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력사의 죄인

1

 

이른아침 민순임은 평시와 다름없이 동틀무렵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달치고도 몇번씩 자리를 옮기지만 지휘부로 되고있는 이 집의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동틀무렵이면 정시명은 마당에 나가 아침체조를 하고 마당을 쓸고 장작을 팬다. 그 일이 끝나면 신문을 보고 방송을 듣고는 아침상을 받는다.

민순임은 비자루소리를 들으면서 가마에 삶은 보리쌀을 넣고 그우에 기장쌀과 당콩을 얹은 후 아궁에 불을 지피였다. 바싹 마른 장작은 불지피기가 바쁘게 탁―탁 소리를 내며 불꼬리를 쳐든다.

그런데 난데없이 밖에서 닭의 비명소리가 나더니 사랑방에서 자던 박륭정이 깜장닭 한마리를 들고 부엌에 들어섰다.

《사모님, 밤새 편안하셨습니까?》

《예, 편히 주무셨어요? …그런데 닭은 갑자기 어째서요?》

민순임은 부지깽이로 아궁속을 들춰주다가 새벽참에 박륭정이 닭모가지를 비틀어가지고 들어오는게 이상스러워 물었다.

《나 좀 끓는 물을 주시오. 제꺽 튀해드리지요.》

《한창 알받는 닭인데…》

민순임은 살이 통통한 알낳이닭을 제낀게 아쉽기도 하고 주인집에 미안스럽기도 해서 혀를 끌끌 찼다.

박륭정은 더 말이 없이 문턱에 걸터앉아서 손기가 날래게 더운 물을 살살 끼얹어가면서 닭털을 뽑기 시작하였다.

민순임도 밥물이 잦아드는 소리가 나자 불을 국가마쪽으로 밀어놓고 그와 마주앉아 털을 뽑았다.

손질한 닭을 옆가마에 앉히게 한 박륭정이 다시 마당에 나가 잘게 팬 장작을 한아름 안고 부엌에 들어왔다.

《아유, 그만둬요. 내 어련히 하지 않을라구요. 그런데 우리 집 나그네는 어디 가셨는가요?》

민순임은 마당이나 방에서 기척이 없어 물었다.

《강변에 나갔습니다. 시원히 강물에 몸을 씻고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강변에요?》

민순임이 바깥쪽을 내다보았다.

새로운 거점생활체계가 선이래 바깥사업이 없을 때는 아침일과로부터 저녁 잠자리에 들기까지 절대로 울타리밖에 나서는 일이 없던 남편이 이 아침에 강변에 나간게 이상스러웠다. 한참 지나서야 대문여닫는 소리가 나더니 정시명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김이 뽀얗게 서린 부엌으로 정시명이 성큼 들어섰다.

《그 냄새 구수한게 좋구만.》

정시명이 내미는 젖은 수건을 받아들던 민순임이 남편의 달라진 모습이 희한해서 입부터 벙긋 열렸다.

《에구머니, 어찌된 일이예요?》

거의 한해동안 품들여 다스려온 채수염이 간데없이 말끔히 사라지고 환갑나이를 부르게 하던 얼굴모상이 몇십년은 더 젊어보이게 젊고 탄력에 넘친 모습으로 돌아온것이다.

《허허, 왜 그렇게 놀라오. 뭐 이 수염은 당신이 싫어하니 아예 한강에 띄워보내고말았지. 어떻소? 이렇게 나서니…》

정시명이 반반해진 턱부리를 쓸어만지며 호탕하게 웃었다.

《좋아요!》

민순임은 한결 젊음과 패기가 돋쳐보이는 남편의 모습을 되찾은게 너무 기뻐서 이렇게 짧게 대답하며 얼굴에 함뿍 미소를 지었다. 비합법생활로 이전한 후엔 남편이 신변위장을 위하여 채수염을 기르고 60객 시골유생처럼 행세하면서 행동거지도 그에 어울리게 늙은이냄새를 풍기게 할 때면 아무리 필요에 따르는것이라 하지만 남편의 모습에 때일찍 찾아온 늙음이 은근히 서글퍼지던 녀인이였다. 례영이도 그게 질색이였던지 민순임더러 수염만은 제발 기르지 말게 말씀드리라고 여러번 간청했으나 남편이 생각이 있어 하는 일이라 한번도 당자앞에서 내비치지는 않았어도 언제면 채수염을 밀어던질 때가 오려나, 그날은 아마 통일이 되는 날이겠지 하고 애모쁘게 기다려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날 아침에는 무슨 일이 생겨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을가.)

수염이 없어지니 두툼한 입술과 무쇠같이 단단하게 생긴 턱이 어울려 이마밑에서 이글거리는 시꺼먼 두눈과 우뚝 솟아오른 코마루가 더욱 강인하면서도 열정적이고 담기가 있어보였다.

사실 남편의 얼굴은 이마에 깊이 패인 주름을 제쳐놓으면 오히려 나이보다 젊어보이게 하는 얼굴이였다. 강직하고 담력이 비끼고 철의 의지와 신념이 력력한 그 준수한 얼굴에 미소가 피여오를 때면 금시 아침이슬을 털어버리고 찬란한 해빛을 받아안은 꽃잎처럼 부드러움과 따뜻함이 어려 상대방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즐겁게 한다.

채수염때문에 지금껏 살아오면서 습관되여왔고 은연중 녀인의 행복으로, 자랑으로 되여온 남편의 타고난 그 모습을 잃게 되였을 때 민순임은 남편이 벌려가는 사업이 그렇게도 모질고 위태한것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면서 그의 신상에 대한 근심으로 애끓는 한숨과 눈물을 남몰래 짓군 하였다.

그 정겹고 미더운 모습을 한해만에야 되찾은 녀인은 남편의 얼굴에서 행복의 눈길을 오래도록 떼지 못하다가 턱부리에 굵은 눈물방울이 매달린것을 의식하자 방긋 웃으며 얼른 고개를 돌리고 옷고름으로 눈굽을 찍어냈다.

《허허, 참 당신두…》

정시명은 민순임의 속마음을 헤아리고 즐겁게 웃으며 부엌문턱을 넘어 방으로 올라갔다.

잠시후 두리반상이 차려지자 정시명이 방문을 열고 큰소리로 박륭정을 찾았다.

박륭정은 지휘부가 옮겨질 때마다 자기의 젊은 색시를 데리고 옮겨앉으면서 늘 사랑방에서 지내군 하였다.

《왜 처도 데리고 오지.》

박륭정이 나타나자 정시명이 나무람조로 말하였다.

《우린 벌써 아침을 치렀습니다.》

《그래… 박동무, 뭐 한잔 없겠소?》

그 소리에 박륭정이 얼른 되돌아섰다.

《제일 좋은걸루…》

정시명이 유쾌히 웃으며 사랑방으로 뛰여가는 박륭정의 등뒤에 대고 소리쳤다.

《아니, 웬일이십니까?》

민순임이 아침술은 리유불문하고 절대로 상에 올리지 못하게 하던 남편이 이날따라 아침상에 술을 찾는게 이상스러워 물었다.

《허허, 뭘 그러오. 오늘은 내 좀 당신과 한잔 해야겠소.》

《저하고요?! 호호…》

민순임이 희한해하면서도 그 말이 사뭇 반가워 소리내여 웃으며 부엌에 나가 잔을 가지고왔다.

박륭정이 술병을 들고오자 정시명이 받아들고 뚜껑을 열었다.

《이 닭이 자리를 잘못 잡았군.》

정시명은 여전히 싱글벙글거리며 자기앞에 있는 통닭을 민순임쪽에 옮겨놓았다.

《원. 참, 어째서 이러세요?》

민순임이 남편의 속궁리가 짐작이 가지 않아 도로 통닭접시를 옮기려는데 정시명이 손짓으로 그냥 둬두라고 하고는 잔들에 술을 채웠다.

그리고는 한마디 하였다.

《박동무, 오늘이 무슨 날인고 하니 이 사람의 생일날이라우.》

《예?… 제 생일이라구요?!… 오늘이 며칠이기에…》

민순임이 덴겁을 한듯 크게 반문하는데 가뜩이나 큰 눈이 뎅그랑해져서 박륭정이도 놀라와하였다.

정시명이 폭소를 터뜨렸다.

《허허, 저렇다니깐… 숱한 사람들의 생일상이요, 결혼상이요 다 차려주면서 당신은 제 생일은 잊고 지내왔지. 사실은 내가 너무 덜퉁한 사람이였소.》

《원, 그러지 마세요. 저야 뭐… 당신이 그저 곁에서 함께 밥상에 마주앉아주시면 그게 노상 명절이고 생일인걸요.》

《사실은 김명호부회장이 일깨워주었소.

어려운 싸움길에 오르면서 길봉례아주머니에게 이제 열흘후이면 당신 생일이니 어떻게 하든지 올해에는 거저 넘기지 말라고 당부하였다누만. 생일소리는 례영이 지난해에 날 바래주러 개성갔다오면서 김부회장에게 했다고 하오. 올해에는 자기가 어머니 큰상을 꼭 차리겠다고 했다는거요. 저 닭은 사실인즉 그렇게 되여 당신 생일말이 길철동무에게까지 돌아와서 그 사람이 구해서 보내왔소.

자, 그러니 이건 뭐 차린건 없지만 우리 동지들의 마음이 두루두루 고여있는 상이고 동지들이 부어주는 술이라고 생각하오. 우리 동무들이 당신에 대해서 고마와 할 때면 나도 참 기쁘오. 잔을 받소.》

이렇게 잔을 권하는 정시명의 목소리는 유난스럽다.

민순임은 잔을 받아들고 목이 꽉 잠긴듯 말 한마디없이 눈물만 좔좔 쏟아놓았다. 자신을 위하여 소리없이 기울여준 례영이와 귀중한분들의 그 진심이 너무도 고마왔다. 생일이라야 별식이라고 이름붙일건 닭 한마리밖에 없다. 하지만 진수성찬인들 이 닭 한마리에 비길소냐.

《사모님, 어서 잔을 내십시오.》

박륭정은 이렇게 권하고 《전 자동차를 점검하겠습니다.》하고 량주간이 시간을 보내도록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순임이 바지가랭이를 잡았으나 박륭정은 자기는 배를 채우고왔다고 하면서 한사코 방안에서 물러났다.

정시명도 여느때라면 굳이 잡아앉혔겠는데 별말없이 놓아주었다.

정시명은 손을 걷어올리고는 닭다리를 뜯어 안해에게 내밀고 자기도 하나를 들었다.

《어, 잘 물렀구만. 자, 좀 맛을 보오.》

민순임은 닭다리를 받아들고 《헉―》하고 흐느끼더니 또 어깨를 흔들었다.

《례영이 고게 떠났어도 이렇게 눈물만 짜게 하는구나. 부회장선생님은 또 어떻구,… 사지판에 찾아가면서도 생일상걱정을 해주시다니, 난 병문안 간다간다 하면서 벼르다가 뵙지 못하고 떠나보냈는데…》

《됐소, 우리 동무들이야 다 그런 사람들이지, 자, 생일날에 눈물을 보이면 명이 짧아진다고 했소. 길게 살아서 좋은 일을 많이 봐야지. 식사를 합시다.》

정시명은 안해의 손에 수저를 쥐여주고 자기도 시래기국에 보리밥을 말았다.

민순임은 닭고기를 잘게 뜯어 남편의 국그릇에 넣어주었다.

《허허, 생일은 내가 쇠는구려.》

정시명은 민순임을 만류하지 않고 껄껄 웃고말았다.

민순임은 그냥 닭고기를 뜯어 남편의 국그릇에 넣어주다가 그제야 속눈섭에 눈물을 달고 배시시 웃었다.

《이제 통일잔치를 치르면 만경대에 갑시다. 장군님을 모시고 순화강에 가서 당신 솜씨로 어죽을 끓여 장군님을 대접합시다. 고기낚는 솜씨는 나도 누구못지 않다오.》

《호, 그런 날이 정말 올가요?》

《오겠지.》

《참말 그날이 올가요?》

《원참, 오지 않구! 꼭 올거요.》

그들은 뜨거운 상념에 잠겨들었다.

문득 민순임이 목이 메여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김정숙녀사께서… 그렇게 돌아가시다니요…》

《참 믿어지지 않소. 그렇게 젊으신 나이에 돌아가실줄이야 뉘 알았겠소.》

지난해에 그들은 김정숙녀사의 부고를 평양방송을 통하여 들었다. 그날 저녁 그들부부는 방안에 제상을 차려놓고 북쪽땅을 향하여 목놓아울었다.

《당신 걱정도 자심하게 해주시던 인자한분이시였소. 난 정말 통일이 되면 당신을 데리고가서 맨 처음 녀사께 인사를 올리게 하고싶었소. 녀사님이 참 지당한 말씀을 하셨지.

당신은 그동안 그분 말씀처럼 서울에 와서 내게는 의지가 돼주고 힘으로 돼주었소.》

《제가 무슨 일을 한게 있어요. 그분의 말씀대로 당신을 도와드리지 못한 걱정만 늘쌍 쌓아두고 사는데…

전 돌아보면 자랑할만 한것은 없구 그저 부끄럽구 미안스러운 일이 더 많아요. 정말 제가 더 잘했드라면 더 잘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어요.》

《그런 말은 하지 마오. 미안한 일이야 내가 많지. 하여튼 우린 오래오래 살게 될거요. 그러니 모든걸 옛말하며 살게 될 때를 보게 될거요. 그런 날을 보자면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지. 자, 식사를 마저 합시다.》

민순임이 또 눈지방이 불깃불깃해졌다. 서울에 와서 여러가지 일을 당하고난 민순임은 참말로 제가 남편앞에서 바르게 처신을 못해서 어그러진 일들이 적지 않다고 늘 속을 썩여온다. 그럴 때면 자기는 남편앞에서 일생토록 짐이나 되고 고생거리가 되고있다고 자기의 불민함을 한탄하군 한다.

정시명은 상을 물리자 곰방대를 꺼내여 써래기담배를 꽁꽁 다져넣고 걸탐스럽게 빨았다. 언제나 그러하지만 이 곰방대를 물면 마음이 깨끗이 정화되여오른다.

그는 담배연기를 달게 삼키며 뜨거운 추억에 잠겨들었다. 곰방대의 불이 꺼지자 재털이에 툭툭 털어버리고는 손수건을 꺼내 정성스레 닦기 시작하였다.

정시명은 곰방대를 다 닦고나자 조끼주머니에서 회중시계도 꺼내놓았다.

그는 회중시계를 한참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곰방대와 함께 붉은 비로도천에 싸서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벽장안에 있는 양복을 꺼내입었다. 꼭 한해하고도 반년만에 다시 입어보는 양복이였다.

정시명은 거울앞에 서서 머리단장을 하고 옷매무시도 깐깐히 보고나서 민순임을 불렀다.

《여보, 이리 좀 들어오오.》

설겆이를 하던 민순임이 얼른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부엌에서 올라왔다.

민순임은 진곤색양복에 밤색넥타이를 조여매고 중절모를 눌러쓴 남편의 한결 젊어진 모습을 기쁨이 어린 눈으로 홀린듯 쳐다보았다.

《시계와 곰방대는 두고가겠소. 정히 간수하오.》

《그건?!…》

민순임은 남편이 길 떠날 때면 늘 채근해서 몸에 정히 품고 다니는 그 뜻깊은 애용품들을 두고 가겠다는게 이상스러워 묻는듯 한 눈매를 지었다.

오늘따라 남편의 거동에 별스러운게 많다. 동지들의 성의라 하지만 닭까지 잡게 하고 아침상에 술을 놓게 한것이라든가 밥상에 마주앉아 말수더구가 많아진게 례사롭지 않다.

민순임은 어쩐지 불안해졌다. 무엇인가 상서롭지 않은 일이 불쑥 앞을 막아설것만 같았다.

《자. 가겠소. 사람일을 어찌 알겠소. 며칠 지체할수도 있으니 내 걱정은 말고 기다리오.》

정시명은 무엇인가 말할듯말듯 바재이는 안해의 수더분한 얼굴을 눈여겨보다가 서둘러 작별을 고하였다.

문밖에선 박륭정이 자동차뒤문을 열어놓고 정시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민순임이 대문을 열어주고는 자동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한자리에 굳어져서 바래주었다. 그는 자꾸만 남편의 신상에 불길한 변이 생길듯싶은 조마조마한 심정을 금치 못해하다가 《아낙이 나그네들의 걸음에 이 무슨 요망한 수작이냐.》하고 스스로 자기를 꾸짖었다.

주인을 바깥으로 내보낼 때면 뇌리에 때없이 찾아드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때마다 마음을 밝게 가지고싶어 애를 끓이는 민순임이였다.

민순임은 금방 비꽃을 날릴듯싶은 초여름의 음산한 하늘을 근심스럽게 쳐다보았다.

희뿌연 하늘에는 해는 보이지 않고 안개같은 구름이 자욱히 메워있었다.

지금 민순임은 어쩐지 불안해지는 마음을 털어버리려 하면서도 남편이 생사기약이 없는 어려운 싸움길에 올랐다는것은 모르고있었다.

 

정시명은 송호정에게로 가고있었다.

송호정은 이 시간에 리승만의 비서 신정섭을 만나 경무대연회초대장을 넘겨받을것이다.

리승만은 이날 정오에 경무대에서 2기 《국회》의원들을 위한 연회를 차린다.

리승만은 연회장에 자기 직계의 소속의원 서른명과 그들의 당선에 기여한 선거참모들과 자금후원자들을 초청할것이라 한다.

리승만이 연회를 차린다는 소식을 받은 정시명은 경무대비서실의 신정섭에게 자기에게도 초대장이 차례지도록 하며 연회후든지 도중에 다문 몇분이라도 리승만과 자기와의 단독면담을 주선할데 대한 특별임무를 주었다.

임무를 받는 순간 신정섭은 리승만과의 정면대결에 직접 뛰여들려는 정시명의 비장한 결심에 깜짝 놀랐다. 그는 임무의 가능성여부를 타산하기 전에 그건 모험이고 만용이라고 손을 내두르기부터 하였다.

정시명은 자기가 결행하려는것이 뒤날에 리승만에 대한 환상에서 나온 정치적몽매와 객기라는 비난을 들을수 있다고 각오를 하였다. 혹은 그 어떤 영웅심리의 발동으로 평가될수 있다고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비난앞에서도 자기를 지켜낼수 있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리승만의 혈관에도 뛰고있는 백의민족의 붉은 피만은 인정해주고싶었다. 그래서 어느 기회에라도 리승만을 만나면 그도 민족적대업에 참여시키도록 기회를 주자고 하시던 김일성장군님의 그 바다같은 도량만은 꼭 전해주고싶었다.

궁성요배에 넋이 팔려 일본천황을 하느님처럼 받들며 철이 들면서부터는 일본놈의 특등주구로 살아온 방대광이마저 비록 좌절은 됐어도 민족을 위한 의로운 길에 나섰거늘 그래도 살아온 방식은 시시껄렁해도 70여평생 《독립》이요, 《애국》이요, 《겨레》요 하는 말을 념불처럼 외우며 살아왔던 리승만이 민족의 대비극앞에서 그렇게도 랭담할수가 있겠는가. 리승만은 반드시 민중의 절규를 들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고초를 씹으며 찾아낸 정시명의 마지막선택이였다. 그것은 겨레의 운명에 대한 책임감, 시대가 제기하는 력사적과제를 걸머진 공민적의무감, 좌절과 상실의 울분, 뚫고나가려는 몸부림, 대재난앞에 떨고있는 민족의 사활에 자기 몸을 깡그리 불태우려는 비장한 넋의 충동이였다. 살아도 민족과 더불어, 죽어도 민족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할 신성한 삶의 지향이 흘러가는 전쟁마차앞에 서슴없이 한몸을 던지게 한것이다. 해야 할바를 다하지 못한 한을 안고 대세를 관망하다가 드디여 터지는 폭탄에 삼천리가 뻐개져나갈 때 요행 한몸이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력사앞에서 범죄이다.

정시명의 이 열렬하고도 우국에 넘치는 진정에 길철도 더는 막아서지 못하고 그를 대신할수 없는 자기 능력의 한계를 한탄하였다. 그러면서 경무대를 뚫고들어가도록 뒤에서 조직사업을 면밀히 해주었다. 이 사업에 송호정을 끌어들여 리범석을 대신하여 총리서리로 된 국방장관 신성모를 움직이게 하였다.

리승만은 리범석의 사퇴를 받아들이자 신성모를 총리서리로 임명하고 경무대에 무시로 드나들수 있는 특전까지 주었다.

리범석은 경무대에 드나드는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불러도 마지못해 들어서군 하였다.

리승만은 리범석의 경무대출입에 대해서는 경계하여왔다.

그러나 신성모에게는 자기의 측근중의 측근이라는것을 내비치면서 군권과 행정권을 안겨주고 자기가 총재로 있는 《대한청년단》의 부총재직까지 리청천에게서 빼앗아 넘겨주었다. 그래서 서울의 어느 일간지에는 리승만이 던져준 벼슬감투에 깔려 무겁게 숨을 쉬고있는 신성모를 보여주는 만화까지 실렸다. 그들의 유착관계를 파헤친 그림이였다.

그러한 신성모가 송호정으로부터 어느 한 절친한 지인이 리승만과 독대하여 몇가지 중대문제를 통보, 협의할것을 요망한다는 부탁을 듣자 힘써주겠노라고 쾌히 받아주었다.

신성모는 정시명을 자기의 선거운동참모로, 자금후원자의 자격으로 연회에 참가시키며 연회뒤끝에 직접 자신이 안내하여 30분간의 면담을 할수 있게 하겠다고 송호정에게 통보하여왔다.

이렇게 되여 정시명은 경무대출입증을 받게 되였다.

이제 정시명은 서울대학교 부속병원에 가서 연회참가자들속에 끼여 건강진단을 받게 되며 경무대경찰서의 신분확인을 받게 된다.

박륭정은 자동차 뒤좌석에 앉아 언뜻언뜻 스쳐가는 바깥풍경에 눈을 보내며 사색에 잠긴 정시명의 모습을 운전대우에 달린 거울로 살펴보며 조심히 차를 몰았다.

정시명은 지금도 달리는 자동차에서 시가지의 전경을 보면서 앙양된 흥분속에 자문자답을 하고있었다. 수백수천의 생각이 줄달음쳐왔다.

마지막싸움이라고도 할수 있다. 이번 싸움에서는 성공보다 패배의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그러나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해서 내 인생도 패배한것으로 되겠는가. 아니다. 패배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념원했고 내가 몸바쳐온 인생의 목표에서 탈선된것이 아니므로 결코 인생의 패배나 후회나 좌절로 될수 없다. 때와 환경이 희생이 마땅하다고 소리쳐 부를 때면 기꺼이 그 길로 나갈것이다.

돌격명령을 받은 전사가 참호를 차고 적진을 향하여 어느 시각에 맞을지 모를 총탄을 맞받아 달려갈 때 누가 모험이라 할수 있으랴. 쓰러질줄 알면서도 용사라면 돌진해야 한다.

그는 지금 이렇게 자기의 걸음을 붙잡는 자기 보신과 리기심, 생에 대한 애착과 공포를 량심이라는 곧고 순결한 방패로 짓누르며 달래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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