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가을날의 번개

3

 

자신을 늙은 총각이라고 자처해온 장억수대위는 실은 올해 서른넷에 나는 홀애비였다. 어느 서울량반의 서너번째 소실의 몸에서 삐여져나온 장억수는 제국대학시절부터 주색잡이로 소문이 났던 서울 활량패였다. 광복된 이듬해에 얼굴이 해반주그레한 명월관의 기생을 얻어 살림을 차렸는데 한해도 넘기지 않고 차던지였다. 그다음 두번째 처를 물색하느라고 바람을 피우며 서울장안을 돌아쳤다.

그런차에 눈에 차는 얌전데기가 제발로 걸어 눈앞에 다소곳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순애다. 키가 맞춤하고 수집음을 잘 타고 말소리가 랑랑하고 얼굴이 해말쑥하고 량볼에 보조개가 매력있는 처녀는 첫순간에 어미를 닮아 멀끔한 신수와 륙군참모부 신분증을 코에 걸고 숱한 서울아가씨들을 울려온 장억수의 눈을 부시게 하였다.

그런데 찌르는대로 받아줄듯 싶던 애호박같이 만만해보이던 처녀가 사귀고보니 생각밖으로 차돌처럼 속이 단단하게 영글었다. 거의 두해째나 자기 이불속으로 끌어들이려고 달콤한 추파를 보내고 재물을 쉴새없이 날려보내건만 무슨 영문인지 마음의 나들문을 빼써 열어보이다가도 덜컥 잠궈버리면 요지부동이여서 어쩌는 수가 없다. 그래서 올해 여름부터는 순애한테 미쳐빠져서 볼이 여위여가는 제 몰골을 거울에 비쳐보다가는 이발을 으드득 갈며 생각을 고쳐하기도 하였다. 그 야멸찬 계집애를 완력으로 타고앉아 짓뭉개버리고 대문안으로 끌어들이든지 아니면 더이상 미련을 둘것없이 팽개쳐버리든지… 하지만 막상 그렇게 하자고 하면 생각과는 딴판이 되고만다. 박속같은 앞이를 반쯤 드러내고 빨쭉거리는 애교있는 웃음에 뼈마디가 사르르 녹아버리기부터 한다. 상대의 언행이 다소라도 흐트러져있을 때면 고슴도치처럼 신경줄을 곤두세우고 매서운 빛을 뿜는 처녀의 새파란 모습을 마주하면 자존심따위는 순식간에 허물어지고만다.

한발 비켜서서 생각해보면 계집 길들이기에는 그 누구에게도 짝지지 않는 장억수가 순애앞에서는 멍청이가 되군 하니 별일이다.

《헹, 고놈의 계집애…》 하고 싱겁게 웃기도 하지만 어쩔수 없이 애간장은 더욱 초들초들 말라들기만 하였다. 그럴 때면 기생집에 가거나 타자실처녀들을 불러들여 분풀이하듯 땀을 뽑군 한다.

그런데 이즈막에 와서 순애와의 관계에 끝장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해지고 절박해졌다.

그것은 최근에 자기 손에 련이어 와닿는 전쟁이라는 무서운 소식때문이였다. 전쟁소리가 심심치 않도록 그냥 줄을 선다.

벌써 몇해동안 군사관계자료들만 취급하여온 장억수는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한다고 어느 정도 정보에 대한 감각이 생겼다. 전쟁이 불원한 장래에 일어나리라는것을 기정사실화하고있는 여러건의 극비자료들을 타자하여 미국대사관과 경무대비서실에 보내거나 군수뇌 인물들에게 전하면서 장억수의 심리도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전쟁이 이 땅에서 반드시 일어나리라는 생각에 와뜰 놀라서 강하게 부정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자료가 한건, 두건 겹치면서 그의 머리속에도 전쟁은 하나의 정설로 굳어져갔다.

《전쟁!》 입밖에 번지기에도 머리칼이 곤두서고 소름이 끼치는 일이였다. 그러나 그는 극비자료취급자로서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자기식의 전쟁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가산도 정리하여 될수록 란리판에서도 써먹을수 있는 금붙이로 전환시켰다. 농짝같은것은 팔아버리였다. 에미 몰래 서울바닥에서는 중류급가옥으로 평가되는 집도 비싼값으로 흥정을 붙이게 하였다.

전쟁준비가운데서도 장억수가 당장 매듭을 짓고저 하는것은 뭐니뭐니 해도 순애와의 관계를 끝장내는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선에 나갈수도 있다. 그러면 순애와도 헤여지기가 십상이다. 그러니 우선은 《도장》부터 꾹 찍어놓아야 한다. 안방에 앉혀놓고 굴레를 씌워놓아야 한다. 저 첫물과일같은걸 전쟁란리통에 내놓으면 제것이라 할수 없게 된다. 아니, 안방은 무슨 안방인가, 내것이면 어떻구 네것이면 어떠랴. 전쟁이다, 전쟁! 고놈의 계집애 끌어다 실컷 재미보다가 전쟁이나 터지면 제멋대로 놀아대라지. 내 허벅다리 물고 늘어지게 두해토록 태가락을 부려온 회계를 톡톡히 치를테다.

이제는 더 미룰수 없다. 전쟁이다.…

사흘이 멀다하게 계집을 갈아대며 욕정을 퍼부어대는 색마들에게 있어서 애초에 사랑의 감정이란 있을리 만무하다. 이런 놈팽이들에게는 녀성의 미모는 도락의 상대이지 사랑이나 련정의 반려로는 될수 없다. 지금도 장억수는 촉수높은 전등을 켜놓은 타자실에 홀로 앉아 순애를 기다리며 이런 불륜의 생각을 하고있으려니 당장 침방에서 그를 끌어안고 딩구는 달콤한 환영에 사로잡혀 온몸이 녹작지근해왔다.

여섯시 정각이 되여 순애가 타자실에 들어섰다.

《언제봐야 순애씨는 약속을 잘 지켜주거든. 또 좀 수고해달라구. 이건 대통령에게 지급으로 올리는 극비문건이야. 한통만 쳐줘. 부본은 필요없고 한시간후에 올테요.》

장억수는 연필로 가필한 대목이 수두룩한 어지러운 문건을 내밀었다.

순애는 시뻘건 도장까지 여러개 찍혀있는 문건을 받아들고 종이장을 벌컥벌컥 번지며 페지수를 세여보았다.

《길지도 않은데 일요일까지 불러내네. 제가 칠게지…》

순애가 짐짓 뾰로통해져서 불만스러워하자 장억수는 헤식은 웃음부터 지었다. 그는 순애의 타자기앞에 빨갛게 익은 사과 두알을 놔주었다.

《같은 값이면 고운 얼굴로 받아주면 못쓴대. 친 다음에 문건검토를 다시하는걸 잊지 말라구.》

장억수의 추파에 맵짜진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순애는 얼른 삼키고 방글거리였다.

《그러문요. 누구의 명령이라구요.》

순애의 고운 웃음에 장억수도 마음이 놓이는듯 헤벌쭉거리였다.

《그래그래, 내 다 알아. 그래서 급하고 중한 일이 있을 때면 순애를 불러내는거지. 이다음에 보라구. 품삯이 백배, 천배로 보상이 되지 않나.》

《흥.》

《자, 수고해줘. 밖으로도 문을 걸겠으니 누구도 들여놓지 말라구.…》

장억수는 금이발을 번들거리며 헤실거리다가 방에서 나가 봉인떡이 붙어있는 커다란 자물쇠를 덜컥 채워놓고 사라졌다.

순애는 문건을 한번 읽어보기부터 하였다. 참모차장 정일권이 일본에 건너가 맥아더의 작전전문가들과 일본의 옛 황군작전장교들을 만난데 대한 보고서였다.

맥아더측은 이미 1946년부터 조선을 발판으로 중국과 쏘련을 침략하기 위한 세계적규모의 전쟁을 준비하여왔다.

미국본토에서 날아온 작전전문가들과 다년간 조선과 중국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일본군장교들이 모여들어 구체적인 전쟁계획이 작성되여 맥아더의 이름으로 워싱톤에 전해졌다.

그런데 최근에 그에 대한 미국방성의 최종검토과정에 쏘련과 중국에 대한 진공작전은 현 단계에서 시기상조라는 반대론자들의 장벽에 부닥쳤다. 조선반도를 평정하여 장차 3차 세계대전의 발원지를 만들데 대한 주장이 우세하게 되였다. 트루맨대통령까지도 그에 합세하였다. 산돼지잡으려 하다가 집돼지 놓칠수 있다고 점잖게 맥아더의 허욕을 눌러놓았다.

맥아더는 쓰거운대로 한걸음 물러서는수밖에 없었다.

조선전쟁을 일으킬데 대한 문제에서 기본적인 합의가 이루어지자 맥아더는 도꾜에서 세워진 작전계획을 남조선군부의 특정한 몇명의 작전전문가들에게만 공개하고 구체적인 협의를 시작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정일권을 단장으로 하는 고위작전장교들이 도꾜로 불리워가서 1차협의를 하고 돌아온것이다.

문건에 작전계획의 구체적내용은 반영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문건을 보면 미국이 벌써 오래전부터 조선반도를 기본무대로 새로운 세계대전을 준비해왔으며 바야흐로 조선전쟁은 마지막단계에서 작전준비가 완료되고있다는것을 명백하게 알수 있었다.

또다시 글줄마다 박혀있는 전쟁소리에 순애는 온몸이 와들거리였다. 그래 자주 오자와 탈자가 나서 여러장을 다시 타자했다.

한시간후에 장억수가 방에 들어섰다. 그는 타자를 끝내고 문건교열을 하고있는 순애를 흡족해서 지켜보다가 가방에서 빵과 두병의 탄산물을 꺼내 원탁우에 올려놓았다.

《벌써 다 쳤구만. 하여간 순애씨의 타자솜씨를 따를 사람이 없어. 참모총장님도 만나면 순애씨에 대한 칭찬이요.

타자란 손기만 날래서 되는게 아니지. 총기가 있고 눈썰미가 빠르고… 말하자면 머리가 좋아야 되는거요. 애란이 그년 보지. 들어온지 한해가 넘었는데도 밤낮 오자, 탈자투성이거든. 게다가 순애씨가 한시간동안이면 해제끼는것도 이틀, 사흘 질질 뭉개지 않나. 생긴건 멀쩡한데 타자하는걸 보면 에, 에…

자, 배고팠지? 내가 교열을 마저 하겠으니 좀 요기를 하라구.》

장억수는 제잡담 순애를 개올리며 장광설을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장억수의 칭찬은 기실 괜한것이 아니다. 순애는 일솜씨도 곱고 다기차다. 순애의 옆에서 일하는 애란이라는 타자수는 장억수 말대로 솜씨가 뜬데다가 탈오자가 수두룩해서 늘 장억수의 주먹찜질을 받군한다. 그러면서도 타자실에 붙어있는것은 장억수의 침실에 자주 드나드는 덕이라는것을 순애도 잘 알고있었다.

순애는 고개를 잠간 들어 눈가에 그 야릇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애란일 너무 모질게 굴지 말아요. 아버지가 없는 불쌍한 애가 아니나요. 이제 몇페지가 안남았으니 제가 마저 해요.》

《음, 음…》

장억수는 다시 문건에 열중하는 처녀의 옆모습을 넋없이 쳐다보며 저 꽃다운것에서 가시같은걸 어떻게 냉큼 뽑아치울가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문건교열을 끝낸 순애가 문건 웃모서리에 종이끼우개를 꽂아서 그에게 내밀었다.

《검토해보세요.》

《수고했어. 뭐 보나마나지.》

《그래두요.》

《그럼 한번 훑을가, 자, 그사이에 빵이나 들라구.》

순애는 음식을 펴놓은 원탁앞에 옮겨앉으며 《함께 들자요.》 하고 권하였다.

《그럼 그렇게 할가?》 장억수는 처녀의 말치레에 기다리기라도 한듯 순애의 맞은편에 걸상을 갖다놓고 앉았다.

그들은 잠시 말이 없이 탄산물을 마셔가면서 빵을 맛나게 먹었다.

《타자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나?》

장억수가 순애의 눈치를 봐가다가 물었다.

이날 장억수가 순애를 특별히 불러내여 타자를 치게 한데는 그놈으로서는 엉큼한 궁리가 있었다.

《글쎄요. 무슨 꿈을 꾸는것 같아요. 어제 타자한 문건도 그렇고 아주 무서운 꿈속에 있는것 같아요. 불안하구, 무섭구…》

순애는 입에 넣은 빵을 오물오물 씹어삼키고는 솔직하게 대답하였다.

《정말 전쟁이 일어날가요?》

순애의 목소리는 그도 다잡을새없이 떨리였다.

순애는 장억수가 제발 전쟁을 부정하는 소리를 해주었으면 싶었다. 그러나 장억수는 오히려 기다린듯이 대포를 놓기 시작하였다.

《뭐 나더러 새삼스럽게 물어볼거야 있소. 우로는 미국대통령 트루맨과 맥아더와 우리 대통령이 합의를 본것이고 밑에서는 이렇게 전쟁준비가 끝나간단 말이요. 전쟁은 피할길이 없게 되였소. 전쟁… 전쟁이란말이요. 젠장, 한번〈빨갱이〉들과 맞붙어보는것도 씨원스럽겠어. 이대로야 뼈가 근질거려 어떻게 계속 산단 말이요. 내 죽든 네 죽든 한번 붙어봐야 돼.》

장억수가 허세를 부려보지만 목소리는 분명 불안에 떨고있었다. 아마 상대가 외짝사랑을 조심스럽게 부어온 처녀인지라 한번 사내답게 밸머리를 세워보는것이지만 전쟁바람에 속이 졸아드는것만은 피할수 없는 모양이였다.

순애는 그 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으나 이내 고개를 숙이고 빵을 큼직하게 떼물고 오물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속깊이에서 뿌지직 끓어오르는 사내에 대한 멸시의 감정을 눌러놓으려는듯 탄산물을 꿀꺽꿀꺽 마시였다.

참말로 순애는 반동의 소굴에서 크게 달라졌다. 사내들로부터 색다른 소리만 들어도 한두마디 안팎에 얼굴이 빨개지고 상대의 눈길에 몸둘바를 몰라 쩔쩔매던 어제날의 순애의 가냘픈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억수따위는 내키는대로 주무르며 자기의 안속을 챙길줄 아는 여유있고 수단있는 녀인으로 성장하였다. 필요한만큼 웃을줄 알고 성낼줄도 알고 필요에 따라 자기 모습을 바꿀줄 아는 세련미까지 풍기는 당당한 애국투사로 자라났다. 통일전이 순애에게 마련해준 새 모습이였다. 어려운 투쟁이 순진하고 연약하던 모습을 버리게 하였으며 임무와 사명감이 담대하면서도 균형미를 갖춘 그리고 자기의 녀성적인 매력과 아름다움을 투쟁의 수단으로 활용할줄 아는 의젓한 녀인으로 키워준것이다.

이 순간에도 처녀의 마음은 앞날에 대한 커다란 위구와 불안으로 파들파들 떨고있으면서도 얼굴에는 시종 사내의 속을 바닥까지 파낼수 있는 상냥한 미소가 감돌고있다.

《그래서 말이야, 순애!》

장억수가 이렇게 흥분에 떠서 그의 두손을 덥석 잡았다.

《내 말했지만 이제는 더는 끌지 말자는거요. 뭐 어떻게 알겠어. 전쟁이 일어나면 무슨 일인들 없을가. 사람 죽이는게 전쟁이니까. 뭐〈빨갱이〉들만 죽을가, 우리도 죽어야 하는게 전쟁이 아니요. 그러니 우리 문제도 더이상 끌지 말자는거요. 그렇게 해주지?》

장억수는 전쟁이라는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펼쳐놓다가 슬그머니 자기 문제로 화제를 젖혀놓고는 열에 떠서 처녀의 손목을 흔들었다.

순애는 그의 손에 잡힌채 장억수가 그려가는 세계에 휘말려들면서도 전혀 딴 생각을 하고있었다. 아성의 생각, 아성과의 관계에 대한 애모쁜 생각이였다. 아성이도 넘겨준 자료를 보고 장억수와 같은 생각을 해주었으면 얼마나 다행스러울가, 그 자료를 보며 뭘 생각했을가.

어찌보면 장억수의 불안이나 그로부터 시작된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장억수의 소리가 턱자없는 헛소리만은 아니다. 우리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통일을 기다린다는것이 이제는 너무도 허무한것으로 되였다. 그러니 더는 이렇게 살아갈수는 없다. 정말 래일이라도 전쟁이 터지면 우리 사이는 어떻게 되겠는가. 몇해동안 그리며 기다리며 살아왔는데 또 끝이 보이지 않는 세월의 언덕을 올라야 하겠는가. 그 끝은 어델가…

처녀는 고개를 숙이고 얄팍한 아래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애달픔에 잠겨들었다. 쓰라린 고통이 단단한 집게발처럼 심장을 그냥 옥죄여드는것만 같았다.

처녀의 번민을 제나름으로 판단한 장억수는 더 강요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생각을 더듬고 결심을 내릴 시간을 준다는 배포였다. 장억수는 마루바닥에 무거운 군화발소리를 내면서 오락가락하다가는 이따금 처녀의 동정을 살피느라 곁눈질을 한다.

한참후에야 장억수는 허리를 굽히고 애끓는 생각에 옴해있는 그린듯 한 처녀의 뒤모습을 바라보다가 또다시 전쟁과 사랑, 전쟁과 인생에 대한 장광설을 훈시조로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그 소리가 처녀에게는 마이동풍이다. 여느때 같으면 마음싸지 않은 웃음이라도 웃어주고 볼우물도 살짝 패우게 하고 이따금 그 고운 눈빛도 반짝이며 대척도 해주련만 그것마저도 없다.

순애는 아성의 얼굴을 눈앞에 세워놓고 장억수의 늘어빠진 궤변은 한마디도 가려듣지 않았다. 다만 엄청난 소식이 몰아온 공포와 불안에 떨면서 애달픈 상념에 잠겨들뿐이였다. 참말로 그것은 번개가 몰아온 천둥이다. 지심을 흔들고 삼라만상을 들부시듯 처녀의 모든 사고와 생활을 일거에 타격하고 뒤번져놓았다.

(어쩌면 좋을가. 장억수도 이제는 마지막 한걸음을 옮겨놓으려고 덤비고있지 않는가. 저 눈을 봐. 꼭 미친 사람의 눈이야. 어쩌면 좋을가?…)

처녀는 전쟁이라는, 아직은 책이나 영화를 통하여 얻은 표상밖에 없는 불의 바다속에 자기와 아성이와 장억수를 세워놓고 생각을 이어갔다. 이 문제는 누구하고도 의논할것없이 자기스스로 판단하고 결단을 내려야 할 문제일것 같다. 그는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리성을 가다듬으려고 애썼다. 정말로 자기 인생에서 매듭을 짓고 넘어가야 할 중대고비에 맞다든것 같다.

마침내 순애는 속에서 일고잦는 하많은 걱정과 불안에 종지부를 찍고 결연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을 지지리 태우고있던 혼란과 까닭모를 분노와 애수는 머리속에서 밀려나고 오래전부터 처녀의 심장을 애모쁘게 그러잡고있던 아름다운 애정과 환희와 열광이 마침내 그의 가슴에 그들먹히 차들었다.

(난 시집을 갈테야. 가고말테야.)

그는 드디여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그러자 갑자기 몽롱하던 주위세계가 선명해졌다. 두근거리던 심장의 고르지 못한 떨림도 가라앉았다. 그 무슨 커다란 힘이 그를 떠밀어주듯 배심이 든든해지고 용기가 솟구쳐올랐다.

생각이 정리되자 처녀는 두말없이 자기 할바를 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원탁우에 펴놓은 먹다남은 빵을 종이에 싸서 장억수의 가방에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거울앞에 가서 머리칼을 비다듬어올리고 한결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생각 좀 해보겠어요. 며칠후에 대답을 드리겠어요.》

《그게 정말이요?!… 어떤 대답을?》

장억수는 너무 좋아 입이 귀밑까지 째졌다.

순애는 자기를 덥석 끌어안기라도 할듯 헤벌쭉거리며 다가드는 장억수를 깔끔한 눈초리로 제어하며 짤막하게 응수하였다.

《대위님에겐 녀자친구들이 많죠?》

《그건 무슨 소리요?… 아, 그건…그건…》

장억수는 처녀의 동문서답에 찔리운듯 오만상이 됐다가 천연하게 벌쭉 웃었다. 순애는 비위살좋게 웃어보이는 장억수를 혐오에 찬 눈으로 쏘아보며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만약 저에게도 대위님보다 더 가까운 남자친구가 있다면 어떻게 하실테죠?》

《뭐야?… 그건… 그건 허튼소리!…》

장억수가 단박에 눈이 휘딱해서 소리질렀다. 이거야말로 그에겐 또하나의 날벼락이다.

《순애, 거짓말이야. 그럴수 없어. 거짓말이라고 말해.》

《좋아요. 바른 대답은 며칠후에 드리죠.》

순애는 더는 장억수와 마주서서 시시껄렁한 싱갱이를 하고싶지 않은듯 딸깍― 딸깍― 구두발소리를 남기며 방에서 나갔다.

《순애―》

닭쫓던 개 지붕쳐다보듯 망연자실해서 순애가 사라진 문쪽을 멀거니 내다보던 장억수의 흐리멍텅하던 눈초리가 이윽하여 거칠게 번뜩거리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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