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번개가 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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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의 긴급호출을 받고 워싱톤에 갔다가 도꾜를 거쳐온 서울주재 미국대사 무쵸는 자기 관저에 들어서자바람으로 1등서기관 노불부터 찾았다.

줄간 밤색양복에 흰점이 박힌 넥타이를 목에 꼼꼼히 조여맨 노불이 향수냄새를 풍기며 무쵸의 방에 들어선것은 호출한 때로부터 한시간 지난 후였다.

무쵸는 둥툭한 코줌방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쓸고있다가 노불이 우정 시간을 늦잡아 나타난데 대하여서는 너그럽게 봐주면서 건성 악수를 청하였다. 금발머리에 듬성듬성한 흰오리가 내불린 노불의 머리칼이 새삼스럽게 눈에 띄였다. 너도 이 나라에 와서 고역살이에 진이 빠졌구나 하고 련민에 가까운 생각이 저절로 났다.

그가 쏘파에 앉자 의례적인 인사치레처럼 슬쩍 물었다.

《뭐 그동안 다른게 제기된것은 없습니까?》

자리를 뜬 사이에 네 주머니에 들어온 정보를 꺼내놓으라는 소리였다. 인생을 남의 눈치를 렴탐하는데 바쳐온 노불은 무쵸의 뒤말을 건너짚었다. 그러나 어깨를 한번 으쓱거려보이고는 《뭐, 특별한것은 없습니다.》 하고 어물쩍하게 대답을 굼때버렸다.

그 소리에 이번에 무쵸가 쓰거운듯 어깨를 으쓱거려보이였다.

무쵸는 화가 돋칠 때마다 항용 그러하듯 엽초를 꺼내 코날개를 벌룸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눈길은 노불의 머리우를 지나갔다. 항상 상대를 무시할 때마다 무쵸가 의도적으로 쳐드는 눈본새다. 매사에 나도 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앙정보국의 현직대표라는것을 암시하는듯 하는 노불의 거만하고 태연자약한 태도에 혐오를 느끼군 하는 무쵸였다. 하지밑에서는 사족을 쓰지 못했다는 노불이 주인이 바뀌고 직급이 달라지자 어깨를 솟군다는 후문이 그의 귀에도 자주 들려온다. 결국은 하지의 손아귀보다 무쵸의 손아귀가 무르다는 비난이다.

무쵸는 적당한 기회를 만들어 조선문제에서는 권위자로 자처하는 거만한 중앙정보국 대표의 기를 죽여야겠다고 벼러오고있다. 노불이 모르쇠를 하는데다가 제먼저 성을 내는건 싱거운 일이여서 무쵸는 심상한 투로 고개를 한번 끄덕이였다.

《리승만과 장개석의 회담정형은 다 걷어쥐였습니까?》

《예, 대사각하의 집무탁우에 가있을것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자료란 모여앉아 쌍방이 정세를 통보했다는 정도입니다.》

노불이 여전히 딴전을 부리며 비위를 거슬리자 무쵸는 불쾌한 빛을 일부러 보이며 말을 이었다.

《도꾜에서 맥아더를 만나고왔소. 리승만과 장개석의 회담정형이 서울정계에 흘러나갈수 있다고 특별히 강조하였소. 난 지금쯤은 벌써 흘러갔을것이라고 대답하였더랬소.》

《대사각하, 아직 그렇게 단정할것은 없습니다. 회담은 철저한 비밀봉쇄속에 진행되였고 회담관계자들은 우리의 검토를 받은 선발된 인물들입니다.》

노불은 자기 사업권에 속하는 문제를 함부로 맥아더앞에서 횡설수설한 무쵸의 말에 분개하여 목을 조여맨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늦추며 다소 어성을 높였다.

《좋습니다. 저녁시간에 다시 만납시다.》

무쵸는 코안경을 연신 쓸어올리다가 노불이 끝내 안주머니를 털어놓을 낌새를 보이지 않자 그를 쫒아버렸다.

이번에 무쵸는 백악관 특별안보보좌관과 맥아더로부터 각각 뜻밖의 특별지령을 받았다. 그들은 표현과 의미가 서로 조금씩 다르기는 하였으나 지금부터 서울대사관은 림전태세에 들어가며 전쟁에 대처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하였다.

무쵸로서는 뜻밖이였다. 지금까지 그는 조선반도의 분렬을 공고화하며 남조선의 정치정세를 안정시키고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의 모든 령역에서 미국의 지배권을 철저히 확립하는것을 서울대사관의 기본임무로 내세워왔다. 무쵸는 서울을 떠난 후 맥아더의 방부터 찾아갔는데 맥아더는 은장식을 한 담배물주리로 책상을 토닥거리며 직설적으로 말하였다.

《무쵸씨, 당신에게 기대되는바가 크오. 중요한건 리승만으로 하여금 북의 공산세력과 힘겨루기를 해보도록 인내성있게 막판까지 유도해가는거요. 이것이 현 단계에서 서울대사 당신에게 극동군총사령부가 부여하는 최대의 과제요.》

북의 공산세력과의 힘겨루기란 곧 전쟁이다. 그동안 전쟁소리를 부지기수로 해온 리승만에게 계속 전쟁열을 부어주며 전쟁에로 부추기라는 뜻이다.

그러나 맥아더는 그이상의 언급은 무쵸에게도 피하였다. 무쵸는 워싱톤에 도착한 사흘후에 장개석이 맥아더의 긴급호출을 받고 도꾜에 불리워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어 장개석이 남조선의 진해에 날아가 리승만과 만났다는것을 국무성 극동국장으로부터 들었다.

이미 백악관의 안방에서 구면으로 사귀여온 백악관 특별안보보좌관은 트루맨이 지금 남아메리카를 순방중이여서 대통령의 위임으로 담화를 나누게 된다고 우선 담화좌석의 위엄을 돋구어놓고는 짤막하게 강조하였다.

《대통령은 정세가 호전되지 않고있는데 대하여 크게 불만해하고있소. 미군철수를 선포하면 서울에서 반미구호도 사라지고 빨찌산도 주저앉을것이라고 보았는데 점점 확산되고있지 않소. 트루맨은 벌써 오래전부터 그쪽에서 미증유의 거사를 결심하고계시오. 2차세계대전후 팽창된 군수업체가 공황에 빠져 허우적거리고있는데 재벌들의 광기를 잠재울 때가 온것 같소. 요즈음은 겨끔내기로 록펠러, 포드, 맥도날드… 이러루한 재벌총수들이 백악관에 대고 전화로 삿대질이요. 지금부터 당신은 거사준비를 현지에서 다그쳐야 하오.》

무쵸가 거사의 륜곽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자 특별안보보좌관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둘렀다.

《나도 그정도이상은 이야기해줄게 없소.》

국무성관계자들도 그에 대해서는 누구 하나 똑똑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다. 무쵸는 국무성에 들려볼가 하다가 현지의 국무성대표의 인격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워싱톤을 떠나왔었다. 그는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도 자기가 아직도 서울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있다는것을 통절하게 느끼였다. 그래서 도착하자마자 노불을 만나 자기의 어깨너머에서 분명히 벌어지고있는 거사의 내용을 파고들려고 하였는데 노불까지 시치미를 떼자 화가 났다.

미중앙정보국은 발족한지는 몇해되지 않지만 거미줄처럼 늘여놓고있는 거대한 정보망을 거머쥐고있는 기관이다. 더구나 리승만과 깊이 유착되여있는 노불이 진해에서 벌어진 회담내용을 모를리가 만무다.

무쵸는 노불을 떠나보내자 워싱톤과 도꾜에서 받은 특별지령을 어떻게 집행하겠는가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워싱톤에서부터 골똘히 사색을 집중하여왔는데 아직도 거사의 폭과 심도가 투명치 않다. 그러나 거사가 노리는 목적은 명백하다. 리승만으로 하여금 전쟁의 불을 기어이 지르도록 외교적압력을 가하라는것이다. 리승만더러 전쟁만이 자신의 정치적운명을 건져주는 유일한 선택이라는것을 페부로 느끼게 만들어놓아 새로운 거사의 주역으로 내세우는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대사관이 어떻게 지휘봉을 흔들어야 하겠는가. 리승만의 정치적지반을 계속 흔들어놓으면 리승만이 매달릴데는 미국이고 타개책을 전쟁에서 찾게 되리라는것은 명백하다. 어렵지 않게 생각이 예까지 톺아오르자 무쵸는 코안경을 벗어들고 창밖의 수양버들 웃초리에 눈길을 보내면서 저으기 흥분되였다.

그는 리승만의 독선독주가 불만이였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적란맥을 일으키는 기본고리라고 인정하고 통치구조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안깐힘을 다 써온 지금까지의 자신의 노력에 이제부터는 대치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이제는 리승만의 통치지반을 흔들어 그 늙은 주구로 하여금 전쟁만이 정치적탈출구라는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것이 그의 생각에도 너무도 비렬한 정치투기이다. 그러나 어찌하랴. 외교관이란 제 뜻에 따라 말하거나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다.

점심식사를 서둘러 치르고난 무쵸는 곧바로 대사관에 나가 참사관과 노불을 다시 불러들였다. 노불이 언제나 리승만의 주변에서 맴돌고있다는것을 알고있는 무쵸는 그에게 백악관의 지령을 전달하는게 께름직하였다. 그러나 어차피 남조선의 우익계를 배후에서 틀어쥐고있는 모략기관의 도움을 받을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도 참가시킨것이다.

무쵸는 지령을 전달하고 그 집행을 위한 자기의 대책을 설명하였다.

그런데 노불은 우묵하게 패여든 눈확에 비웃는듯 한 실웃음을 지으며 짤막하게 대꾸하였다.

《대사각하, 필요성을 강조할건 없습니다. 씨아이에이는 이미 공작의 중심방향을 거기에 두고 움직이고있습니다.》

그 건방진 수작에 무쵸는 어지간히 놀라와하면서 한동안 그를 쏘아보았다. 그 눈길에는 네가 리승만과는 단짝이라는게 그럴수 있느냐 하는 강한 불신과 의혹이 짙게 깔려있었다. 무슨 말장난같은 소리인가, 리승만의 후견인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네놈이 리승만을 막다른 골목으로 쳐몰아가는것을 주도하다니…

노불도 안경너머로 쏘아보는 대사의 눈에서 무언의 질시를 느끼였다. 그는 쏘파의 등받이에 거만하게 허리를 붙이고 한마디 늘어지게 덧붙였다.

《대사각하, 씨아이에이는 어제도 래일도 미국의 리권을 지켜 존재할것입니다.》

그것은 가시박힌 조롱과도 같이 무쵸의 신경을 예리하게 건드려놓았다. 무쵸는 그제사 자기의 무력을 통감하여 숨을 헐떡거리였다. 외교의 격식바른 의례규범이나 분주스러운 상봉과 담화, 번지르르한 연회와 연설들은 정치의 겉면에 불과하다. 그 리면에는 얼마나 판이하고 엄청난 모략과 술수가 숨어있는것인가.

노불의 음흉한 노랑눈이 살팽이처럼 차겁게 번들거리며 자기를 지켜보자 무쵸는 은발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기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다. 무쵸의 견해에 의하면 외교관이란 인간의 속성인 독자적인 사고의식과 창발적인 활동방식을 뒤주머니에 꾸겨박고 사는 속물들이다. 외교관은 주인의 호령에 따라 뛰고 짖고 들어메치는 사냥개나 조종사의 손놀림에 따라 웃고 울고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은것이다. 자기의 기분에 따라 웃고 떠들고 노여워할 권리를 각본에 따라 그어져있는대로 입을 벌리고 목청도 돋구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자기의 두뇌의 지령이 따로있을수 없으며 자기의 결심이나 의지가 소용되지 않는다. …

무쵸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면서 외교관이라는 호화찬란한 직업간판에 가리워져있는 수치스러운 모멸감과 노예적인 렬등의식을 쓰겁게 씹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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