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번개가 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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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이였다.

이날 정시명은 금호동의 유축진 곳에 있는 아바이네 집으로 옮겨갔다. 여기서 점심참에 김아성과 순애의 결혼식을 올리기로 하였다.

원래 안지생은 김명호의 참가밑에 아서원에서 크게 차리자고 주장하였다. 안지생이 아서원을 결혼식장으로 짚은 리유가 있었다. 아서원은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다. 녀주인이란 중국경영자들이 손님을 끌기 위하여 내세운 간판일따름이고 경영실권은 그들이 장악하고있었다. 그런 관계로 여기에는 사찰기관의 촉수가 아직은 뻗치지 못하고있었다.

안지생이 자기 주장을 굽힌것은 김아성의 고집때문이였다. 신랑신부가 정선생님의 주례사를 받아야만 결혼식을 하겠다고 떼를 썼다. 그래서 《흥국상회》의 중요비밀거점인 여기 금호동거점으로 장소를 옮긴것이다. 거점주인으로 있던 아바이는 손녀를 데리고 한달전에 아들집으로 떠나갔다.

《흥국상회》에서는 주변이 비교적 조용하면서도 교통이 편리하고 불의의 정황이 생기면 뒤산 수림에 올려붙기 쉬운 이 집을 넘겨받아 김승원의 처인 윤미향을 앉히고 《흥국상회》지도부 일군들만 사용하는 주요거점으로 꾸렸다.

이 집에 들어선 정시명은 눈물이 글썽해서 맞아주는 윤미향과 다섯살 나는 그의 아들의 손을 잡아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부엌에서는 윤미향이 주동이 되여 민순임과 길봉례, 례영이가 잔치음식을 만드느라고 분주탕을 피우고있었다. 아래웃방 할것없이 기름내가 떠돌고 웃음소리가 높다.

정시명도 쾌히 대사준비에 소매를 걷고 나섰다.

정시명이 맡은 일감이란 밤알에 실을 꿰여 밑둥자른 무우를 중심에 세우고 탑을 만드는것이다.

김승원의 아들이 영특하게 생긴 눈을 반짝거리며 정시명의 곁에서 뱅뱅 돌며 뭐라고 쉴새없이 종알거린다. 아버지의 시원스러운 이마와 어머니의 작고 선이 또렷한 입새를 닮아 여간 귀엽지 않은 애였다. 그도 오늘 잔치에서 제 몫이 있다.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랑신부가 멍석우로 지나갈 때 신부앞에서 꽃보라를 뿌리게 된다.

정시명은 이따금 통통 여무진 밤알을 까서 그의 입에 넣어주었다. 그때마다 애는 어른스럽게 도리질을 하다가도 정시명이 기어이 입에 밀어넣으면 해쭉 웃으며 맛스럽게 꽁꽁 씹어삼킨다.

정시명은 윤기가 자르르 도는 밤알들을 애가 섬겨주는대로 실에 꿰면서 결혼식을 마친 뒤 부회장들과의 협의회에 제기할 문제들을 다시 정리하여보았다. 마가을의 서울바닥을 마구 뒤흔들던 그날의 벼락같은 소식이 《흥국상회》의 대문을 두드린 때로부터 여러날이 지나갔다.

그동안 《흥국상회》는 새로 조성된 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금후대책안을 완성하기 위하여 모두가 하나처럼 부지런히 뛰였다.

전쟁소리가 아직까지는 말그대로 하늘의 벼락이였다. 그 벼락이 어디서 시작되였는지, 그 진폭이 얼마나 큰지, 장차 또 어떤 구름을 몰아올는지, 그것은 아직도 안개속에 묻혀있다. 다만 여러가지 정보들을 계속 모아들여 그것들의 호상관계와 모순점들을 분석하고 견해를 일치시키기 위한 사업이 진행되였다.

여전히 전쟁문제와 관련한 자료의 가치에 있어서는 순애가 보내오는것들이 첫자리였다. 순애는 자기가 보고한 전쟁관계자료들에 대하여 정시명이 전례없이 크게 관심하고있다는것을 아성에게서 듣고는 일에서 무조건 손을 떼라는 그의 엄명을 받고도 물러설수가 없었다.

그는 때늦게나마 자신의 위치가 얼마나 중요하며 따라서 초소에서 리탈하게 된 자기의 경솔한 행동이 《흥국상회》에 얼마나 죄되는 일인가를 뼈저리게 뉘우치고있었다. 그런 자책감으로 해서 그는 결혼하는 그날까지라도 자기의 초소를 지키는것으로 량심의 죄책을 덜어보려고 애를 썼다.

장억수도 눈을 지릅뜨고 지내면서도 사직서가 비준될 때까지는 그냥 합숙에서 나갈수 없고 일을 해야 한다고 을러멨다.

장억수와 그냥 마주서는것이 순애에게는 버거운 신경전이였지만 일을 하자는 소리는 천만다행스러운것이였다.

애인의 갸륵하고도 절절한 심정을 대견하게 받아안은 김아성도 매번 정시명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기는 했으나 순애의 말없는 공모자가 되여 결혼당일까지 버티여오고있었다.

길철도 김명호도 필요한 자료들을 속속 보고하여왔다. 길철은 리범석을 대신하여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신성모가 일본에 넘어가서 전쟁물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공작을 벌렸다는것을 당자의 입에서 듣고왔다. 그런가 하면 김명호는 《국회》투쟁에 참가했던 성원들중 아직 감옥에 끌려가지 않은 인물들을 재수습하면서 리범석과의 공작을 추진시켜왔다.

리범석이 전쟁은 지평선 끝에까지 와있다 했다고 보고하여왔다.

정시명은 그에게 조태준과 문진국을 떠넘겨주고 리범석과의 사업을 전진시켜 리승만과의 대결을 권력대결이 아니라 리념대결로 전진시켜보라고 하였다.

《흥국상회》에서 전쟁소리가 흉흉해갈수록 정시명은 방대광을 한번 만나고싶은 생각이 더 커졌다. 그래도 남조선군부의 작전계통에서 제노라고 하고 실지 군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있는 그를 만나보면 전쟁과 관련한 보다 확고한 결론을 내릴수 있을것 같았다. 지금까지 문건상으로 보고받은 정보를 자기의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하고싶었다.

그리고 중요한것은 《북벌》무용론을 폈다는 그 인간에게 마음이 부쩍 동하는것이였다. 새로운 단계의 투쟁이 전쟁도발을 반대하는것으로 되리라는것은 현재까지 모아들인 정세자료만 종합하여보아도 움직일수 없는 확신이였다. 그러므로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을 하나라도 더 전취하고 결집하는것이 급선무다. 상대가 군복을 걸치고있을수록 더욱 좋다.

이 문제를 놓고 김명호에게 넌지시 비쳐보았더니 그는 말떼기 바쁘게 손을 흔들었다.

《기대를 걸어볼 일고의 가치도 없는 놈입니다. 방대광이 어떤 놈입니까.》

의사표명이 굼뜨고 무거운 김명호가 말 떨어지기 바쁘게 자기 립장을 밝혀놓자 정시명은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방대광이 어떤자인지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김명호가 혀를 찰만 한 반공호전분자인것만은 사실이다.

정시명은 입만 다시고 그 자리에서는 더 화제에 올리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불쑥 방대광생각이 떠올랐던것이다.

가을해빛이 창문에 비쳐들무렵에 새까만 양복에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받쳐 정장을 한 길철이 사진기를 한손에 들고 나타났다.

정시명은 원체 길철의 기분을 고려하여 이번 결혼식에는 그가 관계하지 말도록 하였다. 그런데 당자가 아성이한테서 결혼식을 치른다는 말을 얻어듣고는 자기와 혜숙에게 차례졌던 집을 내놓고 자기가 둘러리를 서겠다고 안지생에게 고집을 써서 결국 참가하게 되였다.

길철은 가을철에 접어들면서 훌쭉 패웠던 볼에 살이 오르고 꺼져든 눈확에서 다시 예전과 같은 정기가 흐르기 시작하였다. 일도 전보다 더 세괃게 해내고 말수더구도 썩 늘어났다. 웃음소리도 커졌다.

정시명은 전우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하여 속에는 눈물 한동이를 채워가지고도 흔연히 웃는 길철이가 무척 고마왔지만 한편으로는 그게 오히려 가슴이 미여지게 측은한 생각을 자아내군 하였다. 저 다감한 인간이 바깥에 나와서는 저렇게 소탈하게 처신하다가도 잠자리에 들면 가슴을 쥐여뜯고 눈물을 쏟으리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던것이다.

김발이 뽀얗게 서린 부엌에서 길철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 우리 녀성팀이 또 솜씨를 보이는걸. 뭐 힘꼴 받아줄 일은 없는가요?》

쾌활한듯싶은 저 목소리도 무심치 않다. 남의 경사에 흥겨워하고 저도 한몫 성의를 바치려는 저 깨끗한 인간의 스스럼없는 가짐새는 그의 흉중을 허비는 쓰라린 상처를 말해준다.

《어서 들어와요. 부회장선생님.》

민순임이 반색을 하는데 윤미향이 례영이가 들고있는 절구공이를 앗아내여 길철에게 척 내밀었다.

《아유, 마침 오셨군요. 선생님을 기다리던 참이예요. 이 절구통을 아예 맡아줘요. 이제 팥고물도 찧고 찰떡도 치고…》

《그럽시다. 한데 둘러리도 절름발이 신랑쯤은 된다고 하는데 이런 일은 어울리지 않는걸.》

《그럼 례영이는 어떻구요.》

신부의 둘러리는 례영이가 맡기로 하였다.

정시명은 오늘 결혼식은 축객은 많이 모여오지 못해도 신랑의 고향인 압록강변과 신부의 고향인 남도의 풍속대로 차릴것을 다 차리자고 하였다. 례영이네와 혜숙이네에게 해주지 못한 성의를 그들의 결혼식에는 량껏 고여주고싶었던것이다. 신부에겐 칠보단장도 시켜라, 둘러리도 제식대로 세우자, 꽃보라도 뿌려라, 사진도 찍도록 하자고 상차림을 주관하게 된 민순임에게도 자별하게 잔소리를 하였다.

《흥국상회》의 재정사업에 참여한 최남수에게도 이번 결혼식을 좀 본때있게 차리자고 하였다. 그래서 최남수는 이틀전에 아서원에 가서 뒤창고에서 제일 좋다는것으로만 꿍져가지고 왔다.

《좋습니다. 제가 다 맡지요. 자, 례영이, 여기다가 팥이면 팥, 찹쌀이면 찹쌀 다 채워넣소.》

길철이 양복 웃소매를 텁텁하게 걷어올리며 나섰다.

《아, 옷 덞어집니다. 어서 들어가보세요. 아버님이 기다리고계세요. 정 해줄것 같으면 웃방구석에 색종이가 있으니 가위로 썰어 꽃보라나 만들어주세요.》

례영은 이마에 송골송골 내돋은 땀발을 지우며 절구공이를 도로 잡고 웃방을 눈으로 가리켰다.

《그래?… 전라도 떡장수솜씰 보일락고 하능기로… 에, 안되겠군.》

길철이 비좁은 부엌에서 어정거리는게 실은 녀인들의 일손에 거치장스럽기만 할것 같아 전라도사투리로 너스레를 부리다가 부엌을 나섰다. 그는 길봉례의 옆을 지나가며 재빨리 나무랐다.

《누님, 그러지 말아요. 미향동무 생각도 해야지요.》

그 소리에 길봉례가 눈물이 뽀얘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경사롭게 대사를 치르는데다가 동생의 얼굴까지 마주하고보니 또다시 권혜숙이 그리워지고 동생이 홀몸이 되여 겪는 불행이 애달파 저도 모르게 눈물이 솟아났던것인데 길철이 어느새 눈치채고 핀잔을 준것이다.

그런데 그 소리를 귀빠르게 들은 윤미향의 눈에 맑은것이 그렁해진다. 어데 내세워도 곯은 구석없는 끌날같은 남편을 비명에 잃고 어느 한시도 그 선한 모습을 지우지 못하는 녀인이였다. 밖에서는 길봉례가 자꾸만 치미는 설음을 짓씹어 삼키느라고 휭휭 휘둘러대는 도끼질소리가 야단스럽다.

웃방에서는 정시명이 여전히 쉴새없이 종알거리는 아이의 말동무가 되여 실에 다 꿴 밤알을 엎어놓은 무우에 뱅뱅 둘러감고있었다. 길철이 들어서자 아이부터 발딱 일어서서 《아저씨…》하며 목에 감긴다.

《어이구, 우리 꼬마도 잔치상 고이는 일에 성수가 났구나.》

길철은 애를 번쩍 들어올려 그의 빨갛게 익은 량볼에 쪽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어주었다.

《선생님은 뭘하십니까?》

《어서 오시오. 좀 멋있게 해야겠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아. 옳지, 사진기를 구해왔구만.》

정시명은 길철이 메고온 사진기를 보고 반가와하였다.

《하, 멋있습니다. 제가 좀 해봅시다.》

길철이 아이를 내려놓고는 양복을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와이샤쯔소매를 걷어올리였다.

《아, 다 됐소. 자, 이건 아래방에 가져가거라. 우린 장작이나 패줍시다. 들어올 때 보니 장작더미가 꽤 커보였는데… 벌써 다 떨어진 모양이군.》

정시명은 밤탑을 아이에게 들려 아래방에 내려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철이도 따라나섰다. 길봉례가 나무토막에 깊숙이 틀어박힌 도끼날을 뽑느라고 기운을 쓰다가 그들이 다가서자 게면쩍은듯 쭈빗이 웃었다.

《아주머니, 인주시오. 원 이런 일이야 남정들의 몫이지요.》

정시명은 길봉례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없습니다. 어서 일을 보십시오. 이젠 혼자 사는데 습관되여 이런 일이 손에 익습니다.》

길봉례가 고집을 쓰다가 길철이까지 나서는 바람에 도끼를 그에게 넘겨주고 장작을 한아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길철이가 도끼질을 하고 정시명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나무를 우물정자로 반듯하게 가리였다. 아무 일에서나 손기가 날래고 일손이 야무진 길철은 도끼질도 맵짜게 했다. 도끼날이 한번 머리우에서 번쩍거릴 때마다 어김없이 나무가 두쪽으로 갈라져 옆으로 날아났다.

그들은 잠간사이에 무둑히 쌓여있던 통나무를 다 빠개놓았다. 그러고나서 마당을 댑싸리비자루로 반반히 쓸고 그우에 멍석을 깔았다. 신랑신부가 밟고 지나갈 중간자에는 여러개의 돗자리를 이어놓았다.

손을 씻고 마당에 펴놓은 멍석우에 퍼더버리고 앉은 두사람은 땀을 식히며 담배를 피웠다.

《길철부회장은 새로운 투쟁과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오?》

정시명은 길게 담배연기를 뿜어버리고 곰방대를 툭툭 털며 물었다. 대사를 치르기 전에 맑은 정신으로 얘기를 나누는것도 좋을듯싶어 화제를 꺼내놓은것이였다.

최근에 안지생이 《흥국상회》의 내부규률을 강화하면서 자연히 지도부성원들과 모여앉을 기회가 드물어지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줄어들었다. 오성도족속들이 눈에 피발이 서서 추적소동을 벌리고있는 때이므로 할수 없는 일이였다. 그럴수록 모처럼 마주앉는 기회를 요긴하게 리용하려고 애쓰는 정시명이였다.

길철도 담배불을 비벼끄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자기의 견해를 담담하게 내놓기 시작하였다.

《미국놈들이 군대철수를 발표한 후 확실히 정세는 완화되고있는것이 아니라 악화되고있습니다. 정세를 안정시키려 하지 않겠는가 기대했는데 그게 오산이였습니다. 겉으로 보면 미군철거도 돼가고 38°선도 조용해지고 서울정치권도 안정이 도모되여가는것처럼 보이고있지만 미국과 리승만일파가 그 연막뒤에서 확실히 더 엄청난 흉계를 다그치고있습니다.

난 며칠전에 림진강다리공사형편을 현지확인하기 위하여 우리 동무를 파견하였댔는데 벌써 다 세워놓았더라고 합니다. 우스운것은 표식패말에 다섯t이상의 중량물은 통과금지라고 써놓았는데 다리를 살펴보니 미군의 주력땅크인 <엠-60>땅크도 얼마든지 통과할수 있더라고 합니다. 전쟁을 위한 준비가 분명하지요.

전쟁은 이제는 미국놈들의 머리속에서만 있는것이 아니라 지도와 참호에서 구체적인 행동에로 이행되고있습니다. 미국놈들이 래년 회계년도 군사예산을 올해의 2배에 달하는 500억딸라로 책정하였다고 합니다. 그 초과예산이 우리 나라에 폭탄이 되여 던져질것이라는것이 명백해졌습니다.

이러한 정세변화는 우리가 들어야 할 구호도 명백하게 시사하고있다고 봅니다.》

《기탄없이 내놓소.》

《전쟁도발을 막아내고 조국통일을 다그칠수 있는 평화적환경을 마련하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옳소, 바로 그거요.》

정시명은 길철의 정황판단과 결론이 자기와 일치되여 쭉 뽑아져나오는것이 내심으로 무척 흡족하여 무릎을 쳤다.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길은 하나요.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을 최대로 강화하여 전쟁지지세력을 제압하는것이요. 그렇다면 이런 환경에서 우리 <흥국상회>의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그건 미국놈들과 리승만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지고있는 우익권의 인물들이요. 그래야 미국놈들의 전쟁흉계를 정면에서 혹은 배후에서 직접, 간접으로 강타를 들이댈수 있소.

그래서 말이요. 난 당면해서는 군부측에서 사단장쯤 골라잡자는거요. <북벌>을 반대해나선 방대광이 말이요. 그자를 돌려세우면 사단장을 하는 그의 친지들도 전쟁반대 혹은 중립서렬에 세울수 있소. 그렇게 되면 륙군무력의 절반이 38°선에 턱 버티고앉아 림진강을 넘어서는 땅크들을 돌려세울수 있지 않겠소.》

정시명이 자기의 이야기에 스스로 가슴이 들뛰여올라 웅대한 구상을 거창하게 펼쳐보이자 길철이 놀란 어조로 반문하였다.

《방대광일 말입니까?》

《그렇소. 그쯤되면 그 파장이 어떻게 될것 같소. 미국놈들의 전쟁바람이 잦아들지 않을가? 미국놈들이 그 3개 사단이 버티고있는 38°선을 함부로 넘어서지 못할게 아닌가.

이쯤해놓고 리범석의 손을 한번 당겨보잔 말이요. 지금까지 그 사람을 리승만의 손아귀에서 빼내느라고 명호부회장쪽에서 속을 태우고있는데 군부가 그쯤되면 리범석이 스스로 화평통일의 기류에 몸을 실을거요. 군부와 행정권이 움씰거리면 미국놈들인들 용빼는수가 있겠소.》

《대단합니다. 용빼는수가 없지요. 그건 정말 대단한 구상입니다.》

길철은 우선 정시명의 제안이 담고있는 신통한 방략과 비상한 담력이 신기할 정도로 희한해서 환성을 올렸다. 그는 자기따위는 꿈에도 내놓을수 없는 희한한 방책이라고 속으로 혀를 찼다. 참으로 그것은 거창한 일이다. 3개 사단이면 능히 38°선을 깔고앉을만 하다.

감동의 순간이 흘러가자 길철은 실무가다운 랭철한 리성으로 정시명이 펼쳐놓은 방략을 점검하여보았다.

《그런데… 가능성이 있을가요?》

《필요하면 가능성이란 만들어내야지.》

정시명은 예상했던 물음이라는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방대광… 뻐근한데요. 리범석이라면 그래도 엄두를 내볼만 하지만…》

길철이 몇번 고개를 기웃거리더니 입을 다물었다. 석연치 못한 표정이다. 그는 불빛이 쏟아질듯 광채가 이글거리는 정시명의 눈을 쳐다보았다. 정시명의 대담한 웅지에는 혀를 차면서도 너무도 상상밖이여서 아직은 어리벙벙해지는 모양이다. 한다면 하고야마는 정시명의 기질에 습관되여온 길철이지만 방대광을 돌려세운다는 말에는 선뜻 공감이 가지 않았던것이다.

정시명은 길철의 회의적인 립장표시에 접하자 마음이 무거워져서 다시 곰방대에 천천히 담배를 다져넣기 시작하였다. 김명호에 이어 길철의 반대에 부닥치고보니 속이 허전해졌다. 정말 내가 너무 허망한 생각을 하는게 아닌가.

두사람은 제가끔 담배불을 붙이고 제기된 문제를 심중히 더듬어가며 거기에 자기의 주장을 세우고 그 주장에 말없이 론거를 받쳐나갔다.

《회장동지, 회장동지가 할수 있다면 되는거지요.》

잠시후 길철이 먼저 무겁게 드리운 침묵을 조심스럽게 깨뜨렸다. 지휘관이 내놓은 문제를 즉석에서 일축하고보니 미안쩍기 그지없었던것이다. 그러나 길철은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제 하고싶은 소리는 꾸미지 않고 하고야마는 성미이며 눈치를 보면서 에돌거나 말롱간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빠른 말씨로 자기의 생각을 꺼내놓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방대광은 반공에 미친 놈이지요. <북벌>반대는 그의 반공리념과는 별개의 행동이라고 보아집니다. 게다가 만주에서 경찰서장노릇 할 때 유격대<토벌>에도 끌려다니던 혁명의 원쑤입니다. 물론 한번 얼이 빠지게 두드려맞고는 남방전선으로 줄행랑을 쳤지만…》

정시명이 다소 뜨아한 눈길로 흥분한 상대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무슨 말을 하자는걸가. 방대광의 과거살이는 이미 세상에 공개되여있다. 왜 새삼스레 그걸 입에 올리는가.

길철의 이야기가 다시 이어졌다.

《그자는 숱한 항일전사들의 원한의 표적으로 되여온 놈이지요. 광복전에도 그렇고 광복후에도 그놈과 결산할게 너무도 많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용납이 될수 있을가요? 전 공작의 가능성이 론의되기 전에 이런 원칙적인 문제들에 고려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에게도 방대광같은 악질친일분자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건… 우리의 근본에 관한 문제가 아닐가요?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말씀드리는것을 용서하여주십시오.》

정시명은 길철이가 례절바르게 사리정연한 설명을 마치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길철이가 무엇때문에 방대광의 어지러운 행적을 다시 들춰내는지 리해되였다. 길철이가 문제의 중요한 본질을 빠개놓았다. 그것은 정시명의 골수에도 가장 아프게 박혀들던 걱정거리다. 돌파하기 어려운 난문제라고 생각하였기에 이제껏 생각을 굴리면서도 전우들앞에 구태여 파헤쳐놓지 않았던것이다.

돌이켜보면 며칠전에 류동명이도 방대광을 입에 올렸을 때 이 문제를 걸고 명백한 반대의사를 꺼내놓은것 같다. 그리고 길철이 자기의 반대의사를 더 전개하지 않고 중도에서 끊어버리는 리유도 대뜸 짐작이 갔다. 길철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두명의 형과 매부마저 반일항전에서 왜놈들에게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러니 지금 그 왜놈들과 한무리에서 애국에 도전하여온 친일분자를 용납할수 있겠는가.

정시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음… 왜놈들!)

왜놈들에 대한 철천의 한은 정시명의 가슴에도 서려있어 세월이 흘러가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는 방대광과의 사업을 생각하였을 때 처음으로 발목을 잡던 문제점이기도 하였다.

정시명의 할아버지도 남도의 의병대에서 싸우다가 왜놈들에게 학살되였다. 두 삼촌도 독립군에서 싸우다가 쓰러졌다. 아버지도 평산의병대를 거느리고 싸우다가 온몸에 부상자리를 가득 만들어가지고 들것에 들려 집에 들어섰고 어머니마저 왜놈들의 모함으로 절명하였다. 열번 죽은들 구천에 사무친 원한을 어이 잊으랴.

(그러니 나라는 인간은 벌써 근본을 잊었다는건가?…)

정시명은 멍석우에서 무겁게 일어나 곰방대를 입귀에 물고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올리며 천천히 마당을 거닐었다.

방대광문제는 결국 뚜껑도 떼보기 전에 흐지부지되고말았다. 가능성은 그뿐아니라도 여러 측면에서 배제되고있다. 그래도 필요성이야 남아있지 않는가.

우리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필요로 된다는것, 이 나라에 들이닥친 막중한 재변을 막기 위하여서는 한번 배짱있게 뛰여들어 판을 벌려봐야 한다는 그 절박성만은 오히려 커지고있는것이다.

그런데 주변의 강한 반대에는 무시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되는 랭철한 론거가 있다. 필요성과 가능성, 상극처럼 부딪친 이 모순을 누가 풀수 있겠는가.

정시명은 커다란 동요와 실망을 느끼며 앞뒤로 막막해지는 심정을 누를길 없어 곰방대를 주머니에 걷어넣고 연송 담배를 갈아댔다.

《딸랑, 딸랑》

대문에서 딸랑방울이 몇번 규칙적으로 딸랑거리여 정시명은 착잡한 생각에서 헤여났다.

윤미향이 얼른 뛰여가서 대문에 질러놓은 빗장을 뽑았다. 대문간에는 금줄을 두른 경찰제복대신 곤청색양복을 미끈하게 차려입은 김아성이 벙글거리며 나타났다.

《아유, 어서 들어와요. 우리 신랑님이 오셨어요.》

윤미향이 얼굴에 기쁨을 함뿍 피워올리고 그를 반겨맞아들이면서 부엌에 대고 누구에게라없이 큰소리로 알렸다.

정시명과 길철이도 그에게로 다가갔다. 부엌에서도 일손을 멈추고 우르르 토방에 나와 신랑을 맞았다.

《아유, 이렇게 차려입으니 아성아저씬 정말 서울장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1등미남이군요.》

윤미향이 어깨가 쩍 벌어지고 온몸에 억센 젊음이 서린 김아성의 사내다운 용모가 탐나는듯 그를 대문턱에 세워놓은채 웃음을 남실거리며 크게 떠들었다.

《그런 말 말아요. 신랑쟁이 쪽 삐여져났기로 신부한테는 조금 기울어져요. 팔도강산 다 뒤져야 그런 배필감 어데서 업어오겠다구.》

《애개개… 신랑이 벌써 대문턱을 넘어섰네. 저걸 어쩌나. 새신랑이 혼례날에 콩벼락을 맞지 않으면 첫 아기는 영낙없이 살짝 곰보라는데.》

《얘, 신동아, 콩 한줌 얼른 가져오너라. 저 서방님 이마에 뿌려줘라. 얼른》

《호호호…》

《호호, 신랑이 벌써 입이 째지는걸 보지.》

녀인들은 신랑을 대문가에 세워놓고 그냥 찧고 까불며 야단법석이다. 대사집의 흥떠진 분위기를 돋구는 녀인들의 유괘한 덕담에 정시명도 길철이도 씨물씨물거릴뿐이다.

당자인 김아성은 녀성들의 우스개소리에 절반 혼이 나가 한발은 아직도 대문가에 박은채 정말 콩벼락이라도 맞고싶은듯 멍청해 서있다.

그 모양새가 우스워서 또 녀인들이 뭐라고 한마디씩 씨까스르며 놀려대는데 윤미향의 아들이 콩 한줌 가지고 와서 아성의 얼굴에 곧바로 던진다. 아성이가 뜻하지 않은 콩벼락에 와뜰 놀라 이마살을 찌프리자 마당안에는 또 한바탕 폭소가 터졌다.

《잘한다, 잘해. 손끝에 기름발리워 키운 고운 딸 품 한자루 들이지 않고 얌치없이 나꾸챈 서방님버릇이 뚝 떨어지게 또 한줌 면상에 던져라.》

《우리 순애 첫애기 곰보는 면하게 됐으니 새각시 절은 신동이가 제일 먼저 받게 됐구나.》

아이가 정말 콩 가지러 달음박질하는데 윤미향이 향수병을 들고와서 신랑의 뒤통수와 옷자락에 뿌려준다.

아성이 송그스러워 굵은 팔을 휘휘 젖자 마당에 또 한차례 폭소가 쏟아진다.

례영이가 수박색뜨개옷에 통이 좁은 골덴바지를 입고 한손에는 새까만 무테안경까지 들고나왔다. 자동차운전대를 잡을 때면 흔히 차리고 나서는 옷차림새였다. 그렇게 차리고 나서면 누구도 한다하는 세도집 규수로 여기기가 십상이다. 이제 례영이는 순애의 숙소에 가서 그를 맞아오게 된다.

순애는 참모부에 정식으로 결혼한다는것을 통고하고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게 아직까지 비준이 되지 않아 출근하고있다. 그래 순애는 토요일부터 3일간이라도 먼저 대휴를 달라고 제기하였다. 그러나 장억수가 그냥 야료를 부리며 승인하지 않았다. 그놈은 오늘 일요일에까지 긴급문건이 제기된다고 불러냈다. 그리고는 아침에 일찍 나와 문건처리를 해주면 열시전에 놓아주겠다고 약속하였다고 한다.

《어서 들어오세요.》

례영이 대문간에서 아성과 마주치자 아직도 어리숙해 서있는 그에게 방그레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제야 김아성은 머쓱해서 대문턱을 넘어오고 례영이는 길철이와 함께 흥겹게 대문을 나섰다.

《자, 이젠 신랑에게 떡메를 지워라.》

《애개개, 떡메에 기운을 다 빼면 오늘 밤에 새색시건사는 어떻게 하겠다구.》

《걱정두, 색시건사하는 기운은 딴데 있으니 떡메를 지워라.》

《호호…》

청높은 녀인들의 맑은 웃음소리에 정시명의 웅글은 웃음소리까지 합쳐져 마당안은 온통 행복에 묻혀 들썩들썩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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