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피로써 이어지는 찬가

1

 

례영은 서울변두리에 있는 자그마한 려관에 묵고있었다. 해종일 방안에 붙박혀있으면서 주변감시만 긴장하게 하였다. 아직도 자기가 오성도의 마수에서 풀려나온게 꿈만 같다.

한주일전에 경찰병원 원장방에 호출된 례영은 오성도를 만났다. 오성도는 자못 랑패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맞아주며 한마디만 하였다.

《무죄석방이요.》

죽음을 각오하고 기회만 노려오던 례영은 자신이 헛갈려들은것 같아 인차 돌아서지 못하고 오성도만 쳐다보았다.

오성도는 그가 영문을 몰라하자 다시 짤막히 말하였다.

《아가씨, 집으로 돌아가시오.》

례영은 이놈들이 아마도 자기 입을 열수 없으니깐 석방시켜놓고 미행하면서 정시명의 거처를 알아내려고 하는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야 자기가 석방돼야 할 리유가 있을수 없었던것이다.

오성도마저 자기라는 존재를 중시하고있는 형편에서 그리고 이미전에 리창순에게 권총까지 내들었던 사실이 확인된 조건에서 무죄석방이란 가당치 않은 수작이다.

예상했던대로 그가 병원대문을 벗어났을 때부터 미행이 따르고있었다. 두어놈이 교대를 해가면서 검질기게 따라다녔다.

례영은 미행을 떼버리는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그놈들을 달고 시안의 여기저기로 끌고다니다가 불의에 역에 나가 부산행 차표를 떼고 렬차에 올랐다. 남도쪽의 멀리로 쭉 빠져나가서 미행을 떼놓고싶었다.

그런데 부산에 이르고보니 돈이 문제였다. 손에 돈이 없고보니 마음대로 움직일수 없었던것이다. 하는수없이 동래시에 있는 권혜숙의 집에서 며칠 묵었다. 권영호의 처와 면목을 익혔던지라 권혜숙의 부모들은 죽은 딸이 돌아온것처럼 살갑게 맞아주었다.

필요한 돈을 마련해가지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도 미행군들이 여전히 삽살개처럼 지꿎게 따라왔다. 가만히 여겨보니 미행군이 네댓놈은 잘 될것 같았다.

례영은 대전에 올라갔다가 불시에 다시 부산쪽으로 갔다. 이렇게 하기를 세번이나 해서야 드디여 례영은 미행을 떼버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례영은 그 미행군들중 길철이가 붙여놓은 사람들도 있다는것을 알지 못하였다.

려관에서 며칠 보내면서 례영은 신문과 방송에서 《흥국상회》성원들에 대한 1차 대검거가 있었다는 수사본부의 상보를 보았다.

례영은 슬피 울었다. 정시명이 체포되지 않았다는 소식에는 숨구멍이 트이였지만 200여명이나 되는 동지들이 철창에 끌려가 자기가 겪은것과 같은 악행을 겪을 일을 생각하니 가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것 같았다.

며칠을 려관에 붙박혀보내자 속이 달아올라 견딜수 없었다. 정시명과 민순임의 소식을 모르고 울타리안에 갇혀살자니 꼭 바늘방석에 앉아있는것 같았다. 그러나 함부로 찾아다니는것도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되여 떠나지 못한채 안타까움속에 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정오가 가까와올무렵이였다. 한대의 군용찦차가 려관 뒤마당에 들이닥쳤다. 거기에서는 박륭정이 헌병대 대령과 함께 내렸다.

대령은 조태준이였다. 례영이도 조태준을 잘 알고있었다. 조태준은 정시명이 군부에서 벌린 숙청놀음에 여러 동지들이 감옥에 끌려갔거나 군복을 벗고 순애마저 학살되여 그쪽이 공간이 났으므로 그걸 메꾸기 위하여 들이밀었는데 길철의 요구에 따라 당분간 지휘부를 엄호하는 사업에 동원되였다.

헌병대 대령의 증명서면 김아성의것보다 가볍지 않았다. 그덕분으로 정시명은 검거소동이 벌어진 다음에도 서울시안을 마음대로 돌아갔다.

박륭정과 조태준은 곧장 례영이가 숨어있는 려관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례영에게 남복을 입히고 얼른 려관방을 빠져나왔다.

례영이는 정시명의 소식부터 물었다. 무고하다는 대답에 눈물이 글썽해졌다.

그들은 꼬리가 달리지 않았는가 해서 한강다리를 두세번 왔다갔다 하다가 종로동의 뒤골목에 있는 자그마한 잡화가게의 뒤문에 와서 멎었다.

여기에는 림인석이 처를 데리고 거처를 잡고있었다.

여라문살 되는 림인석의 아들이 뒤문에서 망을 보고있다가 자동차가 나타나자 얼른 문을 열어주고 집으로 뛰여들어갔다.

림인석이 례영을 반갑게 맞았다. 두해전에 사라졌던 림인석의 출현에 례영이 눈이 둥그래졌으나 림인석은 그저 손을 꼭 잡아주고 고개를 크게 끄덕여주는것으로써 길다란 사연을 굼때여버렸다.

네칸짜리 방이였는데 세개의 방은 미닫이로 련결되여있고 한칸은 잡화매대와 련결되여 거리를 감시하는데 편리하였다.

박륭정과 조태준은 인사도 없이 바쁘게 차를 몰고 사라졌다. 림인석이 나들문을 열어주며 말하였다.

《어서 들어가오. 집안에 누가 와있는지 알겠소?》

림인석이 례영이를 달고 방안에 들어서며 웃방에 대고 소리쳤다.

《마동무, 어서 나와 색시를 맞아들이오.》

그 소리에 기다린듯 미닫이문이 급하게 드르륵 열리였다. 거기에 밤색양복에 람색넥타이를 조여매고 머리를 단정히 빗어넘긴 6척장신의 풍채름름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그는 마동열이였다.

《어마나!》

천만뜻밖의 모습에 례영의 입에서는 외마디 탄성이 튀여나왔다. 불시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그리움과 반가움에 목이 꽉 메여올라 더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는 벽을 한손으로 짚으며 발을 옮기려 했으나 비칠거리였다.

림인석은 젊은 부부의 꿈같은 상봉의 좌석을 마련해주고싶어 벙글거리며 《한시간후에 흥제동으로 갑시다. 회장동지가 그리로 불렀소.》하고는 방에서 나가 문을 꼭 닫아주었다.

례영은 그저 꿈을 꾸는것 같았다. 사랑하는 남편… 너무 그리워 환각속에 그가 불쑥 나타난것만 같다.

시퍼런 대낮에 조태준이 찦차를 몰고 난데없이 려관방에 들이닥칠 때부터 례영은 반정신이 나가있었다. 림인석은 또 어떻게 되여 이 서울땅에 나타나 날 마중해주는것인가. 하늘에서 내려온듯 땅속에서 솟아난듯 마동열이 막아선것은 무어란 말인가. 이게 정말 꿈속이지 생시일가.

례영은 마치도 지금 자기가 그 어떤 최면술에 홀리운것만 같았다. 모든것이 문득이고 뜻밖이니 도무지 제 눈이 잘못된것 같기만 하였다.

그래 례영은 가위에 눌린듯 그리도 보고싶고 그립던 남편이 눈앞에서 벙글거리고있건만 말이 나가지 않고 발이 떨어지지 않아 꼭 외간사내를 외진 곳에서 맞다든듯 두려운 눈으로 바라볼뿐이였다.

《고생했구만.》

마동열은 얼없이 쳐다볼뿐 더 다가서지 못하고 우뚝 굳어진 안해에게로 급히 다가갔다.

《여보, 나요, 동열이요!》

마동열은 폭행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는 례영의 얼굴을 가슴아프게 지켜보다가 그를 넓은 가슴에 와락 끌어안았다.

《내 소식 들었소. 얼마나 고생했소.》

그제야 례영은 남편의 품에 노그라들것만 같아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면서 꺼져드는듯 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게 정말 당신이예요?!…》

례영은 너무도 뜻밖에 찾아든 기쁨과 행복에 가슴이 후둑후둑 급하게 뛰여올라 뻐개지는듯 하였다.

마동열은 온몸의 사개가 풀려 자꾸만 아래로 잦아드는 안해를 장대같은 두팔로 꽉 그러안았다. 그의 팔뚝도 자꾸만 후들거리였다.

《정말 당신이군요. 그런데 어떻게?!… 기별도 없이 이렇게…》

례영이는 숨이 차서 헉헉거리였다. 웃으려고 애썼으나 눈물만이 쏟아진다. 얻어맞아 푸릿푸릿한 볼이 삽시에 눈물에 홈빡 젖어버렸다.

《오… 이제… 이제 다… 말하지…》

마동열도 벅차오르는 흥분을 걷잡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리였다. 그는 별안간 례영이의 몸을 두손으로 버쩍 들어가지고 웃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철색볼에는 싱글벙글 웃음이 넘실거리였다.

《아이참, 원 당신두…》

례영은 쑥스러운 생각에 귀뿌리가 새빨개지면서도 그게 싫지 않아 동열의 실팍한 목을 감아잡고 처음으로 방긋 웃었다. 그렇게 웃으니 예전의 례영의 고운 모습이 다시 살아났다.

마동열은 달아오른 안해의 볼에 자기의 볼을 눌리붙이고 점도록 방복판에 서있었다.

행복의 순간들이 꿈결같이 흘러가는 속에서 마동열은 서울에 나타나게 된 자초지종을 약간 덤비면서 들려주기 시작하였다.

 

마동열은 얼마전 동남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열린 교포들의 국제적모임에 참가하였다가 조국대표로 온 은송을 만났다고 한다.

은송은 지금도 조국의 민전중앙에서 일을 보고있었다.

은송은 남조선에서 《흥국상회》성원들에 대한 검거소동이 벌어지고 정시명에 대한 추적소동이 검질기게 벌어지고있다는것을 들려주면서 안타까운 어조로 걱정하였다.

《얼마전에 김일성장군님께서 민전중앙위원회를 지도하시면서 휴식시간에 나를 만나주시였소. 그분께서는 정향선생이 집요하게 추적을 받고있는데 대하여 크게 념려하시였소.

장군님께서는 평양에 왔을 때 붙잡아두어야 되는건데 저대로 두다가는 아까운 사람을 잃을수 있다고 하시면서 좋기는 이제라도 평양에 데려오는것이라고 간곡히 말씀하셨소.

어떻게 방도가 없을가?… 어물거리다가는 그 금쪽같은 사람을 떼울것 같거던.》

은송은 마동열의 옷섶을 쥐고 흔들며 근심에 잠겨있었다.

마동열은 즉석에서 자기가 이길로 서울로 가서 무사히 모셔오겠다고 굳이 약속하였다.

그래서 회의가 끝나자마자 대만실업가로 위장하고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던것이다.

그러다가 끝내 길철과 만나게 되고 이날 아침 흥제동 아지트에 가서 정시명과도 만났던것이다.

 

이시각 정시명을 태운 찦차는 골목길에 먼지를 뽀얗게 일쿠며 달리고있었다.

방대광을 찾아가는 길이였다. 박륭정이 차를 몰고 조태준이 옆자리에서 긴장한 눈초리로 앞을 실피고있었다.

정시명은 차창가에 피끗피끗 스쳐가는 초겨울의 을씨년한 서울풍경을 내다보면서 아침에 마동열을 만났던 일을 생각하였다.

… 마동열의 서울도착과 도착리유를 들은 정시명은 자기를 념려해주시는 장군님의 심려에 가슴이 후더워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쉬이 잇지 못하였다.

평양에서 그렇듯 세심하게 정을 기울여주시더니 또다시 은정깊은 손길을 보내주시는 장군님!…

잊을수 없는 순화강변이 눈앞에 삼삼히 떠올랐다.

그분께서 다시 몸가까이로 불러주신다! 적구에로 떠나간 전사의 신상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여 따뜻한 은정을 기울이고계신다. 참말로 꿈같은 전설, 전설같은 사랑이다.

《그래서 말입니다. 인차 선생님을 모시고 가려고 합니다. 필요한 출국수속은 길철부회장이 다 맡아하겠다고 했습니다.》

마동열은 그 넉가래같은 손으로 정시명의 두손을 조심히 감싸잡고 감사의 정에 고즈넉이 차있는 정시명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시명은 대답을 기다리는 마동열의 눈길을 피하듯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거닐었다.

뜨거운 격정을 묵새기며 깊은 사색에 갈마드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마동열의 낯빛도 점점 무거워졌다.

기쁨에 넘쳐 달려온 길이였다. 서울소식을 들을 때마다 정시명에 대한 걱정으로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고 늘 죄스러운 자책속에 살아온 마동열이다. 하기에 장군님께서 가까이로 불러주셨다는 소식은 마동열에게도 크나큰 행복이였고 경사였다.

정시명의 곁에는 그리운 안해도 있다. 례영이도 정시명을 따라 귀국의 길에 오를것이다.

제발 무사해다오. 무사해다오.

마동열은 이런 생각에 떠밀리여 만리길을 단숨에 날아왔었다.

그러나 지금 정시명은 장군님의 부르심에 감격을 금치 못해하면서도 분명히 괴로움에 잠겨있다.

그 괴로움이 어디서 시작된것이고 그것이 어떤 대답으로 바뀌여지려는지 짐작이 되자 마동열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오고 숨이 꺽 막히는것 같았다.

마동열은 자기도 느끼지 못할 강한 충동에 떠밀려 그의 앞을 막아서며 격렬한 어조로 부르짖었다.

《회장동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가셔야 합니다. 가셔야 합니다. 장군님께서 크게 걱정하시고 기다리고계시지 않습니까.》

《그래, 장군님께서 기다려주시지…》

《그런데 뭘 또…》

 마동열은 여전히 열차게 부르짖었다.

《동열이, 진정하라구.》

정시명은 그가 더 말을 꺼내지 않도록 이렇게 눌러놓으며 그의 손목을 꽉 틀어잡았다. 그리고는 아무말도 없이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다시금 목메이는 그리움에 휩싸여들었다. 장군님의 자애로운 모습이 그저 창밖을 가득 채웠다.

(그이께서 부르시는구나. … 장군님께서 슬하를 떠나온지 알마 안되는 나를 어서 돌아오라고 부르시는구나.)

속눈섭이 가늘게 떨고있었다. 심장의 세찬 박동을 느끼며 정시명은 가슴을 눌러잡고 창밖으로 하늘 멀리를 쳐다본다.

그는 마동열의 손목을 잡은 손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벅차오르는 감격과 함께 쌍곡선을 쳐 가슴에 적셔드는 괴로움이 그 손을 통하여 마동열에게도 전해졌다.

마동열이 다시 입을 떼려고 하는데 정시명이 조끼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보더니 조용히 눌러놓았다.

《아직은 떠들지 마오. … 내 오늘 중요한 일을 하게 되오. 그러니 림인석동무한테 가있소. 례영이를 그리로 데려오라고 했는데 그애부터 만나보오. 례영이가 잘 싸웠소. 감옥에 간 후 나도 보지 못했는데 크게 상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구만.》

《어데로 가십니까?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마동열은 색시 만나보라는 소리에는 개의치 않고 불만에 차서 부르짖었다. 그는 정시명이 대답을 외면하여 자리를 피하는듯 했던것이다.

《아니, 조용히… 내 만나야 할 사람은 우리 동무들과 만나는걸 계속 외면해오는 사람이요. 갔다와서 다시 마주앉자구. 시간이 없어 그간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어쩌겠소. 량해하오.》

《선생님!》

《가오. 가서 우선 례영이부터 만나봐야지. 견우직녀 상봉이라더니 벌써 이태가 지났군. 어서가오. 그다음 만나기요. 흥제동거점에 우리 집사람이 가있소.》

정시명의 눈길은 다시금 마동열의 어깨너머에 가있었다. …

《장군님!》

정시명은 다시금 목메이는 감사의 정을 안고 속깊이 불렀다.

장군님의 그 자심한 사랑과 신임에 보답하기 위하여서라도 이번 사업을 어떻게 하든지 승리적으로 결속해야겠다고 속다짐하였다.

정시명은 주머니에서 길철이 작성하여온 한페지의 문건을 꺼냈다.

문건 첫페지의 꼭대기에 붙어있는 방대광의 사진부터 눈에 안겨왔다. 이마가 벗어지고 두볼이 옆으로 삐여져나온 군복쟁이가 두툼한 입술을 꾹 닫아붙이고 치째진 눈으로 심술궂게 쳐다본다.

그는 문건을 눈으로 훑으며 이제 맞다들어야 할 상대에 대한 생각에 묻히였다.

정시명은 방대광과의 첫 상면준비가 미흡하게만 생각되였다. 무엇보다도 그에 대한 파악이 없는것이 문제였다. 이 종이장 하나만 가지고는 그 인간의 체질분석을 다할수가 없었다. 리범석에 대하여서는 광복전부터 그의 사상동향은 물론 성격적특질까지 대체로 알고있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며 무엇을 아프게 여기며 그의 어느 곬을 쳐야 할지 판단할수 있었다.

그러나 방대광은 전혀 가량이 되지 않는 인물이였다. 친일정신이 골수에 배여있으면서도 반미적이라는 평가는 어쩐지 모순적이다. 간에 붙고 섶에 붙어다니는것이 민족을 등진자들의 생존방식이다. 그 틀거리에 맞춘다면 방대광은 마땅히 친미분자로 돼야 한다. 사실 지금 서울땅에서 일본이라는 우상이 허물어지자 친일분자들이 기여드는 곳은 미국의 품이다. 역적들의 체질적본성으로부터 달리는 될수 없는 공리이다.

어제까지 《북벌의 기수》라고 자칭하면서 38°선에서 불뜀질을 마구 해대던 인간이 제가 질러놓은 불길이 다 사그라지기 전에 돌아서서는 《북벌》반대론을 들고다닌다니 이것도 모순적이다.

어제 길철이가 상면준비를 위임한 남창영이라는 인물을 데리고 왔었다.

남창영은 광복후에 나라앞에 지은 죄를 씻겠노라고 좌익에 동조하다가 길철의 눈에 들어 《흥국상회》의 충청도조직에서 활동해온 사람이였다. 첫인상에 얼굴이 퉁투무레하고 소눈같이 큰 눈에 겁기가 실려있는게 첫눈에 어리어리해보이는 사람이였다. 이런 사람이 군수노릇을 어떻게 했을가 하는 생각부터 들게 했다.

남창영은 큰 눈을 연신 껌벅껌벅거리며 이렇게 보고하였다.

《방대광이 지금 동요를 하고있지요. 그러나 반공은 아무리 봐야 털어버릴것 같지 않수다. 아, 내가 글쎄 미국도 반대하고 리승만도 반대하니 이제는 공산당과 손을 잡아보라고 하니 일본도를 뽑아 기둥에 박고는 이렇게 말합디다.

〈남형, 공산당은 나와는 철천지원쑤요. 죽을 때까지 계산을 해야 할게 많단 말이요. 일본놈 따라다니며 망해빠진 이 방대광이 이제는 공산당과 손을 잡아보라는 권고까지 받게 되였으니 이런 꼴 보고 외토리장수라 하더라, 성 쌓고 남은 돌이라 하더라… 흥!〉

하, 이쯤되고보니 어디 우리 사람들을 만나보라는 말을 더 붙여보겠습니까. 아직은 그 사람을 돌려세우는건 설익은 과일을 따먹는 격이지요.》

남창영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정시명은 남창영의 말을 되뇌여보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설익은 과일이라…)

방대광이 설익은 과일인것만은 틀림없다. 길철도 더 무르익히자는 말을 하였다.

그래 아직 씹어삼키기에는 시큼털털해서 뻐근하다. 한데 언제 무르익기를 기다리란 말인가. 우선 그럴 시간이 없지 않는가. 전쟁은 시시각각으로 죄여들고있다. 정세는 때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맞받아나가야 할 리유가 여기에 있다.

(정면돌파…)

 정시명은 다시금 자기의 마음에 탕개를 치듯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정 허망한 일도 아니다. 정시명은 그 인간의 우직한 성미에 호기심이 가고 기대감도 생겨났다. 우직하다는 말에는 고지식하다는 의미도 있다. 고지식하다는 말은 진실하다는 의미와 가깝다.

그가 이미 동만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서 얻어맞은바가 있고 38°연선에서도 만신창이 되고보니 생각이 달라지고있는것이 분명하다. 《북벌》에 관한 그의 립장변화가 그것을 보여준다. 호기는 부린다지만 공산주의자들앞에서 주눅이 든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방대광은 미국이나 리승만의 지휘봉을 따르다가는 일본놈때 깊이 찍혀진 수치스러운 역적의 락인을 영영 지울수 없다는것을 생각하고있다. 겨레앞에서 한번 큰 일을 해놓고 《이것 봐라, 방대광이 이런 사람이다.》고 소리치고싶은데는 자기 몸을 비벼댈만 한 언덕을 찾지 못해 정신적으로 방황하고있다.

오늘은 방대광에게서 나쁜것보다 좋은것 혹은 좋을수 있는것을 더 찾아보자. 그다음에는…

생각을 이어가려는데 자동차가 멈춰서는 바람에 정시명의 사색은 토막이 났다.

담장을 높게 두른 한채의 청기와집이 차창을 가로막고있다.

담장너머에 지금 방대광이 남창영의 처의 생일초청을 받고 와있을것이다.

박륭정이 생일선물로 준비한 식료품지함을 들고 앞에 섰다.

정시명은 저으기 긴장해지는 신경을 가다듬으며 그를 따라 육중해보이는 널대문앞에 가서 섰다.

(침착하자. 방대광쯤을 휘여내지 못하면 내가 …자격이 있느냐.)

피뜩 떠오른 일깨움에 정시명은 속이 평온해졌다.

그는 뒤짐을 지고 박륭정이 초인종을 누르고 주인인 남창영이 나타나기를 서두름없이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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