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피로써 이어지는 찬가

4

 

한주일이 되였다.

이날 마동열은 례영이와 함께 김포공항을 통하여 출국하게 되였다.

새벽무렵까지 정시명의 속내의를 다 뜨고난 례영이 그바람으로 눈을 붙이지 않고 부엌으로 나갔다.

민순임이 뒤미처 나와 떠나는 날까지 동자질을 하겠느냐며 등을 떠밀었으나 례영은 한사코 그가 가마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

민순임은 마지막으로 제 손으로 정시명의 밥상을 차려주고싶어하는 례영의 눈물겨운 속마음을 짐작하고 가마에서 물러났다. 부엌아궁앞에 쭈그리고앉아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불만 때주었다. 그러면서도 이따금 치마자락으로 눈굽을 쩍어내며 조심스럽게 례영의 옆모습만 훔쳐볼뿐이였다.

보글보글 끓는 밥물소리를 들으며 례영은 정시명의 내외와 남다른 인연을 맺고 살아온 지난 5년간의 가지가지 사연깊은 생활을 그려보며 눈물을 삼키고있었다. 친부모가 살아있은들 어찌 이들보다 더 정을 기울여주겠는가. 지나간 추억에 잠겨들수록 애모쁨은 뼈를 저미고 심장을 후벼냈다. 그는 정시명의 놋수저를 닦으면서도 눈물을 떨구고 토장뚝배기에 장을 풀면서도 눈물을 똑똑 떨구었다.

이제 또 언제면 정시명을 위하여 밥을 짓고 놋수저를 닦는 이런 기쁨, 이런 행복을 다시 가져보게 될가.

정말 이제 이 땅에 전쟁이 터지면 어떻게 될가?… 그걸 막아내자고 속들을 썩이고있지만 정말 그 엄청난것을 막아낼수 있을가.

이즈음에 보면 정시명의 얼굴에는 웃음이 보기 힘들다. 노상 쇠덩이같이 굳어지고 무거워진 모습이다.

이제라도 다시 말씀드려볼가? 정말 이 서울에 그리도 정을 두고 계실가?

밖에서는 장작패는 소리가 들렸다. 마동열의 도끼질소리다.

마동열도 이른새벽에 일어났다. 도적눈이 내린 마당을 말끔히 쓸고 도끼를 휘두르고있다. 어데 가서나 일로 다지운 몸을 아끼지 않고 실한 뼈대에 어울리게 걸싸게 일을 제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쩡- 쩡- 》

마동열의 도끼질소리가 례영의 가슴도 마구 찢어놓는듯 하였다.

아, 정말 사람이 눈물없이 사는 세상은 언제나 오려나. 길지도 않은 인생에 돌아보면 굽이굽이 눈물이 차있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그리워 눈물이 많았고 커서는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눈물이 고였다.

지금은 또 새로 모신 부모님과의 작별때문에 그리고 억대우같은 랑군과의 리별때문에 또 눈물이 그들먹해진다.

마동열과는 만나자마자 또 리별이다. 둘사이에 이미 약조가 되였다.

마동열은 이제 아침식사를 치르고 례영이를 김포공항까지 데려다주고는 그길로 청주로 내려간다. 마동열의 행동결심은 이미 길철의 승인을 받았다. 마동열은 정시명을 평양으로 모셔갈수 없다는것을 알자 길철에게 자기도 서울에 남겠다고 떼를 썼다.

길철이 그의 제기를 들어줄리가 만무였다.

《동무가 맡은 초소는 누가 대신해준단 말이요? 회장동지가 아시면 큰일날 일이요. 입밖에 끔쩍 올리지도 마오.》

그러자 마동열은 김아성의 탈옥을 도와주고 떠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길철은 조금이라도 동지들을 도와주고싶어하는 마동열의 지꿎으면서도 지극한 성미를 마다할수 없어 정시명에게 보고하지 않기로 하고 그리고 탈옥투쟁이 끝나면 곧 3국으로 돌아간다는 조건밑에 동의하였다.

사실 김창기가 잘못된 후 김아성과의 선이 끊어졌으므로 길철은 적임자를 물색하고있었다.

김아성은 최근에 자기 혼자만 탈옥을 하는게 죄되는 일이라 하면서 청주감옥의 전체 수감자들을 다 데리고 나가겠다고 제기하여왔다. 감옥에서 사귄 친구들을 떼놓고 혼자서는 나가지 못하겠다는것이였다.

그래서 길철은 김아성을 도와주기 위하여 파악이 깊고 제낄 손이 있는 동지를 찾아내느라고 왼심을 써오던중이였다. 그래 마동열의 제기가 천만다행스럽기도 해서 일단 받아두었다.

마동열이 그 일때문에 며칠간 청주쪽으로 왕복하면서 청주감옥의 부감옥장과 련계를 가지는데 성공하고 김아성과도 선을 이어놓았다.

이미 움직이고있던 감옥안의 정치범들의 지하조직은 감옥의 전체 수인들을 탈옥시킬데 대한 김아성의 제의를 환영하였다.

감옥안에서는 김아성을 총대장으로 하는 폭동지휘부와 결사대가 조직되고 탈옥에 필요한 기재와 무기를 마련하기 위한 사업이 진척되고있었다.

청주감옥의 부감옥장은 마동열을 감옥식당의 화부로 채용하였다.

마동열은 세개의 단도와 한정의 권총을 들여보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감옥과 주변의 지형지물을 익히면서 탈옥후에 탈옥자들의 행군로정을 현지에서 구상하고 그 정형을 김아성에게 통보해주군 하였다.

그런데 탈옥은 예정보다 앞당겨 하게 된다. 김아성이 고등법원에 제출하였던 항소리유서가 기각되여 사형집행이 앞당겨질수 있다는 자료가 법무부의 권재수를 통하여 길철에게 전달되였던것이다. 탈옥은 래일 저녁 8시무렵에 하기로 하였다.

김아성은 탈옥자들을 거느리고 산으로 들어가 남도의 빨찌산에 합류할것을 계획하였다.

거사는 부감옥장과의 협동밑에 마동열이 김아성이 갇혀있는 호동의 간수들을 제압하고 무기를 회수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무기를 김아성의 결사대가 넘겨받아가지고 다른 호동의 간수들을 제압한다. 이어 전체 수감자들이 경비무력을 쳐갈기고 감옥을 나선다.

그다음에는 허약자들을 다른 지역에로 빼돌리면서 기본집단은 남도의 산악지대로 향하게 된다.

마동열은 대오가 산에 붙을 때까지 김아성을 도와주다가 철수하여 부산에 가서 일본으로 가는 려객선에 오를것이다.

작전은 대체로 이렇게 짜져있었다.

그러므로 마동열이도 이제 집을 나서면 정시명과 다시 만날수 없게 될수도 있었다.

여차하면 안해와도 영영 리별이 될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동열은 조국땅에 들어서자 전우들의 처절한 투쟁과 불행한 소식에 접하고 가슴이 저리고 주먹이 떨려 견딜수 없었다. 무엇인가 전우들을 위하여 피를 쏟아놓지 않고서는 돌아설수가 없었다. 귀중한 동지들이 쓰러지고 잡혀갔는데 자기만이 이국의 평화로운 하늘밑에서 긁힌 자리 하나없이 지내는것이 너무 죄스러웠다.

하지만 거사를 당장 눈앞에 두니 생각이 많아졌다.

그래서 마동열은 흉중에 가득 차드는 정시명과 민순임과의 작별과 안해와의 기약모를 리별의 정을 도끼질로 삭여내고있는것이였다.

도끼질소리에 눌리운 마동열의 속쓰린 마음을 지금 례영이만이 가려듣고있었다.

례영은 아침상을 차렸다. 두리반에 정시명이 좋아하는 토장뚝배기며 구운 송어와 명태회, 김치가 챙겨지고 술병이 올랐다.

이 집에서 갖춘 반찬가지들이 다 오른셈이다.

《아버님, 부디 옥체건강하십시오. 마음뿐이였지 아버님을 잘 모시지 못하였습니다.》

례영은 아직도 눈물이 가랑가랑해서 술을 부어 정시명에게 내미는데 손이 바르르 떨며 술이 옆으로 흘렀다.

《원, 그런 소리 하지도 말아.》

정시명은 례영이 올리는 잔을 받아들고 갈린 소리를 냈다.

《어데 가서도 죽지를 않으면 다시 만난다. 자, 동열이도 한잔 들라구.》

정시명은 애써 미소를 짓고는 잔을 냈다.

례영은 민순임에게도 마동열에게도 술을 따랐다.

민순임은 잔을 쳐들고 애절한 눈으로 쳐다보는 례영이를 바라보며 쉬이 받아들지 못하고 눈물부터 앞세운다.

《어머니, 시름만 얹어드리고 떠나는 이 딸을 용서해주세요.》

《이것아, 그간 정말 고마웠다. 네가 곁에 없었다면 내가 어떻게 지금까지 속편히 지내왔겠느냐.

례영아, 통일이 되면 우리 평산집에 꼭 오너라. 참 좋은 고장이다. 우리 다 함께 거기서 모여살자.》

민순임은 잔을 받아 상우에 놓고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볼을 비비였다.

《어머니, 어머니라도 이 서울을 떠나자요. 전 자꾸만 불안해요. 제가 글쎄 어떻게 혼자서 떠나요. 아버님께 말씀하세요. 네?》

례영이 민순임의 겨드랑이에 파고들면서 부르짖었다.

《얘야, 아버질 두고 여길 어떻게 떠나겠니. 아버님 조석은 누가 끓이며 나그네들 시중은 누가 들어준다더냐.》

민순임이 고개를 가로젓자 례영이 이번에는 정시명쪽으로 돌아앉으며 분연히 다시 청을 들이대기 시작하였다.

《아버님, 이제라도 마음을 돌려주세요. 저더러 소갈머리 부족한 년이라 해두 아버님께 이런 말씀만은 꼭 드리고싶습니다.》

이제까지도 그리도 삽삽하고 연연하던 례영이 갑자기 여무진 말투로 바뀌여지자 정시명은 다소 놀란듯 한 표정이였다.

마동열도 불만기가 어린듯 한 안해의 말투에 놀라서 그이 발뒤꿈치를 가벼이 쳐서 주의를 주기까지 하였다. 속쓰게 하는 얘기는 꺼내지 말라는것이였다.

《어서 말해라.》

정시명은 례영이와는 마지막 자리인지라 그의 말을 흔연히 받아주었다.

《아버님, 우리 동지들처럼 내 나라, 내 동포에 정성을 고여온 사람들이 이 서울 하늘밑에 도대체 얼마나 되겠습니까? 나라 위해 얼마나 장한 일을 많이도 하였습니까? 그런데 그 싸움 뒤끝에 남은게 뭐나요. 예, 아버지? 아버님께 걸어놓은 현상금, 특별수사본부의 지명수배령… 이것이 이 땅이 아버님께 내건 보상인가요? 아버님, 전 정말 분합니다. 원통합니다. 이 땅은 어째서 이리도 매정하기만 합니까. 네, 아버님!

누가 끌어서 온 길입니까, 밀어서 온 고장입니까? 저희들과 함께 마음 편히 떠나고 맙시다. 이 서울땅에 또 무슨 미련이 있습니까. 네? 아버지!》

례영은 말끝에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그 비통한 부르짖음에 정시명은 숟가락을 든채 우뚝 굳어져 유리창너머로 눈에 묻힌 먼산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례영의 그 절통한 소리에 한마디로 대답할수가 없는 심각하고 가슴터지는 비분이 욱 치밀어올랐다. 례영의 웨침이 마디마디 갈퀴가 되여 페부를 쫙-쫙 흝어내리는것만 같다.

례영은 정시명의 무표정한 모습에 더욱 기가 찬듯 목이 꾹꾹 갈리여 그냥 정시명에게 섧게 들이댔다.

《아버님, 대답하세요. 네? 떠나요! 장군님께서 부르시지 않나요. … 아버님의 충심을 그리도 몰라주는 땅, 세상에 다시 없을 성의에 독으로 대답하는 이 무정한 서울을 영영 떠나자요, 예, 아버님…》

《아서라, 례영아. 그만하거라. 아버님 가슴터지는걸 보자구 안달복달이냐.》

말쑥한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어 애처롭게 울부짖는 례영이의 애끓는 하소연에 한마디 대답도 하지 못하고 낯빛이 컴컴해서 꼼짝하지 않고있는 정시명의 모습을 안타까이 지켜보던 민순임이 례영이를 끌어안으며 타일렀다.

례영은 그만에야 《어머니-》하고 엉엉 소리내여 슬피 울기 시작하였다.

가슴을 꽉 메운 그 무어라 이름짓지 못할 슬픔과 원망이 눈물이 되여 속눈섭에 매달려 파들거리다가는 볼우로 도글도글 굴러내렸다.

《그쳐라, 그쳐. 이것아.》

민순임도 두볼에 눈물을 펑펑 쏟으며 목이 메여 한다.

《놔두오. 울어라, 실컷 울고 떠나거라. 눈물은 다 털어놓구 떠나라. 울어라, 맘껏 울어라.

그러나 얘야, 이 땅을 너무 욕되게 생각지 말아. 못나두 잘나두 우리가 태여나서 자라난 땅이구 우리 후손들이 살아갈 땅이 아니냐.》

정시명은 례영의 절통한 부르짖음이 얼음쪼각처럼 부서져 가슴에 뿌려지는듯싶었다.

그러나 인차 후회가 되였다. 례영이 그걸 모르는 철부지인가. 례영이는 애당초 남의 가슴을 허빌줄 모르는 마음착한 녀자다.

정시명도 례영이 너무 안타까운 김에 자기 마음을 제딴으로 움직이고싶어 해본 소리라는걸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례영이 반듯한 얼굴에 끓고있는 슬픔과 괴로움을 쓰다듬듯 잠시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러나 흉중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속삭임이 소용돌이치고있었다.

(례영아, 이 땅을 두고 우리 장군님께서 얼마나 정을 기울여주시는지 너는 다는 모를게다. 그래서 나도 우리모두에게 뼈아픈 상실과 눈물을 안겨준 땅이긴 하지만 열과 정을 다 바치고저 하는것이다.)

그는 저려드는 회한을 감씹으며 흔연한 어조로 말했다.

《자, 어서 한술 뜨거라. 먼길 가자면 뭐니뭐니해도 배가 차야 하느니라.》

정시명은 례영이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주며 자기도 토장국 한숟가락을 듬뿍 떠서 입에 가져가는데 그 숟가락이 후들후들 떨고있었다.

정시명은 식사를 치르고나서 마동열에게 출국준비를 다시 깐깐히 물었다.

마동열의 말을 듣고나서 정시명은 심중하게 주의를 주었다.

《실수없도록 매사에 열번씩 다시 생각하는 버릇을 키워야겠어. 내 지금껏 동무들에게 꼭 찍고 넘어가지 않은게 하나 있소. 뭔가 하니 48년도에 마동열이 박정인선생 모시고 개성 갔을 때 말이요.》

느닷없이 떠올린 화제에 동열이도 민순임도 감개무량해졌다.

그때 마동열은 박정인과 민순임을 앞세우고 대북무역상인들로부터 구입한 출판물과 돈을 가지러 갔던것이다.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왔었다.

그런데 뭘 찍고 넘어갈 일이 있었는가.

마동열이 의아쩍은 눈으로 정시명을 쳐다보았다.

《그때 동무들은 박연폭포에 유람갔다오는것으로 경찰들을 업어넘기였는데… 헌데 박연폭포가 지금 어데 속해있나?》

《예?… 글쎄요.》

《분계선 웃쪽에 있단 말이요. 헌데 동무들은 거기 가서 놀고온다고 했다니 다행으로 경찰녀석이 떨떨해서 업혀넘기였지.》

《예―》

그제야 마동열은 자기가 이태전에 저지른 실책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생각해보니 하마트면 일을 칠번 했다.

《내 그때 말해줄가 하다가 박정인선생이 첫 공작을 마치고 기분이 떠있고 또 임무는 수행됐고 해서 그만 두었소. 그런 실수가 이번에 있으면 랑패야.》

정시명이 전에없이 각근히 일깨워주는 소리에 마동열은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명심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정시명은 그들을 떠나보낸 다음에야 마동열이 왜 며칠동안 분주하게 시간을 보냈는가를 알게 되였다.

떠나면서 마동열이 슬그머니 민순임의 손에 쪽지를 전해주었던것이다.

 

선생님, 선생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 령을 어기는 저희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저는 이제 례영이를 비행기에 태워주고는 아성이한테로 가렵니다. 례영이는 제가 있던 곳에 한발 먼저 가서 자리잡도록 의논이 되였으니 걱정마십시오. 아성의 탈옥을 보장해주고 저도 산으로 들어가든지 아니면 부산을 통해 자기 초소로 돌아가렵니다.

제가 우리 동지들을 위하여 할수 있는 마지막일을 아버님께서 널리 리해하여주시고 용서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안녕하시여 평산에서 만납시다.

우리의 수많은 동지들이 불렀던 우리 마음의 찬가를 례영이와 함께 부르고저 합니다.

통일조국 만세!

                                    마동열 드립니다.

 

그는 한동안 그 쪽지편지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다가 빈 곰방대를 뽑아물고 뻐금뻐금 빨기만 하였다. 자꾸만 불안한 생각이 떠올라 심중을 저저히 괴롭혔다. 마동열의 편지와 함께 례영의 눈물어린 설분이 그냥 귀전에 울리고 흉중을 마구 흔들어놓는다. 정말 저들의 사랑마저 이 서울땅에서 짓밟히는것이 아닐가.

《이 서울땅에 또 무슨 미련이 있습니까?》

그 애절한 부르짖음이 갖는 의미가 씹히우자 정시명은 순식간에 사색이 헝클어지고 까닭모를 비분과 서글픔이 치밀어올랐다.

(엄혹한 랭대, 체포소동, 기다리는 교수대, 비극으로 끝난 젊은이들의 사랑…

우리가 벌린 투쟁이란 결국 희생과 비극, 설음과 후회뿐이 남아있다는건가.)

정시명은 터져오르는 울분을 지그시 누르며 그냥 곰방대만 빨았다. 례영이 남기고 간 그 처절한 웨침과 마동열의 편지의 구절구절들이 불길한 여운으로 그냥 울리면서 가슴한복판을 쿡쿡 쑤셔댄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방안을 휘―휘― 둘러보았다.

례영이 떠나가니 모든것이 썰렁하기만 하였다. 방안도 마음도 텅 비여버린것 같다. 쓸쓸한 비애, 써늘한 공허, 처량한 고독감이 서린 집안에 초겨울의 눈바람소리만이 창가에서 소연할뿐이다. 커다란 상실과 슬픔이 가슴속에 구름처럼 쓸어들었다.

그는 뻐개지는듯 한 심장의 동통을 느끼며 시름겹게 중얼거리였다.

《마지막까지… 성의를 다 고이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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