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번개가 친 뒤

4

 

송호정은 거사에 대한 지시를 가지고 찾는가싶어 며칠동안 거사의 주역인물들과 머리를 맞대고 세운 대책안을 들고왔다.

그런데 순애소리가 나오자 눈이 퀭해졌다. 순애에 대해서는 그를 타자수로 취직시킬 때부터 관여한바가 있다. 뒤날에도 순애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어 송호정도 잘 알고있었다. 그는 순애와 아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들어왔다.

정시명은 사태의 전말을 추려서 간단히 설명하였다.

《그 앨 구원해주오. 그 앤 결혼상에 나앉아야 할 신부요.》

정시명은 전에없이 기운이 쇠진해서 애타는 어조로 부탁하였다. 뜻밖의 흉보도 그렇지만 정시명의 지쳐있는 모습이 련민에 겨워 송호정도 명치가 쭝해왔다. 그의 속을 편하게 해주고픈 생각에서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였다.

《념려마소. 참모부놈들이 가두어놓았을거요. 체네가 제놈들의 엉뎅일 마구 쑤셔놨으니 어데다 〈빨갱이〉를 잡았다고 소리쳐볼만 한것이 못되지요. 수사기관에 넘겨야 제 상판 깎이는짓이니 필경 넘겨주지 않을게구. 그런즉 뒤구멍으로 뽑아내기에도 크게 품들일게 없어요. 걱정할게 없다니까.》

송호정은 정시명의 구름 깔린 얼굴이 걱정스러워 이렇게 호기있게 장담부터 하였다. 실상 그만 한 정도의 일이라면 퇴역장성에다가 총사령관이라는 전직을 발동하면 힘들게 없다고 단정하였다.

송호정의 속씀에 정시명은 다소 속이 진정되였다.

《그런데 이 일은 아무쪼록 조심을 해야 할것 같네.》

《아, 물론이지요. 걱정마소.》

《그런데 말이네. 이 일은 시간이 급하네.》

《아, 물론.》

《그놈들이 비밀이 샐가봐 서두르면 만사가 끝이란 말일세.》

정시명은 송호정이 어려운 과업을 너무 가볍게 받아들이는듯싶어 속을 쓰며 안타깝게 다짐을 두었다.

《아, 아, 내 다 생각이 있다니깐요. 뭐 려수땐 다 떼울번 한 한렬이를 구원하기까지 했는데 그까짓 타자수 하나쯤이야 건사 못하겠나. 그건 그거구, 어째 정형이 이렇게 자꾸만 볼이 상해가시오? 정말 안팎으로 다 쇠하는건 아닌가, 어찌된 일이요?

사실 우리 〈흥국상회〉야 련속 쾌거를 올려오지 않았는가 말이요. 우리 상회의 보잡이가 낯빛이 어두워있는게 난 불안하구려.》

송호정은 여느때없이 속이 여리여 자심하게 걱정을 하며 그 당당하고 의연하던 자세를 잃고있는듯 한 자기의 존경하는 지휘관이며 막역지우인 정시명의 꺼칠한 모습을 안타깝게 살피였다.

사실 정시명은 이 며칠새에 안팎으로 고통과 번민속에 헤매고있었다.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하늘은 높고 말도 살진다 하건만 어찌된 일인지 가을철에 잡아들면 늘 그러하듯 입맛이 떨어지고 복통이 심하여 끼니를 번지는 일이 드문하였다. 게다가 신경통으로 이따금씩 오른쪽어깨가 바늘로 찌르듯 아프고 편도가 자꾸 부어올라 말하다가도 목이 꽉 잠기는 일이 자꾸 생겼다.

설상가상으로 요즈음은 여러가지 정신적압박감과 고충으로 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 순애가 체포되여 그들의 결혼상이 물리게 되는 비극이 정시명의 자제력의 마지막 탕개줄을 썩둑 잘라버린것 같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안깐힘을 다해 가까스로 지탱하고있었다.

《내 몸이 어떻다는건가?》

정시명은 길게 드리운 수염발을 쓸어내리며 옛 지기의 다심한 눈길을 슬그머니 외면하고 입가에 어줍은 미소를 담았다.

《내 눈은 못속이네. 좀 쉬는게 어떻겠나? 통일이라는게 아무래도 하루이틀에 될것도 아니잖나, 제 몸이 엉망이 되고있다는걸 인정해야 하네.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한 열흘간만이라도 머리를 쉬우고 오는게 어떤가. 그동안 난 순애를 풀어놓는 일을 할테니.

그건 걱정말래두, 숱한 사람들이 정형을 쳐다보며 뛰고있는데 그러다가 아예 자리에 덜컥 몸져눕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내 최원기한테 이야기해놓겠네. 그렇게 해주게. 례영이랑 데리고 다문 며칠만이라도 남해에 다녀오게나.》

송호정은 친구의 손목을 감아쥐고 자못 간곡하게 권하였다.

정시명은 자기의 속내를 꿰뚫어보는듯 한 송호정의 정깊은 눈길을 마주보며 더는 속일수 없어 시무룩이 웃었다.

《음, 정말 어떤 땐 아무 생각없이 다문 하루라도 머리를 비우고 지내고싶네.》

정시명은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그러나 말해놓고나니 속이 덜컥 해왔다. 내가 정말 친구라고 한들 이렇게 나약해지는 심기까지 내비칠 정도로 비참해졌는가.

되돌아보면 여적 그 누구에게도 한숨을 내비친적이 없던것 같다. 나자신도 전쟁이라는 번개에 넋을 잃고 번개가 몰아온 회오리에 공포와 불안에 빠져있는것이 아닌가. 자기 사업에 대한 허무와 비관에 빠져 통일위업에 대한 신념과 의지가 으깨여져버린것이 아닌가. 전쟁이라는 소리에 순애도 불안에 떨었다. 김아성도 김명호도 길철도 자신을 다잡기 힘들어하고있다. 장억수도 방대광도 전쟁소리에 혼비백산해졌다.

송호정이 리승만을 제끼겠다고 나선것도 뒤집어놓고보면 새로운 정세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데로부터 극한점에 몸을 투신하여 대세를 역전시켜보려는 마지막필사의 몸부림이다.

하지만 내가 그래서는 안되지. 난 누구인가. 송호정이 말했지. 《흥국상회》의 보잡이라구. 보잡이가 중심을 잃어서야 안되구말구. 보잡이마저 감정의 이마받이에 리성의 대가 흔들리면 《흥국상회》가 흔들리며 우리의 애국위업에도 그만큼 손실을 주게됨은 자명하다. 송호정도 그걸 끄집어낸것이다.…

그러나 정시명은 송호정의 동정과 련민에 겨운 눈초리앞에서 여전히 가슴에 남모를 비애와 허탈감이 휩쓸어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렇게 하게. 남해바람을 쐬면서 머리를 식히고 오게. 순애문제는 내가 책임지겠다니. 걱정말고 떠나가게.》

《고맙네, 호정. 하지만 걱정을 놓을 계제가 됐나. 당장 할일이 산같아. 지금 전쟁이 있을것이라는 설이 우리 정보선에서 기정사실로 확증되고있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것은 명백하네. 모든걸 새로 시작해야 하네. 명백한것은 밀려드는 전쟁의 구름을 맞받아나가야 한다는것일세. 어떻게 맞받아나가겠는가?

대안은 명백하네. 맞받아나아갈 진을 무어내는걸세. 자네가 반대했지만 난 방대광이도 그 진에 세우려고 하네. 리범석이도 끌어넣어야겠고… 안 들어서겠다고, 못 들어서겠다고 앙탈도 부리겠지. 허지만 딴길이 없네. 반전세력을 묶어세워야 한단 말일세.

헌데 문제가 있네. 우리 동지들도 반대하고있는걸세. 모험이라는거지. 그건 별다른 문제구. 문제가 또 있어…》

다시 열정적으로 펴나가던 이야기가 여기서 토막이 났다. 정시명은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괴롭게 말을 이었다.

《자네의 도전과 비슷한 장애가 내 발목을 붙잡고있네.》

《나의 도전?… 내가 뭐랬기에?…》

《방대광과의 사업이 이번에는 주요과제라네. 헌데 방대광은 항일유격대와 직접 맞섰던 인물이거든. 남방전선에 나가서는 련대장이 돼가지고 〈쟝글노부시〉라는 별명까지 들으며 〈천황〉의 감사패까지 받지 않았나. 자네도 이걸 말하자는게 아니였나. 방대광은 김구와는 질도 다르고 바탕도 다른 인물이란 말이지. 나도 그러한 주장에는 더 해볼 소리가 없구만.》

《그래 그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려는가?… 내 생각에도 미국놈들이 이미 전쟁을 결심했고 리승만이 쌍북을 두드려대는것만은 사실인것 같네. 그까짓 정말 전쟁이라도 콱 터졌으면 씨원하겠소. 집은 타도 빈대가 죽으니 좋다고 저 리승만일당들을 불속에 다 처넣는다면야 우리 산야도 깨끗해질게 아닌가.》

《그래서는 안되지. 재더미를 만들어놓고 빈대나 없앤다면 어쩐단 말인가.》

《그런데 이보게, 지난해 려수항쟁때 김정원이 하던 소리가 생각나는구만. 무너지는 제방뚝을 흙 한짐으로 막아낼수 있느냐고 했지… 그렇다니까. 하늘이 주저앉는데 외나무기둥으로 버티여낼수 있겠는가.》

송호정은 속이 끓어올라 그러는지 차 한잔을 다 들이마셨다. 그 소리에 정시명은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생각에 잠겨들었다.

송호정의 경고에도 일리가 있었다. 정말 우리 힘으로 주저앉는 하늘을 버티여낼수 있으며 터지는 제방뚝을 막아낼수 있겠는가.

그러나 정시명은 길게 생각지 않고 분연히 자기의 주장을 폈다.

《그렇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수밖에 없어. 실농군이라면 무너지는 제방뚝을 보면서 피해서지 않을걸세. 차라리 흙 한짐 지고 제방과 함께 물속에 뛰여드는 길을 택할걸세. 그래서 난 결심하였네.》

정시명의 마지막말은 그 어떤 비장한 선언처럼 엄숙하게 방안의 무거운 공기를 흔들었다. 꺼져들듯싶던 눈가에 다시금 세찬 불빛이 번쩍거리기 시작하였다.

송호정은 그 추연한 모습에서 이 사람이 또다시 비상한 용단을 내렸으며 그 누구도 그걸 제지시키거나 수정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자기 지휘관의 단호한 의지가 뜨겁게 공감되고 그 가능성여부를 저울질하기에 앞서 겨레의 운명을 두고 제 한몸을 불태워가는 불굴의 투사의 애국의 넋에 깊이 머리가 수그러졌다. 송호정은 불시에 정시명의 앞으로 와서 그의 손목을 다시 움켜잡았다.

《내 더 할말이 없네. 그래, 우리 함께 흙 한짐씩 지고 물속에 뛰여들어보세. 난 이미 흙짐 하나 마련해놨으니 제발 날 상관치는 말아주게.

그런데 이보게. 정형, 난 지금 자네가 무슨 결심을 하고있는지 짐작이 가네. 김장군님 생각을 하겠지?》

《?!…》

정시명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빛이 대번에 이글거리였다. 요 며칠새 마음속에 감쳐들던 그 생각을 송호정이 넌떡 들어올린것이다. 여러 낮과 밤을 이어가며 방황과 고민과 불안속에 부대껴온 그의 심장은 평양을 그리며 뛰고있었다.

송호정이 저으기 격조가 높아지며 인차 말을 이었다.

《더 지체말고 장군님을 찾아가게. 그분께서야 무슨 방략이 있을게 아닌가.》

정시명은 다시금 크게 놀랐다. 바로 그것이다. 자기의 생각과 너무도 일치되는 그의 권고에는 환희비슷한 감정이 얼찐거리는것같다.

참말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조성된 정세를 타개할 방략을 이미 세우셨을것이다. 방대광이나 리범석의 문제도 결국 장군님의 결단이 내려져야 할 문제이다. 그분만이 삼천리조국땅우에 몰려드는 전쟁의 검은 구름을 짓부실수 있는 지략과 담력을 지니고계실것이다.… 요즈음 더욱 가슴에 사무쳐드는 이러한 생각은 캄캄칠야에 길잃은 나그네가, 북극성을 찾는것과도 같은 절박하고도 운명적인 심장의 지향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다름아닌 친구가 그 속내를 앞질러 꺼내놓고는 선뜻 지지를 표시한것이다.

정시명은 그것이 고맙기도 하고 마음이 든든해지기도 하였다. 그는 송호정이 순애의 석방문제를 감당하여나선데다가 평양길에 대한 지지까지 주자 한결 개운한 심정으로 송호정과 헤여졌다.

 

그러나 정시명은 《흥국상회》성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김명호는 현 단계에서 매우 지당한 선택이라고 지지하면서도 그가 38°선을 넘는다는데 대해서는 껑충 뛰였다. 현상금까지 걸어놓고 오성도의 부하들이 쌍심지를 켜고 찾고있는데 그건 말도 되지 않는다는것이였다. 차라리 자기가 제기된 문제를 안고 평양을 다녀오겠다고 주장하였다. 길철이도 김명호의 주장을 지지해나섰다. 어느 누구도 정시명이 군대와 경찰력량이 밀집되여있는 38°선을 넘는데 대하여서는 찬동하지 않았다.

이 어려운 시기에 그런 모험을 절대로 찬성할수 없다는데로 립장이 합쳐지자 정시명은 주춤거리는수밖에 없었다. 안지생이까지 나서서 최근 오성도의 합동수사본부의 움직임에 대하여 렬거하면서 이런 형편에서 모험을 한다는것은 애국위업앞에 무책임한 범죄로 된다고 단단히 걸쇠를 채워놓았다.

결국 《흥국상회》는 금후투쟁문제와 관련한 합의를 보지 못하고 각자가 더 연구한 다음 빠른 시일안으로 가부를 다시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송호정이 운전사를 통하여 보내온 보고는 정시명을 아연실색케 하였다.

이날 새벽 순애가 륙군참모부놈들의 손에 넘어가 비밀고문장에서 숨졌다는것이다. 그리고 김아성이 애인을 탈환하기 위하여 무작정 만탄창이 된 두정의 총을 들고 참모부에 뛰여들었다고 한다. 그는 장억수놈과 순애를 고문하는데 참가한 또 한놈의 교형리를 찾아 현장에서 사살하고 체포되였다는것이다. 인차 군법회의 즉결심판에 송치된다고 하였다. 심판결과가 어떠하리라는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였다.

련이어 전해진 처절한 급보에 정시명은 가슴을 물어뜯는듯 한 통분을 금할수 없었다.

소식을 들은 《흥국상회》의 전우들과 아직도 결혼상의 마른 음식들을 정하게 건사하고 순애를 기다리고있던 녀인들은 서로서로 부둥켜안고 애통하게 소리내여 울었다.

세해 가까이 《흥국상회》의 각별한 사랑과 관심속에 끌어온 젊은이들의 사랑이 이렇게 하루새에 비극으로 막을 내린것은 모두에게 현실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베차고 리성으로 삭여내기에는 너무나 힘든 아픔이였다. 이젠 김아성이라도 구원해야 되겠는데 현장에서 살인범으로 잡혔으니 그마저 구원할 길이 막연하였다. 놈들이 분명 그도 순애와 련결시키고 갖은 악행을 다하고있을것이다.

정시명은 김아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간을 끌어 행동할 기회를 얻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내무부의 수사과장 김창기를 움직이도록 하였다. 놈들이 손을 쓰기 전에 김아성의 소속이 경무대 경찰서이고 형식적으로는 내무부의 소속이므로 범죄수사를 요구하고 그의 인도를 정식 제기할수 있다고 타산하였던것이다.

송호정이 달려오고 김창기가 불리워왔다. 그러나 새까만 경찰복에 시누런 금줄을 두른 김창기는 정시명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청취하자 번열증이라도 난듯 목단추를 신경질적으로 풀어놓으며 한숨만 내쉬였다. 송호정도 철색의 두볼을 풀떡거리며 눈길을 자꾸 피했다.

《김창기동무, 그래 끝난 사건이라는거요?》

그들의 침묵에 부아가 나서 정시명이 저도 모르게 어성이 커졌다. 더구나 크게 기대하였던 김창기마저 덤덤해있는것을 보자 속이 좋지 않았다.

《호정, 어깨에 주먹같은 별을 올려놓았는데 그건 뒀다 언제 써먹자는거요?》

송호정에게 하는 소리지만 실은 김창기에게 해보는 소리였다.

다시한번 좌중을 몰아때리는 정시명의 터갈라진 질책에 고개를 들었던 송호정은 정시명의 애원어린 눈길을 보는 순간 《음―》 하고 저도 어쩔새없는 신음소리를 내질렀다.

정시명은 그들의 침묵에 숨이 가빠졌다. 속이 그냥 기름심지 타듯 빠질빠질 졸아들었다. 웬간한 일이면 넌떡 받아안던 이들이 낯빛이 컴컴해서 입을 다물고있는 리유가 짚이우기는 했으나 그 리유가 정시명의 자제력을 폭발시키고야 말았다.

순애가 빨찌산 정보원이였다, 아성이 그의 애인이고 공범자였다, 현장에서 살인범으로 체포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니 지금 형편에서 손쓸 여지가 없게 되였다, 헌데 《흥국상회》앞에서 서뿔리 대답할수 있느냐… 이런것이다.

정시명도 당장은 김아성의 생명이 경각에 이르렀다는 절박감에 속이 암담해질뿐 상대의 머리를 틔워줄 묘안이 없었다. 그저 속만 부글부글 끓어오를뿐이였다. 그래서 더구나 눈앞이 캄캄해졌다.

《호정! 제발 비네. 무슨 수가 없겠나. 엉?》

정시명은 속수무책인 자기자신에 대한 경멸과 죄의식으로 하여 박달같이 단단하게 생긴 철빛의 얼굴이 더욱 컴컴해진 송호정의 돌덩이같은 주먹을 덥석 움켜잡으며 처량하게 부르짖었다. 슬픔과 고뇌와 분노가 응축되였던 응어리가 한꺼번에 탁 터쳐진것이다. 송호정이야말로 정시명이 이 서울장안에서 자기의 설음을 마음껏 터쳐놓아도 무랍이 없는 벗이였다. 그러나 이 자리는 자신을 깡그리 터쳐보여서는 안되는 자리다. 정시명은 그걸 인식하면서도 자기를 걷잡을수가 없었다.

송호정은 자기를 믿어의심치 않고 한가슴에 가득 서린 통분을 한꺼번에 왈칵 토해놓는 귀중한 동지의 그 신의와 기대에 보답할수 없는 자신이 통탄스러워 입술을 푸들거리였다. 다만 《정형!》하며 불덩이같은 정시명의 주먹을 자기의 가슴우로 끌어올릴뿐이였다.

《호정, 내 어리석은 놈일세. 덕이 모자라고 수가 밭은 자격없는 지휘관일세. 수하에 처녀 셋 두었다가 다 불행하게 만들어버렸으니 내 무슨 회장이란 말인가? 내가 미리미리 대책을 세웠더라면 순애의 죽음도 막을수 있고 아성이 또한 저꼴이 되지 않았을걸세. 후―

순애를 벌써 팔뚝부러지게 내곁에 끌어다놓아야 되는건데 설마설마하다가 벼락을 맞게 했소. 저 아성이도 원체 저렇게 쉽사리 확 타번지는 성민줄 알면서도 말 한마디로 주의를 주어 내놓았지. 아하― 내가 참 불민하기 짝이 없는 놈일세. 수백수천이 이 못난 놈 믿어 귀한 명을 맡겨왔는데…》

정시명은 요며칠새 가슴 한끝에서 지절지절 끓어오르다가 압축되여버린 회한과 비분을 한꺼번에 쏟아놓으며 자기를 사정없이 타매하였다.

오랜 세월 상종해오면서도 여태껏 접하지 못했던 자기 벗의 이 처절한 모습앞에서 송호정은 가슴이 그냥 울꺽거리고 상처에 재친듯 쓰리기만 하였다. 갈기갈기 찢긴, 오열에 떨고있는 저 의로운 인간의 고통을 가셔줄수는 없을가.

송호정은 잠시후에 닭알침을 꿀꺽 삼키고 위로하였다.

《정형, 진정하게, 진정하라구. 어쩌겠나. 미국놈과 판가리하는 싸움인데 어떻게 희생이 없겠나. 그게 어찌 회장의 탓이란 말인가. 엉?!》

모처럼 꺼내놓은 송호정의 위로는 오히려 타끓어번지는 비분에 키질이였다. 정시명은 마치도 걸고들 싸움의 상대라도 찾은듯 《뭐라구?》하고 왈칵 성을 돋쳐 부르짖었다.

《그래 마땅한 희생이란 말인가?…

어찌 그럴수 있는가, 호정! 그들이 뭐가 부족해서, 그들이 뭘 못난짓해서 비명에 죽어야 한다는건가. 그네들은 하나같이 천금만금짜리들이야. 군대에 내보내면 어렵지 않게 왕별을 얹을 사람들이고 대학에 보내면 박사재목들이야. 희생이 어떻다구 엉?…》

《정형!》

《호정!》

정시명은 그만 송호정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무쇠같이 굳센 어깨에 이마를 쿡 박았다.

그때 김창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금줄두른 모자채양으로 엄숙하게 손을 들어올렸다. 천하를 눈아래로 굽어보는 호방한 인격과 천지풍파에도 끄떡없을것 같던 정시명이 그 도고한 위엄을 다 헐어버리고 전우들에 대한 애끓는 정에 사무쳐 몸부림치며 속에 재가 차서 부탁을 하는것을 목격하자 저도 모르게 퉁퉁한 두볼우로 뜨거운것이 줄지어 흐르고 더는 속을 꿍져가지고 바질거리며 앉아있을수 없었던것이다.

《회장선생님, 제가 맡겠습니다. 저에게 임무를 주십시오.》

김창기는 모자채양에서 손을 내리우지 않은채 결연한 어조로 저력있게 부르짖었다.

정시명도 송호정도 그에게 눈길을 모았다. 그 눈빛들에 희망찬것이 번쩍거리였다.

《무슨 수가 있소?》

송호정이 그에게 매달리는듯이 서둘러 물었다.

《아니, 아직은 없습니다. 수를 찾아내겠습니다. 아성동무를 구출하겠습니다. 꼭 해내겠습니다.》

김창기는 상대방이 마치도 시비라도 걸어올가싶어 다급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하였다. 평소에 어리무던해보이던 얼굴에 그 어떤 비장하고도 결연한 빛이 서려있었다.

정시명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머리우로 쳐든 김창기의 손을 으스러지게 틀어잡으며 고마움에 젖어 나직이 말했다.

《고맙소. 정말 고맙소. 그렇게 해주시오.》

 

다음날 정시명은 뒤수습을 김명호에게 위임하고 평양길에 오를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이 문제를 지도부모임에 다시 상정시키면서 이렇게 목이 갈린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동지들, 다른 문제라면 몰라도 나의 신변안전때문이라면 더는 나의 북행길을 막지 말아주시오. 피흘린 동지들앞에서 그 리유란 너무도 보잘것 없고 시비가 되지 않는단 말이요. 순애의 죽음앞에서 신변안전이라는 따위의 말이 너무도 유치하고 죄스럽소.

나를 그들앞에서 비겁한 인간으로 밀어놓지 말아주시오. 그들이 우리 곁을 떠나면서 보여준 숭고한 모습앞에서 난 다시금 맹세를 다졌습니다. 나도 그들처럼 살며 싸울것이며 그들처럼 죽음도 초연히 맞을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젠 한시도 지체할수 없습니다. 정세는 우리가 탁상공론이나 하면서 어정거리는것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북행길이 늦어질수록 그만큼 우리들은 쓰러진 전우들과 겨레앞에서 죄를 짓는것으로 될겁니다. 자, 결정을 지읍시다.》

목소리는 낮으나 웨치듯이 열정과 강기를 담아 내뱉는 그의 주장에 전우들은 묵묵히 손을 올렸다.

정시명의 그 비장한 주장과 함께 다른 절박한 리유가 전우들의 심장을 움직이게 하였다.

정시명은 요 며칠새에 련이어 부닥치는 재변과 번민에 시달려 10년은 더 늙어버린듯 꺼칠해지고 윤택이 꺼져버렸다. 북행길만이 그에게 원기를 되찾아주리라는것을 김명호도 길철이도 똑똑히 깨달았던것이다.

순애를 잃은 뒤 여러날째 목이 쉬고 입술이 터갈라져 좀체로 말이 없고 때식도 잊고있는 자기 지휘관의 모습에 가슴이 더구나 쓰려있던 김명호는 례영이와 법무부판사 권재수까지 데리고 개성까지 동행하였다.

정시명은 권재수의 명함장까지 동원시키려는 그의 사업조직이 야단스러운것 같았다. 제지시킬가 하다가 전우들의 마음을 너무 흐려놓을것 같아 잠자코 그들과 함께 움직이였다.

그러나 권재수를 달고온것은 다행이였다. 봄철까지만 해도 밀수군들과 왕래자들이 활개치며 드나들던 개성시와 38°선에 송악산싸움이 있은 뒤로 2중3중으로 삼엄한 경비진이 전개되여있었다.

그들은 개성시안에서 법무부판사명함을 걸고 여러날 묵으면서 안전한 밀로를 탐색하였다.

김명호는 개성에 있는 동지들의 도움으로 북으로 가는 믿을만 한 밀수군을 데리고왔다. 그들은 권재수만 시안에 남겨두고 밀수군을 따라 락엽이 지기 시작한 산발을 넘었다. 김명호는 돌아서라는 정시명의 말은 들을념도 않고 송악산중턱에 있는 38°선 패말뚝까지 함께 걸었다.

《저것 보세요.》

문득 례영이가 나직이 부르짖었다.

례영의 눈길을 따르던 두 사람은 분계선 패말뚝에 걸려있는 양철판에 눈길이 갔다. 거기에 토색뼁끼로 써놓은 글이 눈부리가 아프게 마주쳐온다.

《여기는 38°선입니다. 북진합시다.》

정시명도 김명호도 그것을 입속으로 읽었다. 그들은 양철판앞에서 발을 묶이운듯 인차 걸음을 옮길수 없었다. 모두들 순식간에 전신의 피가 얼어들고 숨이 가빠지는것을 느꼈다.

정시명은 저 짤막한 글에 곧 미국의 대조선정책의 본질과 목표가 다 집약되여있는것 같았다. 남조선통치권의 정치향방이 저 짤막한 글에 극명하게 함축되여있는것 같았다.

하지만 너무도 후안무치한짓이다. 어떻게 감히 북녘땅을 코앞에 두고 저런 위험천만한 물건짝을 함부로 뻐젓이 걸어놓을수 있단 말인가. 저앞을 오갈 때 사병들이 뭘 생각하겠는가.

리승만의 전쟁광증이 도를 넘은것 같다.

정시명은 저 양철판이 한편으로는 전쟁의 포성이 가까와왔다는것을 소리없이 광고하는듯싶었다. 그리고 현 단계의 투쟁과제를 전쟁도발을 억제하는것으로 설정한 《흥국상회》의 결심이 천만번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잠시후에야 정시명은 굳어져버린 전우들에게 말했다.

《자, 헤여집시다.》

김명호가 생각에서 헤여나와 그에게로 돌아섰다.

《아버님, 평양에서 좀 쉬고오세요. 다문 며칠이라도 꼭 그렇게 하세요.》

례영이 두눈에 촉촉히 물기가 고여 부탁하였다.

김명호도 곁들어나섰다.

《옳습니다. 꼭 그렇게 하십시오. 례영에게 약속하십시오. 그간 저희들이 남겨놓은 일들을 잘 처리하겠습니다. 방대광과의 사업을 담당할 인물도 찾아내고 리범석과의 사업도 밀고나가겠습니다. 마음을 비워놓고 좀 쉬고오십시오.》

《고맙소. 례영아, 내 약속한다. …자, 이젠 떠나시오. 부회장이 먼저 돌아서는걸 보구야 떠나겠소. 아성일 부탁하오.》

《회장동지, 어서 떠나십시오. 아성에게 어떻게 하든지 련락선을 이어놓겠습니다.》

《문제는 시간을 끌어 아성에게 기회를 주는거요.》

정시명이 숱한 일감을 부회장의 어깨에 지워놓고 훌쩍 떠나는것이 여간 미안하지 않아 바재이자 김명호는 속이 후끈후끈 달아올라 갈린 어조로 대답하였다.

《너무 여기 일을 걱정마십시오.》

《그럼… 자, 이제는… 너무 왔소.》

《아니 좀 더 갑시다. …저기 산코숭이까지…》

김명호는 정작 헤여지자고 하니 쉬이 돌아설수 없는듯 그냥 휘적휘적 따라선다. 지난 몇해사이에 김명호에게서 정시명은 혈육이상으로 가까와진 동지였다. 정시명을 떠나서 《흥국상회》를 생각해본적이 없는 그였다. 그래 그런지 이제 헤여진다한들 며칠, 기껏해야 한달이겠는데 가슴이 알알해오고 눈부리가 찌릇찌릇해지는것을 어찌할수 없다.

《원 참 사람두…》

정시명도 눈언저리가 벌깃해진 김명호의 손을 뜨겁게 잡으며 코멘소리를 냈다.

《장군님을 뵈오면 저희들의 마음까지 합쳐 인사를 올려주십시오.》

《그러리다! 그러리다!》

정시명은 그를 와락 끌어안으며 격정에 넘쳐 속삭이였다.

《우리 다 함께 장군님 뵈올 날이 멀지 않았소. 이번 일이나 잘 치르고 우리모두 평양을 찾아갑시다. 다 함께 장군님을 찾아뵈옵시다.》

《회장동지!》

《부회장!》

그들은 잠시토록 한몸으로 엉켜있었다.

종시 동시에 돌아서서 각각 북으로, 남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례영이만은 몇발자국 옮기지 못하고 되돌아서서 정시명이 숲속에 묻힐 때까지 눈물에 젖은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9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