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피로써 이어지는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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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간의 작은 쪽문이 빼써 열리더니 무명으로 두툼히 지은 회색바지저고리에 털조끼를 입고 백고무신을 신은 풍채좋은 코수염쟁이가 나왔다.

남창영이였다.

그런데 정시명을 보자 허둥지둥 대문턱을 넘어서는게 얼굴이 사색이다. 그 큰 눈에 겁기가 한데 모여 서물거리는게 기분을 잡치게 한다. 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보이는 정시명앞으로 다가왔다가 도로 대문쪽에 가서 쪽문부터 꼭 닫고왔다.

《이거 정말 야단났습니다.》

남창영이 그 겁기가 모여든 순해보이는 큰 눈을 슴벅거리며 뒤머리를 슬슬 긁기부터 하였다.

《하, 어째 남선생이 부인님생신날에 얼굴이 밝지 못합니다.》

정시명은 주인의 혼빠진듯 한 거동으로 보아 대문너머에서 정말 야단스러운 일이 벌어진것만 같아 다소 긴장해지면서도 개화장을 든채 흔연한 어조로 받았다.

《아니 글쎄 제가 좀 실언을 했습지요. 방금 저 량반더러 좀 마음을 흔들어놓느라고 이제 찾아오는분이 아마도 당신과 국사를 의논하고싶어할것이라고 했더니…》

남창영은 대문안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끝을 얼버무리였다.

《그것 참 잘했습니다. 그러니 뭐라고 합니까?》

정시명은 주인이 확실히 실언을 했구나 생각하였다. 그들사이에는 정시명의 정체나 찾아오는 목적을 절대로 밝히지 말고 그저 생일날 초대에 응했다가 술좌석에서 우연히 만난것으로 하자고 약속이 되여있었던것이다. 만약 방대광이 그걸 사전에 밝히면 겁을 집어먹고 물러서거나 다른 꿍꿍이를 벌려놓을수 있다는 사정때문이였다.

그러나 정시명은 이미 엎질러놓은 일이라 구태여 탓하지 않고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자기는 국사를 다루는 문관은 아니니 할말이 없다는거지요. 그러며 한다는 소리가 원체 술상에서는 술마시고 잘 놀아주는것이 손님의 미덕이라 했거늘 술마시고 엮어대는 국사가 변변할수 없노라고 하면서…》

《허 그것 참, 정말 술군다운 소리외다. … 그리고 또?》

정시명이 여전히 뒤말을 쉬이 잇지 못하는 주인의 말꼬리를 붙잡으며 소탈하게 웃었다.

《또 한다는 소리인즉 그 사람이 공산당은 아닌가, 공산당이라면 내 단칼에 요정내겠노라 하며 닛뽄도(일본칼)를 뽑아들고 일본군가를 한바탕 불러댑디다.》

《하하, 듣던바 그대로 막돼먹은 〈쟝글노부시〉로군. 어쩌겠습니까.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거늘 장부의 걸음 대문간에서 머뭇거리랴.》하고 정시명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치며 대문앞으로 팔을 내저으며 걸어갔다.

《엣, 그까짓 맞서보는거지요.》

남창영은 정시명이 대범하게 웃으며 자기의 근심거리를 가셔주는게 고맙기도 하고 장부다운 소탈하고 텁텁한 기개에 사뭇 기운도 생겨 덩달아 기세를 올리며 대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마당에는 방대광이 몰고온듯 한 찦차 한대가 서있었다.

《자, 운전사, 뭘하우. 자동차도 대문안에 들여놓으소.》

그리고는 집마당이 들썩하게 크게 소리쳤다.

《여보 마누라, 어서 나와 인사드리오. 정선생님이 수고로이 오시였소.》

방대광이 들으라는 소리였다.

50대안팎의 안주인이 《예― 나갑니다―》하고 길게 대답하며 버선발바람으로 토방에 나와 《선생님 오셨습니까》하고 곱게 앉은절을 한다.

《부인님, 축하합니다. 이렇게 생신날에 불러주시여 정말 고마운 마음 이를데 없소이다. 오래오래 살면서 큰 복을 누리십시오.》

정시명이 토방에 올라 맞절을 하면서 굵은 소리로 정중하고도 례절있게 인사를 차렸다.

《어서 들어가십시오.》

남창영이 정시명을 너렁청한 방안으로 안내하였다.

다다미방인데다 해볕이 잘 들어 무척 정갈하고 환하였다.

방 한가운데 잘 차린 술상이 차려져있는데 벌써 몇순배 돌아갔는지 얼굴에 벌그레하게 주기가 도는 군복입은 사나이가 벽에 허리를 붙이고 장검을 한손에 잡은채 들어서는 손님에게 거만한 눈길을 보냈다.

《방형, 인사하시오. 내 서울에 올라와 제일 귀한 술친구로 사귀고 지내는 정사장님이시오. 사장님, 이 방대광사단장으로 말하면 내게는 죽마고우요, 서울장안에선 너나들이로 트이고 사는 둘도 없는 벗이니 한번 정을 나누어보시오.》

남창영이 장황할만치 깍듯이 례의범절을 차리며 이쪽저쪽에 대고 선통을 한다.

《아, 성함을 익히 들어왔소이다. 나라의 국방을 맡아나선 중임을 돌보느라 로고가 많으시겠습니다.》

정시명이 이렇게 남창영의 장중한 인사말에 못지 않게 채수염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정중하게 말하며 허리를 숙이였다.

그때까지 벽에 비스듬히 허리를 붙이고앉아 거만한 눈길을 보내던 방대광이 풀어놓았던 목단추를 다시 채우고는 몸을 무겁게 일쿼세웠다. 무슨놈의 인사가 그리도 다사스러우냐 하는 맞갖잖은 거동이였다.

《친구의 친구는 나의 친구라 했으니 우리도 친구로 사귀여봅시다레. 자, 게 앉으시오.》

방대광이 옆자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자기도 이쯤이면 인사대접을 했다는듯 다시 벽에 허리를 붙이였다.

그때 안주인이 들어오더니 여닫이문을 열고 옆방으로 그들을 옮겨앉게 하였다.

옆방에는 똑같은 술상이 차려져있는데 상가운데는 노란빛이 반들거리는 신선로가 방금 자리잡은듯 흰김을 올리고있었다.

셋은 상두리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남창영은 방륭정과 조태준도 만약의 경우를 고려하여 술상에 청해들였으나 그들은 아래방에서 다른 상을 받았다.

방대광은 경계하는 빛을 풀지 못한채 술잔을 인차 들지 못하고 마른 낙지만 북북 찢어 질근질근 씹었다.

《자, 마십시다. 주량이 도량이라 한다는데 나는 도량이 크지 못해 술잔을 작은걸로 한답니다.》

정시명은 방대광의 앞에 있는 반홉은 실히 담을수 있는 은잔에 술을 채워주고 미소를 지었다.

《그 말씀은 과히 신통치는 않수다레. 주량이 도량이라 하는 말인즉 술망나니들이 술 퍼먹는 망신꼴을 변명하느라 만들어낸 수작질이요. 그리고 우리 무인들의 사발술재주는 실은 전쟁터에서 배우는겁지요. 부하장병 잃으면 화술에 벌을 적셔 떨떨해져야 잠들수 있으니 어쩌겠소. 내 술버릇 곱게 봐주시구려.》

방대광은 평안도말씨로 이렇게 넉두리를 늘이더니 은잔을 두손으로 받쳐들고 단숨에 쭉 들이켰다. 무인다운 솔직성과 애교가 묘하게 어울려든 방대광의 수작에 정시명은 한바탕 크게 웃고말았다.

《허허… 방사단장이 듣던바대로 솔직하고 시원스러워 술자리가 좋습니다. 우리 실업가들이 술 한잔 세워놓고 시간을 보내는 재주는 이 한잔을 기울여 한푼이라도 술대상의 돈주머니를 갉아낼 궁리를 익히는 재주지요.》

《하하, 사장님말씀 그럴듯 합니다.》

이번에는 방대광이 엉뎅이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방대광은 실업가의 체취가 풍기는 정시명의 언행에 차츰 경계심을 풀고 목단추도 다시 풀어놓았다.

《이렇게 방사단장을 보니 38°선을 지켜선 용장에게 더욱 믿음이 갑니다. 우리 국민이 발펴고 자는 덕이 뉘덕인줄 다 알고있지요.》

《허허, 고맙수다레. … 헌데 그런 얘기는 거둡시다. 난 용장이 아니라 졸장이요. 군권을 틀어쥔 놈들이 시라소니들이니 용장인들 그밑에서 어떻게 제 빛을 낼수 있소.

더구나 우리 상대가 너무 만만치 않지요. 우리 <한국>의 비극은 인재의 부재요. 리승만 같은 명이 다 진한 두상에게 <대통령>벙거지를 씌우지 않나 채소좌 같은 햇내기에게 군권을 주지 않나.

그러니 아침저녁 양놈들의 가랭이에 매달려 지낼수밖에… 실력과 실적으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아첨과 처세로 자리지킴들을 하니 국방이 허술하고 정치가 쑥대밭이 돼가는게 아닌가.》

방대광이 저으기 술기운에 의기가 충천해서 도도히 열변을 토해놓기 시작하였다.

국사를 피한다고 하던 방대광이 스스로 국사를 꺼내놓은것이다.

정시명이 슬쩍 어기를 다쳐놓으니 우직한 성미 그대로 밸속까지 다 드러내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국사란 길철의 자료보고에 언급된것처럼 한갖 불평투성이다. 자기는 용장이 분명한데 양놈들앞에서 사족을 못쓰는 시라소니들의 훈시질에 놀아대야 하는탓으로 용장구실을 못한다는것이다.

《내 사단에 미군 고문관이라고 대위녀석이 틀고앉아 감놓아라 배놓아라 사사건건 쫒아다니며 삿대질이요. 뭐 웨스트 포인트라든지 뽀인트라든지 그런 군대학교 졸업했다나요. 그놈이 분계연선에서 두드려맞기만 한다고 눈을 부라리기에 내 혼뜨검을 내주었수다레.

<야, 이 노랑눈아, 네가 그 뽀인트에서 중대를 다스리는 법을 배울 때 난 련대를 끌고 전쟁터를 누비던 사람이다. 포탄 한발 제대로 쏴주지 못하는 우리 군대전법을 비행기를 새까맣게 띄워놓고 적진을 재더미로 만들어놓고야 공격을 들이대는 너희들 식으로 할수 있다더냐.> 허허…

난 아직도 그 양놈의 노린내에 습관이 되지 않아. 에에-》하며 방대광은 다시 엉뎅이를 들썩거리며 소리내여 웃었다.

아마 38°연선에서의 패배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는지라 정시명앞에서 그게 켕기는 모양이였다.

결국 그것도 양놈들과 어깨우의 우두머리들탓이라는것이다.

정시명은 화제를 제 곬으로 몰아나가기 시작하였다.

《참 듣자니 방사단장님이 <북벌>무용론을 제창한다는 설이 항간에서까지 분분한데…》

《그러니… 사장님도 <북벌>지지파요?》

대뜸 방대광의 말이 거칠어졌다. 그가 촉각을 곤두세우는게 짐작되였다. 아마두 방대광이 그 주장때문에 외부로부터 여러가지 압력과 비난을 받고있는 모양이다.

정시명은 그의 그 심리를 더 들쑤셔놓는것이 좋을듯 싶었다.

《북벌》반대주장을 어느 정도 견지할수 있는가, 그 주장의 뿌리가 얼마만큼 든든한가, 이것은 앞으로 방대광과의 사업을 벌리는데서 기초로 될것이다.

《글쎄요. 사단장님이 주장이 있을게 아닙니까? 지난해까지만 해도 나는 방사단장님이야말로 <북벌>로 나라를 통일시킬 장수로 알고있었지요.》

정시명은 슬그머니 입침을 박았다.

《음-》

방대광의 코구멍에서 거친 숨소리가 뿜어져나왔다.

그는 정시명의 미소를 조소로 접수한듯 다시 잔을 들어 단숨에 비여버리더니 장검을 뽑아들었다.

이야기가 심화되고 두사람이 담판에 들어섰다는것을 알고 남창영은 아래방손님들에게 가봐야겠다는 량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방대광은 남창영이 방에서 나가자 뽑아든 칼을 다다미에 박으며 속에 찬 울화를 쏟아놓기 시작하였다.

《<북벌>, <북벌>… 개꿈이요. 말그대로 그건 리승만의 잠꼬대요. 나는 리승만앞에서 <북벌>을 잠꼬대라 꾹 찍어놓았소. 왜서냐구?… 안돼, 안되구말구. 나는 북의 공산주의자들과 15년 가까이 맞서봤소. 안된단 말이요.

뭣이 안되는가? 첫째로는 통수권자가 대상이 안되요. 조강지처는 헌신짝처럼 버리고 눈알이 새노란 양녀를 안방에 앉히고 정사를 하는 그 늙은이가 희세의 영웅남아 김장군과 대적이 되는가?

나는 김장군의 전법에 벌써 손을 들었던 사람이요. 밀림속에 야장간 차려놓고 일본의 100만대군과 대적해왔는데 지금 나라 절반땅을 타고앉아 진을 쳤으니 이거야말로 호랑이가 뿔과 날개까지 돋힌 격이라… 내 지난해부터 행여나 하고 불질을 해봤는데 어, 안되겠더라구요.

둘째로는 우리 군사가 대적이 안되요. 이번에 뭐 리승만이 김창룡을 시켜 숙군놀음을 벌렸는데 김창룡 그 자식이 무인같은 사내들은 말짱 좌익으로 몰아 족쇄를 채웠어. 쭉정이만 남아 어정거리는데 <북벌>은 해봐야 승패는 불보듯 하오.

셋째로는 무엇이 안되는가? 국민이야. 북쪽은 김장군두리에 똘똘 뭉쳐 김장군만세요. 헌데 남쪽은 어떤가? 아침저녁 제 <대통령>을 쳐죽이라고 주먹질이야. 이래서야 <북벌>을 어떻게 한단 말이요? 그런데 왜 백성이 주먹을 들었는가 이가 문제요. 리승만이 옥좌에 버티고있는 한 백성의 노한 주먹이 내려가지 않을거란 그 말이요.

내 미국것들과 리승만앞에서도 말했지만 이제 벌어질 전쟁은 태평양전쟁과는 다르단 말이요. 군사만 힘겨루기하는 군사놀이가 아니라 그 말이지요. 이밖에도 등등 해볼 소리는 많소.》하며 방대광은 제김에 결이 올라 주먹으로 방바닥을 쳤다.

정시명은 그가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 묵묵히 들어주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방대광이 우직하고 단순한것만 같았는데 예상밖으로 생각을 깊이하고 제법 자기의 주장을 빈틈없는 론거로 다져놓고있는것이다.

정시명은 그가 이야기에 지친듯 다시 낙지꼬랭이를 질겅질겅 씹기 시작하자 이미 열이 오른 화제에로 다시 몰아갔다.

《방사단장님까지 그렇게 김빠진 이야기를 하니 이 나라는 전도가 막막하군요. 지금 남북삼천리가 국토를 하나로 합치자고 왁왁거리는데 〈북벌〉도 안된다, 남북협상은 〈보안법〉위반이다 하고들 된서리만 치니 정말 나라통일은 어느 하가에 한단 말입니까?》

《뭘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소. 그네들이 보따리를 넘겨받으라지요. 미국놈들이나 리승만의 낌새를 보면 그냥 전쟁바람을 일쿠고있는데 내 지금 생각하면 그건 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미친 놀음이요.》

《그러면 사단장의 직분을 가지고있는 군부의 중핵적인물로서 사단장님도 소신을 세상에 내놓아야 할게 아닙니까. 통일은 이렇게 하는게 순리로다 하고 말입니다.

국민은 지금 조반석죽으로 연명하면서도 방형 같은분들을 위해 세금을 꼬바기 바쳐가고있습니다. 나 역시 당신이 입고있는 그 영국산 고급모직천을 바다건너에서 실어다가 제공하고있습니다.

헌데 국민의 혈세로 주지육림에 묻혀사는 나라의 중진들이 겨레앞에 드리운 재앙을 피해서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돌아앉아 한숨이나 쉬고 울분이나 토해서야 장수가 아니지요.》

정시명이 다소 준절하게 방대광의 기를 그도 의식할 겨를이 없이 슬그머니 눌러놓았다.

방대광은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갑자기 머리를 홱 가로저었다.

《로형, 자고로 군대는 생각이 앞서는 무리가 아니지요. 군대란 나라의 방풍림이요, 녀왕벌의 날개깃을 따르는 로동벌과 같은거란말이요. 생각은 정치가들의 몫이지요.》

《방사단장, 그래서는 안됩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오늘의 혼탁된 시국일수록 국민앞에 책임몫이 큰 사람으로서 뜻을 세워놓고 그 뜻을 지켜 살아야 합니다. 생각을 해야 합니다.》

《허, 그건… 딴은 그게 지당할듯 싶습니다. 보아하니 정사장이 범상치 않은분 같은데 그럼 당신생각에는 이 방대광이 어떤 방략을 내놓으면 좋을상싶소?》

방대광이 약간 삐뚤어진 말투로 늘어붙는다.

정시명은 방대광의 비양기어린 눈치를 가려보았으나 개의치 않고 헌헌하게 받아주었다.

《글쎄요. 방사단장이 정히 나의 자문을 필요로 한다면 좀 함께 생각하고 의논해봅시다. 그런데 길은 명백하고 목표는 달리될수 없습니다. 나라에 충정을 고이고 겨레에 헌신하는것이지요.》

《그도 지당한 말씀이시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에 건너가 사관학교를 다닌이래 일본사람들과 많이 어울려 지낸탓으로 사실인즉 조선사람의 혼이 빠져있던 사람이요. 뭐 그 사람들속을 들여다보면 배울것도 있지요. 명치유신이래 강병부국의 구호를 들고 나라를 강국으로 세운걸 보면 일본정치가들이 개명했던건 사실이 아닌가. 광복이래 나는 조선사람의 얼굴 되찾고 왜왕이 아니라 우리 임금의 정사를 받들자고 열번도나마 서약을 했건만 그게 참 말뿐이요.》

방대광은 정시명에게 끌려들어 커다란 호기심을 보이였다. 그는 지금껏 군부의 중진인물이라는 제딴의 체면을 세워보려던 허세를 어쩔새없이 허물어버리고 무인다운 솔직성을 보이면서 말투도 부드럽게 가지느라고 애를 썼다.

《지금 시대는 분렬시대입니다. 이건 분명히 비극입니다. 우리 력사를 거슬러오르면 고구려, 백제, 신라로 갈라졌던 시대가 수난의 한 토막으로 전해오고있습니다.

헌데 그때부터 수십세기가 흐른 오늘에 와서 외세에 의하여 강토가 갈라져가지고 남과 북이 너나없이 분렬의 비극이 만들어내는 화를 입고 손해를 보고있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눈앞으로 전쟁구름이 몰려오고있습니다. 벌써 벼락이 쳤습니다.》

《그 벼락은 나도 알고있습니다.》

《알고있어서만 안되지요. 겨레앞에 량심을 고이고저 하는 사람이라면 이 엄혹한 상황에서 길을 찾아야지요. 구름을 휘여내고 전쟁을 막아내야 합니다. 통일대업에 나서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백범이 나선 구국의 길에 올라야 합니다. 방사단장도 목을 내댈 각오를 가지고 겨레를 위해 의로운 길에 나서야 합니다.》

《음… 정사장님이 오늘 국사를 나누겠다고 했다더니 그게 나한테 안고온 국사라는겁니까?》

방대광이 문득 눈섭머리를 팔자로 쳐들고 정시명을 살피다가 투박하게 직선적으로 따져물었다.

《국사라… 허허허, 사실 나는 방대광사단장과 겨레의 사활권에 중대의미를 가지는 그런 국사를 의논하고저 오늘 왔습니다.》

《뭐라고요?… 그럼 당신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요?》

방대광은 무엇인지 례사롭지 않은 일에 맞다든것 같아 장검에 손이 가면서 눈꼬리를 들었다.

《나는 〈흥국상회〉회장 정향이올시다.》

《정향?… 그러면?… 가만 있자, 내가 요전번에 〈국방일보〉에서 정향이라는 이름을 봤던것 같소. 가만…》

방대광이 기억을 더듬다가 화닥닥 놀라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장검을 번쩍 뽑아든다.

순식간에 성난 메돼지처럼 표표해진 방대광을 지켜보던 정시명은 그의 잔에 술을 따르며 태연자약하게 말을 이었다.

《그렇소. 나는 목에 500만원이 붙어있는 지명수배자요. 미국놈들이 특별합동수사본부라는것까지 차려놓고 쌍심지를 켜달고 찾고있는 사람이요.》

《그러면 정시명이?… 그 정시명이라는 사람이?…》

《그렇소, 내가 정시명이요.》

그 저력있는 실토에 방대광은 혼비백산하였다.

방대광은 이미 특별합동수사본부의 상보와 부대에 기밀문건으로 떨어진 정향이라는 미지의 인물의 이른바 범행자료를 본바가 있었다.

그걸 보면서 방대광은 그 미지의 인물이 미국과 리승만과 맞서고있는 비범성에 혀를 차기도 했고 그 인간이 《한국》을 강타하고있는 위험성에 경악을 하였다.

특별합동수사본부는 공개적으로나 비공개적으로나 정향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최대의 거물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의 체제를 지키는 큰 몫을 맡고있는 자신이 이 나라의 체제를 흔들고있는 그 거물과 술잔을 나누고 국사까지 거론하고 속말까지 꺼내놓고있다.

《나는 당신을 체포하겠소. 우리 부대 방첩에도 당신의 인상특기와 당신이 저지른 범행자료와 무조건 체포할데 대한 지시문이 와있소. 이보게 남형!》

방대광이 아래방을 향해 벽력같이 고함을 질렀다.

남창영이 사이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뜩이나 큰 남창영의 두눈이 겁에 질려 휑해졌다.

《남형, 나는 가봐야겠소. 이 사람은 공산당두목이요. 내 술자리에서 사귄 사람을 고자질하는 용렬한 수작은 하지 않겠지만 다시는 이런 자리에 날 청해들이지 마소.》

방대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뽑아들었던 장검으로 앞에 있는 선인장화분에서 배가 불룩하게 나온 선인장 한마디를 뭉청 잘라버리고는 칼집에 절컥 들이밀었다. 잘라진 선인장토막이 다다미우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정시명은 함부로 으르릉거리고 을러메는 방대광의 란동을 쓰겁게 지켜보다가 위엄있게 그를 불러세웠다.

《방사단장!》

방안을 쩡하고 울린 저력있는 소리에 방대광이 마치도 뒤잔등에 총탄을 받기라도 한듯 흠칫 몸을 떨고는 홱 돌아섰다. 그리고는 자기를 쏘아보는 정시명의 눈초리에 우뚝 굳어졌다. 눈초리가 아니라 불줄기가 쓸어나오는듯싶은 이글거리는 눈이다. 서리발이 돋친것 같기도 하고 섬광이 번뜩이는것 같기도 하다. 그 세찬 눈빛에 찔리운듯 방대광은 잠시토록 그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하였다.

《나는 당신의 술투정을 받자고 온게 아니요.》

다시금 나직하나 호령기가 풍기는 소리가 방안을 위엄있게 눌러놓았다.

《자리에 앉으시오. 나는 위임을 받고 당신을 만나고있소.》

《위임?… 위임이라니?!…》

방대광은 까닭모르게 속을 휘젓는 불안과 육체에 감겨드는 속박에서 헤여나오려는듯 큰 소리로 받았다.

《나는 김일성장군님의 대표요.》

방안을 드르릉 울린 정시명의 선언은 장중하면서도 도고하였다. 정시명은 숱많은 눈섭밑에서 불빛처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방대광의 흡뜬 눈과 반사적으로 크게 벌어진 메기입을 근엄하게 지켜보았다.

《뭣이?… 김일성장군의 대표?!》

순간 방대광의 팔다리가 사시나무떨듯 하더니 낯빛이 백지장처럼 핼쑥해졌다. 그는 어정어정 도로 걸어왔다. 그는 아직은 부닥친 정황과 정시명이 던진 말의 의미가 너무 엄청나서 짐작이 되지 않는듯 코꿰인 송아지처럼 눈이 멀뚱멀뚱해져서 여전히 위엄과 정숙과 커다란 무게를 담고있는 상대방의 모습을 지켜볼뿐이였다.

잠시동안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팽배한 도전속에 흘러갔다. 두 사람은 서로 격렬한 눈싸움이라도 벌려놓은듯 상대를 노려보며 버티였다.

그러나 차츰 정시명의 얼굴에 서리찬것이 지워지고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그 고요한 미소에는 방대광의 도발을 견제하고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다기찬 강기와 무한한 힘과 비상한 용기가 느껴졌다.

웃는자와 성난자의 정신적승부에서는 언제나 웃는자가 강자요, 이기는 법이다.

방대광이 먼저 사개가 들려서 자리에 도로 풀싹 주저앉더니 제손으로 술을 부어서 꿀꺽꿀꺽 마시였다.

남창영이 안도의 숨을 내긋고는 도로 아래방으로 나가고 방안에는 여전히 납덩이처럼 무겁고 서늘한 침묵이 흘렀다.

정시명이 다시 포문을 열듯 웅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방사단장, 내 오늘 당신과 만나게 되기까지는 실은 곡절이 많았소. 나는 당신이 리승만의 면전에서 배짱있게 <북벌>반대를 선언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그래 당신과 마주 앉아 나라의 재난을 덜어볼 의논을 하고저 결심을 했지요. 그러나 직접 마주앉을 용단은 내리지 못했소. 솔직히 말하면 우리 동지들이 하나같이 반대했소. 나도 흔드렸고… 당신이 지난 기간 민족앞에 저질러놓은 친일역적죄를 어떻게 계산없이 넘어갈수 있는가 하는것이였소. 사실 당신이 아무리 변명해도 친일죄과는 이미 엎지른 물이라 주어담아낼수는 없는게 아니요.

그런데 어쨌단 말이요. 나라의 위기가 눈섭앞에 다가온 지금 고문서만 뒤지고서야 어쩌 대사를 도모할수 있겠소. 시간이 없고 일은 벽에 부닥치구… 더는 우물쭈물할수가 없어 나는 김장군님을 뵈오러 갔댔소.》

《?!… 그래서요?…》

방대광의 눈빛이 거칠게 번쩍거리였다. 커다란 호기심과 함께 화해할수 없는 경계심과 반발이 복잡하게 서리엉킨 눈빛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즉석에서 문제의 매듭을 명쾌하게 풀어주시였소. 방대광이 전쟁반대를 선언하고 통일위업에 함께 나선다면 자신께서도 손을 내밀것이라고 전해주라 하셨소.》

《그렇다?… 계속하시오, 계속…》

방대광이 여전히 두눈을 데룩거리며 서둘러 재촉했다. 흐리멍텅하던 얼굴에는 오만하고 심술궂은 빛이 떠돌았다. 삐죽이 내민 입술에는 분명 랭소가 떠올라 서늘한 빛을 뿜었다.

정시명이 방약무인한 그 거동에 역기가 솟았으나 진정을 고여 말을 이어나갔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방대광이 통일을 위해 한몫을 한다면 후손들은 그에게서 매국역적의 감투를 벗겨줄것이며 통일력사의 공신으로 전해갈것이라고 하시였소.》

《나를?!… 정말 그분이 이 방대광에게 손을 내민다고 하시였소?》

《그렇소. 당신에게 력사앞에서 속죄할 기회를 주자고 분명히 말씀하시였소.》

《속죄할 기회?… 그럼 당신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시오?》

방대광이 다시 도전조로 느릿느릿하게 물으며 입가에 얄궂은 미소를 담는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당신에게 하해같은 도량을 베푸시는데 우리도 그 뜻을 따를뿐이지요.》

《음- 김장군이 친히 이 방대광일 알아주고 당신 또한 날 믿어주겠다?… 감지덕지할 일인데…》

눈섭머리를 팔자로 쳐들고 심술궂게 빈정거리며 말꼬리를 길게 뽑던 방대광이 별안간 《핫-하하》하고 배허벅을 들먹거리며 발작적으로 웃기 시작하였다. 꼭 구새통 두드리는 소리처럼 궁글고 구접스럽다. 메기입처럼 길게 가로째진 입을 한껏 벌리니 제멋대로 얼기설기 박힌 호박씨같은 앞이와 시누런 금이를 박아넣은 어금이가 드러나 온통 번쩍거린다. 그안으로 설태낀 혀가 널름거렸다. 웃음마디를 넘길 때마다 구름이 잡힌 살찐 볼이 풀떡풀떡거리고 둥그런 어깨가 아래우로 널뛰듯 뛰놀았다.

잠시토록 실성한 놈처럼 제잡담 바스러지도록 웃고난 방대광은 웃던 그 모양새대로 별안간 웃음을 뚝 멈추더니 상판이 금시 불맞은 메돼지상이 되여버렸다. 그는 상대를 당장 짓뭉개버릴듯 노려보며 더위풀린 개처럼 헐떡거렸다.

방대광은 푸들푸들 떠는 입술을 강물고있다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당신, 지금 무슨 얼빠진 수작을 붙이는거요? 김장군이 내게 손을 내민다고, 뭐 어쩌고 어째?! 흥》

《여보 방사단장!》

《여보시오, 정사장, 당신앞에 누가 앉아있는지 똑바로 보시오. 당신은 지금 날 엿 한가락에 울다가도 웃을 세난 철부지로 보고 덤벼든게 아니요? 이 방대광이 그리도 귀가 무른줄 아는가. 우리 둘중의 하나는 미쳤소, 미쳤어. 핫 하하하… 김장군이 내게 손을 내민다고?… 나에게 속죄할 기회를 준다고? 하하하.》

또다시 방대광이 말끝에 천정을 향해 그 메기입을 한껏 벌리고 배를 풀떡거리였다.

극도의 혐오를 더는 참을길 없어하던 정시명은 마침내 압축될대로 압축되여있던 분통을 터뜨려놓고야말았다. 그는 돌덩이같은 주먹을 머리우에 높이 쳐들었다가 방바닥을 깨버릴듯 아래로 멨다 꼰졌다.

《어디다 대고 야로인가? <쟝글노부시>!》

그 추상같은 호령에 여닫이문이 드르릉 떨었다.

방대광은 턱밑에서 흐득거리다가 뜻밖에 터진 불호령에 오만상이 돼가지고 너불거리던 입을 급기야 닫아물었다.

두사람의 눈싸움이 다시 시작되였다. 이번에는 정시명도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밸통같아서는 목줄을 탈아쥐고 그 유들유들한 상판에 주먹을 날리고싶었다. 사람의 진정을 우롱해도 유만부동이지 제따위가 도대체 금새가 얼마 간다고…

정시명은 목청을 돋구어 분연히 꾸짖기 시작하였다.

《당신도 인간이라면 어떻게 하해같은 은총에 접하고서 미친놈처럼 망동을 부릴수 있는가. 우리 장군님께서 당신에게 력사앞에서 자신을 회계할 기회를 주시였는데 그래 그게 얼마나 힘들게 내리신 대용단인줄 당신은 참말로 모른단 말인가?

당신과 당신 부하들은 사실상 항일전사들의 철천지과녁이였소. 헌데 그 항일대전의 사령관께서 당신이 모기소리만큼 울린 <북벌>무용론을 귀하게 받아주시고 당신의 구질구질한 인생을 다듬질하도록 민족앞에 속죄할 기회를 마련해주시였는데 백번 머리를 조아려 사례해야 할 당신이 아닌가. 꿈에도 엄두 못낼 은혜에 분골쇄신으로 보답하기는 고사하고 뭐가 어찌고 어째? 택가락도 도가 넘으면 얄밉다 했거늘 주제에 뭐 코방귀? 헝!

좋소, 나는 가겠소. 리승만은 <북벌>을 짖어대고있소. 당신은 그 <북벌>에 반기를 들었소. 미국놈들도 이미전에 <북벌>을 결심하였소. 그러면 당신의 명은 리승만의 손끝에서도 다 진한게 아닌가. 당신의 <북벌>무용론을 받아줄데가 이 서울땅에 있는가? 당신은 지금 갈림길에 서있소. 한길은 자기를 멸망시켜 영원히 역적의 오명을 쓰는 길이요, 다른 한길은 우리 장군님께서 하사하신 은총을 받아안고 만고대역죄를 씻는 길이요. 후회란 언제나 때늦은 법이라는걸 잊지 마시오.》

정시명은 설익은 말고기처럼 벌겋게 타는 방대광의 면상에 이렇게 불을 토하듯 맵짠 입김을 준절하게 쏘아붙이고는 자리에서 성큼 일어났다. 오늘은 방대광과의 사업을 더이상 끌고싶지 않았다. 그자신도 온통 화증머리가 꿈틀거려 짜증만 앞서고 차분한 이야기를 붙일수가 없었던것이다.

정시명이 옷자락에 바람소리를 내며 나들문쪽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방대광이 덩달아 솟구쳐 일어나며 《사장님!》하고 웨치듯 큰소리로 부르며 뒤따라와 앞을 막아섰다.

《아!… 아!…》

방대광은 그의 팔을 그악스레 잡으며 목이 꽉 잠긴듯 이렇게 외마디만 비명처럼 내질렀다. 방대광은 한동안 정시명의 얼굴을 세세히 뜯어보기라도 할듯 지켜보았다.

꾹 다물린 입술은 내키지 않으면 억년가도 열리지 않을 성문같다. 숱많은 눈섭밑에서 불덩이같은 눈망울이 마치도 이런 인간은 거짓이 없고 군소리가 없다고 속삭이는것만 같았다.

아무리 흝어봐야 허투로 대할수 없는 사람앞에서 내가 정말 분수에 넘는 야료를 부린것이 틀림없다. 이 사람의 소리는 바른소리임이 분명하다. 준수한 거동과 진정에 사무친 분노는 의심할나위가 없다.

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이기에는 상대가 꺼내놓은 이야기에 너무도 거창한 의미가 있다. 여차직하면 굽이굽이 곡절많은 인생길이 뒤집어지게 될 판국이다. 참으로 만년세월 곬을 낸 장강이 꺼꾸로 흐르는 일이 있을수 있을가.

방대광은 아직도 부닥친 일이 기연가미연가 석연치 않아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정사장, 그러니 김일성장군님께서 나를 받아주신다는거겠소?》

그 소리에 정시명은 준절한 빛을 거두지 않은채 엄숙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게 참말이란 말이지요?!…》

또다시 정시명은 크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 순간 정시명은 방대광의 뇌리에서 격렬하게 서리엉켜 소용돌이치는 속갈래들이 언뜻 가늠이 갔다. 방대광으로서는 꿈에도 상상할수 없는 일일것이다. 창망한 난파우에서 표류하다가 비로소 구원의 등대를 찾은 인생의 행운을 방대광으로서는 선뜻 믿기 힘들어하는것이다.

정시명의 볼편으로 부지불식간에 다시 미소가 서서히 번져갔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타일렀다.

《방사단장, 어찌 그 엄청난 일을 놓고 랑설을 꺼내놓겠소. 용단을 내리시오. 옛말에 마음 한번 곱게 먹으면 북두칠성이 굽어본다 했소. 수렁창에서 이왕 뽑아든 발이니 의를 위해 의롭게 내밟기를 난 진심으로 바라오.》

《음-》

방대광의 코구멍으로 탄식인지 한숨인지 분간 못할 숨소리가 쓸어나왔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이 방대광을 정말 알아주신다는거지요?… 이보시오, 정대표! 오늘은 이만하고 자리를 파합시다. 헝, 도대체 내가 무슨 소릴 듣고있는지…

내 지금 제정신이 아니우다. 당신이 지금껏 한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나는 참 떨떨해집니다래. 맑은 정신으로 생각해야겠소. 그리고나서 다시 만납시다.》

방대광은 너무도 상상밖의 일에 접하고보니 온통 감각이 마비되고 정신이 혼란되여 말도 걷잡지 못하고 허둥지둥거렸다.

《그렇게 합시다. 방사단장.》

정시명은 그의 흥분한 모습을 사려깊은 눈매로 지켜보다가 기꺼이 받아주었다.

방대광이 마당에 나가 몰고온 찦차에 오르자 정시명은 《박동무가 좀 수고해야겠소. 방사단장을 댁까지 모시고 갔다오오.》하고 박륭정에게 지시하였다.

방대광은 두말없이 정시명의 호의를 받아들여 정시명의 차에 옮겨타고 방대광의 찦차는 남창영이 몰고갔다.

자동차의 뒤좌석에 올라 눈을 꾹 붙이고있던 방대광은 여전히 생전에 처음으로 당해보는 이상야릇한 공포와 그에 쌍곡선을 치는 감격의 열풍에 휩싸여있었다.

어쩐지 자기가 몽롱한 꿈속에 있는것만 같았다. 그런데 꿈치고는 너무 야단스러운 꿈이다. 꿈이란 자기 생각을 그려놓는것이라 하지만 이런 꿈을 언제 한번 상상해본적 없다.

(그게 정말인가? 김장군이 이 방대광에게 손을 주신다는것이겠다. 그럴수 있는가?…)

숱한 생각들이 가슴속에서 뜀박질한다.

방대광은 자동차가 서울을 벗어나서 개성으로 가는 도로에 들어서자 갑자기 《운전사선생, 차를 돌려주우. 한강으로!》하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어쩐지 서울을 이대로 훌쩍 떠나는게 불안스럽기 그지없다. 이상하게도 서울을 떠나는것이 정사장에게서 멀어지는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 한생에 다시 차례지지 않을 귀중한것을 놓쳐버릴것만 같다.

(력사에 속죄할 기회라 했지.)

바로 그 기회를 잃을것만 같다.

박륭정은 방대광의 높아진 숨소리를 기쁜 마음으로 가려들으며 한강의 숲으로 차를 몰아갔다.

《세우시고. 나 좀 강바람에 머리를 식혀야겠소. 미안한대로 여기서 기다려주우.》

방대광은 이렇게 말하고는 숲으로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강가에 이르자 바지가랭이를 걷고 물에 들어가 푸- 푸거리며 얼굴부터 씻었다. 이마로부터 턱부리로 씻어내리는 맑은 강물에 후끈해오는 가슴속의 열기마저 가셔지는듯 속이 시원히 열리였다.

그는 손수건으로 물기를 벅벅 닦은 다음 볕에 따가와진 강변모래불에 허리를 붙이고 벌렁 드러누웠다.

눈앞으로 새파란 하늘이 시원스럽게 마주쳐왔다. 숲속에서는 갖가지 새들이 저마끔 목청을 돋구고있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정시명의 미소어린 모습만이 새파란 하늘에 달처럼 둥실 떠올랐다.

그가 들려주던 말들이 다시 공명되여 하늘땅에 꽉 차있는것만 같았다. 그 신비의 음향속에 묻혀 방대광은 눈을 감았다.

그에게서 김일성장군은 벌써 오래전부터 공포의 대상이면서 무엇인가 인생의 빈공간을 가득 채워준 동경과 흠모의 빛이였다.

방대광은 항일유격대에 두드려맞아 완전히 넋이 빠져있던 때가 생각났다. 면상에 소낙비처럼 들부어지던 왜놈상관들의 무지한 욕설과 조롱과 모욕, 강직처벌뒤에 온 인생의 좌절감과 허무와 비관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맛보았던 자기자신에 대한 환멸과 멸시, 공산주의에 대한 극도의 증오… 그러나 이런것만은 아니였다.

방대광은 그때로부터 자기로서는 딱히 이름짓지 못할 비상하고 경이적이며 신비로운 모순투성이의 감정에 휩싸여들었다. 그것은 자기가 총부리를 겨눈 적진에서 일본의 기를 누를 민족의 영웅호걸이 드디여 솟아올랐다는 조선사람으로서의 류다른 자존심과 환희였다.

《일본의 기를 눌러라!》

이것은 일찌기 개화파량반으로 김옥균의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에 관여하였다가 대원군의 미움을 사서 룡강땅에 락향하였던 그의 조부의 유언이기도 하였다.

문명개화의 리념을 쫓아 일본에 추파를 던져왔던 그의 조부는 생의 말년에 일본놈들이 《한일합병》으로 이 나라를 삼키고 침략자, 략탈자, 압제자로서의 본색을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하자 구한국군에서 장교로 있던 방대광을 강권으로 일본륙군사관학교로 보내였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훈시하였다.

《섬오랑캐들이 근간에 유럽의 문물을 렴탐해가지고 청조는 물론 아라사의 수족까지 얽어매며 우쭐하고있는즉 너는 그네들의 무술을 익혀 그놈들의 기를 꽉 눌러봐라.》

한데 방대광이 일본의 기를 눌러본것이란 무엇이였던가. 기껏해야 갈겜질하는 부하왜놈들의 따귀나 후려치는것이였다. 조선사람을 반도인이라고 업신여기는 왜놈들앞에서 우직하고 끈질긴 경쟁심리를 가지고 드센 손탁과 우월한 전술로 타고누르는것이였다. 부대안에서 자기의 지휘권에 도전하는 왜놈부하들의 사소한 행위에도 무자비하게 목을 쳤고 군률을 위반하는데 대해서는 가차없이 다스렸다.

동만에서 목숨도 건지기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남방전선에 자원해간것이나 그의 부대가 남방쟝글속의 전투에서 단연 첫자리라고 《천황》의 《감사》까지 받은데는 이렇듯 식민지나라의 무장으로서의 우직한 반발심과 민족적인 보복심리가 진하게 깔려있었다.

한데 자기는 겨우 부하왜놈들 따귀정도였다면 김일성장군은 일본제국을 통채로 기를 누르고 얼을 뽑아버리고 있는것이다.

그때로부터 김일성장군의 존함은 무서우면서도 끌리는 숭배의 화신이였다.

광복후에 방대광의 이러한 이률배반적인 감정은 더욱 커왔다.

38°선에서 북을 넘겨다볼 때마다 방대광은 리승만은 감히 견줄바가 안되는 그이의 비범한 령도력에 머리가 숙여졌고 세기의 영웅호걸이 어찌하여 공산주의를 리념으로 하고있는지 못내 불만스럽기도 하였다. 김장군이 이 서울에 틀고앉아 정치의 홰대를 잡고 남북삼천리를 통솔하시면 미국놈들이 사족을 쓰지 못할것이라고 속구구도 하며 뼈저린 탄식도 해보았다.

그런데 지금 그분께서 자기를 알아주시고 하해같은 은총을 베풀어주신것이다.

(한데 난 왜서 정사장앞에서 시원스럽게 열통을 터놓지 못하고 못나게 덤비다가 달아빼왔는가. 그분이 손을 내밀어주신다면 뭘 더 바질거리겠는가.

그분이 마련해주신 속죄의 기회를 우선은 정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없을 이 기회를 놓쳐버리면 나의 인생은 리승만의 종복으로 만신창이 되고말것이다. 속죄의 기회라… 그래, 력사앞에 속죄할 기회다.)

방대광은 리승만의 몰골이 떠오르자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어 시야에서 쫓아버렸다. 눈앞으로 다시금 정시명의 뜻있는 미소가 떠오르고 그의 이야기들이 다정하게 울리였다.

그는 모래불에서 벌떡 일어났다. 옷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버리고 목단추까지 꼼꼼히 채웠다. 그리고는 박륭정과 남창영이 초조하게 기다리고있는 강뚝으로 걸어갔다.

자동차들은 다시 남창영의 집을 향하여 쏜살같이 달려갔다.

방대광은 성수가 나서 코노래를 흥얼거리는 박륭정을 둘러보다가 골살을 찌프리고 투덜거렸다.

《젠장, 정사장 모시고 다니는 자동차라는게 굼벵이나 한가지군. 속도를 좀 높이시우.》

그는 정시명이 자리를 뜰가봐 못내 념려되였던것이다. 박륭정은 방대광의 앙양된 감정을 넘겨짚고 《예! 만속으로 달려봅시다!》하고 기쁨에 넘쳐 자동차의 가속답판을 더 힘껏 밟았다.

이렇게 되여 방대광은 정시명의 앞에 다시 나서게 되였다.

《내 정사장님 다시 봅고싶어 서울지경도 벗어나지 못하고 돌아섰소이다.》

방대광은 아까와는 달리 자세를 정중히 해가지고 이런 말부터 먼저 했다.

《방사단장, 고맙습니다.》

《날 사단장이라 부르지 마시오. 이제부터 방상 아니 방형이라 불러주시오.》

정시명은 방대광의 복잡해진 심리를 너그럽게 받아들여 군소리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잡았다.

《내 이제 인생총화를 하렵니다. 김장군님이 용서해주시는 어지러운 그 인생을 다 결산을 해놓으렵니다. 그다음에 날 만나주시오. 하지만 나는 이 자리에서 한가지만은 말할수 있습니다. 무사는 가볍게 장검을 뽑지 않소. 한번 뽑아들면 그대로는 거두지 않소.》

방대광은 주먹을 불끈 쳐들었다가 방바닥을 치며 목갈린 어조로 부르짖었다.

《이 방대광이 한번 결심하면 번의하지 않을것이라 김장군님께 말씀올려주시오. 그러나 방대광이 당신편에 들어서겠는가, 이건 속단하지 마시오. 난 좀 생각해야겠수다.》

방대광은 커다란 흥분과 격정을 금치 못하면서 불안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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