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가을날의 번개

5

 

다음날 저녁 자료를 가지고온 김아성과 함께 저녁상을 치른 정시명은 그를 달고 한강의 버들숲에 나왔다.

그들은 어슴푸레한 갈구랑달빛이 서린 숲속길을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김아성이 가져온 자료를 되살려보는 정시명의 가슴은 새로운 충격으로 뻐근해왔다.

아직은 전쟁이라는 재난소식이 바다물속에 숨어있는 얼음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번에 련이어 가져온 자료를 통하여 그 뿌리가 상당히 깊고 그를 뽑아버리는것이 어쩌면 어려울수 있다는 생각이 가슴을 저리게 하였다.

그는 강바람에 머리칼을 날리며 요즈음에 입수되고있는 자료들을 련관시켜보았다.

길철이와 김명호에게서 들은 이야기들도 새로운 의미에서 풀이되였다. 두사람이 다 리승만-장개석회담자료를 접하고나서 무척 흥분되여있었다. 전쟁의 검은 마차가 서서히 굴러오고있다는 엄청난 정보가 두 부회장을 긴장시키고 낯빛들을 어둡게 했던것이다.

길철은 자기가 직접 수집한 자료를 내놓았다. 순애가 수집한 자료의 신빙성을 확증해주는것이라고 머리말을 붙이였다. 확실히 무엇인가 거대한 사변이 움직이고있다고 단언하였다.

그가 가져온 자료에는 《국군》으로 개편된 국방경비대의 무력이 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크게 변화되고있으며 일본으로부터 다섯척의 군함이 빠른 시일안에 들어온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한 자료에는 최근 군공병려단이 림진강에 다리공사를 지급으로 벌려놓고있다는 자료였다.

길철은 말끝에 사리정연하고도 명확하게 결론을 내렸다.

《현재 림진강다리를 놓아야 할 절박한 리유가 없습니다. 림진강 이북에서 물동량을 많이 움직일것이 없은즉 림진강다리가 북에 대한 침공을 위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김명호는 《총리》 리범석이 《북벌》무용론을 편 방대광을 두둔해나섰다는 자료를 가지고왔다.

리승만이 사단장들을 만난 후 리범석에게 당장 방대광을 해직하라는 호령을 내렸다 한다. 리범석의 대답인즉 방대광의 사위와 장인이 각각 사단장으로 있는데 괜히 호랑이가 설친다고 바오래기를 던졌다가 화를 입는다는것이다. 그래서 리승만도 끙끙 신음소리를 내지르다가 그쯤해두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김명호도 느렁느렁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리승만이 <북벌>에 미쳐난것은 사실입니다. 조만간에 자기 주변에서도 <북벌>반대파들은 제거하려고 할것입니다.》

송호정과 류동명으로부터 방대광에 대한 인물평가를 들으면서 흥미를 잃었던 정시명은 이 인간에 대하여 다시 생각이 갔다.

송호정도 리승만의 면전에서 반기를 들고 나선 그 인간의 담력에 대하여서는 긍정하였다. 사실 전쟁의 구름이 밀려오고 이미 벼락이 치기까지 했는데 그걸 맞받아 골받이를 한다는게 웬간한 배짱과 나름으로의 주의주장이 없고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만약 방대광을 돌려세우고 그를 연줄로 그와 밭은 친척인 사단장들까지 돌려세우기만 한다면?… 륙군 사단무력의 거의 절반이 38°선에서 총대를 거꾸로 돌리수 있다. 3개 사단이라… 그쯤되면야 리승만의 광기를 조기에 문질러버릴수 있지 않겠는가.

아직은 막연한 기대와 필요성에 불과하다. 하지만 바싹 구미가 동하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방대광을 돌려세우면 리범석의 문제도 풀려나갈수 있다. 리범석이 지금 화평통일론을 과감하게 들고나서지 못하는것은 자기의 지반이 약하고 린접이 굳건하지 못한것과도 크게 관련되여있다. 그는 국무회의에 자기 의견을 조심스럽게 한번 제기하였다가 리승만과 외무부장관 장택상을 비롯한 리승만계 장관들의 집중공격을 받은 후로는 움츠러들고 말았다 한다. 그러므로 방대광을 비롯한 군부의 권위있는 세력이 린접으로 나서준다면 리범석을 돌려세우는 문제도 풀려나갈수 있을것 같았다.

리범석까지 돌려세우면 행정권에서 통일세력을 결집할수 있는 중심을 가지게 된다. 이 두 세력을 하나의 구호밑에 묶어세우면 미국놈들과 리승만일파가 제아무리 전쟁나발을 불어대도 무섭지 않다.

정시명은 새롭게 떠오른 착상이 일정하게 줄거리가 서가고 그 가지들이 안개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모습을 드러내자 저도 모르게 흥분되였다.

(한번 만나봐야겠군.)

방대광의 문제를 이 정도로 아퀴짓고나자 그다음에는 김아성과 순애의 문제가 다시 밟혀졌다. 되박이마에 날아갈듯 들린 눈꼬리며 번들거리는 눈빛이 감때사나와보이는 겉모양세와는 달리 성품이 순하고 사랑에서는 용해빠진 김아성은 간밤에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쳤다. 그리고나서 제사 잘 익은 고추알처럼 낯빛이 빨갛게 익어가지고 한다는 말이 《하 참, 고게 발전하였습니다. 제편에서 막 덤벼듭니다. 그전엔 묻는 소리에 대답도 하기 힘들어해서 맹꽁이라고 했더니 이건 완전히 괄랭입니다. 하, 고거 참!》하며 뒤머리를 벅벅 긁는것이였다.

정시명은 순애가 내 집에 들겠노라 떼질을 했다고 토설하는 김아성의 소리에 입을 벙긋하긴 했으나 그냥 웃음으로 들어둘수가 없었다.

《발전한거라구? 아닐세, 짓눌렸던 제모습을 되찾은거지. 수집음부터 앞서던 순애에게 아성동무가 활기를 주고 제모습을 찾아준거지.》

정시명은 정색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리고 어제껏 자신이 그들의 공작과 생활에 너무 무관심했다는 자책을 금할수 없었다. 순애가 이렇듯 절박한 처지에 놓이기 전에 그 무슨 대책마련을 해놓아야 할것이였다. 신상에 대한 관리를 지휘관으로서 옳게 하지 못했다는것을 말해준다. 그가 장억수의 공세앞에서 오랜 나날 자신을 지탱해온것이 얼마나 눈물겨운 고뇌속에 이루어진것이겠는가.

순애가 수집한 자료들은 언제나 그 가치나 신빙성에 있어서 앞자리에 세울만 하였다. 더두 말고 그가 수집한 자료들이 우리의 애국조직들과 빨찌산의 피와 생명을 위기로부터 얼마나 많이 건져주었는가. 그를 위하여 바쳐진 처녀의 수고를 어떻게 다 헤아릴수 있으랴.

더구나 장억수라는 인간페물과의 사업은 처녀에게 있어서 그 무엇에도 비길수 없는 신역이였을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벌려온 순애의 《사랑놀이》는 그자체가 너무도 값비싼 희생의 대가였다. 적의 소굴에서 상시적으로 들이닥칠수 있는 위험도 크지만 그에 못지 않게 한 녀성으로서의 내적인 고민과 색다른 슬픔이 있는것이다.

언젠가 정시명은 지휘부일군들속에서 순애의 공작이 《사랑놀이》로 사랑스럽게 불리워지자 화를 낸 일까지 있었다. 그때 정시명은 순애의 공작을 놓고 자신의 고충을 솔직하게 터놓았다.

…《사랑놀이》라는게 어찌보면 인륜법도에 거슬리는 소리처럼 들려 난 듣기가 거북하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던바도 아니다. 순애도 바랐던바가 아니다. 예견했던바도 아니다. 그것은 순애에게 강요된것이다. 준엄한 싸움이 그로 하여금 말려들게 하였다. 사랑이란 여하튼 숭고하고 아름다운 개념이다. 사랑이란 그지없이 순결하고 고결한 인간들의 세계이다. 사랑이라는 그 아름답고 깨끗한 개념이 그 어떤 목적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되는것은 인간세계의 아름다움을 유린하는 역겨운 행위로 될것이다. 어린 처녀를 피치 못할 초소에 내세워놓고 난 정말 그앞에서 죄스러울 때가 많다.

순애의 활동에 《사랑놀이》라는 낱말은 쓰지 말자.…

정시명이 이렇게 순애의 사업환경을 두고 평소에 불편하기만 하던 심기를 털어놓자 아무 일에서나 일가견을 세우고 사는 김명호가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론리정연하게 자기의 주장을 대치시켜 정시명을 위로하였다.

… 옳다, 사랑이란 고상한 개념이다. 그러나 사랑의 개념을 조국이라는 보다 숭고한것에로 지향시킬 때 그 류형은 달리도 될수 있지 않겠는가, 나라위해 정조까지 바쳐 마침내 왜놈장수의 목을 치게 한 평양명기 계월향의 우국지성을 어떻게 욕되게 평가할수 있으랴, 후손들은 그의 충정을 기리여 렬녀비를 세워 자랑으로, 사랑으로 전해간다.

순애의 《사랑놀이》를 두고 흑자들은 생활의 탈선이거나 비정상이라고도 비하할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통일을 위한 숭고한 애국투쟁일진대 사랑의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일수 없는 우리의 투쟁환경의 준엄성을 생각하자. 목적에 따라 방법은 얼마든지 자기의 성격을 바꿀수 있지 않겠는가.…

정시명은 김명호의 주장이 다분히 자기의 속쓰림을 어루만지는 위안조였으나 《사랑놀이》에 바쳐진 순애의 희생을 너무 값싸게 여기는듯싶어 격조를 높여 반박하였다.

…계월향은 적장에게 정을 팔고 웃음을 팔아야 하는 자기의 고뇌를 목숨으로 바꾸어버렸다. 순애의 《사랑놀이》도 고뇌와 슬픔의 비싼 대가속에 이루어지고있다.

사랑이란 《놀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개념이고 너무도 고상한 인간의 세계이다.

그러나 순애는 《사랑놀이》를 하고있다.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여있다. 그것이 임무로 되고있다. 그것이 얼마나 고된 일이라는것을 생각하자. 순애는 지금 임무수행을 위하여, 통일을 위하여 웃음을 팔고 정도 팔고있다. 사랑으로 행복하고 사랑으로 충만되여야 할 꽃시절에 우리 순애는 죽음보다도 더 어렵고 준엄한 고뇌에 시달리고있다. 그를 사랑해주자. 그지없이 아끼고 위해주자!…

그때 전우들은 다같이 격동되여 순애에게로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었다.

지금 이 시각 정시명은 순애의 고민이 더더욱 뼈에 사무쳐왔다. 지금껏 순애의 쓰라린 아픈속을 달래여온것은 조국의 통일이였다.

통일! 이 한마디가 모든것을 초월하고있었다. 통일, 그것은 순애에게서 한갖 리상이나 꿈이 아니였다. 그것은 그를 투쟁에로 떠밀어주는 힘이였고 그 어떤 진부한 마음속의 고충도 보다 숭고한것에로 숭화시켜주는 정신의 무궁한 샘이였다.

결국 《사랑놀이》는 순애가 통일조국에 바치는 눈물겨운 순정이였고 한 애젊은 처녀가 투사로 자라나는 고난의 혈로였다.

그런데 이제는 순애의 활동무대에 막이 내려졌다. 순애가 순간의 흥분을 이겨내지 못한 실책도 있지만 다시 굴려보면 벌써 벌어졌을 사태가 이제 터진것이다. 사실 어린 처녀를 승냥이의 소굴에 오래동안 앉혀놓은건 어찌보면 지나친 모험이다. 수집음 잘 타던 처녀가 막다른 궁지에 빠져 호소하고있는 그 애절한 부탁은 응당한것이다.

이제 와서 순애나 김아성을 탓할수도 없게 되였다. 이미 저질러놓은 일을 바로잡지 못할진대 빨리 수습부터 해야 할것 같다.

어떻게?… 순애의 청을 받아들이는 일부터 하는것이 첫번째 공정일것이다. 순애는 마땅히 행복할 권리를 주장할수 있는 공로자이다. 그것도 빨리 해야 한다. 이젠 《사랑놀이》도 끝장을 봤다니 그들에게 행복의 보금자리도 마련해주고 장억수의 있을수 있는 도발로부터 뽑아내야 한다. 도발이라… 십분 그럴수 있다. 그러니 될수록 빨리 순애를 그의 손아귀에서 뽑아내야 한다.

정시명은 전쟁이라는 정황앞에서 예상밖의 행동도 서슴치 않는 순애가 폭풍의 전조를 예감하고 애처롭게 떨고있는 메새처럼 애달프게 그려져 초조하고 불안하기까지 하였다. 이 외로운 메새에게 이제 맹금이 달려들기만 하면 큰일이다. 이렇게 된바에는 빨리, 더 빨리 손을 써야 한다. 순애를 대신할 인물도 빨리 물색해내야 할것이다. 정시명은 다시한번 속으로 되뇌이였다.

정시명은 스무나문 걸음뒤에서 조용히 자기를 따르고있는 아성을 불렀다.

《아성이.》

주변을 경계하며 걸어오던 김아성이 명령에 습관된 군인답게 절도있고 패기있게 대답하고나서 빠른 걸음으로 따라섰다.

정시명은 뚝뚝하게 말했다.

《순애더러 당장 사직서를 내라구 하게.》

《예?!》

《결혼식을 올리자구.》

《예?… 그까짓 결혼식은 해서 뭘 합니까. 순애도 뭐 그걸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 어느때라고… 전쟁이 당장 일어날 판에 한가스럽게…》

김아성이 대수롭지 않게 받으며 씩 웃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남남이였던 처녀총각이 하나의 가정으로 결합되는 인륜대사인데. 그런걸 어물쩍해 보내는건 부모님들 욕되게 하는짓이야. 이번주 일요일에 하자구.》

정시명은 잘라매듯이 다소 엄하게 타일렀다.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좋은 일이야 빠를수록 좋지. <아서원>에서 하자구. 성대하게 차리자구. 동무들은 우리 <흥국상회>의 보배덩이들이야. 동무들은 정말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어.》

김아성이 정시명의 칭찬에 겸연쩍은듯 뒤통수를 벅벅 긁다가 《그런데 아서원에서 하면 회장선생님은 참가하시지 못할게 아닙니까?》하고 볼부운 소리를 냈다.

안지생이 공공장소에 회장이 나타나는 문제는 엄격하게 불허하고있다는 생각을 했던것이다.

《부회장동무들이 참가하도록 하지.》

《그래도 선생님이 참가하셔야 합니다. 저희들과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약속? 언제?…》

《저희들의 결혼식때에 주례사를 해주시겠다고…》

《하하… 그랬댔지.》

정시명은 이태전에 아성이가 순애를 처음으로 데리고 박정인의 집으로 왔던 일이 더듬어져서 유괘하게 웃었다. 그때 정시명은 그들의 사랑얘기를 듣고 즐거운 약속을 해두었던것이다.

김아성도 정시명이 그때 일을 기억하고있는것이 다행스러워 벙글써해졌다.

《그래, 내가 약속했지. 그러니 약속을 지켜야 되겠는데 안동무가 승인해줄가, <아서원>… <아서원>이라… 거긴 중국료리점이니… 아니… 좋소. 동무가 안동무와 장소문제를 따로 토론해보오. 그 사람의 비준을 받아야 하니깐.》

《알았습니다.》

김아성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며 좋아하였다.

《그런데 말이요. 이제부터 순애는 일에서 손을 떼라고 하오. 장억수와의 관계도 잘 마무리짓고. 그녀석이 못되게 나올수 있고 분풀이를 하려고 할수 있단 말이요. 좋기는 래일부터라도 사직서를 내고 출근하지 않도록 하오. 아니 그렇게 하오. 집에 들어온 다음에는 우리 밑에서 일을 시키자구.》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중요한 대목에서 순애가 자리를 비우면…》

아성이가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여물구지 못하자 정시명이 엄하게 잘라매듯 말했다.

《아니, 그래야 하오. 그래야 하오.》

정시명의 명령조의 타이름을 김아성은 무겁게 접하며 다시 뒤에 떨어져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묵묵히 어두운 숲길을 걸었다.

젊은이들의 일을 일단 매듭지으니 다소 속이 가벼워졌지만 전쟁이라는 소리때문에 다시 심기가 무직해왔다.

미국놈들이 제놈들의 군대를 뽑아내겠다고 선포한것이 언제라고 이런 흉계를 꾸며놓는가. 애당초 미국놈들이 물러서기를 세상에 선포해놓은것이 전쟁준비를 가리우기 위한 연막이였던가.

만약 전쟁이 터지면 남과 북은 언제면 합쳐지려는가.

그는 지금까지 애써 세워온 통일을 위한 탑이 뿌리채 뽑히고 와르르 무너져내리는것만 같았다.

물론 전쟁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기고야말것이다. 그러나 전쟁은 불피코 이 나라의 강토와 겨레에게 영원히 아물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될것이다. 이걸 허용할수는 없다.

정시명이 곰방대에 써레기를 다져넣는데 김아성이 불쑥 말을 꺼냈다.

《선생님, 이제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 나라의 통일문제는 어떻게 되는겁니까?》

그러니 김아성이도 지금껏 전쟁에 대하여 생각해왔는가.

정시명은 아성의 질문까지 당하고나니 가슴이 더욱 답답해왔다. 인차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리승만이 꿈꾸는 《북벌》전쟁이란 동족끼리의 피투성이의 싸움이다. 리승만이 도대체 초보적인 혈육지정을 생각이나 해보고 전쟁나발을 그리도 극성스럽게 불어대는건가.

정시명의 눈앞에 입을 쑥 내민 심술스러운 상통이 흉물스럽게 그려져 인차 꺼지지 않았다.

미국놈들은 어쨌든 이 나라 사람들의 리해관계는 털끝만치도 안중에 두지 않는 이방의 무리들이다. 제놈들의 밥상을 더 기름지게 하기 위해 총포를 둘러메고 이 땅에 달려든 놈들이다. 제놈들의 욕심에 조선의 분렬통치가 리로운것이니 음으로 양으로 못되게 놀아왔다. 전쟁을 남과 북에 걸어놓는것이 좋을듯싶으니 남의 집안을 서로 물고뜯게 충동질하는것이다. 그놈들에게는 이 땅이 내뿜는 선혈에서 챙길수 있는 어부지리가 없다.

그런데 리승만의 반통일적인 언행의 밑뿌리는 얼마나 치졸한것인가. 분렬이 가져다주는 기득권-오직 통치권장악과 일신의 향락이다. 송호정이 울분에 차서 규탄한것처럼 리승만 한놈때문에 천만이 주리고 헐벗고 불행하고 무모한 피와 땀을 강요당하고있는것이다.

정시명은 그냥 입을 다물고있다가 김아성의 말투에 비낀 심각한 빛을 감촉하고 입을 열었다.

《글쎄 우리의 통일문제는 미국의 간섭과 국토분단에서 정치적권력을 추구하는 무리들때문에 힘들어지는거요.》

《그러니 리승만의 권력욕심때문에 통일문제도 성사되지 않는다는겁니까? 그러면서도 제놈이 <애국자>라고 말끝마다 부르짖고있으니 그거야말로 언어도단이지요.》

김아성이 턱을 쳐들고 격해져서 부르짖었다.

정시명은 분노의 섬광이 번쩍거리는 아성의 흥분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였다. 정의에 눈뜬 젊은 가슴에서 분출하는 격렬한 감정이 그의 심장에로 후덥게 전해졌다.

《권력에 맛들이면 친구도 나라도 백성도 량심도 없어지는가 보오. 리승만은 권력을 쥐겠다고 미국을 등에 업었지. 그걸 잡게 되니 그다음에는 놓지 않겠다고 미국에 붙어서 버둥거려왔지. 이제는 미국놈들의 전쟁놀이에까지 끼여들었거든.》

《어떻게 될가요?》

《글쎄…》

정시명은 자리에서 무겁게 일어났다. 김아성이마저도 전쟁이라는 아직은 가닥이 확정되지 않은 사실을 기성공론으로 믿고 불안해하고 당황해하는것이 불안스러웠다.

정시명은 아직도 순애가 보내온 자료들을 전쟁이라는 결론으로 끌어가고싶지 않았다. 정국의 혼란에 불안을 느끼고 정세방향에 충격파를 일으켜 흐물거리는 집권지반을 다져보려는 리승만의 로망으로 받아들이고싶었다.

그렇다면 《흥국상회》가 너무 과민반응을 하고있는것이 아닐가. 설마 아무러면… 미국놈들도 사정이 그렇지 않은가. 2차세계대전에서 미국이 덕을 봤다고 하지만 그들도 피맛을 본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전쟁의 참사를 겪은지 몇해라고 그 무시무시한 피의 란투극을 다시 벌리려고 하겠는가.

정시명은 이렇게 불길한 재난예고가 안고온 불안과 우려를 애써 지워버리고싶어 필요한 부정적요인들을 찾아냈다. 그것은 저 멀리 지평선에 떠올라 빠른속도로 엄습해오고있는 민족재난의 폭풍을 어떻게 하든지 가라앉혀야 한다는 이 나라의 충성스러운 아들의 애절한 갈망과 의분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저녁 10시를 알리는 고동소리가 서울의 밤하늘에 긴 여운을 남기며 사라진 뒤에야 버들숲에서 나와 서병남의 뜨락에 들어섰다. 김아성이 떠나려고 자동차에 오르는데 민순임이 옷자락을 잡았다. 햇감자를 삶아놓았으니 밤참삼아 맛을 보라는것이였다.

그들은 감자 몇알씩 들고는 민순임이 펴주는 포단에 나란히 누웠다.

김아성은 이내 코나발을 불기 시작하였다.

건강미가 넘치는 젊은이의 말투레질같은 코소리를 들으며 정시명은 또다시 요즈음 입수된 자료들을 머리속에서 종합하고 그것들의 호상관계와 새로운 정세발전의 전체적인 륜곽을 그렸다.

그리고 아까 피끗 세워놓았던 금후투쟁의 줄기와 가지들에 아지를 치고 잎새를 불리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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