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대결의 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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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감방에 돌아온 정시명은 미국의 전쟁음모부터 전체 수감자들에게 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무쵸는 한주일이라 했다. 그러니 한주일만 견지하면 될수 있다. 이놈들이 전쟁을 일으켜야 38°선을 넘어서보지 못하고 꺼꾸로 줄행랑을 놓을것은 뻔하다. 그러면 가까운 시일안으로 이 서대문감옥도 들부셔질것이고 전우들이 풀려날수 있다. 그러니 동지들에게 마지막까지 싸움을 잘하라고 고무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것은 적들의 최후발악에 대처하는것이다.

전쟁을 일으키면 이놈들은 저들의 후방치안에 비수로 되고있는 좌익계인물들부터 소멸해치우려고 할것이다. 감옥밖의 동지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어 유사시에 미제의 전쟁도발을 분쇄할수 있도록 자기 성원들을 궐기시켜야 한다. 통방으로 알려주면 안지생에게 가닿을것이다. 그러면 안지생이 외부와의 련락선을 통하여 알려주게 될것이다. 길철이 그 신호를 접수하고 마지막 판가리싸움을 훌륭하게 조직하여갈것이다.)

《맹호동무, 한가지 알려줄게 있소. 좀 수고를 해주오.… 멀지 않아 전쟁이 예견됨. 끝까지 견지할것. 결사전을 준비할것. 1번.》

통방신호는 2층과 1층을 재빨리 돌아갔다.

감방들에서 전우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맹호는 통방신호를 다 보내고나자 한동안 혼빠진 사람처럼 벽을 두드리던 그 자세로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제기된 사건에 믿음이 안가는 모양이였다.

정시명은 오른팔로 그의 어깨를 지그시 당겨안으며 타일렀다.

《너무 상심말게.》

이날 저녁 맹호는 자정무렵까지 구실렁거리며 잠들지 못하다가 끝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 시간이면 간수들은 졸음에 지쳐 걸상을 갖다놓고 앉아 꺼떡꺼떡 졸거나 마당에 나가 저희들끼리 모여앉아 술을 마시거나 한담을 벌리며 시간을 보내군 한다.

정시명도 무쵸와 만났던 일들과 급전직하로 변화되는 정세를 그려보며 잠들지 못하고있었다.

《선생님, 주무십니까?》

《왜 일어나오?》

《전 잠이 오지 않습니다. 이럴수 있습니까. 전쟁이라니요? 전 사실 전번날 오성도의 상보를 본 다음부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우리가 나라앞에서 얼마나 큰 일을 많이 했는가구 생각하니 백번 죽어도 한이 없을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뭐입니까. 전쟁이라니요? 전쟁이 터진다면 통일이 된다는 담보는 없지 않습니까?》

《없지. 오히려 우리의 통일위업은 더욱 멀어질수도 있지.…》

정시명은 솔직하게 자기 생각을 내놓았다.

《말씀하십시오. 투쟁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수많은 동지들이 희생되고 이렇게 감옥에서 고생하는데 싸움끝에 얻어진 열매가 무엇인가 말입니다. 46년도에 저의 형님도 대구항쟁에서 숨이 졌습니다. 헌데… 도대체 우리가 미국놈들과 리승만역적과 대결해온 결과가 전쟁으로 너무 쉽게 무시되는게 아닙니까?》

맹호는 괴로움에 휩싸여 나직하나 날카롭게 물었다. 손에 잡힐듯 성큼 다가서던 통일이 급기야 저멀리 수평선너머로 사라져버리는것 같아 안타깝고 절통하기 그지없었던것이다.

젊은이의 솔직하면서도 의분이 서려있는 질문이 무딘 송곳이 되여 정시명의 심장을 쿡쿡 찔러대는것 같았다. 어떻게 대답을 주어야겠는가. 처절하게 찢겨진 마음의 상처가 어떻게 위로해야 아물어질것인가.

정시명은 불쑥 례영이 자기곁을 떠나가던 때가 생각났다. 그 얌전데기가 서울을 함께 떠나자고 애원하면서 이 비슷한 소리를 하였다.

그때 정시명은 례영에게 대답을 속시원히 주지 못하였다.

이들의 질문은 새 세대가 전 세대에 던지는 엄숙한 항변이다. 그리고 조직성원들이 조직의 책임자에게 들이대는 심판이기도 하다.

정시명은 저으기 흥분되였다. 가슴이 터질듯이 답답해왔다.

《나를 좀…》

정시명은 일어나려고 몸을 뒤척이였다.

맹호는 그를 부축하여 앉혀주었다.

정시명은 벽에 허리를 붙이고 앉아서 잠시 가쁜숨을 몰아쉬였다.

여러갈래의 생각이 언뜻언뜻 뇌리에 스쳐갔다. 쓰러진 전우들― 멀리로는 례영의 아버지 김정필로부터 박영수, 권혜숙, 김승원,  리승애, 김명호, 려운형, 김구… 돌아보니 기쁜 일보다는 슬픈 일들이 더 뇌리를 파고들며 떠나지 않는다.

하기는 즐거움이나 기쁨에 대한 추억은 제아무리 크고 뜻깊은것이라 할지라도 오늘의 기쁨이나 즐거움으로는 될수 없다.

그러나 슬픔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가시처럼 박히여 눈을 감을 때까지 아픔을 준다고들 한다.

선렬들의 죽음이 죽음자체로 끝나서 세월의 망각속에 묻히고만다면 그네들의 희생이야말로 그 얼마나 허무하고 통탄할 일인가. 그들의 피가 이 나라의 력사에 무익한것으로 씻겨버린다면 후대들이 과연 그들처럼 나라가 필요를 느낄 때 자기 몸을 선뜻 내댈수 있을가?

정시명은 량미간을 찌프리고 가슴에 마구 차드는 울분을 짓씹으며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투쟁에서 결과가 중요하지. 하지만 젊은이, 보다 중요한건 력사앞에서 동시대의 인간들이 뜻을 가지고 사는거야. 무엇을 해놓았느냐 하는것도 중하지만 더욱 소중한것은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것이지.

예로부터 세상은 대결이 없는 세상을 향해 줄기차게 움직여왔어. 누구에 의하여?… 인간들, 가난하고 권리가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지. 그런데 인간들이 숙맥이라면 력사가 어떻게 흐르겠나. 정지하고말걸세.

무릇 독재에 저항세력이 없고 침략에 도전세력이 없고 부정의에 정의가 맞서지 않는다면 그 나라는 언제 가도 약자와 강자와의 대결, 진보와 반동간의 대결, 빈자와 부자와의 대결을 끝낼수 없고 영원히 비참하고 치욕스러운 운명을 강요당하는수밖에 없어.

다행히도 인민의 피와 희생이 있었기에 력사는 한걸음, 한걸음 헐떡거리면서 전진하였고 인민이 바라는 모양새를 갖추어가는거야. 자네도 책에서 배웠겠지만 인류사에 기록된 숱한 피의 항전이 비록 실패는 하였지만 력사를 앞당기는데 다 제몫을 가지고있거던.

맹호동무, 우리의 싸움도 그렇게 생각하라구. 우리가 흘린 피가 없었더라면, 이 나라 사람들이 외세의 노예살이에 만족을 하고 민족의 재앙앞에서도 분노할줄 모르는 박약한 정신적기형아들이라면 조선은 영원히 세계에서 빛을 잃게 될것이고 분렬의 력사도 고착되고 말걸세.

그래서는 안되네. 오랑캐들이 이 나라 사람들을 숫보게 해서는 안된다 그말이네.

위정자들이 백성을 얕보게 해서는 안되네. 백성을 무서워하고 백성의 눈치를 보게 해야 하네. 용기를 내라구. 이제는 자네들의 시대야. 동무들이 우리의 계주봉을 넘겨받게 될것이고 통일이 되는 그날까지는 감옥도 단두대도 피와 희생도 두려워하지 말고 조선사람의 얼을 지켜내야 하는거야.》

정시명이 여기까지 말하고는 갑자기 숨이 차서 헉헉거렸다.

《선생님, 어서 자리에 누우십시오.》

맹호는 정시명의 잔등을 자근자근 두드려주다가 그를 자리에 눕도록 하였다.

《맹호동무.》

《정선생님, 힘드신데 이젠 쉬십시오. 제가 잘못 생각하였습니다.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일생을 그렇게 살겠습니다.》

《고맙소.》

맹호는 정시명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정시명은 그의 부수수하게 흩어진 머리칼을 쓰다듬어주며 숨을 가라앉히였다.

속안에 어혈처럼 응쳐있던것을 털어놓았으나 아직도 종잡지 못할 불만이 꾸역꾸역 모여들어 그를 괴롭혔다.

어찌 보면 후대들앞에서 다하지 못한 책임을 회피한 구구한 변명같기도 하다.

참말로 후대들은 우리의 투쟁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려줄가? 나와 우리의 동지들이 최선을 다했다는것만은 틀림없다. 통일을 위하여 이렇게도 저렇게도 모대기며 힘자라는껏 싸워보았다.

(통일… 통일… 아, 통일아!…)

그는 속깊이 부르짖었다.

그에게서 통일위업은 단순히 지향이나 목적을 규정짓는 개념만이 아니였다.

그것은 산 유기체와도 같이 생동한, 그러면서도 한없이 다정한 련인처럼 느껴지는것이였다. 그것은 참말로 인간의 고귀한것을, 세상의 우아한것을 다 끌어안고 하냥 무궁한 정감을 이끌어내며 슬픔과 기쁨을 굽이치게 하는 신성한 넋이다.

정시명은 자기로서도 풀길 없는 번민에 시달리며 바닥없는 사색의 심연에 빠져들어 6월의 더운 밤을 뜬눈으로 보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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