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가을날의 번개

4

 

이튿날 퇴근후 순애는 동료타자수들과 함께 지내온 합숙방에서 버들가지로 엮은 고리짝 두개를 들고 문을 나섰다.

합숙나들문을 나서고나니 어쩐지 속이 열리고 걸음이 가벼워졌다. 순애는 이날 옷차림도 바꾸었다. 평상시 입고다니던 양복이 아니라 아성이 좋아하는 수박색 짧은치마에 화려한 무궁화장식을 한 뜨개옷을 입었다. 그리고 하르르한 목도리로 상큼한 목을 맵시있게 둘러감았다. 얼굴도 몸매도 그 산뜻한 옷차림으로 더욱 싱싱하고 청신해보였다.

합숙마당을 지나 군인들이 보초를 서는 대문을 나서는데 한대의 찦차가 발동소리를 퉁퉁거리며 앞을 막았다. 여겨보니 륙군본부의 문건송달차였다. 이차는 장억수가 몰고다니면서 대상기관들에 문건을 넘겨주거나 받아온다.

발동소리가 멎더니 자동차문이 열리고 거기서 장억수가 서둘러 내리였다. 퉁방울같은 눈알을 디룩거리며 곧바로 다가오는 품이 찬서리를 풍긴다.

뜻밖에 나타난 불청객에 순애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놈이 기미를 차린게 아닐가. 왜 이 시간에 나타났을가?)

무엇인가 일이 터질듯싶은 불길한 예감이 앞섰다. 장억수가 합숙에 나타날 리유가 따로 없는것이다.

그러나 순애는 침착하려고 애쓰면서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알은체를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장억수의 눈이 퀭하니 처녀가 무겁게 들고있는 고리짝에 돌아갔다.

《어디로 가오? 그 고리짝은 뭐고?》

전례없이 투박한 어조였다.

《저…좀 의논을 하려고… 이건…》

당황해난 순애는 말꼬리를 제대로 가무리지 못한채 막아서는 그를 비켜서며 재게 걸음을 옮겼다.

《남자친구가 있다더니 정말이라는거요?》

장억수가 비켜서는 그의 앞을 막아서며 따지고들었다. 걸고드는 품이 순순히 놓아줄 잡도리가 아니다. 퉁방울눈이 칼날같이 날카롭게 번뜩이고 말투에 유리쪼각같은 선뜩한것이 느껴졌다.

사실 장억수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순애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한번 엇드레질해보는 소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행여나 해서 한번 따져보자고 합숙을 찾아왔던것이다.

순애는 더는 피해설수 없게 되였다고 생각하였다.

장억수가 여전히 장승처럼 버티고서서 비킬념을 보이지 않자 순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일이 이렇게 된바에는 더 끌게 없이 오늘 이 자리에서 매듭을 지어버리는것이 시원스러울것 같다. 어차피 그에게 알려야 할 일이고 한번은 겪어야 할 신경전이다.

순애는 오연히 마주서서 아래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속을 차돌처럼 단단히 다져먹었다.

《대위님, 난 지금 약혼자에게 가는 길이랍니다. 우린 한주일후 결혼하게 된답니다.》

《뭐라구?!》

순애가 예상했던대로 장억수는 눈이 떼꾼해지고 입이 쩍 벌어졌다. 어제 순애의 소리를 듣고는 설마 하고 서늘한 의혹과 불안속에서도 의연히 막연한 기대감에 사로잡혀있었는데 그 설마가 현실로 성큼 다가든것이다.

장가는 한걸음 다가서며 순애가 들고있는 고리짝 한개를 덥석 잡았다. 퉁방울같이 두드러져나온 눈이 무섭게 번들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렇단 말이지. 좋아, 내가 실어다주지.》

순애는 사납게 기를 쓰며 덤벼드는 장가앞에서 한걸음 물러서며 도리질을 하였다.

《아니 괜찮아요. 날 난처하게 만들지 말아요.》

《난처하게 만들지 말라구?》

《왜 이러세요? 백주에 길복판에서 부끄럽지 않아요?》

순애는 고리짝을 잡아채며 야멸차게 쏘아붙였다.

《뭘 해먹는 놈이야?》

장가는 순애가 다기차게 대들자 고리짝을 그냥 잡은채 물었다.

《헌병대 사령부에 있어요. 중령이예요.》

순애는 아성의 직함을 그대로 대주어 이놈이 더 수작질을 못하게 하고싶었으나 괜히 애인을 로출시키는것 같아 생각나는대로 위압감을 주도록 대포를 쏘았다.

순애의 예상대로 장가는 상대가 주어섬긴 애인의 직업과 직무에 쉽사리 주눅이 들어 고리짝을 놓아주었다. 헌병대의 눈밖에 났다간 장성별도 하루아침에 곤두박질하는 판이다. 그러나 장가의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지고 눈섭꼬리가 사납게 쳐들리고 그 밑에서 사기알같은 눈자위가 희뜩거리였다.

듣는 소리마다 금시 초문이요, 청천벽력이다. 게다가 그 애인이란 사람이 요즈음 세도줄이 하늘에 뻗친 헌병대쪽이라니 서뿔리 다쳐볼수도 없게 되였다.

《좋아, 가보라구.》

장억수는 이렇게 씹어뱉듯이 소리치고는 이런 궁해빠진 자리에서는 36계 줄행랑이 제일이라는듯 빠른 걸음으로 자동차로 다가갔다.

자동차문을 열던 장억수가 홱― 돌아서더니 고함치듯 불렀다.

《순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돌아서던 순애는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날아오는 눈길이 완전히 날이 선득선득한 도끼눈이다. 당장 씹어삼킬듯이 불이 팔팔 일고 서리발이 돋혀있다.

《두고보자. 계산은 따로 할 때가 있을거다.》

흡사 찢어지는듯 한 말투다.

장억수는 악에 받쳐 뇌까리고는 자동차에 올라 문을 소리나게 닫아버린다.

자동차는 인차 성난 주인의 발길질에 밸풀이라도 하듯 시커먼 가스를 꽁무니에 뿜어던지며 퉁퉁거리다가 심술스럽게 사라졌다.

장억수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순애는 10년 묵은 체증이 풀리는듯 속이 후련해졌다. 달과 해를 넘기며 그렇게도 속에 불이 나서 기다려오던 그 일을 제힘으로 비로소 해버렸다는 시원스러운 성취감과 쾌감으로 하늘로 날아오를듯 한 기분이다. 그러나 속 한구석에서는 야릇한 불안이 찾아드는것도 어찌할수 없었다.

 

청계동에는 김아성의 하숙방이 있다. 주인은 《흥국상회》소속의 한 동지였다.

아성은 올봄부터 그 집 사랑방에 기거하여왔다.

그날 늦은 저녁때 무심히 방문을 열고 들어서던 아성은 방 한쪽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순애를 보자 와뜰 놀라며 문턱에 얼어붙었다.

《웬일이야?》

아성의 목소리엔 순애가 상면날자도 아닌 때에 나타난데 대한 불안의 음조가 짙게 어려있었다. 그러거나말거나 순애는 앉았던 자리에서 발딱 일어나 아성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의 갸름한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확 피여올랐다.

《아이, 겨우 기다려냈네.》

순애는 묻는 말엔 동문서답하며 애인의 팔을 흔들어댔다.

《그래 내가 온게 기쁘지 않은게죠?》

처녀의 밝고 무랍없는 교태와 엉석에 총각의 어두운 낯빛도 노을빛이 스러지듯 스르르 풀리였다.

《아니, 저건 뭐라는거요?》

그제야 방구석에 놓여있는 두개의 고리짝을 띄여본 아성의 눈이 다시 커졌다.

《이사짐이죠.》

처녀의 얼굴은 명랑하였지만 총각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사짐?… 흥, 이건 정말 무슨 케속인지 모르겠군. 그래 대체 어찌된 일이요? 무슨 일이 있었소?》

그제야 순애는 얼마전에 장억수와 만났던 이야기를 간단히 들려주었다.

《어때요, 시원스럽죠?》

순애는 자못 긴장해지는 아성의 마음속을 넘보자 이렇게 일부러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를 마치였다.

《그래서… 어떻게 하겠다는거요?》

김아성은 여느때없이 수다를 피우며 들떠있는 처녀가 숱한 문제거리를 만들어냈다는 무거운 생각부터 들어 책망조로 몰아댔다.

한데 처녀는 총각의 걱정거리를 피하고싶은듯 여전히 깔깔거리고 기분이 나서 매달린다.

《아유 숨이 차. 방이 너무 덥군요. 에그머니, 저 란초 좀 봐요. 게으름뱅이… 물을 주는데 한시간이 걸릴가.》

처녀는 창가림을 걷어올리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그다음에는 부엌에 나가 바가지에 물을 떠가지고와서 시들어가는 화분에 천천히 물을 주었다.

《그렇게 마구 쏘아대니 숨이 차서 대답할수 있겠어요. 저녁 잠자리는 걱정마세요. 내 집에서 자면 되지요.》

처녀는 방안의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옷가지들까지 제자리에 틀어박고서야 침대모서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깔끔한 눈초리로 아직도 떨떨해있는 애인의 얼굴을 조롱하듯 쳐다본다. 방안에는 알싸한 향수내와 함께 처녀가 안고온 싱그럽고 애틋한 생활의 향취가 가득찼다.

그러나 아성은 도무지 순애의 케속을 알수 없어 여전히 의혹이 앞서 지꿎게 물었다.

《합숙에서도 나와버렸다는거요?》

《그럼요. 오늘부터 난 여기 내 집에서 자고먹고 하겠다는거지요. 아유, 이젠 살아났다.… 그 눈!… 무서워… 좀 웃어요. 내가 이렇게 문턱을 넘어선게 기쁘지 않아요?》

처녀는 행복에 취하여 까르르 웃고는 그의 실팍한 목에 매달렸다. 자기들의 운명에 서서히 엄습해오고있는 대재난에 대한 공포, 그 불안속에서 감쳐드는 사랑의 애모쁨, 드디여 이태도록 아슬아슬하게 끌어온 지겨운 《사랑놀이》를 끝내고 그리운 련인의 집에 들어섰다는 시원스럽고도 가슴벅찬 환희 그리고 다시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을 떠나지 않으려는 불같은 결심이 그동안 갈망하면서도 감히 넘어서지 못했던 금단의 세계에로 흔연히 몸을 던지는 담과 용감성을 만들어낸것이다.

김아성은 애인의 주저없는 사랑의 공세에 점직해서 오히려 제쪽에서 얼굴이 온통 새빨개지며 한걸음 뒤로 비켜서기까지 하였다.

《엥히, 뭐가 뭔지…》 하고 자기도 알지 못할 소리를 내고는 애인의 애무를 받아들여 그의 나긋나긋한 허리를 근육이 울뚝불뚝 삐여져나온 억센 팔로 한껏 그러안았다.

그들은 한동안 한몸으로 엉켜 방 한복판에 서있었다. 이 순간만은 그들의 마음속에 아무런 복잡한 생각도 껴들지 못하였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의 심장의 투닥거림만이 밀착된 가슴팍을 통하여 쿵쿵 세차게 전해질뿐이였다. 그 울림이 방안을 가득 채우고 세상을 온통 메우고있는것 같았다. 갑자기 사위가 끝없는 고요에 묻힌듯싶은데 다만 어데선가 밤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이 밤의 고요와 적막은 그들을 위해 내려앉는것같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그들은 얼굴이 한껏 달아가지고 쇠침대에 걸터앉았다. 잠시 숨을 가라앉힌 다음에야 김아성은 다시 순애가 오늘 장억수와 끝장을 보고 여기에 나타난 일이 가지는 상서롭지 않은 의미와 후과에 대하여 생각을 이어갔다. 그는 아직도 순애와 세해가까이 정을 나누면서 처음으로 그토록 뜨거운 포옹을 나눈 그 흥분의 여파를 눌러버리느라고 어둠이 서린 창밖을 우두커니 내다보면서 머리속을 랭철하게 정리하였다.

그러니 이제는 타자실에서 빠져나올것을 결심한것인가? 장억수와의 관계도 결산을 했다는건가? 순애의 일에 대해서는 회장동지가 직접 관심하고계신다. 회장동지가 순애의 분별을 잃은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시겠는가? 나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실망하시겠는가? 순애는 도대체 투쟁에 자신을 바친다는 그 의미에 대하여 어떻게 리해하고있는것인가? 어떻게 《흥국상회》에 보고하지도 않고 기분나는대로 초소를 리탈할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나에게 아예 이사짐까지 싸들고 나타나면 도대체 어쩌자는건가. 우리 동지들이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가? 여기에는 도덕륜리라는 문제도 있지 않는가? 이런 문제에서는 깨끗해야 한다. 부끄럽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것은 지금이야말로 순애의 위치가 더욱 중요한 시기라는것이다.…

한꺼번에 뇌리를 어지럽게 마구 휘감는 이런 생각들에 김아성은 뒤골이 지끈해왔다. 떠오르는 생각이 곬을 타지 못하고 온통 갈팡질팡이다. 그러나 성취감과 행복의 무아경에 들떠있는 처녀앞에서 그 숱한 문제거리들을 실토해놓는것이 여간 괴로운것이 아니였다.

그는 끝내 애인의 기분을 흐려놓고싶지 않아 어색한 어조로 입을 뗐다.

《래일 회장선생님을 만나 결론을 받자구. 참, 회장선생님께 드릴 새 자료는 없소?》

순애는 돌아앉더니 품에서 성냥갑만한 작은 곽을 꺼냈다. 아성은 안주머니에 그걸 깊숙이 건사하고나서 말했다.

《이젠 자자구. 난 머리가 뗑한게 뭐가뭔지 통 모르겠군. 주인집에서 불끄기 전에 어서 가보라구.》

순애는 이 집에 여러번 찾아왔는데 밤시간을 너무 지체했을 때는 주인집에 건너가서 해동갑나이인 주인집 딸과 함께 자군 하였다.

《흥!》

순애는 다시 김아성의 목을 꼭 끌어안고는 방금전까지 눈가에서 새물거리던 미소가 언제였더냐싶게 새침해졌다.

《하, 이거…》

김아성이 어처구니없는듯 그의 손을 목에서 풀어내며 픽 웃었다.

《왜 웃어요? 정말 장억수한테 갈가봐. 나때문에 몸살이 나 하는데.》

순애는 웃지도 않고 총각을 빤드름히 쳐다보며 앵돌아져서 대꾸한다.

《하…》

《왜 싱겁게 웃기만 해요? 얼마나 끌끌한 사내대장부라구. 생긴건 또 얼마나 미끈하구. 내게는 또 얼마나 정이 쏙쏙 들게 놀아준다구. 어제는 뭘 또 사왔는지 알아요? 자, 보라요.》

순애는 뜨개옷주머니에서 아무렇게나 처넣은 황금빛갈의 목걸이를 꺼내여 방바닥에 내던졌다. 순애는 지금까지 장억수가 마련해준 귀중품들을 김아성이를 통하여 《흥국상회》에서 자금으로 전환시켜 리용하도록 보내주군 하였다. 다 합치면 그 값이 약차하였다.

《정말 어떻게 된거야, 오늘은?… 장억수 혼을 빼라고 보냈더니 제 혼을 전당잡히고 온게 아니야?》

김아성이 순애가 아직도 자기의 진정을 몰라주는게 약이 올라 건주정을 부려보며 투덜거리였다.

《흥, 그럴수도 있지요 뭘. 그러니 거기서도 우물쭈물하지 말아요.》

《하 참!》

김아성은 비켜설수록 살품에 파고드는 순애의 다기찬 모습이 새삼스러워 입을 헤 벌리고 픽 웃기만 하였다.

순애는 김아성에게서 물러나 방바닥을 깨끗이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고리짝에 있던 물건들을 부엌에도 내가고 장안에도 집어넣고 말끔히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소랭이에 물을 떠가지고 와서 소매를 걷어올리고 재빨리 방바닥을 닦았다.

그때까지 김아성은 침대에 그냥 우두커니 앉아서 걸레질을 걸싸게 하는 처녀를 지켜보기만 하였다.

순애는 손을 닦고와서 다시 김아성의 발치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눈을 동그랗게 해가지고 쳐다보았다. 처녀의 예쁜 눈에서 장난기는 사라지고 고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원망과 서글픔이 어리였다.

《난 누구예요? 거긴 누구예요? 당신앞에서 내가 지금도 얌전하게 례절을 지키라는거예요?》

살갑게 귀전에 파고드는 애정어린 항변에 아성은 어쩐지 가슴이 후끈후끈 달아올랐으나 자기를 다잡느라고 애썼다.

《우리에겐 약속이 있지 않아?》

김아성은 고개를 돌린채 어깨너머로 사정하듯이 말하였다.

《통일된 다음에 결혼을 한다는 약속? 아이참, 그 자료를 보세요. 요새 장억수가 날 제 집에 기어이 끌어가려고 눈이 새파래서 덤벼치는게 실없는게 아니예요. 난 정말 그 싱검둥이앞에서 더는 견뎌내지 못하겠어요. 난 녀자예요. 녀자는 약해요. 거기서야 날 잘 알지 않아요. 내가 지난 이태동안 속을 썩여온것이 아직도 모자란다는 말인가요. 이제는 더는 참아낼수가 없어요. 이제는 더는 〈사랑놀이〉를 하지 못하겠단 말이예요. 아니, 더 할수도 없게 됐구요. 전쟁이예요, 전쟁… 그래서 난 결심하고 자기 주인을 찾아온거예요.》

처녀는 예전의 순진하던 티는 흔적도 없이 눈이 따갑게 총각을 쳐다본다.

총알같이 여무진 소리로 마음속에 다져왔던 설음을 왈칵 토해놓는 처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시작되였다가 비애와 울기가 뒤섞인 부르짖음으로 바뀌였다.

처녀의 설음겨운 목소리가 아성의 가슴을 불갈구리로 지지듯 쓰리게 하였다.

그는 《순애-》하며 돌아앉아 불러놓고는 뒤말을 찾지 못해 허둥거리였다.

《날더러 얌치없고 바람난 계집이라고 해도 좋아요. 어쨌든 난 당신의 사람이니깐요. 난 결혼식은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당신이 곁에 있어주면 돼요. 당신은 녀자의 마음을 너무도 몰라줘요. 그 싱검둥이 말이 무심치 않아요. 전쟁이라는 말을 장가가 날 꼬이느라고 입밖에 올리는게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당신은 그저 일, 일이지요. 난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오직 당신만이 있을뿐이예요. 당신은 내가 장억수에게 짓밟히우는게 두렵지 않아요? 당신은 정말 너무해요.》

마지막 말마디들은 눈물에 젖어있는듯 하였다. 처녀는 끝내 벽쪽으로 돌아앉으며 두손바닥으로 얼굴을 싸쥐고 《흑- 흑-》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어쩔수 없는 노여움과 애수와 실망의 격렬한 감정이 가슴속에 마구 뒤설레다가 맑은것이 되여 하염없이 솟아올랐다.

《순애!》

아성은 처녀의 그 눈물젖은 설분에 자신을 버티여오던 의지력을 잃고말았다. 그는 처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손수건을 꺼내 처녀의 젖은 눈굽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처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며 더 세차게 흐느끼며 샘처럼 좔좔 눈물을 퍼올린다. 김아성은 처녀를 한팔로 꽉 끌어안은채 어떻게 위로했으면 좋을런지 몰라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쩔쩔맸다.

《순애, 울지만 말고 내 말을 들어줘. 내게도 순애보다 더 귀중한 사람은 없어. 내가 신의주에서 멋모르고 망둥이질을 했다가 서울로 도주해온것은 내 인생의 수치이고 비극이였어. 그러나 난 이 서울에 와서 잃은것보다도 얻은것이 더 많아.

그게 뭔가 하니 첫째로 조국이 뭔가 하는걸 알게 된거야. 둘째로는 어떻게 살아가는게 참다운 인생인가 하는걸 알게 되였어. 셋째가 뭔지 알아? 그건 순애를 내 사람으로 정하게 된거야. 이건 내 인생의 그 무엇에도 비길수가 없는 행복이야. 이건 죄다 사실이야. 이런 소리는 좀 시시한 소리지만 난 순애를 위함이면 백번 죽을수 있을거야. … 그런데 … 그런데 말이야… 우린…》

절절하게 엮어가던 김아성은 또다시 말문이 꺽 막히고말았다. 어차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순애에게 리성을 찾도록 깨우쳐주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가 이 자리에서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을것 같아 꺼내놓기가 땀이 났다.

순애가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살그머니 막아주며 속삭이였다.

《알아요. 다 알아요. 더 말하지 말아요.》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침묵속에 그들은 서로의 믿음과 정을 새삼스럽게 다시 뜨겁게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밤새의 울음소리가 더욱 가슴에 스며들었다. 신비로운 사랑의 선률이 침묵속에서 두 련인의 품에서 품으로 울려가는듯 하였다. 그러나 그 가락은 예전처럼 애무와 순결과 아름다움만이 실려있는것이 아니다.

잠시후 순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경대앞에서 흩어진 머리를 얼레빗으로 비다듬은 다음 아성의 앞에 단아한 자세로 섰다.

《용서해요. 전 다 알아요.》

《그런데 왜?》

김아성은 흔연히 자리에서 일어난 처녀의 파릿해진 모습에 덴겁을 하며 물었다.

《다 알아요.》

순애는 한결 차분하게 곱씹었다. 또렷한 말새로 분명하게 말을 잇는다.

《주인집에 가서 자겠어요. 새벽에 일찌기 참모부에 나가야 되겠으니 기다리지 말아요.》

《아니, 여기서 자라구. 응, 순애?》

아성이 당황해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처녀는 아성의 손에서 손목을 뽑는다. 다소 서글픔이 어리여 아이들처럼 몇번 도리질을 하였다. 하냥 애정어린 미소가 찰랑이던 그 고운 눈에 실리는 애수에 아성은 가슴한복판으로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는듯 썰렁해졌다.

더 만류할새 없이 순애는 얼른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허둥지둥 따라일어서던 아성은 그를 붙잡을념을 내지 못하였다. 방문이 닫기자 그 자리에 우뚝 발을 세우고 그가 사라진 나들문쪽을 우두커니 내다보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창밖에서 순애의 고르지 못한 발자국소리가 타박타박 멀어져가다가 어둠에 묻히고 말았다.

별안간 그의 가슴에도 형언할수 없는 고독과 불안이 밀물처럼 욱 쓸어들어 속을 서늘하게 하였다. 처녀가 자기 품에서 영영 떠나가는듯싶은, 가슴을 에여내는 슬픔이 자꾸 뇌리에 감쳐든다. 순애가 남기고간 향긋한 냄새가 아직도 방안에 감돌았다.

아성은 그가 벗어놓은 머리수건을 움켜쥐였다. 처녀의 체취에 다시 취하고싶은듯 거기에 얼굴을 묻고 길게 숨을 들이쉬였다. 어쩐지 불길한 생각만이 자꾸만 갈퀴처럼 박혀들어 좀체로 괴로운 심정을 달랠수 없었다. 불시에 《난 녀자예요.》 하던 처녀의 애끓는 하소가 고막을 찡- 울렸다.

그 연연한 웨침은 비애와 슬픔의 눈물이 어린 쓰라린 메아리로 심장에 젖어들어 사나이의 든든한 육식을 단숨에 휘감아버리는것이였다.

순애는 륙군참모부 타자실에서 일을 시작한이래 여러번 이와 류사한 눈물과 한숨으로 김아성의 속을 태운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아성은 임무의 중대성으로 그를 위로하고 설복하여 되돌려세우군 했으나 그자신도 애인이 겪고있는 심중의 고통과 번민으로 뼈가 저리군 하였다. 그는 애인이 제공하는 자료마다에 얼마나 쓰라린 고뇌와 시련이 쌓여있는가를 알고있었다.

꽃같은 웃음과 마음씨 고운 정을 파는것이 얼마나 수치에 겹고 설음에 겨운 일이라는것을 오열을 터뜨리는 애인의 눈빛에서 똑똑히 읽을수 있었다.

참자, 참아내야 한다.… 이러루하게 리성을 잃지 않도록 타이를 때면 자기의 속도 천갈래만갈래로 찢기는듯싶었고 그래서 자신의 설음도 다잡느라고 곱절이나 열을 올리고 심기가 무거워지군 하였다. 그러나 지금 순애의 눈물겨운 하소연은 더는 되돌려세울수 없는 전례없이 절박하고 심각한것으로 하여 그를 더욱 괴롭히고 슬픔으로 자욱한 사랑의 매연속을 헤여날수 없게 하는것이였다. 자신의 속도 이제는 애인의 《사랑놀이》에 더 타협을 할수 없게 지쳐 아예 녹초가 되여버렸다.

(그러나… 임무가… 우리에겐 임무가 있어.…)

격렬한 감정에 도전하는 리성의 목소리는 모질지 못했다.

아성은 밤늦도록 침대모서리에 망두석처럼 굳어져 정가로운 달빛이 흐늘어져내리는 창밖을 속절없이 멍하니 내다보았다. 《사랑놀이》가 어떻게 끝을 보려나… 불안한 밤이였다. 지루한 밤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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