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번개가 친 뒤
3

 

이 시각 륙군본부 타자실에서는 전혀 예상밖의 사건이 벌어지고있었다.

여느때처럼 순애에게 긴급문건을 맡기고 제 방에 가있던 장억수가 눈에 열이 돋쳐 타자실에 나타났던것이다.

문건교열이 끝나자 순애의 손목을 그악스레 잡더니 치근거리기 시작하였다. 맑은 정신으로 순애를 대상하여 추행을 저지를수는 없었던지 씩씩거리는 코숨에서는 술내가 지독하게 풍겼다. 이제까지 볼수 없었던짓이였다. 놈은 자기의 더러운 야욕을 로골적으로 드러냈다.

《넌 내앞에서 두해째 꼬리를 치면서 날 골려왔다. 사나이 장억수가 너따위 비린내나는 계집때문에 넝마꼴이 됐단 말이다. 난 너의 짝패에게 깨끗한 몸뚱이를 고스란히 안겨줄수는 없어. 난 그 사내에게 이 장억수라는 사나이한테서 만신창이 된 창녀를 넘겨줄테다.》

순애는 너무도 무방비한 상태에서 장억수의 돌발적인 공격을 받자 몸이 와뜰 굳어졌다. 그는 사내의 험악해진 얼굴이 위험계선까지 왔을 때에야 소스라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둔한 몸을 왈칵 밀치고 오연히 부르짖었다.

《이건 뭐예요? 점잖치 못하게…》

《배신에 대한 복수다. 그래 이 장억수가 네년을 개평해볼 권리가 없단 말이냐. 아무렴 이태동안 품들이고 애간장 태워온 이 장억수가 한점 이지러지지 않은 첫물딸기같은걸 초례청에 고이 섬겨줄줄 알았더냐. 난 이날이때까지 네 몸둥이에 손 한번 대본적이 없어. 그러니 오늘은 그동안의 계산을 다 치르고야말테다.》

장억수는 타자실문을 안으로 잠그고 창가림마저 다 내려놓았다.

순애는 벽시계를 쳐다보았다. 례영이가 지금쯤 숙소가까이에 있는 다방앞에 차를 가지고와서 기다리고있을것이다. 그차를 타고 아성의 집에 가서 《흥국상회》에서 마련해준 첫날옷을 두르고 초례청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쩐단 말이냐.

방음장치까지 되여있는 문을 닫아걸고 두툼한 빛가림천까지 내려놓으니 타자실은 숨쉬기조차 가쁜 마굴이 되고말았다.

장억수는 열기가 뻗쳐 군복상의를 벗어 방구석에 집어던지고 그에게로 덤벼들었다.

《대위님, 왜 이래요? 미치지 않았어요.》

순애는 너무 급해 발을 구르며 새된 소리를 내질렀다.

《미쳤다. 옳아. 난 미쳤어. 미친 놈을 당해봐라.》

장억수는 다시 그의 손을 잡더니 와락 끌어안으려 했다.

순간 순애는 주먹으로 그의 상판을 후려치며 소리쳤다.

《누가 없어요? 사람살려요.-》

그러자 장억수는 징그럽게 웃으며 비양거렸다.

《아무리 소리쳐도 밖에 새여나가지 못해.》

놈은 순애의 저고리를 홱 나꿔챘다. 그바람에 저고리고름이 떨어지고 팔소매가 찢어졌다. 놈은 속내의까지 잡아챘다. 술로 밸까지 적시고 맹수처럼 날뛰는 미친 놈앞에서 처녀는 너무도 연하였다.

순애는 드러난 어깨를 한손으로 가리우고 악에 바쳐 소리쳤다.

《안돼, 안돼. 네놈이 세상에 더없이 더러운 놈이라는걸 내 모르는줄 알아. 죽기 전에는 네놈을 받지 않을테다. 네놈의 노리개로는 죽어도 안돼!》

순애는 가슴팍을 마구 움켜쥐려고 허우적거리는 놈을 안깐힘을 다해 뿌리치고 창문가로 달려갔다. 그 방은 2층에 있었다. 창문유리를 까고 아래로 뛰여내릴 심산이였다. 그러나 창문턱에 거의 이르러서 장억수의 손에 다시 잡혔다. 피를 본 짐승처럼 포악해진 놈은 필사적으로 반항하고있는 처녀의 치마폭을 탈아쥐고 잡아챘다. 순간 치마말기가 떨어지면서 치마단에 돌돌 말아 건사했던 미농지가 툴렁 떨어졌다. 그것은 이날 순애가 마지막으로 타자한 문건의 2번지였다.

그 문건에는 남도의 빨찌산들에 대한 륙군참모부와 내무부의 합동평정작전안이 적혀져있었다.

숲이 우거지기 전에 남조선전역에서 활동하고있는 빨찌산들에 대한 평정작전을 완료할데 대한 백악관과 펜타곤의 요구밑에 노불과 미군사고문단이 직접 기안하고 완성한것이였다.

놈들은 빨찌산소탕전에 서울이남에 자리잡은 륙군 2개 사단과 경찰 5만명을 동원하여 엄동설한에 대포위소탕전을 벌리도록 하였다.

기어이 더러운 수욕을 채우려고 덤벼치던 장억수는 그의 괴춤에서 떨어진 미농지를 보자 얼른 풀어보았다. 시뻘개있던 상판이 단박에 종이장처럼 하얗게 질리였다. 놈은 여러차례 륙군정보국 방첩과에 호출되여 특급기밀들이 새여나가고있다는 문초를 당한바가 있었다. 그때마다 타자실은 절대로 믿어도 된다고, 그건 헛소리라고 탕탕 장담하고 뻗치여왔다.

장억수는 이제야 비로소 륙군정보국 방첩과의 심문이 헛소리가 아니였다는 생각에 눈앞이 새까매졌다. 자기의 타자실에서 기밀이 흘러나갔다. 그 장본인이 누구도 아닌 2년간 《사랑》에 열중해온 상대역이다.

이런 난사라구야. 순애가 과연 빨찌산의 정보원인가? 세상에 이런 일도 있는가. 등잔밑이 어둡다더니 내 밑에 처녀첩보가 있다니… 그에게 특급기밀들에 접근시킨것은 타자실책임자인 자신이였다. 지난 이태동안 수많은 중요비밀들이 자기 손을 거쳐 순애에게 넘어갔다. 순애를 통하여 그것이 상대방에 전해졌을것이다.

이런 직감에 장억수는 그만 정신이 마비되고 모든것이 얼어들고말았다. 순애의 몸을 기어이 겁탈해보려던 육욕도 아직까지도 남아있던 처녀에 대한 미련도 깡그리 얼어붙었다. 국방장관 비서실에 옮겨앉아 장성들과 아침저녁으로 교제하며 때일찍 큰 별을 따내리라던 달콤한 꿈도 얼어붙고말았다. 이 시각 그의 눈앞에 얼른거린것은 무시무시한 군법회의의 심판대였다.

순애도 미농지가 괴춤에서 떨어지고 그것을 집어든 장억수의 얼빠진 몰골을 접하는 순간 정신이 아뜩해졌다. 돌이킬수 없는 실책이였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사지가 게나른해오고 숨쉬기가 가빠졌다.

차츰 장억수의 피발이 선 눈이 사납게 번뜩이기 시작하였다. 놈은 눈살이 꼿꼿해져서 마치도 처녀를 당장에 태워버리기라도 할듯 노려보다가 천천히 권총을 뽑아들었다. 불이 이는듯 적의가 돋친 눈알을 뱅글뱅글 돌리며 잠시 무서운 생각에 휘말려 신음소리를 크게 냈다.

(음- 어쩐다?… 깨진 사발이고 쒀놓은 죽이다. 이 일이 소리나면 죽을 놈은 이 장억수다. 차라리 죽여버릴가… 과실로 그랬다고 하면 용서를 받지 않을가. 아니, 결코 용서받지 못할것이다. 차라리 내 손으로 잡아가자. 그동안 의심이 가서 감시하다가 덫을 놓아 잡아왔노라고 하면 그래도 죄가 덜어지고 빠져나갈수 있을것이 아닌가.

이년의 배후를 들어내면 오히려 상을 받을수 있다. 내 손으로 죽이면 여하튼 나도 살인자가 되고 징역살이 면할길이 없지. 에라, 내 손으로 오라를 지워 끌고가자. 다음일은 운명에 맡기자.)

눈알을 뱅글뱅글 돌리며 이렇게 결심을 세운 장억수는 찢어진 옷가지들을 모아서 책상서랍에 쓸어넣고는 옷걸이에 걸려있는 다른 타자수들의 근무용 옷을 던져주었다.

《어서 옷을 입어. 네년이 그 하얀 가슴에 새빨간 심장을 숨겨두고있는줄을 몰랐구나.》

순애는 그놈이 명령하는대로 움직이는수밖에 없었다. 벌어진 사태가 명확해지자 어쩐지 후두둑거리기만 하던 가슴이 오히려 진정되였다.

(더는 빠져나갈수 없다. 이렇게 된바에는 당당하자. 장억수, 내 네놈의 발부리에 엎디여 빌줄 아느냐.)

모든것을 각오한 순애는 아래입술을 피가 나게 깨물었다. 그는 가누기 힘들어지는 몸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흐트러진 머리칼도 손가락으로 다듬고 옷매무시도 단정히 하였다.

《가자!》

장억수는 총부리로 복도를 가리키며 방문을 열었다.

이 순간 순애의 눈앞에 아성의 다정한 모습이 사무쳐들었다. 아성은 그의 생명의 은인이였다. 미독 의지하여온 벗이였다. 함께 정시명을 따라 통일애국의 길에서 서로서로 부축여주며 고락을 함께 나누어온 동지였다. 지금 그가 기다리고있을것이다. 결혼식장에서 그도 정시명선생님도 여러 다정한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고있을것이다. 례영언니도 다방에서 속을 태우고있을것이다.

(아, 어쩌나. 아성동무!… 난 먼저 가요. …)

걸음을 옮기는 처녀의 두볼로 분노와 절망이, 그리움과 슬픔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치지 못한 죄스러움이 눈물이 되여 쏟아져내렸다.

순애는 걸어갔다. 고개를 높이 쳐들고…

이렇게 처녀는 갔다. 꽃나이 꽃시절에…

 

11시에 결혼식장에 들어서야 할 자동차는 오후 1시가 되여서야 왔다.

신부를 눈이 까매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자동차에서 길철이와 례영이만 덜렁 내리자 누구라없이 가슴들이 철렁하였다.

길철이가 정시명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귀속말로 뭐라고 소곤거리였다.

례영이 녀인들의 묻는듯 한 눈길을 받고는 합숙에 세번 찾아갔는데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고 울상이 되여 말했다.

비상사고였다.

정시명은 얼굴이 금시 흙빛이 되여 조성된 사태를 짐작해보았다. 분명 그 장억수놈의 조간인것 같았다. 정시명은 순애가 장억수로 하여금 스스로 물러나게 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어쩐지 불안하고 께름직한 생각이 들었다. 그 너절한 녀석이 김아성과 순애의 결합에 심술이 나서 마지막으로 못된짓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성동무, 아무래도 신랑이 나서야겠소.》

《알았습니다.》

혼례식장에 나서기 위하여 재빛무명바지에 보라빛 모시적삼에 양단조끼를 받쳐입고 신부를 기다리고있던 김아성이 기다린듯 가슴을 쭉 펴고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리고는 급한 생각에 떠밀려 멍석우에 깃을 맞추어 일매지게 펴놓은 돗자리우에 입고있던 혼례식옷들을 훌훌 벗어던지고 례영이 눈썰미있게 가져다주는 양복을 재빨리 갈아입었다. 너무 급하게 서두르는통에 웃옷의 단추들이 제구멍에 박히지 못하였다.

례영이 다가가 제대로 채워주며 각근하게 타일렀다.

《아성동무, 조심해요. 뭐 별일이야 있겠어요. 오늘은 아무쪼록 좋은 날이니 장억수와 부닥쳐도 티각태각하지 말고 순애만 곱게 데려와요.》

《예, 예, 누님, 걱정마세요.》

김아성이 그 어떤 예감에 가슴이 서늘해있으면서도 평소에 자주 묻어다니던 례영이 다심하게 일깨워주자 벙긋거리며 대꾸하였다. 그러나 눈길은 초점을 잃은채 하늘로 쳐들려 허둥거린다.

그가 떠나자 기쁨과 행복이 무르녹던 집은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지나간듯 썰렁해졌다. 누구 하나 말이 없이 하던 일만 수걱수걱하였다.

한시간 남짓해서 김아성이 돌아왔다. 녀인들도 대문 여닫는 소리가 나자 김아성이 안고온 이야기를 들으려고 일제히 부엌에서 몰려나왔다.

대문안에 들어서는 김아성의 축 늘어진 어깨와 몸의 중심을 잃고 비칠거리는 걸음새가 그가 가져온 소식이 좋지 않으리라는 짐작이 가게 했다. 그는 마주쳐오는 눈길들을 피하다가 정시명이 서있는 멍석우에 와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순애동문…》

김아성은 이렇게 말머리를 떼고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그가 전한 소식은 너무도 비통하고 충격적이였다. 순애의 합숙방을 장억수와 륙군참모부의 놈들이 들이닥쳐 벌컥 뒤집어놓았다는것이였다. 순애의 타자실에서 근무하여온 다른 타자수들도 외출금지령을 받고 참모부에 한명한명 불리워가서 순애와 관련한 심문을 받고있다고 한다. 같은 방의 동무들이 순애 일이 걱정스러워 타자실에 가보니 타자실도 온통 뒤죽박죽이고 장억수의 방에는 순애의 치마저고리가 찢어져서 책상서랍에 꾸겨박혀있었다고 하였다.

《아마 순애가 마지막으로 극비문건을 가지고 오려 하다가 걸려든것 같습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장억수가 중요문건을 타자해달라고 부탁하였다고 어제 저녁에 와서 말하고 갔습니다.》

김아성은 어깨를 실그러뜨리고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아래입술을 꽉 물더니 하늘을 향해 두눈을 초점없이 데룩거린다.

정시명은 김아성의 추리가 옳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김아성의 말까지 듣자 대사집은 삽시에 란가가 되고말았다.

민순임은 너무 억이 막혀 옷고름으로 눈굽을 찍어내며 부엌으로 들어가고 례영인 얼굴을 싸쥐고 몸을 휘친거리였다.

다 차려놓은 결혼상앞에 앉아 파리를 쫓고있던 길봉례는 밖에서 떠드는 소리에 귀를 강구고있다가 벌써 퉁퉁한 두볼을 눈물로 적시고있었다.

윤미향은 부들거리는 김아성의 손을 꼭 감싸잡고는 몸을 떨고있었다.

토방에 나서서 닥쳐든 불행을 제나름으로 판단하고있던 길철은 맑게 들린 가을하늘을 쳐다보며 피를 토하는듯 한 긴숨을 내긋는다.

정시명은 불의의 비보에 어쩔바를 몰라하는 녀인들과 전우들을 둘러보다가 엄하게 지시를 내렸다.

《이렇게 합시다. 결혼상은 일단 거두기로 합시다. 마른 음식은 다시 쓸수 있도록 건사해놓는게 좋을것 같습니다. 여기 식장도 거두되 그대로 건사해놓읍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녀인들중에서 이러루한 경난을 제일 많이 치르어본 윤미향이 눈물을 거두고 나직이 대답하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윤미향이 뭐라고 했는지 집안에서 녀인들의 울음소리가 높아졌다.

《례영이는…》

례영이 얼른 뛰여왔다.

《안지생동무에게 제기된 정황을 아는만큼 보고해라. 그리고 오후 여섯시에 송호정을 아서원에서 만날수 있도록 조직사업을 해달라고 전해라.》

《알았어요.》

《길철부회장동문 김창기동무에게 련락하여 사건에 내무부가 관여했는지 알아보라고 해야겠소. 내 생각에는 륙군참모부안에서 벌어진 일이니 아직은 그놈들의 손에 있을것 같소.》

《알았습니다.》

《아성동문 당분간 피해있어야겠소. 장억수놈이 동무의 근무지를 톺아가지고 경무대에 손을 뻗칠수 있소. 그러니 적당히 핑게대고 숨어있다가 열흘후에 날 찾아오오. 자, 다들 움직입시다.》

길철이와 례영이 먼저 자리를 뜨고 마지막으로 김아성이 입을 꾹 다문채 두눈에 불심지를 달고 비틀거리며 대문을 나섰다.

그 정상이 측은하기도 하고 또 그 무슨 일을 당장 치를것 같은 험악한 느낌도 들었다.

정시명은 그의 팔을 꽉 붙잡고 자동차 있는 곳까지 따라나갔다.

《아성이, 덤비지 말라구.》

김아성은 깊이 허리를 꺾어 인사를 하다가 몸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엎어질듯 비칠거렸다. 불시에 정시명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더니 참아오던 눈물을 좌르르 쏟아놓았다.

정시명이 그의 실팍한 허리를 쓸어주며 다심하게 위로하였다.

《아성이, 너무 걱정말게. 세상을 열백번 뒤져서라도 순애를 찾아내겠네. 송호정사령관에게 이 일을 맡기려고 하니 마음을 놓으라구. 그리구 자넨 절대로 무모한짓은 말구… 응, 약속하지?》

김아성은 목이 꽉 잠겨든듯 대답을 바로하지 못하고 추연한 눈으로 정시명을 쳐다보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정시명의 허리를 놓아주었다. 그리고는 다시한번 꾸벅 절을 하고는 자동차에 올랐다.

정시명은 그가 탄 차가 금호동의 언덕길에 뽀얀 먼지를 일구며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도 그 자리에서 움직일줄 몰랐다. 다치면 통곡이라도 터칠것 같은 김아성이 두눈에 불을 달고 하직인사도 변변히 하지 못하고 떠나는게 불안스러웠다. 지휘관으로서의 위치가 있어 엄하게 자신을 다잡고 사태수습을 위한 긴급조치를 일단 취해놓고 전우들을 다 떠나보내고나니 자신도 어쩐지 탕개가 툭 끊어져나가고 눈앞에서 별찌같은것이 아물아물거리며 날아다녔다. 사태의 결말이 불길할것만 같아 속이 급해나고 후둑후둑 떨렸다. 이런 경우를 예상하고 미리 강하게 대책을 세우지 않은 자책이 가슴을 미여지게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번져지리라고는 생각 못했어도 무슨 일이 터질수 있다는 정도로 걱정이 되였던것만은 사실이다. 당사자들에게 있을수 있는 불의의 정황을 깨우쳐주고 그에 대처할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하였더라면 일이 이 지경에까지 번져지지 않았을것이다. 그저 이따금 자료를 들고오는 아성에게 한마디씩 주의를 주는것으로 그쳤으니 일이 이렇게 크게 벌어지고말았다. 순애가 애초에 장억수와의 결별을 너무 경솔하고 서투르게 해버렸다. 그놈의 분노를 폭발시키고 계교를 꾸며낼 언질과 기회를 준것은 큰 랑패다.

아, 순애의 신상에 무슨 변이 생기면 어쩐단 말인가. 수하에 처녀 셋을 두었는데 순애까지 이렇게 되였으니 그들모두가 사랑의 비극을 겪는 수난자로 되였다. 례영이, 혜숙이 그리고… 부지중 정시명의 밸굽 한끝으로부터 창자가 터질듯 한 거세고 피에 젖은 신음이 치밀어올랐다. 순애까지 야수같은 놈들에게 떼우고 그들의 사랑마저 날려버린다면 내 무슨 그네들의 지휘관이고 동지란 말인가.

그들모두는 개체가 똑똑하고 하늘같이 높고 푸른 꿈을 안고 살아가는 끌날같은 이 나라의 젊은이들이다. 그들이라고 마음껏 배우고 즐기고 행복을 구가할 권리가 없어 생사기약이 없는 통일성전에 뛰여든것인가. 겨레의 아픔을 피해설수가 없어 이 나라의 아들딸된 자각과 량심이 이끄는 길에 서슴없이 가장 보람차고 행복한 시절을 바쳐온게 아닌가.

그런데 누구라없이 사랑의 수난자가 되고말았다.

(어떻게 하든지 순애의 향방을 알아내고 구원해야 한다.)

정시명은 뼈를 바스는듯 한 아픔을 덜길 없어 이렇게 그냥 속깊이 부르짖었다. 한초가 새롭게 느껴졌다. 송호정을 당장 만나자고 했을걸 오후 6시에 만나자고 한것이 후회막심하였다.

(이놈들! 제발 우리 순애의 고운 얼굴은 상하게 하지 말아라. 그 앤 꽃방석에 앉아야 할 신부다.)

정시명은 이 시각에도 놈들의 폭행에 시달리고있을 순애를 그려보며 속에 재가 차서 저도 모르게 입속으로 절절하게 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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