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결 전 전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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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은 일구이언이 없다고 한 말은 누가 꺼낸것이였습니까?》

노성을 터뜨리는 방대광의 고함소리에 문창호지를 붙인 미닫이문이 드르릉거렸다.

방대광은 지금 배신감과 패배감으로 하여 온통 얼굴이 피빛이 되였다. 호랑이처럼 리성을 잃고 길길이 뛰고있었다. 차려놓은 술상에서 술잔이 공중 뛰여올라 다다미우에 딩굴고 찬거리들이 튀여났다. 그래도 그는 그냥 술상과 다다미바닥을 주먹으로 쳤다. 그는 아까부터 한모양새로 다리를 펴고앉아 눈길을 깔고있는 정시명에게 뼈저린 울화를 터뜨려놓는중이였다.

《말씀하시오. 정회장, 공산주의자들과 피를 물고 싸워온 이 방대광이 로망이 들었지. 물은 건너보아야 알고 사람은 지내보아야 안다는 조상들의 속담이 그른데가 없어. 그래 아직도 이 방대광이 믿어지지가 않는다는거요? 더 지내보아야 된다는거요? 내가 눈에 곰팽이가 끼였지. 암 그렇구말구.》

방대광은 며칠새 련일 화술을 억병으로 마시여 코끝이 빨갛고 눈도 충혈되여있었다. 눈시울은 부풀어오르고 볼도 윤택이 없이 부석부석해보였다. 다시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공산주의자들이 키를 잡은 구조선에는 오르지 않을 심산이였다. 배신감과 굴욕감으로 뒤엉킨 감정의 오물통에서 삐여져나온 이런 앙심으로 련 사흘 불맞은 승냥이처럼 홀로 으르렁거리였다. 그는 여러날째 두문불출하고 일체 외부인원방문을 받아들이지 않고있다가 정시명이 찾는다는 소리에 접하자 기다린듯 한달음에 련락통로로 되여온 남창영의 집에 달려왔었다.

남창영은 방대광이 38°선지역에서의 패전책임과 38°선무역상인을 끼고 1억원의 밀수품을 사취했다는 죄명으로 사단장모임에서 철직이 정식 선포된 후에야 서울로 돌아왔다.

방대광은 정시명의 덤덤한 표정에 한동안 주눅이 들어 달려올 때의 사나운 밸머리가 어지간히 수그러들었지만 쓰거운 술을 몇잔 걸치고나자 불붙는 가슴에 힘겹게 재를 쳐서 잠재운 울분을 다시 터쳐놓았던것이다. 방대광은 이따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벽을 상대로 격투라도 벌릴듯 빠른 걸음으로 오락가락하다가는 정시명에게 저주를 퍼붓기도 하고 술상에 와서 제 손으로 밥사발에 술을 따라서 목구멍에 부어넣기도 하였다. 그러다가도 지쳐서 정시명의 눈앞에 퍼더버리고 앉아 실성한 사람처럼 숨을 헐떡거리고 풀어진 눈을 꾹 감아버리기도 한다.

정시명은 방대광이 그 메기입을 한껏 벌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추태를 부리는것이 차라리 속이 후련하였다. 정말 방대광이 멱살을 쥐고 따귀를 붙인다 한들 할소리가 없고 피해설 곳이 없다. 하지만 가슴을 지지리 파고드는 좌절감과 쓰디쓴 수치로 말하면 정시명쪽이 더 심한것이였다. 쓰라린 패배감이 그냥 돌덩이처럼 명치끝에 매달려 삭여지지 않는다.

정시명은 분명 이것이 평양에 있는 나쁜 놈들의 작간이라는것을 어렵지 않게 간파하였다. 그런데 이제는 파괴된 사태를 수습할수 없게 되였다. 방대광이 놈들의 감시에 묶이운 몸이고 또 전적으로 사단에 대한 지휘권을 잃게 되였으니 무졸장수가 된 처지에서 무슨 수를 써도 출발점으로 되돌아갈수 없게 된것이다. 그렇다고 이미 장막이 내려진 사건을 놓고 자신이 38°선을 다시 넘는것도 무모하고 필요없는 일이였다. 길철의 말에 의하면 방대광의 사건이 한입두입 건너가 군부의 고위인물들속에서 전쟁문제와 관련하여 동요가 번지고있다고 한다. 반미, 반리승만기운도 버쩍 높아지고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움츠러들었던 리범석이 《군부마저 북과의 교섭을 바라고있는데 우리 정치권에서 침묵을 지킬수 있느냐.》하며 측근들과 의사소통이 되는 장관들을 화평통일론으로 부추기기 시작하였다. 정계와 군부의 여기저기서 방대광을 영웅으로 추켜올리는 풍문이 여러가지 풍설에 실려 전해졌다.

《〈쟝글노부시〉가 영웅이 되였다.》

《방대광이 묵은 때를 다 털어버렸다.》

《무쵸와 리승만이 방대광을 어쩌지 못한다.》

우익권에서 방대광은 별명그대로 우직하고 밸이 센 영웅호걸로 일약 떠올랐다. 중요한것은 이번에 방대광자신이 많이 각성된것이다. 살아온 한생을 정직한 이 나라 공민의 량심으로 재여보게 된것만 해도 방대광에게는 커다란 진일보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정시명은 방대광을 그대로 둬둘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사업은 좌절되였으나 그 주인공은 여전히 진창에서 애써 뽑은 발을 어데다 옮겨놓을지 몰라 당황망조해하고있다. 그래서 이번 길 역시 모험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남창영이네 집에 나타난것이였다.

먼저 편지로 량해를 구하는것이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다. 방대광이 무슨 미친짓을 할지 모르는데다가 감시권에 들어있는 사람을 구태여 만나겠는가 하는 주변의 만류도 있었다.

《방대광을 저대로 두어서는 안되오. 그러면 우리가 그 무슨 정에 사는 사람들이요. 이제 뭐 끝나버린 사건을 두고 구구하게 변명할바는 못되지만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라도 해주고 와야 내 속도 편해질것 같소.》

정시명은 이런 말을 남겨두고 왔다. 그런데 마주앉자마자 방대광이 피대를 돋구어 넉두리를 시작한것이다. 마디마디가 앙심이 서린 독설이다. 그래도 정시명은 그냥 듣기만 하였다. 이따금 남창영이 옆방에 있다가 방대광이 노성을 터뜨릴 때면 장검이라도 뽑아들지 않나 하여 여닫이문을 열었다가는 사정없이 들붓는 방대광의 입심사나운 욕설을 잠자코 받아들이는 정시명을 측은한 눈으로 보고는 숨을 조용히 내쉬며 미닫이문을 닫아주군 하였다.

《말씀 좀 하시우. 정사장, 좀 씨원하게. 왜 당신은 벙어리 랭가슴앓이요?》

방대광이 또다시 방안의 탁한 공기를 휘저어놓다가 처절한 목소리로 웨쳤다. 명을 걸고 시작한 거사가 몇자국안팎에 좌절되여 군지휘권을 잃고 일생토록 입고온 군복마저 벗기운 지금 방대광은 마주치는것이 있으면 닥치는대로 쓸어눕히고 부셔버리고싶은 광적인 열기에서 좀체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정시명이 좀 말대꾸를 해줘야 더 길길이 뛰여올라 성풀이를 할것 같은데 상대가 바위같은 자세로 앉아있으니 더 푸들거리는것도 맹랑하기 그지없는 일이였다. 그래 방대광은 이젠 당신쪽이요 하는듯 한 표정을 짓고 입을 닫아맸다. 하지만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지고 눈빛은 여전히 표독스럽게 번뜩거린다.

정시명은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형언할수 없는 고통과 비분이 서려있는 눈길이였다. 그는 마구 꾸겨놓은듯 얼기설기 주름살이 지나간 방대광의 이마와 볼을 동정에 겨운 눈으로 찬찬히 더듬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라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당신의 속을 조금이라도 풀어줄수 있겠소?》

방대광이 그 나직한 대꾸에 억이 막힌듯 또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이 어리석은 방대광이 또 얕은 꾀에 넘어갔지요. 내 평생에 우직한 성미를 고치지 못해 쟝글의 무사라는 추한 별명을 버리지 못하는 놈이요. 공산당이 내게 한풀이하는줄 모르고 모략에 걸려들었거던. 후― 인생을 이렇게 망쳐버리다니… 당신들이 이 〈쟝글노부시〉를 바지저고리로 만들어놓았소. 흥, 방대광이 이렇게 뒤문치기하다가 일조에 세간의 웃음거리로 돼버리다니…》

방대광은 옥맺힌 제 속주머니를 활 털어버리고싶어 심지바르지 않은 지청구만 골라내며 그냥 마른 하늘에서 우박 쏟아지듯 퍼부어댄다. 그리고는 지쳐버린듯 숨을 헐썩거린다.

《방사단장, 당신이 무슨 말을 해도 나는 할 말이 없게 된 사람이요.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줘야겠소.》

정시명은 곰방대를 꺼내 써레기담배를 꽁꽁 다져놓기 시작하였다. 그는 천천히 불을 붙여 한모금 길게 빨아들이고서야 그를 향하여 면바로 눈길을 들었다.

《이번 일이 너절하게 끝난것은 우리 장군님의 뜻이 아니라는거요. 난 그렇게 믿소. 당신도 그걸 믿어주시오. 그리고 내 뜻도 아니구요. 나는 이걸 말하고싶어 당신을 찾아왔소.》

진심이 내비치는 그 소리에 방대광은 사납게 번뜩거리던 눈길을 접었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푹 떨구며 입술을 푸드드 떨다가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아, 그건… 그건 나도 아오. 내 하도 절통해서 주절거려보는 건주정이니 한귀로 흘려보내주시소. 어디에나 유다같은 족속들이 있기마련이니 평양정권이라고 뭐 그런 박쥐같은놈들이 한둘이겠소. 그놈들이 못된짓을 했겠지요. 난 당신을 믿소.

하지만 공산당은 더는 믿지 않을테요. 공산당이 원래 집안단속을 잘하지 못해 일정때부터 제 닭잡아 섬기는 시시껄렁한짓을 오죽 많이 했소. 자, 이젠 김빠진 넉두리는 그만합시다. 내 너무 억이 막혀 게정을 부려보는건데 어찌하여 정사장은 후려치는 회초리를 받아만 주는거요.

아, 정사장, 부디 신변에 류의하시오. 내 솔직한 말로 백발토록 사귀여도 서먹서먹함이 있다지만 사장님과는 첫 인상에도 옛친구처럼 정이 들었지요.》

형언할수 없는 통분이 서려있는 정시명의 눈빛이며 말투가 분별을 잃고 갈갬질하던 무사의 리성을 회복시켜준것이다.

정시명은 방대광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자, 한잔 부어주시오. 나는 정말 당신앞에 면목이 없소. 하지만 당신께 지은 죄야 아무것도 아니지요. 나라앞에 죄를 짓게 됐소. 만회할수 없는 대죄요. 당신과 함께 나라의 재난을 막을 큰 꿈을 꾸어왔는데 겨레앞에서 참 면목이 없게 됐소. 후― 난 정말 꿈이 컸소. 당신이 나를 리해해주니 천만다행이요.

한마디만 더 하겠소. 언제든지 이 나라는 꼭 통일이 될거요. 우리 대에 되겠지요. 아니면 손주대에 가서라도 통일은 될것이고 갈라진 겨레가 다시 하나로 얽혀질거요. 그런즉 통일에 보탬이 되는 일만 하시오. 당신도 북쪽태생이라니 그래야 죽은 뒤에 혼백이라도 고향땅에 가볼게 아닌가.》

《정사장… 어허… 그렇다니깐.… 그 말 참 고맙소이다. 내 고향사람들이 날 곱게 봐줄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고향땅에 죽어서 뼈라도 묻히고싶은게 소원이올시다. 어허… 죽을 때가 가까와오니 더욱 그러하우다.

내 고향 룡강은 농사가 잘 되는 곳입니다. 지금도 눈감고 자리에 들면 시내가에서 함께 물장구치던 동갑내기들이며 까치가 우짖던 버들방축이 선하고 수수밭이 설레는 소리가 들리군 한다우. 어허… 내 일정때는 금의환향이라 출세의 비단보에 싸여 고향에 가서 우쭐해보려고 감히 금줄두른 왜군복을 감고 룡강땅을 밟은적 있었지요. 그런데 보는 눈이 곱지들 않아 하루밤을 자고나서 달아빼왔지요. 허허… 아, 고향이라… 내 사장님말씀 금언으로 받들어가리다.》

방대광은 연방 창자가 텅 빈듯 한 너털웃음을 터치다가 올방자를 풀고 엉거주춤 일어나 그에게 정중하게 술을 따랐다.

눈언저리가 지절지절해가지고 짜릿한 향수에 젖어있는 그 모습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로심초사를 거듭하여 가까스로 뜻을 세워놨으나 빛을 보지 못한채 좌절과 수난의 쓰디쓴 고배를 들이키게 된 인간이 기와 얼이 삽시에 꺼져버려가지고 목메인 비탄을 씹어삼키고있는 모습앞에서 정시명은 그냥 속이 저려들기만 하였다.

《자, 취해봅세다. 취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놈의 세상을 헤염쳐가겠소. 세상에 믿을만 한 인간이 몇 안되니 이놈의 세상꼴은 영낙없이 망해가는 꼴이라…》

그들은 잔을 찧었다. 작별의 잔이였다. 새로운 세계에로 발을 떼는 방대광에 대한 축복의 잔이기도 하였다.

정시명은 그에게 이 말 한마디는 더해주고싶었다.

《방대광씨, 나는 우리의 교제가 무익하다고 생각지 않소. 그것은 당신이 비로소 조국을 리해하고 민중을 리해하였기때문이요. 아마도 고향은 뒤날에 당신을 받아줄거요. 꼭 받아줄거요.》

그러나 입밖에 꺼내놓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는 너무도 새삼스럽다고 생각되였던것이다.

 

정시명은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동행하였던 조태준과 박륭정이더러 어디든지 공기가 맑고 조용한 곳에 가서 쉬고 가자고 했다. 박륭정은 한강을 따라 수림속으로 차를 몰았다. 차는 서울교외의 아름드리로송이 꽉 들어찬 울창한 수림속에서 멈춰섰다.

정시명은 차에서 내려 수림속의 흰눈우에 발자국을 찍으며 천천히 걸었다. 소나무들은 머리우에 흰눈을 떠이고 소연한 바람에도 꺼떡없이 수림속의 초병들처럼 서있는데 숲속에 드문드문 보이는 벗나무의 가느다란 가지들이 살랑거리고있었다. 이따금 흰안개가 내리듯 가지우에 쌓인 눈들이 떨어져 뽀얗게 흩날리였다. 해빛은 나무사이로 찬연하게 비쳐들어 흰눈우에 눈부시게 부서진다. 여러마리의 산새들이 이따금 대자연의 호젓하고 매혹적인 세계에 들어선 손님들을 반겨주듯이 짹짹거리며 그들의 머리우에서 맴돌다가는 민틋한 나무줄기에 매달려 기묘한 부리로 열심히 벌레를 쪼아낸다. 인적이 없는 수림속의 흰눈우에는 그들보다 먼저 자국을 남긴것도 있는데 짐승들이 오간 흔적이였다. 두쪽으로 갈라진것으로 보아 노루의 발자국이 분명한것도 있고 아기의 네손가락을 모아쥐고 눌러놓은듯 한 자국은 산토끼의 발자국이다.

정시명은 자연의 신선한 품에 안기여 하루건 한달이건 머리속을 텅 비워놓고 흰포단같은 눈우에 자욱을 푹푹 찍으며 끝없이 걷고만 싶었다. 하지만 맑고 깨끗하고 싱싱한 대자연의 싱그러움도 확 달아오른 피를 식혀주지는 못하였다. 그의 뇌리에는 의연히 무참히도 좌절되여 다시금 공세를 벌려볼 여지조차 없어진 방대광과의 사업의 전후가 그냥 집요하게 파고들어 온몸을 괴롭히고있었다. 이런 때는 그 누구의 위로라도 받았으면 터갈라진 신경이 다소 너누룩해지련만 그래줄만 한 사람이 곁에 없었다. 길철이나 림인석이, 조태준이도 회장이 거의 단독으로 벌려온 그 거창한 투쟁이 손써볼 형편이 없게 되자 정시명의 눈치만 보면서 함께 속을 썩이고있었다.

리범석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권과 방대광을 대표로 하는 군부세력을 통일운동권에 집결시켜 전쟁을 억제하고 나라의 통일을 앞당기려했던 거대한 계획은 분명 공화국에 기여든 반역도배들때문에 틀어졌다. 정시명은 아직은 부닥친 난관을 타개할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기의 걸음걸음에 보이지 않는 그물이 날을 따라 좁혀들고있는것을 생각할 때면 마음이 급해나고 무거워졌다.

(내가 정말 이러다가는 일도 크게 쳐보지 못하고 오성도의 경고대로 아예 넘어지게 될것이 아닌가.)

시름겨운 생각들이 또다시 기다린듯 단꺼번에 쓸어들어 하늘이 낮아보이고 오히려 숨쉬기조차 답답해왔다.

정시명이 돌아가는것이 좋을상싶어 어느 한 아름드리로송밑에서 발을 세우고 곰방대를 뽑아드는데 멀찌감치 뒤따라오던 박륭정이 다가왔다.

그는 《저―》하고는 무엇인가 말을 꺼내기가 난감한듯 쭈밋거렸다.

정시명은 아침에 남창영의 집으로 갈 때부터 박륭정이 무엇인가 말을 꺼낼듯말듯 하던 기색을 봐두었던지라 생각에서 깨여나 큰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요?》

《저… 김명호부회장이 감방에 다시 들어갔다는 보고를 전해달라고 길철동지가…》

《뭐요?… 또 잡혀갔소? 보석으로 나온 사람인데… 아직 몸을 다 추세우지 못하지 않았는가.》

정시명은 박륭정의 말을 가로채며 어성을 높였다.

《아니, 잡혀간것은 아니고…》

《그러면 어쨌다는거요?》

정시명은 대뜸 얼굴에 찬바람이 스치는것을 느끼며 다우쳐 물었다.

《길봉례아주머니가 이걸 가져왔습니다.》

박륭정은 정시명에게 길숨한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길봉례는 길철의 부탁을 받고 김명호가 자리잡은 필운동에 가서 그의 때식을 보장해주면서 병간호를 하고있었다.

정시명은 편지를 받아들다말고 박륭정의 얼굴에서 다른 대답을 찾아내기라도 할듯 점도록 시선을 옮기지 못하였다.

(김명호가 다시 감옥에 잡혀가다니 어떻게 된 영문인가. 오성도가 그에 대한 미행을 하지 않겠노라 약속했다는데 그러면 그의 움직임이 다 감시권에 들어있었는가. 아니, 박륭정이 잡혀간건 아니라고 말한건 또 뭐인가.)

이 편지에 또 무슨 상서롭지 않은 일이 담겨져있을것 같은 예감이 앞섰다.

정시명은 봉투를 찢고 속지를 꺼내 급하고 불안한 마음에 쫓기여 단숨에 훑어내려갔다.

 

회장동지, 죄송합니다. 저는 이 길로 서대문감옥에 다시 들어갑니다. 지금에 와서 저는 제가 회장동지에게 모욕적인것을 강요하였다는것을 깨닫게 되였습니다. 끝까지 나라와 겨레앞에서 스스로 선택하여 걸머진 애국위업에 헌신하려는 회장동지의 그 마음을 오성도같은놈들과 짝이 되여 감히 저울질한데 대하여 이 김명호는 다시한번 자신의 탈선을 인정하며 조직앞에서 심심히 자기 비판을 합니다.

길철동무의 비판이 옳았습니다. 제가 확실히 적에 대한 환상이 생기고 각성이 무디여졌습니다. 옳습니다. 끝까지! 끝까지! 끝까지!

통일조국을 일떠세울 때까지 우린 기발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길철동무로부터 또다시 세개의 아지트가 간밤에 경찰청 부청장 최운하의 기습을 받아 여러명의 동지들이 체포되여갔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가슴아픈것은 저의 선에서 움직이던 세사람이 그놈들을 안내하여왔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전우들의 부담거리로나 되고있는 이곳이 아니라 200여명의 나의 전우들이 싸우고있는 철창속이라는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였습니다.

저는 감옥에 있는 전우들속에서 배신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무거운 일감을 놓고 함께 어깨를 들이밀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깝게 타매하다가 제스스로 다시 정한 싸움길이니 저를 리해하고 지지하여주십시오. 철창속에서 마지막싸움으로 제가 조직앞에 저지른 대죄를 조금이나마 씻으려고 하니 보다 치렬한 싸움터를 남겨두고 떠나는 저를 용서하여주십시오.

사실 어떤 의미에서는 어리석은 보신주의, 자아중심의 넉두리인것 같기도 합니다. 혹은 일부에서 적에 대한 투항이라느니, 자신의 결백을 죽음으로 보증받으려는 비렬한 자살행위라느니 하는 말이 돌아갈가봐 겁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태여 자신의 선택을 변명한다면 운신조차 하기 힘든 제가 여기서 더 맡아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저의 현 육체적상태로 보나 조직이 처한 형편으로 보나 제가 수백명의 전우들이 있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조직은 건재하고있으며 투쟁은 끝나지 않았고 통일애국위업은 반드시 승리한다는것을 깨우쳐주며 옥중투쟁을 조직하고 이끄는것이 옳다고 인정합니다.

회장동지, 저는 지금 우리곁을 먼저 떠나간 김승원동지, 박영수동지, 권혜숙동지, 리순애동지, 김창기동지들을 생각합니다. 나라앞에, 조직앞에, 벗들앞에 량심껏 살자! 이것은 우리 조직의 창립에 세워지고 지켜온 법도이고 미덕입니다. 회장동지가 자기의 모범으로 우리들을 깨우쳐주었고 우리모두가 그렇게 사는데 습관되여왔습니다. 쓰러진 전우들은 바로 우리스스로 세워놓은 그 법도에 충실하였습니다. 이 김명호도 필요한 시각이 오면 그들을 따르리라는것을 믿어주십시오.

우리 《흥국상회》를 뭇던 그날이 삼삼합니다. 그날에 다졌던 선서에 우리모두 충정을 고여왔고 그것을 위하여 자신들을 깡그리 바쳐왔다는것을 자신있게 말할수 있는것은 참으로 우리모두의 자랑이고 영예이며 행복입니다. 저는 이따금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한 전쟁의 포성이 통일의 축포로 이어지지 않을가 하는 막연한 기대도 가져봅니다. 통일되는 그날까지 회장동지와 우리의 동지들이 부디 무사하시여 그 영광의 시각에 우리의 몫까지 합쳐 통일찬가를 불러주실것을 충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념원이며 자랑이며 미래인 통일조국 만세!

                                                        김명호 드림

 

다 읽고나자 정시명은 또 하나의 커다란 충격에 몸을 가누기 힘들어 비칠거리였다.

《회장동지!》

왼쪽가슴을 꽉 움켜잡고 편지를 더듬어가던 정시명의 옆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박륭정이 얼른 그의 겨드랑이에 어깨를 들이밀었다.

《일없소, 일없소.…》

정시명은 그를 뿌리치고 로송밑둥에 기대고 서서 숨을 가라앉히느라고 애를 썼다. 그러나 끝내 무너져내리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나무밑둥에 노그라들듯 풀썩 주저앉고말았다. 현기증이 나서 빽빽이 들어찬 소나무들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피로가 쓸어들었다. 천길나락에 떨어지는듯 한 절망과 패배감으로 그는 눈을 꾹 감아버리고 마구 들뛰여노는 심장을 두손으로 움켜잡았다. 별안간 속이 텅 비여버리고 머리속이 온통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는 성난 어조로 불끈거렸다.

《이 사람이 도대체 제 정신이냐, 엉? 범의 굴에 제 발로 찾아가다니… 교수대를 찾아 떠나가다니… 그래 제 량심 귀한줄은 알면서도 다른 사람들 가슴에 피눈물을 뿌려준다는 생각을 못한단 말이냐.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 금쪽같은 인간도 끝내 우리 곁을 떠나는게 아닐가. 엉?》

정시명은 비분을 새길길 없어 나무등을 힘껏 쳤다. 죽음을 맞받아간 전우에 대한 애통한 정이 김명호의 행동을 다시 음미할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잃게 하였다. 그는 온몸이 홧홧 달아올라 두손에 숫눈을 듬뿍 퍼가지고 얼굴을 세괃게 문다지였다.

(그럴수 있는가… 그럴수 있는가…)

련이어 가해지는 타격에 정시명은 몸도 마음도 갈가리 찢어졌다. 잠시후에야 그는 조성된 사태의 전말을 랭정하게 분석하여보았다. 차츰 편지에 담겨진 김명호의 고뇌에 리해가 갔다. 하기는 그게 심지바른 인간의 량심인지 모른다. 김명호의 뜻이 바른것 같기도 하다. 바꾸어놓고 나도 그런 처지에 놓여있다면 달리는 행동할수 없을것 같다. 방대광공작정형을 통보하고 회장을 구원해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에서 가석방에 응한 자체를 놓고 신념의 부족으로 자신을 재평가하고 절규하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지휘부가 길봉례만 시중을 들도록 붙여주고 아무런 일감도 주지 않자 절망에 사로잡히고 흥분하기 시작한것 같다. 거기에 자기가 지도하여온 동지들속에서 변절자가 나오고 그로 인해 또다시 전우들이 피해를 입자 더는 조직앞에서 죄책을 금할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필사의 각오를 안고 마지막혈투에 몸을 던진것이다.

유서와도 같이 비장하게 엮은 이 편지의 한자한자에 심혼을 쪼아박는 김명호의 고통스러운 모습이 눈에 밟혀들자 정시명은 부지불식간에 커다란 실망과 노여움이 지글지글 가슴을 태웠다. 누구보다도 길철의 처사에 노여움이 갔다. 길철이가 적들의 대규모검거와 련이어 벌어진 조직사고와 특히는 김명호의 처신에 대하여 의심해온것 같았다. 그래서 자기 누이를 붙여놓고 간격을 두도록 하고 김명호의 언행에 대하여 장악하도록 한것만 같다.

그래서는 안될 일이다. 경각성을 높이는것은 좋은 일이지만 의리를 지키는것은 다른 문제이다.

정시명은 자신도 김명호가 이런 결단을 내리기까지 큰 책임이 있다고 뼈아프게 뉘우쳤다. 요즈음은 방대광과의 사업이 좌절된 후 얼굴이 꺼매서 뛰여다니다나니 감옥에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시달릴대로 시달려온 김명호의 신상관리를 등한히 하였다. 중요한것은 그에게 일감을 주지 않은것이다. 그를 자기의 실책으로부터 시작된 정신적수치와 허탈로부터 건져주는것이 투쟁임무였다는것을 정시명은 때늦게나마 통절하게 깨달았다.

그런데 그저 건강이나 추세운 다음에 보자고 숨어서 일체 외부출입을 하지 않도록 하고 동지들의 방문도 차단하도록 하였으니 그가 더구나 자신에 대한 환멸과 고독에 몸부림쳤을게 아닌가.

《음―》

전우들에 대한 자기의 무관심이 지난 몇해동안 혈붙이 못지 않게 정이 들고 믿음이 가고 서로가 상대방에 습관되여온 귀중한 동지를 막다른 싸움길로 몰아넣었다는 자책이 요즈음 한껏 어혈진 정시명의 가슴에 덧재를 뿌리였다.

김명호에 대한 야속한 생각도 금할수 없었다.

(어찌 이런 생각까지 하면서 나하고는 한마디 불평도 없고 상론도 하지 않았을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 왜 하고픈 소리를 못하고 속에 꿍져가지고있다가 극한으로 치달아갔을가.)

그러나 정시명은 김명호에 대한 노여움이 치밀어오르자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는 김명호의 행동을 될수록 존중하고 아껴주고 지켜주고싶었다.

(김명호는 결사전에 나선 사람이다. 이것은 만용이 아니다. 리유불문하고 죽음을 맞받아나선 용사에게 시비를 가리는것은 죄된 일이다. 아니, 그는 새로운 싸움으로 그리고 혁명가로서의 고상한 륜리로 우리모두를 고무해주고 떠밀어주고있다. 신념이 가리키는 곳에서 설사 죽음이 기다려도 우리의 위업에 필요하다면 나서야 한다. 김명호처럼…)

자동차는 다시 수림을 벗어나 시내로 달리였다. 정시명은 등받이에 허리를 붙이고 불쑥불쑥 꼬리를 쳐드는 괴로움속에서 벗어나 조성된 정황에서 새로 벌려나갈 투쟁을 설계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의지의 대결이였다. 자기를 이겨내는 보다 가혹한 시련이기도 하였다.

(쓰라린 감정을 이겨내야 한다, 오직 설정한 목표를 향하여 용기백배 달려나가야 한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다잡았다.

이제는 리범석에게 매달리는수밖에 없을것 같다. 리범석을 주축으로 하는 화평통일과 전쟁반대를 주장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을 전쟁도발세력과 분렬주의자들에게 맞세워놓아야 한다. 방대광의 의거가 실패하여 전쟁도발자들을 38°선에서 군집단으로 저지시키려던 계획이 파탄됨으로써 리범석이 위축되여있는것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리범석에게 심어진 정의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그 불씨를 불길로 타번지게 하기 위하여 지금 조태준과 문진국이 최선을 다해 뛰고있다.

방대광대신 송호정의 영향밑에 있는 거사세력을 리범석에게 붙여줄수도 있다. 그러면 행정권이 아니라 사회일각에 리범석을 주축으로 하는 광범한 화평통일전선체를 묶어낼수도 있다. 정시명은 이 투쟁을 이번에 리승만이 벌리는 2차 《국회》선거분위기에 맞추어 잘만 엮어가면 훌륭한 결과가 있으리라고 예상하였다.

최근에 리승만은 미국의 압력과 반대세력의 도전에 못이겨 선거를 5월 30일에 치른다고 발표하였다. 《국회》선거일정이 정식 공포되자 지금 서울정치세력들속에서는 새로운 정계개편놀음이 벌어지고 당파싸움과 여러 정치구조의 복잡한 리합집산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며칠후 진행된 협의회에서는 길철과 림인석도 정시명의 구상에 지지를 표시하고 임무를 분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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