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대결의 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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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정시명은 담가에 들리워 의무실에 갔다. 낯을 익힌 의무관이 그의 상처를 처치하였다. 깨끗한 붕대를 감아주고 수인복도 새것으로 바꾸어 입혀주었다. 뒤잔등에 향수도 둬방울 뿌려주었다.

며칠전부터 미국대사관의 노불서기관이 올것이라 하더니 이제야 나타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였다.

처치가 끝나자 점심식사가 들어왔는데 별식이였다.

정시명은 이놈들이 싱거운짓을 한다고 코웃음치면서도 그놈들이 하는대로 놔두고 점심도 천천히 다하였다.

식사가 끝나자 풍친 차에 실려 서울교외의 단층집으로 옮겨졌다.

정원에는 정향나무가 서있고 겉보기에도 아담하고 정결하게 꾸려진 집이였다.

어느 한 방에 들어서니 누운채로 상반신을 들어올리게 된 침대가 있었다.

정시명이 침대에 누워 잠시 숨을 가라앉히는데 최운하가 들어서고 이어 밤색양복을 입은 키가 크고 상통이 하마처럼 생긴 갈색머리의 서양신사가 들어섰다.

그 뒤로는 은테를 두른 코안경을 낀 알맞춤한 키에 몸이 아름이 될듯싶은 미국사람이 들어왔다. 상판이 둥글둥글하고 까만양복에 자주빛넥타이를 꼼꼼히 조여매고 가리마를 탄 긴 머리칼을 뒤통수에 빗어 붙인 사교적인 사나이였다.

그들은 흐리멍텅한 눈으로 잠시 방안을 둘러보다가 정시명의 눈길과 마주치자 다소 신비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최운하가 정시명의 앞에 안락의자를 두개 가져다주었다. 그놈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미국사람들에게 자리를 권하였다. 그리고는 사뭇 정중하게 그들을 소개하였다.

《정선생, 이분은 미국대사 무쵸각하이시고 이분은 미국대사관 1등서기관 노불각하입니다.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싶어 찾아왔습니다.》

노불은 안락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대고 고개를 가볍게 숙여보이고는 정시명의 아래우를 거만하게 훑었다. 네해째 찾아오던 인물이다.

그의 눈빛에 호기심과 의혹의 빛이 서서히 나타났다가 지워지기도 하고 불안하고 초조한 빛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하지만 정시명과의 대화에는 껴들지 않으려는듯 안락의자를 벽쪽에 옮겨놓고 무쵸와 사이를 두고앉았다.

무쵸는 피기가 깡그리 사라지고 약간의 권태와 피로의 음영이 어린 상대의 무표정한 모습을 찬찬히 여겨보다가 일종의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고개를 깍듯이 숙여보였다.

《나는 우리의 담화가 호상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리라는것을 기대하고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나는 우선 서로 허심탄회하게 오늘의 대화에 림할것을 제의합니다. 동의할수 있습니까?》

무쵸의 느릿느릿하면서도 상냥한 어조의 말을 노불이 고저가 명백하고 북방의 투박하고 서울의 나글나글한것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평양말투로 통역하였다.

정시명은 그 무슨 거인인체 제스스로 자기의 몸값에 무게를 가하며 허장성세하려는 아메리카의 신사를 향해 조소가 어린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그는 풍채가 름름하면서도 어데라없이 초조와 긴장이 서려있는 무쵸의 인끔을 재보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우리가 온다는 말을 들었습니까?》

정시명은 다시금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쵸가 신사연하게 처신하려고 무척 애쓰고있으나 매우 조심하고있으며 준비해온 언행에서 벗어질가봐 전전긍긍하고있다고 생각하였다. 세련된듯 하면서도 떠듬거리는 말투와 태연자약하기 위해 표정을 담지 않으려는 눈확에서 발산하는 초조한 빛과 그리고 간간이 노랑털이 부수수한 손으로 안면근육의 긴장을 풀어주듯 내리쓸군 하는 그 단순한 동작에서 상대의 순탄치 못한 심장의 투닥거림을 인차 감득할수 있었다.

그때 노불이 무쵸의 굳어지는 자세를 온곱지 않게 곁눈질해보다가 그래도 동료의식이 발동되여 긴장을 풀어주고싶어 대화에 나섰다.

《나는 당신이 이전에 미군사령관 하지를 만날 때 당신에 대한 료해를 위해 중경까지 날아갔던 일이 있습니다. 그때 장개석의 부하들은 당신이 반일정신이 높고 언행이 유하며 정의감이 강하고 반공정신이 투철한 그릇이 큰 인물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진행하여온 당신의 사업은 그중에서 한가지만 제외한다면 매우 적중하였다는것을 반증하였습니다.》

《…》

《난 당신이 서울에서 벌린 여러가지 배후공작을 오성도로부터 다 들었습니다. 방대광과의 사업에 대해서는 평양에 가있는 우리 첩자들로부터 통보받았습니다.

당신은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고 북의 공산주의자들의 지령밑에 남조선의 합법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공작을 공공연히 벌려왔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권고하고싶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대결을 끝내자, 호혜와 우의의 손을 잡자.… 이것은 나의 뜻만이 아닙니다. 나는 이 자리에 참석한 무쵸대사를 대표하는 미국무성과 미중앙정보국의 위임을 받고 말하고있습니다.》

자못 정중하게 노불이 이야기를 끝마치고 무쵸, 이젠 네가 나서라는듯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무쵸가 자신을 회복한듯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노불씨, 당신이 방금 한 말들에는 사실을 전도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튼 그건 뒤에 가서 론의해봅시다.》

정시명이 노불의 평양말에 류창한 영어로 대답하자 무쵸도 노불도 눈이 뒤집혀졌다. 예상밖이였던것이다.

정시명은 얼음판에 나자빠진 소눈이 되여 멀뚱멀뚱해진 무쵸와 고개를 신경질적으로 내젓는 노불을 여유작작하게 지켜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당신의 제안은 훌륭합니다. 우리는 원체 대결이 없는 친선과 화목과 평화를 몹시 갈망하여왔습니다.

대결을 끝내자, 우린 이걸 시종일관하게 주장해왔고 또 주장해나갈것입니다. 참말로 대결이 없어질 그날까지 말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회와 사회, 나라와 나라사이에 대결이 없다면 우리 사는 세계가 얼마나 훌륭하겠습니까.

좋습니다. 당신의 얘기를 계속 들어봅시다. 대결을 끝내기 위하여 당신들은 나에게 어떤것을 기대합니까?》

노불은 다시 그들의 대화에서 비켜섰다. 통역할 필요도 없어 말싸움에 껴들지 않게 된것이 다행이였다.

《난 당신이 미국과 리승만정권에 대한 협조적인 태도전환을 바랍니다.》

무쵸가 사교적인 어조로 말마디에 부드러움을 한껏 담으려고 애쓰며 대답하였다.

《협조적인 태도전환이라?… 그렇다.… 그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해주시오. 당신말에는 아직 무척 애매몽롱한것이 있습니다.》

정시명은 입가에 느슨한 미소를 지었다. 무쵸가 지금 무엇을 바라고있다는것을 대뜸 간파했던것이다. 그러나 정시명은 그 이야기를 무쵸가 제입으로 토설하게 하고싶었다.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대한 당신의 지지가 바로 그러한것입니다.

리승만〈대통령〉은 미국의 지지를 얻어냄으로써 〈한국〉이라는 국가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하였고 멀지 않아 자기의 제도권을 전조선판도에서 완성하게 될것입니다. 난 이미 하지가 자기의 대권을 당신에게 넘겨줄수 있다는 의사를 표명한데 대하여 잊지 않고있습니다. 그의 발언은 아직도 시효가 있습니다.

당신이 수락한다면 우린 미국의 공식적인 립장으로 제기할 용의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대사로서 바쁜 일정을 뒤로 미루고 참석한 자체가 담보가 되리라고 확언합니다.》

《허, 그래요?… 대단한걸…》

정시명은 무쵸의 희떠운 수작이 너무도 엄청나게 분수를 넘어서자 껄껄 웃고말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노불에게로 눈길을 보냈는데 노불도 그 눈길을 제나름으로 인식하고 동감을 표시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정중히 숙여보였다.

《그러니 나더러 리승만의 법통을 이어갈수 있다, 이것인데… 그러니 미국의 결심여하에 따라 이 나라의 대권이 움직인다는것도 사실이였구만.》

《뭘 그러십니까, 정선생. 나는 당신과 같은 거물과는 외교를 하고싶지 않습니다. 당신같은 사람과는 외교로써 문제를 해결할수 없지요. 그리고 이 방에서 한 말들은 더는 외계에 새나가지 않을것이며 따라서 책임소재가 뒤날에 따져지지 않을것입니다.》

《좋습니다. 당신의 솔직성과 배짱이 내 마음에 듭니다. 한가지 더 찍고 넘어갑시다. 당신은 〈한국〉의 제도권을 전조선적인 판도에서 완성할것이라 했는데 그건 어떤 의미입니까?》

《당신은 이미 그걸 알고있지 않습니까?》

《내가 알고있는것은 분석된 추리에 불과합니다. 전쟁이라는거지요?》

《뜻밖입니까?》

《아니요. 38°선에서는 당신들의 사촉밑에 벌써 여러해째 남북간의 전쟁이 벌어지고있습니다. 그런데 전면전쟁의 포성이 그렇게도 가까와왔는가요?》

《이제 얼마후이면, 까짚어 말하면 한주일후이면 당신은 내 말의 의미를 확인하게 될겁니다. 래일 미국무장관 고문 덜레스가 서울에 옵니다. 전쟁준비를 최종적으로 현지에서 검토하고 미국의 립장을 표명하게 됩니다.》

《그렇다!… 한주일이라구?… 끝내…》

정시명은 온몸을 스치는 전률을 느끼며 입술을 푸드드 떨었다.

무쵸가 기세가 올라 고개를 크게 끄덕이였다.

정시명은 갈린 어조로, 그러나 급하게 말을 이었다.

《좋소, 이야기하시오. 그러니 미국무성은 구체적으로 어떤 제안을 한다는거요.》

《가만… 당신에게 통보할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며칠전에 이북당국은 구금되여있는 당신을 포함한 좌익권의 거물 세명과 평양에 억류된 조만식을 비롯한 세명의 우리 계통의 사람들을 교환할것을 제의하여왔습니다. 우린 이 문제를 심중히 접수하고 당신과 몇가지 문제에서 합의를 본 다음에 답변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나의 제안에 심중하게 답변해주기를 바랍니다.》

정시명은 너무도 뜻밖의 통보에 깜짝 놀라 너불거리는 무쵸의 입을 지켜보았다. 말투로 보나 눈찌로 보나 이것만은 진실을 전하는것 같다. 가슴속에 세찬 격류가 넘쳐올랐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몇달전에는 무조건 돌아오라는 말씀을 보내오시더니 오늘은 남북의 관계사에 전례가 없는 제안을 내놓으시여 사실상 이제 교수대에 오른것이나 다를바 없는 전사에게 소생의 손길을 보내주신것이다.

하지만 그 거룩하고 고결한 뜻을 함부로 우롱하며 감히 제놈들의 흉모에 꺼들이려고 하는 무쵸의 더럽고 악착한 계교에 치가 떨렸다.

정시명이 입술을 앙다물고 온몸을 뜨겁게 달구는 감격과 함께 치밀어오르는 분격을 가까스로 참아내자 무쵸는 정시명의 침묵을 제나름으로 판단하고 열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저들의 탁상모의가 현실화될수 있다는 확신이 생긴것이다. 무쵸의 떠듬거리던 말투도 저으기 달변으로 바뀌여졌다.

《필요하면 당신에게 립장정리를 하도록 시한부를 설정해줄수 있습니다. 래일이나 모레에 당신을 위한 기자회견과 정계진출을 환영하는 내외기자들과 명사들의 모임을 조직할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북송환영모임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난 오성도가 이미 당신에게 이에 대하여 시사하였으리라 봅니다. 우리는 오성도본부장이 당신에게 한 약속이 다시말하면 경무대의 립장이 미국의 선의의 립장이며 따라서 당신이 우리의 기대대로 움직일 때는 당신의 희망에 따르는 차기의 대권에 대한 도전이든지 혹은 평양에로의 무사귀환을 담보한다는것을 위임에 의하여 밝히고저 합니다.》

《그러니 나더러 당신들의 꼭두각시가 되여달라는거겠소?》

정시명은 무뚝뚝하게 무쵸의 장광설을 받았다.

《뭐, 그렇게까지 우리의 제의를 속되게 평하실것까지야 있습니까?》

《내가 이북당국의 강박에 의하여 미국과 리승만과의 대결을 목적으로 남파되였는바 이제 와서 친선과 우의를 바라는 미국의 립장을 접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부터는 미국과 리승만과의 대결을 끝내고 〈한국〉의 정치권에서 재출발을 하겠다,… 뭐 이러루한것이겠소?》

무쵸는 정시명의 얼굴에 떠오른 조소의 빛을 보자 노불이 경고했던대로 이 인간과는 이러루한 흥정이 통하지 않으리라는것을 깨달았다. 오성도도 이 문제에서는 자신이 없어했고 더 나서려고 하지 않았던것이다.

무쵸는 초조와 당혹감을 감추려고 이마와 볼에 잡혀진 주름발을 두손으로 쓸어버리며 천연스럽게 웃었다.

노불도 아예 창문가에 나앉아 그들의 이야기에 더는 껴들지 않고있었으나 신경은 더욱 팽팽해졌다. 그의 눈길은 정시명의 모습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고 그의 눈길과 말투에 신경을 집중하고있었다.

《정선생, 자신을 너무 원칙이라는 틀에 얽매여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난 당신의 고민이 리해됩니다. 당신은 명석하고 현명한 정치인입니다. 난 현실에 대한 재평가로부터 당신이 자신과 〈한국〉과 미국에 그리고 당신을 부르고있는 이북당국에 필요한 선택을 할것을 권고하는바입니다.

정치가란 정치라는 복잡다단한 파도를 옳게 타야 합니다. 바람따라 돛을 올리라는 조선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난 정세의 변화를 어떻게 리용하는가 하는것이 정치가로서의 생존을 보장하는 첫째가는 재능이라고 봅니다. 당신은 고명한 정치인이 아닙니까.》

《계속하시오. 당신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봅시다.》

정시명이 한걸음 눙쳐주자 다소 의기소침해지던 무쵸는 코안경을 쓸어올리고는 다시 성수가 나서 떠들었다.

《이제 바야흐로 이 땅에서 벌어질 대사는 당신의 통일감정을 해소시키는데도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나라의 통일을 위해 지난 4년간 고군분투해온 당신네의 리상과 노력의 연장이며 그 결과라고도 말할수 있습니다.

통일된 조선은 아마도 우리 미국과도 더는 대결이 없이 평화롭고 친선적인 우방으로 될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당신이 우리와 손을 잡지 못할 리유가 없습니다. 우린 당신들에게 100년전부터 친선과 뉴대의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나 당신네 선조들은 유감스럽게도 벌써 그때부터 우리에게 대결을 선포하고 친선의 사절들에게 창을 내밀고 불배를 맞세웠습니다.

정선생, 우리는 당신들과의 대결을 이제는 영원히 끝장낼 결심입니다. 이것은 더는 드틸수 없는 백악관의 립장입니다.》

무쵸는 정시명이 눈을 감아버리고 기척없이 자기 말에 귀를 다소곳이 기울이는듯싶어 마치도 청강생들앞에 나선 풋내기연사처럼 제스스로 흥분되여 궤변을 세월없이 늘어놓았다.

기실 정시명도 지금 그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고있었다. 무쵸의 흉심에 깔려진 리면을 송두리채 헤쳐보고싶었던것이다. 다만 무쵸의 기대와는 달리 상대방에 대한 경멸의 감정만이 커갈뿐이였다. 제딴에는 무척 품들여 론쟁준비를 하고온것 같은데 론조가 가볍고 수가 낮다.

서울에서 미국대통령과 미국무성을 대표하는 인물이 이렇게도 설된 인간이였는가.

《나는 당신이 이데올로기를 바꾸라는것이 아닙니다. 전향서에 도장을 찍으라는것도 아닙니다. 그런 요구를 제기하기에는 당신은 너무도 최중량급 인물입니다.

다만 당신께서 미국의 대조선정책에 협조적인 자세를 보여주며 그에 대하여 공개해주는것으로 우리의 지대한 관심과 후원에 대한 약간의 보수를 지불해달라는겁니다.

만약 당신의 정치적장래에 대한 문건상의 담보를 필요로 느낀다면 그렇게 할 용의도 있습니다. 우익이냐, 좌익이냐, 이렇게 문제를 세우지 맙시다.

지금 유럽의 적지 않은 나라들에서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집권세력으로 등장하고있으나 미국에 대한 그 나라들의 립장에는 변화가 없습니다. 난 조선사람들이 뜻을 존중시하는, 당신들의 말투로 말한다면 신념이 투철한 민족이라는것을 체험을 통하여 잘 알고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괴롭히는 고민도 이것이라는것을 나도 리해하며 동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린 력사에서 그런 고민거리를 해소할수 있는 대답을 얼마든지 찾아낼수 있습니다. 대세에 따라 자기 모습을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바꾼 정치가들은 허다합니다. 력사는 언제나 그들의 변신에 대하여 관대하였거나 혹은 현명하다는 평가를 주었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나서 무쵸는 말을 뚝 그쳤다. 눈을 꾹 감은 정시명의 얼굴에서 쓰거운 빛도 사라지고 숨소리만 높아지자 이 사람이 아예 잠들어버리지 않았나싶었던것이다.

무쵸가 잠시 동안을 두고 정시명의 얼굴을 살피는데 잠자코 있던 그가 여전히 눈을 감은채 짤막히 물었다.

《말을 다 했소? 더 얘기해보시오.》

《뭐 이쯤되면… 사실 이건 다 우리로서는 헐치 않은 용단을 내린 중대제안입니다. 당신의 대답을 듣고싶습니다.》

무쵸는 자기의 장광설에 그제야 스스로 멋적은 생각이 들어 입을 다물기로 작정하였다.

정시명은 눈을 뜨고 무쵸를 면바로 쳐다보았다. 정시명의 눈가에 다시 조소의 빛이 서려들었다가 이내 사라지고 진지한 빛갈이 떠올랐다.

《우리의 대화를 래일로 미룰가요?》

무쵸가 상대의 표정변화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소. 가만, 노불씨, 저 돌리개를 돌려주시오.》

정시명이 침대의 상반신의 자세를 편리한대로 가질수 있도록 조절하는 돌리개를 가리켰다.

그러자 노불이 공손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돌리개를 정시명이 《그만》할 때까지 돌리였다.

정시명의 상반신자세가 침대의 변형에 따라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되였다.

정시명은 안락의자에 조심히 앉아 말을 기다리는 무쵸를 굽어보며 눅진눅진한 어조로 말을 뗐다.

《나의 대답이라?… 우선 당신들이 이런 걸음을 해준데 대하여 사의를 표하오. 좋은 일로 온다고 해도 수인이란 누구에게나 귀맛도 스산하고 얼굴 마주하기가 섬뜩하지요.

좋기는 리승만〈대통령〉도 함께 왔더라면 좋았겠는데 유감이요.

당신얘기에서 몇가지는 나도 새겨두겠소.

첫째로는 당신이 이 땅에서 대결을 끝내야 한다고 주장한거요. 아주 좋소. 동감이요. 아주 좋아. 당신이 참 좋은 말을 했소.

다음으로는 나와 우리 동지들이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노력해왔다는것을 당신이 인정해준거요. 당신네의 공식적인 견해든지 혹은 당신의 사적견해든지 당신의 입으로 내놓은 말이니 나는 듣기가 좋소.

미안하오, 무쵸씨, 나에게 물 한고뿌 주시오.》

《예, 그렇게 하시오.》

무쵸는 온화하게 서두를 떼는 정시명의 부드러운 어조가 놀랍고도 희한해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고뿌에 물을 찰찰 따라서 물방울이 그의 옷섶에 떨어질세라 사뭇 경건한 자세로 내밀었다. 자기의 이야기에 정시명이 공감을 느낀듯이 지레짐작이 가서 흡족하고 다행스러웠다.

노불도 예상밖으로 무쵸의 감언리설이 설득력있고 정시명이 거기에 기울어지는듯싶어 일견 다시 신경줄이 팽팽해졌다. 그만하면 무쵸가 소문대로 괜찮은 수단군이다. 《교섭의 명수》라는 말이 헛말이 아닌것 같다. 백번중 하나가 될수 있는 일이 있을수 있다는 예감에 짜릿한 긴장감까지 밀려든다.

정시명은 고뿌의 물을 천천히 다 마시고나서 손등으로 입가녁을 쓱쓱 문다진 다음 서두름없이 말을 계속하였다.

《사실 나는 전쟁이라는 소리에 지금 머리가 온통 뒤죽박죽이요. 당신과 이렇게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것이 이상스럽구만. 하지만 당신이 미국인으로서는 헐치 않은 용단을 내린 중대제안이라니 대답을 내려봅시다.

내가 당신말에서 류의하게 되는것은 일국의 전권대표로서 당신은 모르는것이 많고 모르는체 하는것도 많다는거요.》

《그건 어떤걸 념두에 두시는 말입니까?》

《무쵸씨, 이젠 내가 말할 차례니 당신은 듣기만 하시오. 대결은 우리가 바라는것도 아니요, 청한것도 아니요, 시작한것도 아니요. 우리와 미국과의 대결은 당신들이, 미국이 조선에 강요한거요.

당신의 말대로 이 방에는 우리 셋뿐이니 당신들도 오늘은 대사와 서기관이라는 공인의 립장에서 벗어나 무쵸와 노불이라는 보통인간으로 돌아가 솔직히 말해보시오.

당신이 방금전에 우리 나라와의 친선을 위하여 파견된 미국의 평화사절들에게 우리의 선조들이 불의 세례를 안겼다 했는데 대포를 끌고 남의 나라 성안으로 쳐들어오고 야밤에 금붙이를 로략질해가려고 이 나라 왕의 분묘를 도굴하는 좀스러운 밤강도들이 그래 평화의 사절로 될수 있소?

당신네 선조들의 격언에 입은 삐뚤어져도 주라는 똑바로 불라는 말이 있지요?

노불씨는 아버지때로부터 리승만과 막역한 사이라고 하는데 리승만이 당신들을 등에 업고 옥좌를 타고앉은데 대하여 당신이 정보전문가로서 어떻게 분석하고 평가를 내리게 되오?

아니요. 노불씨! 당신은 이 땅에 태를 묻고 이 땅의 물과 공기를 마시며 자랐다고 하는데 이 나라 인민의 감정에 대하여서는 너무도 모르고있소.

승냥이와 토끼는 절대로 한우리에서 공생공존할수 없소.

돌아가시오, 무쵸씨! 이 땅에서 당신들이 뿌려놓은 모든 재앙의 화근을 다 걷어안고 대양건너로 돌아가시오. 돌아가서 이 나라 인민에게 지난 100년가까이 저지른 죄를 회계하고 속죄하시오.

이것이 대결을 끝장내는데서 선결공정이요. 알겠소?… 그 다음에 참으로 대결이 없는 친선과 화목의 손을 내놓으시오.

우리와 미국과의 대결은 력사적인 대결이며 두 력사의 대결이요.》

《두 력사의 대결?》

무쵸는 정시명의 공세에서 물어챌만 한 말머리를 찾다가 제꺽 걸어챘다.

《그렇소. 력사의 대결이요. 대결의 력사요. 100년간에 걸치는 당신들의 침략의 력사와 침략을 분쇄하는 우리의 애국의 력사간의 대결이란 말이요.

우리 조선사람들은 예로부터 악한것과는 죽기를 겁내지 않고 사생결단하는 사람들이지만 선에는 선으로 대하는 아량있고 례절이 바른 사람들이요. 당신들과 백년숙적의 매듭을 풀고 대결이 없는 친선과 화목의 새 력사를 창조해간다면 얼마나 좋겠소.

나는 정말 그런 세상, 그런 날을 보고싶소. 우리가 구태여 죽음도 불사하고 싸우는것은 참말로 우리 사는 행성에 대결이 없는 세상, 만인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걱정없이 살아가는 인민의 락원을 만들려는데 그 신성한 목적이 있소.

그러나 지금 당신들은 우리 인민에게 대결에서도 가장 극악한 전쟁이라는 피의 결투를 강요하고있소. 뭐 전쟁이 우리의 통일에 대한 감정을 해소시킨다구?

조상전래로 살아온 우리의 보금자리를 재더미로 만들어놓고 이 나라 강산을 인민들의 선혈로 물들이고 통일은 뭣때문에 하는가 말이요? 그런 〈통일〉거사에 협조한다면 리승만의 법통을 넘겨주겠다구?…

그러니 나더러 리승만같은 미국의 더러운 시녀가 되라는것인즉 대사, 당신들이 대상해온 조선사람들이 다 리승만이나 서재필이나 장택상이 같은 역적들처럼 보이는가?

지금 당신앞에 적어도 이 나라의 운명을 제 살점처럼 여기는 조선사람이 누워있다는걸 똑똑히 알고 이야기하시오.

당신들이 전쟁의 불을 지른다고 우리가 두려워할줄 아는가. 압록강까지 양키제국을 세워보겠다구?… 천만에!… 맥아더와 트루맨에게 똑똑히 전하시오. 진실로 우리와의 대결을 끝낼 의사가 있다면 이 나라 사람들을 존중하며 이 나라를 지배하려는 흑심을 버리고 속에 품은 칼을 버리라구 말이요. 당신들의 침략의 력사에 종지부를 찍으시오.

우리의 최소한의 이 요구가 무시되는 한 미국과의 력사적대결은 당신들이 무릎을 꿇을 때까지 계속될것이요. 확언하건대 대결에서 우리가 얻을것은 민족의 존엄이고 강토이지만 당신들 미국에 차례질것이란 수치와 파멸뿐이라는걸 새겨두시오!》

분노와 적의가 무섭게 번뜩거리는 정시명의 도도한 열변이 점점 거세지자 무쵸는 처음에는 단 쇠덩이처럼 온몸이 열기를 활활 내뿜는 그의 모습을 경탄에 휩싸여 쳐다보았다.

그것은 점차 공포와 불안으로 번져져 마침내는 그의 두눈이 성난 맹수의 눈처럼 표독스러워졌다. 승리자연 하던 표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자가당착에 빠지고 공포에 짓눌린 악에 받친 상판이다.

무쵸는 목을 바싹 죄여맨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늦추었다. 마치 그때문에 숨이 막힌듯 한 손세다.

두사람의 대결을 주의깊게 관찰하던 노불은 계교가 여지없이 부서지자 신사연 하던 위선을 집어던지고 눈꼬리가 쳐들리며 살기가 내비치는 무쵸의 상통을 보며 쓰거운 미소를 지었다. 《교섭의 명수》란 세평을 받아온 저 인간에게도 저런 수준이하의 흉한 몰골과 악의 란무가 있었던가.

노불은 《흥》하고 가볍게 코방귀를 뀌며 랭소를 지었다.

정시명의 앞에서 무쵸가 아니라 미국이 무릎을 꿇은듯싶어 낯가죽이 뜨끈뜨끈해왔던것이다. 무쵸가 애초에 감히 견주지 못할 인간과 마주섰다는것이 분명하다. 소학생이 감히 말재주 하나만 믿고 대학생을 가르치려 든것처럼 푼수에 맞지 않는다. 예상했던대로 상대는 무쵸쯤은 시중군 다루듯 하는 백전로장이다.

자기가 대화에 골을 깊이 들이밀지 않은것이 다행이다.

조선사람이라는 그 의미가 무섭게 되새겨지자 온몸에 한줄금의 된서리가 지나갔다. 꺾어져도 휘여들지 않던 려운형의 불굴의 기상을 다시 마주한것 같았다. 자기 의지와 상반되는것이라면 담벽처럼 드팀이 없던 김구의 모습을 다시보는것만 같았다. 이 땅의 산간오지를 뒤흔드는 빨찌산의 일제사격총성을 듣는것 같았다.

(조선의 기질, 조선의 성격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이런 인간들을 정말 휘여낼수 있겠는가.)

지금의 내 꼴은 어떨가? 미협상수석대표 브라운이 조선과의 대결에서 끝내 패배하고 미친꼴이 되여 울부짖던 모양이 불현듯 생각났다.

브라운은 이 땅을 떠나면서 패배자의 렬등의식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고 오히려 제 목숨을 건져준 이 나라에 감사를 드리며 떠나갔다.

(브라운을 그 정도로 다스려놓은것도 이 사람들의 소행이라 했지.

이 사람의 말이 옳다. 애당초 조선사람들을 감람나무를 내들고 다스려보려고 한것은 어리석은 일이였지.)

평화의 사도로 치장을 하고 전 세기에 이 나라에 발을 붙인이래 50여평생 대를 이어오면서 조선사람들의 넋을 휘여잡느라고 동분서주해온 노불은 이들과의 정신적대결에서 패배했다는것을 새삼스럽게 통감하고있었다.

(조선사람은 이 땅의 거악한 산줄기처럼 정신력이 굳건하고 웅장하다. 불의에는 타협이 없고 부정의에는 끝까지 도전한다. 의를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하는것이 조선의 성격이다. 이것을 우리 미국이 휘여내겠다는것은 이 나라의 기질을 잘못 계산한데 있다.

그러니 이 사람과는 대포로 대화를 해야 한다.

아니, 그것도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미 대포를 휘둘러대다가 쓰라린 교훈을 남겼다. 다시 그런 전철을 밟을수 없다.

애당초 왜 우리가 이 사람들과는 스스로 만들어낸 모순투성이의 숙제를 풀지 못해 애쓰는가. 도대체 이 사람들과 대결이라는게 필요한가. 왜 대결해야 하는가?…

정말 이 사람들과는 이제 대결의 력사를 끝낼 때가 되지 않았을가.)

노불은 자기도 딱히 형언 못할 커다란 불안에 휘말려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번거로움이 삼검불처럼 엉켜들자 그 실마리가 묘연해져서 화가 났던것이다.

(대포를 휘두르기로 백악관이 결심한 이상 나 또한 그것을 미국의 뜻으로 접수할 의무만이 있다. 이 사람들과의 다음 기회의 대결의 선택은 우리 후손들에게 맡기자. 지금은 전쟁전야다.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전쟁마차를 막을 힘은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아니, 아니, 그것도 아니다. 나는 첩보원이다. 첩보의 심장은 사실앞에서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의 주장을 그대로 전해야 되지 않을가. 나부터 조선사람들앞에서 죄많은 50평생을 속죄부터 해야 한다.)

노불은 잠시 안색이 바뀌여 얼굴에 가득히 미소를 담고 입술을 꾹 다문채 무쵸의 허여멀쑥한 상판을 굽어보고있는 강직하면서도 유연해보이고 폭이 넓으면서도 깊이가 헤아려지지 않는 조선의 애국자의 모습을 망막에 새겨넣을듯 지켜보다가 말없이 뚜벅뚜벅 구두발소리를 내며 방안에서 나가버렸다. 온통 혼란에 빠진 마음속을 정시명의 앞에서 더는 진정시킬수 없었던것이다.

노불마저 방안에서 사라지자 홀로 남은 무쵸는 겁에 질린듯 전신을 부르르 떨며 오금에 힘을 주었다. 자기의 제안에 랭소를 짓군 하던 노불과 경무대의 주장이 아프게 뇌수를 자극하였다.

(제기랄, 노불은 괜히 끌고 왔군. 노불이 내 몰골을 보면서 속으로는 쾌재를 올렸겠지, 흥.)

번쩍거리는 코안경안에서 하냥 오만한 빛을 뿜던 노랑눈이 꺼벅거리였다.

(노불의 말이 옳은것 같다. 이 나라 사람들의 진맥을 오진한것이 틀림없다.)

무쵸는 날카롭게 솟아오른 코마루며 말을 잠시 끊을 때면 버릇처럼 꾹 닫아붙이는 두툼한 입술이며 얼굴에 엇갈려 비끼는 여러 빛갈의 표정을 신비롭게 쳐다보면서 이 사람이야말로 자기따위는 눈곱만치도 여기지 않을 강한 적수라는 전률에 휩싸여 더위먹은 놈같이 헐떡거리였다. 속에서 자기도 딱히 이름지을수 없는 미칠듯 한 분노의 피가 부그그 괴여올랐다. 그는 은발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나는 현지의 대표로서 미국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시 랭혹한 현실과 의무에로 돌아왔다.

(지금 앞에는 미국과 자기에게 정면으로 도전해나선 무서운 인간이 느슨한 미소를 머금고 누워있다. 그는 적이다. 원쑤다. 무서운 사람이다.)

무쵸는 두주먹을 꽉 틀어쥐고 어금이를 부서지라 악물었다.

(이런자들은 조선땅에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이런자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주물러낼수 없으며 설사 공산주의에 대한 충직성을 버린다 해도 미국의 노복으로는 절대로 될수 없다. 우리의 대조선정책에 장애물로 된다면 모조리 쳐갈겨야 한다.)

무쵸는 정시명에게로 다가와 안면표정을 변화무쌍하게 만들줄 아는 로회한 외교관답게 상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는 정시명에게 손을 내밀다말고 역시 싹싹한 어조로 작별인사를 하였다.

《정선생, 작별합시다. 당신의 고결한 애국주의에 깊이 감동되였습니다.》

정시명은 느슨한 미소를 지은채 무쵸를 굽어볼뿐이였다.

무쵸는 만신창이 되여 허둥지둥 문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문앞에서 우직한 보초병처럼 방안의 동정을 살피며 여차하면 상전을 보호하기 위해 뛰여들 충성스러운 하인배의 자세로 서성거리고있던 최운하가 눈에 띄였다.

무쵸는 아첨기어린 그자의 얼굴을 멸시어린 눈으로 쏘아보며 가까스로 참아낸 화를 터쳐놓았다.

《부청장, 당신들은 다들 바보요. 아메바요. 저런 인간은 애초에 박멸해야 하오. 당신들이 건재하자면 저들을 살려둬서는 안된단 말이요. 모조리 없애버려야 하오. 시간이 없소.》

무쵸는 분별을 잃고 미친개처럼 성이 나서 으르렁거렸다.

최운하는 다림발이 산뜻하게 선 양복에 자주빛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향수내를 물씬 풍기며 언제나 점잖게 처신하던 서양신사가 갑자기 악을 쓰는 꼴을 의아쩍어 하면서도 연방 채찍처럼 내리는 불호령에 몸을 흠칫흠칫 떨었다. 그는 뒤에서 쓰거운 미소를 짓고 서있는 노불에게로 고개를 돌렸는데 노불은 그 눈길을 받자 얼른 외면하는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알았습니다. 각하!》

최운하는 잘못 걸려들었다가는 제 목에 총탄을 건사할것 같아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무쵸와 노불이 탄 자동차는 수림속으로 도망치듯 달아났다.

자동차가 수림속에서 벗어나 서울중심에 들어섰을 때 쓰겁게 입만 다시고있던 노불이 갑자기 발작적으로 웃기 시작하였다.

가시같은 조롱과 질책이 담긴 그 째지는듯 한 웃음에 무쵸는 오만상이 돼가지고 거친 숨만 씩씩거렸다.

한참 지나서야 노불은 웃음을 거두더니 정색하여 그러나 측은한 어조로 말하였다.

《무쵸씨,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느낄건 없습니다. 당신이 패한것이 아니지요. 하지중장이 제 고향에 가서 떠들어댄게 생각나는구만요. 조선에서 당한 패배가 자기 일생의 최대의 패배라고 비명을 질렀지요. 그는 미국이 조선사람들에게 노카우드 됐다고 했습니다.》

노불의 솔직한 이야기에 무쵸는 떡호박같이 부풀어오른 상통을 주억거릴뿐이다. 그리고는 숨이 꺼질듯 한 코김을 내긋는다.

무쵸는 잠시 입을 닫아붙이고 시창으로 바쁘게 미끄러져가는 서울풍경을 멀거니 내다보다가 느직느직하게 물었다.

《노불씨, 우리가 저런 사람들을 타고앉을수 있을가? 우리가 상대를 잘못 보고 덤비는게 아닐가?》

노불은 무쵸의 김빠진 넉두리에 눈길을 돌렸다. 코안경안에서 노상 두가지의 빛갈이 보이던 눈이 쑥 꺼져들고 빛이 바랜듯싶다. 말투에도 극도의 망연자실과 방황하는 공포와 고민의 흔적이 다분히 어려있다.

노불은 그의 얼굴에서 음침한 눈길을 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여지없이 찢겨진 대사의 속을 다독여주는듯 한 아량을 보이며 대답하였다.

《글쎄요. 이제 벌어질 전쟁에서 혹 미국이 이길수도 있겠지요. 무적을 장담하는 우리의 주장은 사실 허세는 아니니깐요. 하지만 종당에는 우리 미국은 이 나라에서 쫓겨나게 될겁니다. 저런 민족은 노예살이에 순종할 족속들이 아니지요. 저 사람이 말하는 대결의 력사를 돌아보면 미국의 력사는 패배의 력사입니다.》

노불의 솔직한 대답에 무쵸는 다시 코김을 길게 불어던지며 앞으로 무겁게 드리운 머리를 맥없이 꺼덕꺼덕거리였다. 언제나 신사의 체면을 잃지 않으려고 거드름을 빼며 눈길조차 사람들의 머리우를 겨냥하여 던지던 무쵸가 조선의 한 애국자와의 정신적대결에서 얼혼이 빠져버린 비참한 꼴을 보는 순간 노불의 흉곽이 그 어떤 비상한 령감으로 쿵 울렸다. 우뢰같은 노성이 고막을 울리고 심장을 쾅쾅 흔들었다. 혼란에 빠졌던 사고가 일순간에 정화되였다.

(노불, 이제 그대는 결론을 내리라. 그대의 50평생을 총화하라. 그리고 인간본연의 제 얼굴을 찾으라. 참으로 위정자에게 아부하고 위정자의 구미를 돋구는 비렬한이 아니라 미국의 국익을 바라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량심의 결론을 미국에 내놓으라.)

성당에서 숭엄하게 울리는 목사의 설교같은 그 일깨움에 노불은 전례없는 흥분에 휩싸였다.

(50평생의 총화라… 그래, 총화를 해야 한다.)

노불은 이것이 바로 자기가 쓰게 될 《조선편력기》의 마지막 맺는말이 될것이라 생각하였다. 한생을 바쳐온 대결의 종점이 명료하게 떠올랐다.

(이 땅에 50평생을 보낸 뒤끝이 뭐란 말인가.

50평생의 총화라… 조선사람들앞에서 죄많은 50평생…)

문득 튕겨오른 생각에 노불은 신음소리를 냈다. 때없이 뼈마디가 저릿저릿해왔다.

(옳다. 이 나라앞에서 나, 노불은 죄가 많다.

그리고 나, 노불은 미국앞에서도 죄가 많다. 미국사람들이 이 나라를 정확하게 판단할수 있도록 해야되겠으나 나는 지금껏 첩보활동을 미국의 조선정복을 유도하고 용인하는 방향에서 벌려왔다.

결국 백악관은 이 나라의 기맥을 옳게 짚어보지 못하고 이 나라의 숨통을 죄이려 한다.

때는 늦었어도 나도 미국에 진언을 해야 한다. 세상에 진실을 내놓아야 한다.)

노불의 눈앞으로 다시 정시명의 불굴한 모습이 그 무슨 숭엄한 군상처럼 거연히 솟아오른다. 불을 토하는듯싶던 열변이 뢰성처럼 귀전을 때렸다. 거기에 짓눌려 허우적거리는 하지와 아놀드, 브라운과 무쵸 그리고 자기의 초췌한 몰골이 방불히 그려졌다.《진실로 우리와의 대결을 끝낼 의사가 있다면 이 나라 사람들을 존중하며 이 나라를 지배하려는 흑심을 버리고 속에 품은 칼을 버리라. 우리의 최소한의 이 요구가 무시되는 한 미국과의 력사적대결은 당신들이 무릎을 꿇을 때까지 계속될것이다.

확언하건대 대결에서 조선사람들이 얻을것은 민족의 존엄이고 강토이지만 미국에 차례질것이란 수치와 파멸뿐이라는것을 새겨두라!》

옳다. 그것이다. 그것은 이 나라의 신성한 대지가 뿜어올린 절규다.

백절불굴은 반만년의 력사로 물려온 이 나라의 기질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 이 나라 국민을 정복하고저 50평생을 갖은 술수를 다 쓰며 파란만장의 오욕의 진창길을 허우적거려온 미국의 우두머리급 현지파견관인 이 노불의 공정한 총화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 땅을 삼키기 위해 전전긍긍해온 100년대결의 종점에서 미국이 얻어낸 결론이 되여야 한다.

미국은 그 결론에서 출발하여 이 나라 국민과의 새로운 관계력사의 장을 열기 위한 정책적전환을 해야 한다.

이것이 더 파멸적인 수치를 면할수 있는 미국의 최선의 방도이다.

노불은 고국의 독자들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이 피에 젖은 절규만은 한자도 빼놓지 말고 더 보태지도 말고 반드시 그대로 새겨넣으리라고 곱씹어 속다짐을 하였다.

그 길지 않은 문장으로 이 땅의 량심앞에 무릎꿇고 속죄하는 미국의 한 노복의 비로소 눈뜬 리성과 량심이 미국인들에게 전달되면 유한이 없을것이다.

(반도가 뿜어올린 용암같은 저 거센 절규에 우리모두는 눈을 떠야 한다.

미국이여― 너도 눈을 뜨라! 언제면 뜨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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