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좌 절 인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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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일모레면 내 나이 회갑이라… 머리엔 서리가 내리고 인생은 어느덧 황혼이 지는데…)

방금 훈련장에서 부관을 상대하여 격검으로 한바탕 땀을 뽑고난 방대광은 시원한 랭수 한사발을 벌컥벌컥 마시고나서 혼자 한증탕에 벌거벗고 앉아 침울하게 중얼거리였다.

요즈음 방대광은 자주 이 훈련장에 와서 부관과 맞붙어 격검으로 시간을 보내군 한다. 산란해지는 속을 달래고 가까스로 세워놓은 인생전환의 버팀줄에 탕개를 틀고싶은 생각에서였다.

정시명을 만나본 그날부터 방대광은 꿈속을 헤매는것만 같았다. 정시명이라는 유명인물을 만나 술잔을 나눈것부터 꼭 꿈속의 일같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들도 꿈속에서 들어둔것 같다. 그리고 자기가 했던 이야기들은 꿈속에서 내놓은 소리같았다.

그 꿈에서 깨여나고싶어 훈련장에서 격검끝에 신경을 모아 한바탕 땀을 뽑고나면 다시 무아몽중에 사로잡히군 한다.

(이젠 정시명에게 대답을 주어야 할판이다. 어떻게 대답을 주어야 하겠는가.)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일껏 대답을 만들어놓으면 입밖에 꺼내놓기가 여간 베차지 않다.

한생에 표적으로 세우고 온 《반공》을 허물어버리는 대답이 분명한데 그것은 지나간 자기 생을 완전히 부정하고 도전하는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괴롭기만 하였다.

(도대체 자기 생애의 그 어느 순간엔들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아볼 엄두를 내본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그 정시명이라는 인물과 술병 몇개 굽을 내고는 그렇게도 쉽게 손을 내밀었던가.

내가 정말 아낙네의 변덕처럼 자기 인생의 방향각을 쉽게 바꾸는 졸렬한 사나이인가.)

살아온 지난날의 굽이굽이를 되돌아보느라면 섬겨온 상전들도 여러번 바뀌였다. 리씨조선의 대들보가 썩어서 곰팡내가 나던 시절에는 마지막왕인 고종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이 나라가 왜나라에 병합된 후에는 천황으로 그 우상이 바뀌였다. 그것이 다시 리승만으로 갈아졌다.

(또 이제는 평생 숙적으로 되여온 공산주의자들을 섬기고저 하니 이렇게 칠면조처럼 자기 모양새를 대세에 따라 바꾸어가면 그 뉘가 나더러 무사라 부르랴. 무사는커녕 변신에 능한 철새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사람이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게 돼먹지 않았는가.)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봉래산 츠렁넝쿨

                       엉킨들 어떠리

 

불쑥 그의 입에서는 자기도 의식할새가 없이 이런 시구가 구슬프게 새여나왔다.

이 시구는 리씨조선의 첫 왕이였던 리성계의 아들 방원이 고려 마지막왕의 신하였던 정몽주를 술판에 청해놓고 충심을 돌릴것을 권하면서 읊었던것이였다.

리성계를 섬길데 대한 방원의 유혹과 압력에 정몽주는 어떻게 대답하였던가.

방대광은 또다시 흥얼거리기 시작하였다.

 

                    이 몸이 죽어죽어 열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없고

                    님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

 

그 의미를 새겨보느라고 참나무대가 번들거리는 천정을 올려다보며 눈을 껌벅거리던 방대광은 급기야 이마살을 찌프리며 결이 나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엥히!…》

어떻게 생각하면 세상살이를 복잡하게 돌이켜보고 내다보는 자신이 희한하기도 하였다.

언제든지 방대광은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굴절을 해가며 돌이켜본 일이 없었다. 일본군에 몸을 담근것도 광복후 다시 탈바꿈을 하여 군부의 요직을 력임하게 된것도 시절의 바람결을 따르는것이고 운이 좋아 언제나 높은 군직이 차례졌던것이다.

그런데 인생의 단풍계절에 와서 새로운 바람에 돛을 올려야 할 막바지에 서게 되였다.

항차 이번에 불어닥친 바람은 지금까지 그를 떠밀어준 행운의 순풍이 아니라 고뇌의 역풍이였다.

(뜻을 세우는것부터 풍랑을 맞받아나갈 용기와 힘이 필요하다. 자칫하다가는 사나운 풍랑에 배도 노도 다 잃고 뜻을 안은채 곤두박질할수 있다.

왜 다름아닌 방대광이 인생이 드디여 조락이 되는 시절에 와서 남다른 뜻을 세워야 하는가?…)

방대광의 고민은 여기에 있었다.

지금까지 굳어져온 《반공》이라는 고정관념을 까부셔야 하는 리유를 놓고 방대광은 며칠째 그냥 속을 썩여왔다.

그 리유란 생각할수록 복잡하기 이를데 없고 천길심연속에 떨어지는듯 자신을 걷잡기 힘들다.

첫째 리유란 공산주의자들과 한생 겨루어보니 이길수 없다는것이며 승산이 없는 싸움에 인생을 속절없이 던지느니 이제라도 화의를 해서 동반자로 되는것이 현명지책이라 할수 있지 않을가 하는것이다.

여기에는 약삭바른 타산이 있지만 그래도 리성적인데가 있다.

둘째 리유는 《반공》무리들에 대한 환멸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재인식이다.

리승만족속들은 사귀여볼수록 구린내만 풍기는 어지러운 도배들이다. 민물고기치고 감탕내 나지 않는게 없다고 어느 놈 하나 깨끗해보이는 놈이 없다. 신뢰할만 한 놈이 없고 나라의 정상에 있는 놈들치고 존경해볼만 한 가치가 없다.

군사란 예로부터 정치의 부산물이요, 방패막이라 했거늘 정치가 병들고 정치가들이 병들어 나라도 병든거라 하필이면 병든 나라를 지키느라 혼백을 뿌릴게 있는가.

반대로 북의 공산주의자들이 하는 정치에는 확실히 신선하고 고결하고 속대여문것이 엿보인다. 방송 하나만 들어봐도 이남방송은 날에날마다 역겨운 정객들의 파벌싸움과 어수선한 나라꼴과 그속에서 부대끼는 국민의 가련한 참상으로 엮어지는데 이북의 방송에는 자신감에 넘치는 주의주장과 5천년의 빈궁과 수난을 털어버리고있는 강토의 오늘의 쇄신이 있고 래일에 대한 긍지와 활기에 넘친 국민의 주인된 기상이 약동하고있다. 정시명이라는 인간 하나만 봐도 공산주의에 대한 표상이 일조에 바뀌여진다.

내가 구태여 버림받는 정치, 버림받는 정치가들을 지켜줄 리유가 뭔가.

그러니 의를 위해 총을 꺼꾸로 멜 때가 되지 않았는가.

셋째 리유도 있다. 그 리유에 더구나 운명적인 비상한 뜻과 절박한것이 있다.

김일성장군이 민족의 단합과 국토통일을 위하여 한생을 일본놈들에게 붙어살아온 이 못난 인간의 인생을 바로 잡아주시고저 바다같은 도량을 베풀어주신것이다. 력사앞에서 속죄할 기회를 친히 마련해주신것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아니 사실인것 같다. 천만뜻밖의 소식을 전해준 정시명회장을 첫인상으로 평가한다면 비범하고 무게있고 분명한것이 의심할나위 없다.

방대광은 공산주의자들은 일구이언이 없노라고 단언하던 정시명의 반석같은 모습이 떠오르자 속이 든든해졌다.

(그런 인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참말로 그런 인간에게는 일구이언이 없을것이다.

그러니 김장군께서 불러주신다면야 내가 골치아프도록 복잡하게 생각할 탓이 없지 않는가.)

오랜 세월 자신의 출세와 부귀영달의 울타리에 속박되여 자기를 위해서만 뛰던 심장이 고결한 넋과 숨결에 이끌려 서서히 퍼덕거리고있었다.

(헌데… 헌데 말이다.…)

다시 그의 뇌리를 집게발처럼 꼭 눌러쥐고 심신을 괴롭히는것이 있었다.

어제 저녁에 경무대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참말로 미묘한 일이였다.

 

…뜻밖에도 리승만이 비서를 태워 자동차를 보내왔다.

방대광은 구새통같은 그 인간과 한자리하는것이 원체 질색이였다. 손주들의 엉덩짝이나 두드려주며 대통에 대진이나 끓이고있을 늙은이가 망신스럽게 양놈들에게 굽석거리며 분수에 넘게 나라의 옥좌를 타고앉은것부터가 꼴불견이다. 그리고 아침저녁 한다는 소리가 전탕 로망기있는 수작이다. 이 나라의 정치하는 놈들이라는건 다 그 로망든 령감한테 붙어먹는 시러베자식들이 아닌가.

하지만 《대통령》의 호출이니 경무대의 문턱을 넘는수밖에 없었는데 국모의 행세를 한다고 비단저고리에 꼬리치마를 두른 프란체스까까지 옆에 놓고 리승만이 꺼내놓는 소리가 첫마디부터 귀가 번쩍 트이게 했다.

《이보게, 채병덕이 안되겠어. 미국사람들이 그 사람을 참모총장에 그냥 놔두면 무기공여를 더는 안해주겠다는거야.》

《어째서 말입니까?》

방대광은 채병덕을 떼버리겠다는 리승만의 속말을 가려들으며 짐짓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 거야 자네도 잘 알지 않나. 홍천과 춘천에서 두개 대대가 2천명가까이 미국에서 넘겨받은 박격포까지 끌고 이북으로 달아빼지 않았나. 그걸 빌미로 미국사람들은 무기를 넘겨줘야 공산군 배불리는 일만 해준다고 버티는거지. 그러한즉 자네 생각엔 참모총장자리 뉘기한테 넘겨줘야 할상싶은가?》

《하… 글쎄요.》

방대광은 자기의 얼굴을 옆에서 따갑게 지켜보는 프란체스까의 눈초리에 등골에서 비지땀이 바질바질 나는것만 같았다.

(이년놈들이 도대체 내가 정시명을 만난것을 알아채고 벌리는 수작이 아닌가. 기괴한 일이로다. 아니 그럴수야 있는가.)

프란체스까까지 동석한것으로 보아 이 두상이 이 말 꺼내놓기까지 론의가 분분히 있었던 모양이다.

경무대의 안중에 무겁게 비쳐있는 자리를 차지할라면 이 안방마담의 결재가 있어야 한다는것이 정계에 돌아가고있는 뒤공론이다.

미국은 리승만의 합법적인 외교적통로뿐아니라 그놈의 몸뚱아리와 얼을 송두리채 치마폭에 휘감고있는 프란체스까를 단단히 거머쥐고 저들의 식민지제국의 인사권을 교묘하게 틀어쥐고있었다. 프란체스까는 인사문제에서 리승만의 고집을 꺾기 위해 아양을 떨고 행악을 부리고 그것도 부족할 때는 《그 사람은 노불씨가 좋아하지 않습니다.》하고 로골적으로 자기의 뒤에 미국이 서있다는것을 상기시키군 하였다.

(그러니 미국것들은 참모총장자리를 내게 주겠다는건가?)

은근히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하였다. 군대의 실질적지휘권을 장악하고있는 참모총장자리는 지금껏 군침을 삼켜오던 자리다. 초대 참모총장직을 차지한 채병덕이 광복전에 인천에서 군수창지기나 하던 주제에 거들거리는 꼴을 생각하면 단통에 속이 뒤집혀진다. 부대지휘경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그에게 군부의 실권을 안겨준 리승만에 대한 분노가 나날이 커왔다. 사람들도 누구나 만날적마다 군지휘권은 마땅히 방대광의 자리노라고 그를 극구 개올리군 하였다.

그러니 나라의 군권을 노려오던 일생의 꿈이 드디여 현실로 성큼 다가선것인가. 너무도 엄청난 유혹에 방대광은 떨떨해졌다.

리승만은 덤덤한것 같으면서도 끓고있는 속셈이 력력한 방대광의 표정을 입가녁에 실웃음을 띄운채 가늠해보다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헌데 말일세. 우리 군대는 어차피 〈북벌〉을 할 군대이고 이제 채병덕의 자리를 넘겨받아야 할 사람은 〈북벌〉의 최고인솔자가 돼주어야 하네. 이게 문제야, 내가 미국사람들과 자네 이름을 거들었는데 그 사람들도 그것때문에 기웃거리거던.》

리승만의 엉큼한 수작질에 방대광은 개개 풀리던 속이 서슬친 콩물처럼 꿋꿋해지고 눈빛이 거칠어졌다. 리승만의 유혹의 미끼에 어떤 낚시가 가리워져있는지 어렵지 않게 드러난것이다. 그러니 리승만은 예전처럼 《북벌》을 주창하여야 참모총장직을 하사할수 있다는것이다. 립장을 다시 바꾸라는 속대사다.

리승만이 자기를 불러들이고 달콤한 유혹의 미끼를 던지는 흉심이 짚이였다.

방대광이 《북벌》반대를 주장해나선 후 군부에서는 그의 주장에 대한 지지의 목소리가 커가고있었다. 그러니 방대광이 주장을 바꾸게 하여 군부의 동요와 혼란을 저지시키는것이 리승만에게는 필요하였던것이다.

리승만의 취지를 알자 방대광은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섰다. 그리고는 무인답게 솔직하고도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였다.

《좀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북벌〉이 현실적으로 필요하며 가능한가 하는데 대해서도 재고해보겠습니다. 각하께서도 그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방대광은 술상이나 받고 떠나라고 아양을 떠는 프란체스까의 소리에 요즈음 보신약을 복용하는중이라 섭생에 류의하라는 의원의 권고를 받았다고 점잖게 사절하고는 경무대를 나섰다.…

(리승만도 지금 자기의 대답을 기다리고있다. 보상이 보다 유혹적이여서 쉽게 단언을 내릴수가 없다.

다시 《북벌》기수로 등장한다?… 하기는 리승만의 말이 옳다. 이번에 참모총장직을 타고앉는 인물은 《북벌》기수가 되지 않을수 없게 될것이다.)

군의 통솔자라는 그 유혹이 방대광의 량심이라는 대문을 닫아버리고 그냥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꼬이게만 하였다.

(정대표가 기다리는 대답에는 인생전환이라는 운명의 중대결단이 나서고있다.

까짓거 복잡하게 인생을 다시 재전환해보느라고 골치아프게 속구구를 할게 있는가.

이미 발목이 비끄러매여있는 곳에서 군의 실력자로 되고싶던 꿈을 성취하고 때가 되면 적당히 물러서서 마음을 다 비워버리고 살다가 황천길에 오르는것도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제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는다고 한들 그런 자리야 어떻게 넘볼수 있겠는가. 그네들이 이제껏 저들에게 칼을 던져온 이 방대광에게 그런 선의를 보여줄리는 만무다.

그러니 인생살이를 복잡하게 그려나갈게 없다.…)

 

방대광은 이날도 서리서리 엉켜드는 번민속에서 헤매다가 종시 결심을 내리지 못한채 찬물욕탕에 뛰여들어 한껏 달아오른 몸을 식히고 집으로 돌아왔다.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니 남창영이 무거운 낯빛으로 맞아준다.

(이 사람이 대답받으러 왔나?)

방대광은 불쾌한 낯으로 그와 대수 인사를 나누었다.

남창영은 방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댔다.

《방형, 어찌된 일이시오? 모처럼 차례진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지요.》

《젠장, 가만 있소. 한숨 돌리고나 얘기합세다.》

방대광은 돌아오는 길에서도 번거로운 고민의 속박에 꽁꽁 묶이워있었던지라 남창영이 나타난것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해서 성난 어조로 대꾸하였다.

서두름이 없이 군복을 벗고 실내복으로 바꾸어입은 방대광은 담배를 꺼내 남창영에게 권하고 자기도 피워물었다.

방대광과는 한고향내기인 남창영은 어린 시절부터 너나들이로 살아온 막역지우이다. 일제시기는 한쪽은 군수요, 한쪽은 일본군 고위장교라는 직함이 있어 더욱 친밀하게 지내였고 광복후에도 마음은 서로 적대되는 진에 두고있으면서도 술상에 나앉으면 격의없이 속을 털어놓으며 친분을 이어온다.

방대광은 상대의 예민한 눈초리를 외면하여 느릿느릿 창문턱에 다가가서 화분들에 물을 주고 참나무꼬챙이로 흙을 보드랍게 뚜져주고나서야 남창영의 앞에 와서 쏘파에 무겁게 몸을 실었다.

잠시 그들은 서로 상대방이 말꺼내기를 기다리며 담배만 애꿎게 빨았다.

《방형, 난 방형이 며칠전에 경무대로 불리워갔다는 말 들었소. 혹시 방형대답이 늦어지는게 그것과 관련되는게 아니요?》

그 소리에 방대광이 눈을 번쩍 뜨더니 그에게로 쏘는듯 한 눈길을 보냈다.

남창영은 그 서리찬 눈길을 맞받아 주저없이 한마디 더 꺼내놓았다.

《거기서 신임총장문제가 거론되였다는 말도 듣고 왔소.》

그제야 방대광은 《거참, 정보통이 날래기도 하군.》 하며 비위살 두껍게 씩 웃고는 남창영의 눈길을 피해 바깥으로 턱을 들었다.

남창영의 소리는 정시명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정시명은 리승만의 비서실에서 있은 소식을 듣자 필경 방대광이 리승만이 던진 낚시에 코를 꿰웠다는것을 직감하였다. 일생을 그 무슨 철학적리념이 없이 세월의 풍랑에 이리저리 떠밀려온 그 인간으로서는 그쯤의 달콤한 유혹에 걸려들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정시명은 이 뜻하지 않은 장애를 극복할 방도를 찾다가 우선 그의 진맥을 짚어보기로 하고 남창영을 먼저 보냈던것이다.

《절대로 자세를 낮추지 마시오. 방대광이 제아무리 고집불통에 밸머리가 사납다고 해도 그는 지금 운명의 난파선에 올라 표류하는 나그네에 불과하오.》

정시명은 남창영을 떠나보내면서 이렇게 강조하였다.

지금 남창영은 정시명이 일러주던 말을 생각하면서 배심있게 달라붙고있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방형이 이제라도 대답을 주기 바라오. 정대표는 전쟁은 눈앞에 박두하였다, 강토에 몰려오는 전쟁의 불구름을 막아 민족의 영웅으로 력사에 남겠는가, 일본놈들과 미국놈들에게 붙어 한생을 백성의 원쑤로 살다가 전쟁하수인으로 력사에 오명을 남기겠는가, 방대광의 앞에는 이 두길이 있다고 하였소. 대답을 하시오. 나도 이 일에 더 개입하고픈 생각이 없으니 오늘로 손을 떼려고 하오.》

방대광은 강한 질책이 어린 남창영의 이야기를 덤덤해서 듣고있다가 그의 말이 단호한 결별선언으로 끝나고말자 얼굴부터 시뻘개지면서 역증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아따. 남형, 거 남형답지 않게 설설 끓는구려. 참모총장이면 어떻고 장관감투면 어떻단 말이요. 양놈들과 리승만이 씌워주는 감투에 이 방대광의 목대가 비틀어질것 같은가?》

방대광은 상대가 자기 급소를 사정없이 찔러대는통에 화가 돋쳐있으면서도 명백한 의사는 어물쩍하게 넘기려고 버둥거렸다.

《그렇다.… 그렇다면 대답을 끌고있는 리유가 뭐요?》

《남형, 목마른다고 우물을 통채로 들어마시겠소? 금방 먹을 떡에도 소를 박는다고 했소. 나나 남형이나 복잡하게 살아온 사람들인데 그걸 청산하는것이 가볍지 않구려. 피차에 리해해줄수 있지 않겠소. 그리구 김일성장군님께서 참 꿈같은 말씀을 보내주셨는데 내 그 정선생말만 듣고 정설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엄청난 의미가 있단 말이요. 이건 좀 실례되는 말같소만 그 정대표를 못믿어서가 아니면서도 쉬이 결심이 서지 않는구려. 여보, 바꾸어놓고 날 좀 알아주소.》

《그럼 어떻게 하자는거요?》

《그래서 내 좀 머리를 굴려보는게 아닌가.》

방대광은 남창영이 몰아대는통에 벼랑턱에 밀렸다가 이렇게 간신히 자기를 버티여내고서는 한숨을 내쉬였다.

방대광은 사실 이 문제를 놓고 생각을 해보기는 하였지만 그렇게 심각하게 느꼈던것은 아니였다. 그런데 창황중에 입밖에 올리고보니 남창영의 공세를 늦춰줄수 있는 맞춤한 구실이 되였다.

남창영은 방대광의 변명이 그럴듯 하게 받아들여져 일단 시작한 공세를 거두고 섭섭한 소리를 했다.

《그럼 정대표를 믿지 못하겠다는거요? 그분이 김장군님의 대표라는게 신뢰가 안된다는거요? …세상에 그런 거짓말도 할수 있는가?》

《아, 아… 날 오해하지 마오. 자꾸만 하는 소린데 남형이 내 립장이 돼보구려. 그렇게 단판으로 승부를 겨룰수 없게 되여있지 않소. 난 대표에게 대바람으로 반해버렸소. 첫눈에 알아봤단 말이요. 그런데… 형제간에 빚돈 한푼 내면서도 문서장을 먼저 만드는 세월인데 눈감고있으면 코떼우고도 할소리 없는 때가 아니요.》

방대광은 여전히 이 문제를 중요쟁점으로 세워놓았다. 시간을 더 끌어가 명분과 여유를 얻어내고저 자못 심각한 어조로 고집을 부렸다.

남창영은 더 시비를 캐거나 덮어놓고 밀어붙일 여력을 잃고말았다.

《그럼 문서장을 달라는거요?》

《아니, 그런건 아니구…》

《좋수다. 방형의 의심은 정대표만이 풀어줄수 있을것 같구만. 내가 오늘 있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겠으니 다시 만나겠다고 하면 어쩌겠소?》

《다시 만난다고?… 가만… 다시 만난다?…》

방대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천정의 한점을 멀거니 쳐다보면서 손가락마디를 잡아당겨 딱딱 소리를 냈다.

《이달중에는 안되겠소. 부대가 동기훈련에 들어가는데 사단장이 몸뺄 재주가 있겠나.》

《그것도 그대로 전하리다.》

남창영은 상대가 더 말을 붙여볼 여지를 주지 않고 배놈 배머리돌리듯 적당한 변명거리로 둘러치자 어쩌는 수가 없어 불쾌한 기색으로 일어났다.

방대광은 참모총장자리문제가 락착이 될 때까지 시간을 끌어볼 심산이였다.

우선 나선 자리는 타고앉고 보자. 정대표의 제안은 그 뒤날에 봐도 늦지는 않을것이다.

방대광은 이런 배심으로 버티였다. 남창영이 물러나자 숨구멍이 트이는것 같았다.

그는 대문가에 나와서 남창영을 바래주면서 엉큼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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