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결 전 전 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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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는 필운동에 있는 거점에 와있었다. 둥글둥글하던 얼굴이 온통 시퍼렇게 이물리고 툭 삐여져나온 관골이 더부룩한 수염에 묻혀있었다. 몸이 실하던 사람이 반쪽이 되여 옷이 온통 후렁후렁해지고 온몸에 성한 자리가 없었다. 손톱 열개가 다 뽑히고 한다리가 부러졌는데 아직도 절룩거린다.

몸도 쇠약해졌지만 자기가 저지른 실책으로 《흥국상회》에 만회할수 없는 치명적인 손실을 준 죄의식으로 하여 그렇게도 억대우같던 사람이 완전히 반정신이 나가있었다.

김명호는 정시명이 나타나자 그를 붙잡고 감방에서 자기의 조직선을 넘겨주기 위해 모색하던 일을 간단히 이야기하고는 《회장동지! 이놈이 백번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하고 아이들처럼 우들우들 턱을 떨었다.

감정의 굴곡이 완만하고 좀체로 얼굴에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놓지 않던 김명호가 눈물을 삼킬 때 정시명도 명치끝이 저려들었다. 정시명은 그를 끌어안은채 상처자리를 어루쓰다듬을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감방에서 그가 자결을 시도하여 양말을 이어 목에 걸었다가 때마침 나타난 간수에 의하여 살아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때 정시명은 《살아서 싸울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죽는건 두번다시 동지들앞에 죄를 짓는 어리석은짓이요. 감옥에 갇힌 숱한 동지들이 부회장을 쳐다보고있는데 그들의 옥중투쟁을 장악하고 지도해야 될것이 아닌가.》하고 엄한 지시를 적어 감방에 보내주었었다.

정시명은 그가 눈물을 거두기를 기다렸다가 그의 목부분을 찬찬히 살펴보며 각근히 위로하였다.

《홍민표! 그놈이 더러운 개로 굴러떨어질줄이야 어찌 알았겠소. 참 일이 더러운 놈때문에 더럽게 되였소. 자, 진정하오. 여하튼 보석석방이든 뭐든 이렇게 풀려나왔으니 천만다행이요. 우리가 새롭게 벌린 싸움이 마지막고비에서 돼가고있소. 우선은 몸을 추세우고 다시 본때있게 싸워보기요. 자, 진정하라니깐.…》

함께 자리를 한 길철도 그를 진정시키느라고 타일렀다.

《부회장동무, 지나간 일을 꼬집어 이제 후회나 해서 뭘하겠습니까. 우선 몸을 회복하십시오.… 그런데 제 본인을 앉혀놓고 솔직히 말씀드리는걸 용서해주시오. 부회장동무의 보석이 여러가지 의문을 던지고있습니다. 우선 석방자체에 문제가 있고 그리고 우리가 통보를 받은 후 여러날 감시한데 의하면 감시와 미행이 전혀 없다는것이 또한 이상스럽다는겁니다.》

길철은 몇해동안 생사를 함께 하여왔고 서로간에 깊은 파악이 있는 전우에게 이런 말을 꺼내는것이 괴로운듯 매우 힘겹게 말하였다.

그 소리에 김명호는 다소 얼굴에 열적은 미소를 담더니 고개를 힘들게 끄덕이였다. 다시금 죄책감과 고민으로 고개가 맥없이 떨어지고 숨소리가 커졌다.

정시명이 얼른 《됐소, 됐소. 자, 누우시오. 누워서 경과나 들어봅시다.》하고 김명호의 잔등을 떠밀어 자리에 눕혀주고는 이불을 씌워주었다. 그는 길철에게는 엄한 눈매를 지어보였다.

범의 굴에 물려가서 엉망이 된 사람앞에서 당치 않은 소릴 한다는 정시명의 엄한 질책이 어린 눈길에 길철은 《미안합니다.》하고 한마디 건성하였으나 눈에는 의혹과 불신의 그림자가 비껴있었다. 수많은 전우들을 철창속에 끌어가게 한 그에게 도무지 타협이 가지 않고 련민의 정을 느낄수 없었던것이다.

김명호가 정시명의 손길에 눌리워 자리에 누운채 고개를 다시 괴롭게 가로저었다.

《길철부회장동무, 미안할게 없소. 아무토록 그건 의심스러운것만은 사실이요. 의심점은 깨끗이 풀어야 하오. 그런데 난 그걸 풀길이 없소. 헌데 여기에 문제점이 있기때문에 난 동지들의 의심을 해소하기 전에 감히 긴급상면을 요구한거요.》

김명호가 기침을 쿨럭거리기 시작하였다.

길철이 그에게 꿀물을 권하자 김명호는 몇모금 힘들게 마시고는 이야기를 이었다.

《난 문제가 심각하기때문에 조직규률에 저촉된다는것을 알면서 길철동무도 동석하여달라고 했습니다.》

 

한주일전 밤시간이였다.

김명호는 자리에 누워서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곰곰히 돌이켜보면서 잠을 청하였다. 날이 흐를수록 그는 자신이 애국위업에 끼친 엄청난 손실을 그 무엇으로도 보상할수 없다는 죄의식에 시달려 몸이 여위고 신경만이 팽팽해져서 도무지 잠을 이룰수 없었다.

(다시는 치욕이 되풀이되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싸워야 한다. 끝까지… 끝까지…)

김명호는 이렇게 괴로운 심경을 달래고 고무하며 돌바위에 쪼아박듯 심장에 언약을 새기고 매일매시각 깨끗한 량심으로 닦고있었다.

하지만 외계와 철저히 격리된 지하독감방에서는 마지막까지 싸워볼 상대도 없고 몸을 잠가볼 일거리가 없다. 홍민표놈이 철수한이래 철창가에서 때없이 꽥꽥거리던 간수놈들도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 머리를 빡빡 깎고 시커먼 간수옷에서 더러운 냄새가 풍기는 간수가 하루 세끼 밥시간마다 오군 하는데 주제에 역병이라도 옮을가봐 말 한마디 붙여볼세라 철창속에 아이들 주먹만 한 줴기보리밥을 던져주고는 뺑소니치듯 나가버린다.

(중요한것은 옳게 죽는것이다. 그것만이 한생을 광복위업과 통일위업에 바쳐온 이 김명호가 전우들과 조직앞에 할수 있는 최대의 봉사이며 최후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김명호의 일생이 재평가 될것이다.)

지금도 김명호는 이러루한 비장한 각오를 되풀이하면서 심장에 보듬어세운 기둥이 허물어질세라 쓰다듬고있었다.

문득 지하감방의 복도가 쿵쿵거리였다. 발자국소리로 보아 두놈이 오고있었다.

(웬일일가?…)

김명호는 가까와지는 발소리가 야밤중에 울리는것으로 하여 긴장해졌다.

철문이 새된 소리를 지르며 열리더니 전지불이 감방안을 휘휘 핥았다. 키가 꺽두룩한 메마른 간수장놈이 간수를 달고 나타났던것이다.

《합동수사본부 오성도본부장이 기다리고있습니다.》

간수장이 공손한 어조로 알리였다. 그놈은 이미 김명호가 거물급인물이라는 소리를 들어왔고 철창속에서 어찌할수 없이 드러나는 그의 인격과 무게에 사뭇 압도되여온지라 허투로 대하지 못하였다.

《뭣때문이요? 때가 왔소?》

김명호는 깊은 밤에 오성도가 찾는 리유가 의아쩍어 굵은 소리로 물었다.

놈들이 이렇게 끌어다가 없애치운 동지들이 적지 않다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아니올시다.》

간수장은 이미 오성도와 무슨 얘기가 있었던지 여전히 싹싹한 어조로 대답하고는 간수더러 그에게 수갑을 채우라고 하였다.

김명호는 길다란 복도를 지나가면서 오성도가 찾는 리유를 놓고 복잡한 심회에 얽혀들었다. 또 무슨 수작질을 하자는건가. 몇번 겨루어보건대 오성도는 다른 놈들과 달리 단수가 있고 교활하기 그지 없는 위험한 적이였다. 오성도가 쳐놓은 새로운 옹노에 걸려들수 있다는 생각이 이미 그놈이 파놓은 함정에 빠져든 쓰라린 교훈을 상기하게 하면서 신경을 예리하게 해주었다.

오성도는 칼끝같은 눈초리로 그를 맞아주었다.

《간수장은 나가보시오. 저 수갑을 풀어주고…》

간수장이 방에서 나가자 오성도는 김명호에게 걸상을 손으로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담배를 권하고 불까지 붙여주었다.

두사람은 한동안 묵묵히 담배연기만 뿜어올리면서 서로 눈초리에 적의를 서리발처럼 돋쳐가지고 눈싸움을 벌렸다. 서로 고문대에서 만나 원쑤로 사귀면서 상대방의 지성과 품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고있었다.

오성도는 꿰지르는듯 한 눈으로 몸은 비록 반쪽이 되여버렸지만 굳건한 정신력으로 육체적, 정신적고통을 누르고있는 상대를 쏘아보다가 랭랭하게 말을 하였다.

《부회장선생, 당신에게 몇가지 통보할게 있어 만나자고 했습니다.》

김명호는 얼음처럼 차디찬 얼굴을 한 적수를 맞받아 쏘아보며 아무런 흥미도 없는 뚝뚝한 어조로 받아넘겼다.

《필요없는 일이요.》

김명호는 서울권력층의 1급파수군으로 자처하는 오성도와 마주앉아있는것조차 구토감이 나서 그의 심문에 더이상 응할 흥심이 없었던것이다.

그러나 오성도는 김명호가 어떻게 반응하든지 개의할바가 아니라는듯 여전히 고저가 없이 딱딱하고 메마른 소리를 이어나갔다.

《이젠 우리 합동수사본부도 해체될 때가 되였다는겁니다. 우린 정시명이라는 미지의 인물을 찾아내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런즉 우리의 통보가 정말 당신에게 필요없다는겁니까? 아니면 당신은 지금도 〈흥국상회〉부회장이라는걸 부인하고싶습니까?》

김명호는 오성도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으나 인차 정신을 다잡고 약간 어성을 높여 박아주었다.

《난 정시명이라는 인물을 모르오. 당신이 나를 아무리 달구치고 잔꾀를 부려도 두번다시 얼려넘기지 못할거요.》

그러나 오성도는 깔끔한 눈초리로 상대를 한번 흘끔 쳐다보았을뿐 그의 단호한 선언에도 개의할바가 아니라는듯 여전히 자기 말만 고집스럽게 했다.

《우린 정향과 정시명이라는 인물이 하나의 얼굴을 가진 두 인물이라는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얼마전에 륙군정보국 5과장이였던 신치호를 정향의 고향인 평산에 침투시켰는데 정시명이라는 인물이 47년초에 고향에 잠간 들렸다가 부인을 데리고 평양에 간다고 소문을 놓고는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평양에 박혀있는 우리 첩보들을 총동원하여 확인한데 의하면 정시명이라는 인물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치호가 가져온 정시명의 인상특기가 당신네 책임자 정향과 일치되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시명이라는 인물을 따로 찾을 필요성이 없게 되였으며 합동수사본부도 자기의 사명을 끝내게 되였습니다.》

김명호는 이놈들의 포위환이 훨씬 좁혀들었고 정시명에 대한 수사가 진척되였다는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그 무엇에도 비할수 없는 커다란 위험이였다. 지금의 싸움이야말로 정시명의 조직자적두뇌와 손탁 센 지휘를 더욱 필요로 하고있다. 1946년 가을부터 네해가까이 정시명의 체취에 습관되여온 김명호는 통일애국의 리념에 대한 그의 충직성과 그 길에서 자기의 심혈을 깡그리 바쳐가는 자기의 지휘관에게 매혹되여있었다.

김명호는 감방에서 파란곡절많은 인생사를 돌이켜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훌륭한 인간과 더불어 삶의 가치를 빛내여왔는가 하는것을 더욱 깊이 절감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애국열을 간직하고 무산혁명의 길에 오른이래 김명호는 수많은 유명무명의 인물들을 따라다니며 풍파많은 인생험로를 헤쳐왔다. 머리를 어찔하게 현혹시키던 수많은 혁명의 구호들과 미래에 대한 달콤한 약속들이 그 서푼짜리 《지도자》들과 함께 사라질 때 그에게 남았던것은 쓰디쓴 환멸과 인생의 허무감이였다.

정시명과 만나면서 김명호는 드디여 통일위업의 위대한 령수 김일성동지의 사상과 리념을 생명의 자양분으로 받아안게 되였으며 통일위업의 선각자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담당하고 그 길에서 활력과 희열로 충만된 삶을 누릴수 있게 되였다.

참으로 광복이 된 후에도 혼탁하기 그지없는 서울정치권에서 항로를 잃고 천만풍파에 시달리던 김명호에게 있어서 정시명과 같이 신념이 투철하고 수완있는 지휘관과 손을 잡게 된것은 인생의 행운이 아닐수 없었다. 《흥국상회》는 훌륭한 키잡이를 내세움으로써 복잡다단한 정세속에서도 애오라지 통일애국위업의 길에서 사소한 드팀도 없이 련전련승의 쾌거를 올려왔다.

김명호는 자기뿐아니라 《흥국상회》의 지도부일군들과 전우들이 누구나 정시명에게 습관되여온것이 응당하였으며 그것이 바로 정시명이 간직하고있는 신념과 의지 그리고 그들모두를 하나로 결집시키고있는 인간미에 있었다는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뜨겁게 느끼고있었다.

하기에 그의 신상에 가까이 접근된 위험경고를 김명호는 결코 무심하게만 스쳐넘길수 없었다. 그것은 《흥국상회》의 밑뿌리를 흔드는 가장 치명적인 타격이였다. 그래 김명호는 지금까지 보여온 형식상의 무관심에서 벗어나 얼른 오성도의 말꼬리를 붙잡고 그가 던진 말의 진위를 따지고들었다.

《그러니 당신들은 정향의 꼬리를 잡았다는건가?》

김명호가 자신을 다잡을 겨를이 없이 호기심을 보이자 오성도의 얼굴에 얄망궂은 랭소가 떠올랐다가 이어 지워졌다. 오성도는 다시 무표정한 낯빛을 하고 여전히 메마른 어조로 그의 말을 받았다.

《물론이지요.》

그리고는 김명호의 흥분을 눅잦혀주고싶은듯 담배갑을 그에게 내밀었다. 김명호도 오성도도 담배를 붙여물고 잠시 말이 없이 다시 눈싸움을 벌려놓았다.

오성도는 상대의 눈빛에서 아까와 같은 적의와는 다른 괴로움과 고민과 분노의 빛이 한데 어울려 번뜩이는것을 가려보았다. 김명호의 그 심경변화가 어디에서 시작되였는가 하는 생각이 들자 오성도는 대뜸 《흥국상회》를 뜻높은 인간들의 전투대오로 묶어세운 정시명이라는 미지의 인물을 그려보게 되였다. 사형수나 다름없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자기 집단과 동료들생각으로 흥분하는것은 아무 사람에게서나 볼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난 어제 경무대에 불리워나갔습니다. 두번째로 당신에게 통보해줄 문제입니다. 거기서 나는 리승만과 서울주재 미중앙정보국 책임자인 노불서기관으로부터 한건의 극비자료를 넘겨받았습니다. 그것으로 말하자면 나자신까지도 기절할만 한 우리 〈한국〉의 국체가 밑뿌리까지 뒤흔들릴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였습니다. 최근 정시명이라는 인물이 〈국군〉사단장 방대광을 설복하여 이북과의 평화협상을 통한 국토통일에 나서도록 한것입니다.》

그 소리에 김명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내가 헛들은것이 아닌가? 무슨 잠꼬대인가. 김명호는 오성도가 털어놓은 소식이 정말 그의 입에서 나온것인가싶어 눈을 흡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오성도는 그 소식을 다시 확인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김명호의 큰 입에서 저도 어쩔새없이 가슴한복판을 쩡 가르며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오성도의 말을 듣건대 방대광과의 사업이 이미 시작되였고 일정하게 성공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극비에 붙여져야 할 방대광문제가 어떻게 리승만이나 미중앙정보국선에까지 로출되였는가? 그렇다면 방대광사업이 실패했다는것이 아닌가.

이것은 최대의 비상사고였다. 방대광을 돌려세우는것이 현 단계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는 김명호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흥국상회》가 벌려온 투쟁의 모든 성과들을 릉가하는 의의와 가치를 가지는 거대한 진폭과 깊이를 가지는 투쟁이였다. 이 사실을 조직에서 알고있는가? 김명호는 가슴에 쿡 박혀드는 비수를 느끼며 오성도가 꺼내놓은 그 엄청난 사실을 확인하고싶어 이렇게 부르짖었다.

《아니요. 그건 거짓말이요. 모략이요. 방대광이 어떤 인물이라고 그 인간을 대상하여 모험을 벌린단 말이요?》

오성도는 통분함이 돋쳐있는 그의 열찬 웨침에 피씩 웃어보이고는 메마른 어조를 버리고 다소 승기가 나서 떠들었다.

《부회장선생, 흥분하지 마시오. 당신들은 지난 4년간 공격전에서 언제나 승리하였습니다. 난 그걸 인정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패하였습니다. 방대광의 밀사는 이북당국에 억류되고 서울에는 밀서가 도로 보내져왔습니다. 보시겠습니까?》하면서 오성도는 서류가방에서 한통의 얄팍한 문건을 꺼내 김명호에게 내밀었다.

《이건 방대광이 평양에 보낸 밀서의 사본입니다.》

김명호가 들여다보니 문건은 정말 방대광의 수표가 있는 밀서였다.

… …

 

김명호는 예까지 말하고는 침통한 어조로 물었다.

《회장동지, 이것이 사실입니까? 아니면 모략입니까?》

정시명은 김명호의 질문이 흉중에 꺾쇠처럼 들이박히자 그 세찬 충격을 참느라고 아래입술을 피가 터지게 깨물었다. 너무도 엄청난 만회할수 없는 패배를 김명호로부터 확인한 지금 정시명은 눈앞에서 불이 일고 귀전에서는 폭풍이 태질하는듯싶었다.

김명호는 터지는 오열을 간신히 짓씹고있는 정시명의 얼굴을 보자 고개를 푹 떨구고말았다. 방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서로의 가슴들에 쇠사슬처럼 칭칭 감겨들었다.

《그렇군요.》

김명호는 다시금 두사람을 둘러보다가 억이 막혀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잠시후에 그는 《어험, 어험》하고 마른 기침을 몇번 한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신중한 문제가 또 있습니다.》

… …

오성도는 방대광의 밀서를 한번 훑어보고나서 비분을 금치 못하는 김명호를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교수대에 한다리를 걸치고있는 지금에도 그리고 자기 동지들에게서 배신자로 배척을 받게 될수 있는 처지에서도 여전히 뜻에 살고있는 이 강하고 여유있는 인간의 진가를 다시 확인하는듯싶었다. 그는 방안을 오락가락하다가 김명호앞에 와서 걸음을 세우더니 말마디에 무게를 실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결심을 내려주시오. 난 어제 경무대에서 돌아온 후 방대광을 만났습니다. 방대광은 〈흥국상사〉사장을 접촉했다는것을 시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를 유인하여줄데 대한 요청은 배격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체포하다니, 정사장은 김장군의 대표이고 내가 이 서울장안에서 제일 존경하여마지 않는 신사다. 그 사람을 다치지 말아〉 이것이 대답이였지요.

나도 이제 정사장과의 사업을 끝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다치지 말자, 그는 우리의 리념적 적이다, 하지만 그는 민족의 재사이고 김장군의 대표다.…

부회장선생, 우습지 않습니까? 그리고 믿어지지 않지요? 누구도 아닌 오성도가, 이 남한의 파수군 오성도가 이런 호의를 베풀다니… 부회장선생, 더 긴말 할새가 없습니다. 난 지금 내 목을 걸고 당신과 도박을 하려 합니다. 이 비밀이 나가면 나도 정시명 그리고 당신도 함께 단두대에 오를겁니다. 난 당신들에게 기회를 주겠습니다. 즉시 함께 이남을 떠나시오. 조용히 그리고 빨리. 정시명의 소재와 그와 련계된 인물들이 드러난 이상 그의 체포는 시간문제입니다. 담화를 끝냅시다.》

오성도는 제잡담 이야기를 마치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명호는 뜻밖의 유혹적인 제의에 일순간 얼떠름해졌다. 일시에 여러가지 의문점들이 떠올랐다. 오성도가 어떻게 되여 이런 제안을 내놓은것인가, 이놈이 이것을 통하여 노리는 목적은 무엇인가, 나를 풀어놓고 회장동지를 유인해서 쉽게 체포해보려는 얕은 수작이 아닌가?

선뜻 접수하기에는 너무도 믿기 어려운 제의였다. 김명호는 오성도의 진속을 헤쳐보고싶어 진지한 어조로 대꾸하였다.

《난 동의할수 없소. 이에 대해 고발하면 당신은 련좌법에 걸려들어 사형당한다는걸 모르오?》

그러자 오성도는 다시한번 쓰겁게 웃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과 평생을 싸워본 사람입니다. 당신이 신의를 배반하는 무뢰한이 아니라는걸 난 알고있소.》

그의 배심있는 소리에 김명호는 다시 따져물었다.

《도대체 그러한 〈선의〉를 내놓는 당신의 진의는 무엇이요? 이것은 분명 엄청난 의미를 가지는 제의요. 내 솔직한 말로 당신의 제의에 떨떨해지오.》

《생명은 무엇보다 귀중한거지요. 당신들에게도 또 나에게도… 난 오늘의 우리의 지위가 거꾸로 되게 될 때 나 오성도가 김장군의 대표를 구원했다는 당신네의 보증을 바랍니다.

래일아침까지 대답할 시간을 주겠습니다. 결심이 된다면 아침에 나를 불러내시오. 당신은 동의해야 하오.》

오성도는 말을 마치자 더 설전을 벌리고싶지 않은듯 초인종을 눌러 간수장을 호출하였다.

《이자를 끌어가시오.》

감방으로 돌아온 김명호는 뙤창이 희붐해질 때까지 오성도의 제의를 놓고 머리속에서 격론을 벌려놓았다. 그는 오성도가 토설한 이야기들을 한마디한마디 되살리면서 그 매끄러운 목소리가 남겨준 어망처망한 느낌들을 정신력을 집중하여 분석하고 평가하였다.

평생에 이처럼 심각하고도 결심하기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 일이 없었던것 같다.

참으로 오성도의 제의에 대한 대답에는 애국투쟁의 원칙과 량심에 관한 문제, 자신의 명예와 조직의 존엄에 관한 문제, 전우들과 자신의 생명과 관련한 심각하고 극적인 문제들이 얽혀 쉽게 답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 어떤 인생의 여울목에서도 쉽사리 삶의 활로를 찾아내던 김명호지만 죽음의 벼랑턱에서 흔드렁거리는 구원의 바줄을 놓고서는 주춤거리며 생각이 깊어졌다. 어느것이 원칙인가, 어떻게 하는것이 량심을 지키는것인가, 전우들을 남겨두고 옥문을 나서는것이 리유여하 불문하고 도덕적인것으로 될수 있는가, 전우들과 더불어 이곳에서 원쑤들과 끝까지 싸우다가 지조를 지키고 장렬하게 죽는것이 내가 처한 처지에서 유일하게 영예로운 선택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오성도의 제의를 묵살해버리다가도 방대광과의 사업비밀이 로출되고 정시명에 대한 체포가 눈앞에 박두했다는 엄연한 현실이 그 격렬한 감정을 조심스럽게 반발하면서 랭정하게 리성을 가다듬게 하였다.

(《흥국상회》가 운명을 걸고 벌린 투쟁이 찌그러져가고 조직의 책임자의 신변이 위험에 빠진것을 알면서 자기의 명예와 체면을 먼저 생각한다는것은 어쩌면 너무도 알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자신을 《흥국상회》의 운명에 누구보다도 무거운 책임을 지고있는 주인의 한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러한 희생을 용납할수 없다. 끝까지, 목숨이 질 때까지 조국을 생각하고 동지들을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싸워야 한다.)

마침내 뙤창이 횅창하게 밝아올무렵에 김명호는 오성도의 제의를 일단 받아들이는것이 조직의 안전과 금후투쟁을 위하여 옳은 선택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는 오성도를 찾기 전에 다시한번 자기의 결심을 놓고 엄밀히 따져보았다.

(나 하나의 명예나 량심따위는 두번째 문제다. 내 한몸이 백천으로 쪼각나더라도 우리의 자랑이며 기쁨인 《흥국상회》만은 절대로 쪼각나서는 안된다.)

김명호는 이렇게 억세게 자신을 다잡으며 랭정하게 결심을 굳히였다.

이날 아침 김명호는 오성도를 불러 잠간 만난 후 경찰병원에 실려갔다. 거기서 가택치료라는 가석방수속을 받은 후 경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텅 빈 집에서 며칠을 보낸 후 미행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서울거리를 이틀동안 돌아다니였다. 오성도의 제의에 다른 기미가 없다는 확신이 생기자 법무부의 권재수를 전화로 만나 길철부회장에게 통보할것을 부탁하였다.

이렇게 되여 김명호는 길철을 만났고 그의 안내로 여기 필운동거점으로 옮겨앉게 되였던것이다.

… …

김명호는 이야기를 마치자 기침을 련발하였다. 그는 길철이 내미는 꿀물을 또 몇모금 마시고서야 다소 가슴이 가라앉는듯 숨을 쌕쌕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방안에는 다시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침침하게 드리웠다.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제가끔 분석하고 음미하고있었다.

정시명은 무릎을 꽉 틀어잡은채 아래입술을 지그시 깨물고있었다. 그에게는 방대광과의 사업이 실패했다는 생각만이 가슴을 토막치듯 절통하게 울리고있을뿐이였다. 어찌되여 이렇게 사태가 뒤집혀졌을가. 김명호의 말까지 듣고보니 다시 수습한다는것은 엄두도 낼수 없게 되였다.

길철은 머리를 기웃거리다가 김명호의 말이 리해가 되지 않는듯 쓰거운 어조로 방안에 드리운 괴괴한 정적을 흔들어놓았다.

《꼭 옛말얘기 듣는것 같습니다. 오성도가 자선가라, 하… 그가 미치지 않았으면 우리가 제 정신이 아니지 않는가.》

길철은 쓰겁게 웃으며 혀를 찼다. 김명호가 그 소리에 눈초리를 힐끗 쳐들었다가 속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난 오성도와 그의 심복인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안영선과 자주 만났습니다. 그 과정에 난 오성도가 대세에 민감하며 남조선의 정세발전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있다는것을 감촉하였습니다. 그는 어느 때든지 우리와의 력사적대결에서 미국놈들과 저들의 무리가 패배하리라는것을 리해하고있습니다.

지금 서울반동들의 심적동요가 하나의 대세로 되고있는건 사실이지요. 오성도는 우리에게 될수록 득죄를 하지 않으려고 하며 더우기는 통일운동에서 큰 몫을 담당한 회장동지와 같은 거인을 처리한 형리로 후손들에게 전해지는것을 두려워하고있습니다.》

《부회장동무!》

김명호가 자기의 견해를 조심스럽게 내놓는데 길철이가 칼날같이 예리하고 격한 어조로 그의 말을 썩뚝 잘라버렸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속에서 끓고있던 울화를 터쳤다.

《어찌 그럴수 있습니까? 난 이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해야겠습니다. 적에 대한 환상, 그렇습니다.

그 살인마들을 감히 그렇게 평가할수 있습니까? 아직도 부회장동문 저지른 과오에서 교훈을 찾지 못한것 같습니다. 뒤날에 총화는 되겠지만 부회장동문 확실히 달라졌소.》

엄중한 실책을 범한 김명호에 대하여 매우 감정이 좋지 않다가 고문에 초주검이 된 당자를 막상 마주하고서는 격한 속을 가까스로 누르고있던 길철은 김명호가 꺼내놓은 이야기에 그만에야 자제력을 잃고말았다.

《뭐요?!》

김명호는 길철의 랭혹한 비난을 받자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있었던지 이불을 홱 밀어제끼고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세웠다. 평소에 마음씀씀이 넉넉한 그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길철을 노려보다가 열이 나서 부르짖었다.

《길철동무, 내가 조직앞에 죽을 죄를 지었고 옥살이를 몇달 했다고 량심의 자대마저 잃은줄 아는가?》

김명호는 격해오르자 또다시 속이 궁근 기침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방대광과의 사업이 실패했다는 좌절감에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 없어하던 정시명은 전우들의 화제가 이상스럽게 번져가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모두들 이렇게 흥분하오? 사지판에서 나온 당자를 앉혀놓고 그 무슨 당찮은 소리요?… 길철동무의 말을 너무 타내지 마오.

부회장동무, 누가 동물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요. 일이 여의치 않아 길철부회장이 한마디 해본거지. 자, 자, 눕소, 누우라는데…》

정시명이 쿨럭거리는 김명호의 등을 주먹으로 자근자근 두드려주며 둘 다 나무랐다.

김명호는 기침이 멎자 분연히 다시 말을 이었다.

《길철동무, 내가 오늘 이 상면을 통하여 조직에 제기하려는건 다른 문제요. 내가 더럽혀진 제 목건사하러 나왔다고는 생각지 말아주시오. 회장동지는 서울을 떠나야겠습니다. 난 방대광소식을 전할겸 이 소식도 급히 전해야겠기에 동지들의 의심을 받을수 있고 제 상판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오성도의 병보석에 동의하였습니다. 오성도의 위험경고가 허풍이 아닙니다. 회장동지는 사실상 이제는 오성도가 구령만 내리면 오늘밤이라도 령어의 몸이 되게 되여있습니다.

부회장, 사태는 심각합니다. 회장동지가 서울을 떴다는것이 적들에게 확증되면 오성도의 말처럼 수사본부는 해체될것이고 그러면 〈흥국상회〉도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게 될것입니다.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길철부회장, 난 이 제의를 지휘부모임에서 정식 심의해줄것을 바랍니다.》

김명호는 사뭇 정중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하고는 더는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포단에 허리를 붙였다.

길철도 김명호가 제기하는 문제가 생각밖으로 너무도 절절하고 심중하여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명호의 실책에 대한 원망과 분은 다 새길수 없었지만 그때문에 너무 신경이 예민해졌다고 자기를 인차 뉘우쳤다.

정시명은 김명호의 진정에 넘치는 권고에 즉석에서 명확하게 자기 의사를 내놓았다.

《내가 벌려놓은 일들은 어차피 내가 끝을 봐야 하오. 난 리범석과의 사업을 마저 해야 하오. 그리고 방대광을 저대로 내버려두고 내가 훌쩍 서울을 떠나면 어쩐단 말이요?

그리고 말이요, 내가 떠나면 우리 〈흥국상회〉가 건재할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수 없소. 좋습니다. 오성도의 동향을 더 주목해봅시다.》

정시명은 복잡한 심리적굴절을 거쳐 안고온 김명호의 성의를 너무 푸접없이 꺾기도 난감하고 그렇다고 이 문제를 놓고 시비를 캐면 괜히 귀한 시간만 헛되이 보낼것만 같아 여운을 남겨놓고 매듭을 지어버렸다.

사실 정시명은 방대광과의 사업이 실패하였다는 엄연한 현실을 두고 다른 문제에로 도무지 사색의 곬을 쨀수 없었던것이다. 속이 와뜰거렸지만 의지의 힘으로 가까스로 참고있었다. 모처럼 준비한 사업이 열매를 딸무렵에 이렇게 좌절되고 수습할수 없게 되였다는것으로 하여 정시명은 감각이 마비되고 그냥 전우들과 자리를 함께 할수 없게 하였다. 속에서는 자꾸만 역겨운 한숨만이 치밀어올랐다.

정시명은 박륭정이 기다리고있는 자동차에 오르다말고 길철에게로 돌아서서 나직하나 엄하게 타일렀다.

《김부회장을 너무 몰아대지 마시오. 옆에서 내가 다 땀이 나오. 김부회장이 사형을 앞두고 자기가 맡아보던 수하성원들에 대한 지휘를 일임하기 위하여 애쓴것은 결과가 나빴으니 그랬지 옳은 선택이 아니였는가. 나도 그런 환경에서는 달리는 행동할수 없을거요. 실수는 그의 처도 했고 안지생동무도 했소.》

길철은 정시명을 쳐다보고는 대꾸없이 낯빛이 컴컴해서 고개를 숙였다. 정시명의 이야기에 공감이 가고 또 죽을 고비를 넘어온 사람앞에서 지나쳤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너무도 엄중한 손실로 해서 도무지 치미는 분기를 삭여낼수 없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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