여났다. 어떻게 알고 여기로 찾아 나왔는가. 덧저고리를 씌워주는 안해의 얼굴에 근심이 어려있었다. 녀자들은 자식이 생기면 남편에 대한 관심이 적어진다지만 나이가 들수록 잔정을 더 기울이는 안해였다.

《일선이한테서 전화가 왔댔어요. 생각이 많을 때마다 여기에 나오시기에…》

참으로 다심한 녀자다. 내가 집안일로 마음을 쓰지 않으며 사는게 다 안해를 잘 만난 덕이라고 해야 하리라.

《옥련이가 조국방문을 온다지요?》

리면상은 고개만 끄덕여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큰마음을 먹고 오는 녀자예요. 마음고생은 얼마나 했겠나요. 멀고먼 남의 나라 땅에서 외롭게 살다니…》

《우리 민족이 오늘도 당하는 불행이요. 가슴이 아프오. 그래서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보게 되는가보오.》

리면상은 봄빛이 어리는 모란봉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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