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정 면 돌 파

3

 

김명호는 몽롱해지는 의식속에서 누구인가 자기 이름을 부르는것만 같았다.

《김동무, 김명호동무. 나요. 홍민표요. 김동무…》

김명호는 천근만근으로 무겁게 드리운 눈시울을 가까스로 올리고 자기를 끌어안고있는 상대를 초점잃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한쪽알이 깨진 안경부터 눈에 안겨왔다. 흩어진 머리카락, 피자박이 된 얼굴… 그는 가까스로 더듬다가 맥이 진해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의식을 가다듬으며 기억을 되살려보았다.

어디서 많이 보아온 모색이다.

누구더라… 옳아, 홍민표… 홍민표로구나. 나를 당에서 내쫓을 때 앞장에 섰던 공산당 서울시 부위원장. 박헌영 발판다지기 공세에서 앞장서 날뛰던 박헌영의 심복이였지. 전라도에 순시차로 내려와 여러번 충돌하고 견실한 동무들을 맑스주의이단자라는 감투를 씌우고 무리로 쫓아냈지. 몇해전에 우리가 신문을 통해 선전공세를 벌릴 때도 저 인간은 박헌영의 위임이라고 하면서 북의 현실을 격찬한다고 시비를 걸어왔었지.

《물을 마시겠소?… 자…》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갔다. 그제야 김명호는 가슴이 좀 트이고 눈시울이 가벼워졌다.

《자, 밥도 좀 드시오. 개놈자식들! 그렇게도 건장한 사람을 이지경으로 만들어놓다니.》

홍민표가 숟가락으로 밥을 비벼서 조금씩 입에 넣어주며 격분하여 혀를 끌끌 찬다.

김명호는 홍민표의 권에 못이겨 입에 받아 힘겹게 우물우물 씹어넘기였다. 한숟가락가량 씹어넘기다가 더는 기력이 없어 입을 꾹 닫아버렸다.

《먹어야 하오. 먹는것도 투쟁이요. 뭐 왜정때 감옥살이를 오죽했소. 심문에서 이기자면 먹고 기운을 차려야 하오. 몸이 허하면 신경도 약해져 쓸데없는 흔적을 많이 남기는 법이요. 방금도 그냥 헛소리하는데 회장을 찾더구만.》

《회장?… 무슨 회장말이요? 내가 그랬단 말이요?》

김명호가 정신이 번쩍 들어 물었다.

《그렇소. 정향동지 이름을 부르더구만.》

《음―…》

김명호는 상처투성이인 몸을 뒤치락거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놈들은 지금 회장의 거처지와 조직원명단을 내놓으라고 악을 쓰고있다. 그사이 오성도가 두번 더 왔다갔고 취조관들도 늘어났다. 집단적으로 달려들어 주먹과 발로 차고 채찍질을 한다. 손톱끝에 참대이발 쑤시개를 찔러넣으며 미친듯이 날뛰고있다. 그것도 모자라 고추물을 먹이고 욕조에 머리를 틀어박기도 한다. 꺼꾸로 매달아놓고 불꼬챙이를 등심에 갖다댄다.

묻는것은 두마디다. ―정향거처를 밝히라, 조직원명단을 내놓으라―

김명호도 이제는 얼뜨기연극은 걷어치웠다. 서울경찰청 부청장 최운하에게는 그 놀음이 통했는데 오성도가 왔다간 후에는 통하지 않게 되였다.

그래서 놈들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것이다. 김명호도 자신이 이제는 빠져나갈 구멍수가 없다는것을 깨닫자 처신을 당당하게 하기 시작한것이다.

《모른다!》

김명호는 이 한마디로 버티고있다.

정체가 확증되자 김명호는 사형수들이 수감되는 감방으로 넘겨졌다. 최운하놈은 속히운 분풀이를 한다고 더욱 지독하게 때리고 차고하다가 재판도 없이 사형에 처할것이라고 을러멨다.

김명호는 이미 각오했던바라 흔연하게 받아들였다.

《좋다, 매달아라.》

어제부터 서울시당 부위원장을 하던 홍민표가 이 감방에 들어왔다. 그도 수태 얻어맞았는지 온통 피투성이고 고름투성이다. 이발이 부러지고 옷이 찢어져 허연 살이 드러나보였다.

김명호는 의식을 회복하자 홍민표에게 어떻게 되여 들어왔는가고 물었다.

《태백산빨찌산에 관여했다는게 들장이 났지요. 우리 조직에 다니던 련락원이 체포되여 날 불어먹었소. 다시 풀려나갈 가망이 없을것 같소.》

《언제 잡혀왔소?》

《몇달 잘되였소. 요즈음은 재판조서를 꾸미는지 그리 찾지는 않는구만, 재판을 벌려놓아야 판결은 뻔하오. 사형수감방에 처박은게 우연이겠소. 그까짓 난 생각하지 않소. 이런데서 피차에 이런 꼴로 마주하고보니 내 당신께 사죄할게 많소.》

홍민표는 부르튼 입술을 감물며 어깨를 으쓱거리였다.

김명호는 더 응수하지 않고 반듯이 누워 다시 눈을 감았다.

김명호는 정시명에 대한 걱정과 《흥국상회》일때문에 괴로왔다. 그리고 자신이 잠결에 회장소리를 한다는게 두려워졌다. 차라리 정시명이 평양에 눌러앉아 치료를 받고 이 고비를 넘기고 오면 좋으련만 그 성미에 그럴상싶지 않았다. 지금쯤 서울에 와있다면 그의 신변이 정말 위태롭다.

(나는 이렇게 뻗친다고 하지만 례영이, 그 참하고 어진 녀인이 이놈들의 행패를 어떻게 이겨내려나.)

비밀을 고수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김아성은 걱정되지 않았다.

두번째 매질심문시에 김아성은 검사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봐, 난 사형수야. 너들이 자꾸만 내 비위를 건드려놓는데 내 모르기도 하거니와 설사 안다고 한들 곧대로 말할것 같으냐?

네놈을 도와줬다고 내 목에 걸린 올가미를 뉘가 풀어주겠는가. 개똥같은 수작 걷어치워. 정 못나게 굴면 너죽고 나죽고다.》

그때 김명호는 벌떡 일어나 그를 끌어안고 볼을 비벼주고 그의 잔등을 두드려주고싶었다.

김아성과는 감옥에 와서 처음 말을 붙여보게 되였지만 《홍길동》이요 《우리 경관》이요 하고 지휘부안에서 사랑스럽게 불리우던 사람이라 평소에도 정이 가고 호기심이 가던 청년이였다. 감옥에서 만나고보니 정말 그 얘기들이 헛말이 아니여서 사랑이 가고 믿음이 갔다. 그후로 다시 나타나지 않는걸 보니 도로 청주감옥에 끌려간 모양이였다.

김명호를 또 하나 괴롭히는것은 수하의 전우들에게 자립성을 키워주지 못하고 잡혀왔다는 생각이였다. 길철이가 자기의 조직선을 알고있다면 회장이 맡기고 간 일감들을 점검하면서 전우들의 투쟁을 지도할수 있으련만 길철은 김명호가 장악하고있는 전우들의 관계를 모르고있었다.

당장에는 《국회》의 소장파의원들중에서 감옥으로 끌려가지 않은 사람들을 수습하여 새로운 투쟁에로 준비시켜야 하며 여러 정당, 단체에 들어가있는 전우들을 발동하여 전쟁도발을 분쇄하기 위한 투쟁을 심도있게 벌려나가야 한다. 《유엔조선위원단》과의 사업도 더욱 진공적으로 벌리기 위하여 그곳에 있는 동지들의 력량을 보강하는 사업도 빨리 결속지어야 한다. 최근에 정간처분이 해제된 《광명일보》를 통한 선전전도 벌려 미국놈들과 리승만의 전쟁흉계를 폭로하고 사회 각계에서 커지도록 해야 한다.

이밖에도 김명호는 전쟁도발에 대처할수 있는 여러가지 조직사업을 벌려놓았는데 이 두터운 콩크리트벽안에 갇히고보니 자기가 맡은 일들이 정지될것이 괴로왔다.

당장은 수사의 목표를 정향에게 집중시키고있는 적들의 계략을 길철에게 전하여 정향이더러 평양에 일정한 기간 머물게 하도록 해야겠는데 바깥과 완전격페된 감방이라 어찌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재판을 받고 교수대에 오르면 이 모든것이 끝장이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생명에 대한 미련은 이미 버린지라 그까짓 교수대쯤은 웃으며 오를 자신이 있었으나 조직과 동지들에 대한 걱정이 이 만사대틀인 사나이의 가슴을 졸아들게 하였다.

《이젠 좀 정신이 드시오?》

홍민표가 음식그릇을 옆으로 밀어놓고 살갑게 물었다.

김명호는 자리에 누운채 그를 쳐다보며 숨을 그냥 헐떡거리였다.

《음, 이 고비를 넘기면 될거요. 이번에 당해보니 이놈들이 왜정때 까마귀들보다 더 악착하구만. 그래 정향동지는 건재하시오?》

홍민표는 김명호의 얼굴에 고개를 숙이고는 귀속말로 물었다.

《모르겠소. 난 정향동지와 헤여진지 한해가 되여오오.》

김명호는 저으기 신경이 도사려져서 툭 잘라버렸다.

《헤여지다니 어째서요?… 아니 됐습니다. 내가 동무를 괴롭히는군.》

홍민표는 김명호를 난처하게 만들것 같아 얼른 어조를 바꾸며 손을 내둘렀다.

《뭐 그리 비밀될것도 없소. 나의 과거를 놓고 신뢰감이 부족해하기에 스스로 물러난거요.》

이것은 김명호가 고문대와 심문장에서 진술하고 버티여온 대답이였다.

김명호는 설명을 달았다.

《당신들이 날 대회파로 몰아서 당에서 내쫓지 않았소. 당신네 말투로 난 무산혁명타락분자요. 지금은 리발관과 음식점을 보면서 돈모으는 재미에 살고있지요.》

《하, 나 홍민표를 까짚어 불만이시군.… 우리 피차에 감옥살이하는 처지에서 여기다가 다시 구차스레 론쟁무대를 만들어놓지 말기요. 이제 와보면 그게 다 무익한 힘과 시간의 랑비였소. 하지만 공산주의자란 그래서는 안되지요. 일개인이 믿는가 안 믿는가가 공산주의자들의 금새를 가리는 척도가 돼서는 안된단 말이요. 죽음도 투쟁이요. 싸워야 하오.》

홍민표가 한알밖에 남지 않은 도수높은 안경을 춰올리며 나직하지만 엄숙하게 훈계하였다.

김명호는 랭소를 지었다.

(흥, 좌익소아병, 생경한 정치적구호로 남을 훈시질하는 교만은 아직도 버리지 못했군.)

김명호는 평소에는 요란한 구호를 들고 당장 세계자본주의를 들부시고 붉은기로 지구를 휘감아버린다고 윽윽하다가도 정작 목을 내대야 하는 판국에서는 꽁무니를 빼는 홍민표와 그 일파들의 종파적습벽을 알고있는지라 더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홍민표가 이 정도의 초주검이 돼서도 그런 소리를 제입으로 꺼내는것이 한편으로는 대견스러웠다.

또 여러 주일이 지나갔다. 그사이 그들사이에는 많은 이야기가 오갔으나 김명호는 의연히 자신을 지켜가며 주로는 홍민표의 이야기를 들었다. 홍민표는 비밀관리에 무척 신경을 쓰면서 이미 공개된 이야기들을 꺼내놓고 자기의 과오들에 대하여 지적하고 교훈을 찾기도 하였다.

피차에 죽음을 기다리는 련대의식과 이 살벌한 곳에서 우연히 맞다들어 고락을 나누게 된 공통된 감정이 지난날의 간격을 좁히고 그들을 서서히 접근시켜 친밀하게 해주었다.

 

철창밖에서 간수가 왜가리목청으로 꽥꽥거리였다.

《1201번, 왜 떠드는가? 또 벌감에 가고픈가?》

홍민표가 얼른 김명호의 곁에서 물러나 철창곁의 담벽에 잔등을 붙이고 방정하게 앉는다.

김명호는 인차 홍민표의 옆구리에 쪽지가 날아들고 그가 돌아앉아 재빨리 읽는것을 보았다. 다 읽고나자 홍민표는 종이장을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다가 삼켜버리였다. 홍민표가 들어온 후 세번째로 보는 광경이다.

그러니 분명 《왜가리》간수(홍민표는 그렇게 불렀다.)는 홍민표와 련계된 조직성원임에 틀림없다. 홍민표가 이곳에 끌려온지 여러달이 되였다니 외부와의 련락선을 가지고있을수 있다. 이곳이라고 좌익권이 자기 선을 이어놓지 못할 리유가 없다. 전달까지 군대에서만 5천명이 좌익으로 몰려 숙청되였는데 다른 권력기관에도 좌익권의 동지들이 배겨있으리라는것은 쉽게 리해되는 일이다. 김명호는 잡히기 전에 리승만이 군대에 뒤이어 사법경찰기관들에서 제2차 숙청놀음을 벌릴데 대하여 지시하였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이 있었다.

김명호는 더 지켜보기로 하고 그냥 모르쇠를 하여왔다. 그러나 그를 통하면 길철이와의 련계를 가질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며칠후에 홍민표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또다시 《왜가리》의 앙칼진 소리가 들렸다.

《1201번 왜 떠드는가? 벌감으로 가고싶은가?》

김명호는 《왜가리》의 앙칼진 고함소리가 련락문을 접수하라는 간수의 신호라는것을 알아차렸다. 생각해보니 쪽지는 꼭 닷새에 한번씩 오후 첫 시간에 날아들었다.

김명호는 돌아눕다가 쪽지를 홍민표가 보는 순간에 눈을 번쩍 떴다.

홍민표가 김명호의 눈길을 받자 얼른 종이를 꾸겨쥐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김명호는 인차 자신을 후회하였다. 괜히 홍민표를 놀래워놓은것 같았다. 그래서 진심을 고여 그의 경계심을 풀어주고싶어 말했다.

《홍동무, 나를 꺼릴건 없소. 난 공산주의이단자가 아니요. 지난날 내가 당신을 고약하게 생각한건 사실이요. 그러나 그건 그때 일이고 지금의 내 생각은 달라졌소. 죽음을 겁내지 않고 이 철창속에서도 지조를 지키고 싸움을 계속하는 홍동무에게 존경이 가오.》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소. 헌데 뭐 이건 큰일이 못되오. 바깥동무들이 소식을 종종 보내오는데 내 견해를 적어서 보내줄뿐이요.》

홍민표가 김명호의 고백에 무척 감동이 된듯 자못 겸허한 표정으로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였다. 그의 대답이 예전의 그 도고하던 자세와는 너무도 판이하여 김명호는 호감이 갔다.

인생의 년륜이 두터워지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모습을 안팎으로 바꾸어간다. 못나게도 혹은 곱게도 될수 있다. 그러니 사람을 평가하는 눈도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이 인간의 금새는 더 따져봐야 한다.

《어디가서나 자기를 지키는것이 중요하지요. 난 동무가 부럽소.》

《김동무, 너무 락심할건 없소. 기운을 내시오. 내가 도와줄 일이 없겠소? 외부와 련계를 가질 필요가 있다면 〈왜가리〉를 리용할수 있소. 저 사람은 우리가 오래전에 서울경찰청에 박아넣었던 견실한 동무요.》

《고맙소.》

김명호는 다시 눈을 감고 속을 눙치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하든지 외부와의 줄을 가져야 할것 같다. 그래야 투쟁의 련속성도 보장할수 있다. 만약 정향동지가 평양에 머무르고있다면 내가 쉽게 빠져나갈수 없는 형편에서 조직들을 길철동무에게 넘겨주어 지휘를 맡아하도록 해야 한다. 전우들이 지금 나의 지시를 기다리고있겠는데 더 지체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이대로 이 안에서 죽어버리면 200명나마 되는 동지들이 조직선을 잃고만다. 그것은 애국위업에서 또 하나의 죄악으로 된다. 내 한목숨은 없어져도 조직은 살아움직여야 한다.

홍민표의 선을 한번 리용해보자.

김명호는 며칠 더 관찰해보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뚝거리며 감옥을 거닐기도 하고 체조도 하면서 기운을 돋구었다. 홍민표와도 주동적으로 화제를 꺼내놓고 말을 시키였다. 수사관놈들은 이제는 더 알아내기가 틀렸다고 아예 포기해버렸는지 재판에 기소하겠다고 기소문을 작성해가고는 더는 불러내지 않았다.

어느날 김명호는 홍민표에게 조용히 부탁하였다.

《여의도술집에 가면 녀주인을 만나달라고 하시오. 거기에 없으면 명월리발관을 찾으라 하시오. 내가 여기에 있다는것을 알려주기만 하면 되오. 접수했다는 우리 처의 글 몇자만 받아달라고 해주시오.》

《아 그러리다.》

홍민표는 쾌히 김명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김명호는 우선 그들의 선을 검토해보고싶었던것이다. 만약 홍민표의 련락선에 나쁜 놈이 끼여들어있다면 자기의 련락을 받은 처에 대하여 감시가 시작될것이며 이것은 곧 《흥국상회》의 엄호선에 포착될것이다. 그렇게 되면 처의 보고를 받은 길철은 곧 이 선을 주동적으로 끊어버리는것으로 나에게 경보를 보내올것이다.

며칠후에 홍민표는 김명호의 처가 보내온 《잘 알았습니다.》하는 간단한 회답편지를 내밀었다.

이런 식으로 김명호는 자기 처와 여러차례 내용이 따로없는 련락을 가지였다.

김명호는 이쯤되면 홍민표의 련락선을 리용할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드디여 김명호는 어느날 홍민표에게 비교적 길게 쓴 문안쪽지를 내밀었다.

《또 수고해주시오.》

그 쪽지에는 처에게 보내는 긴급지시가 암호화되여있었다.

《부엌의 물독밑을 파면 단지가 있다. 그 안의것을 안씨에게 전달하라. 이 편지를 전달하는 사람을 내가 신임하는것은 아니니 각성을 높여 정확히, 빨리 전달하라.》

사기단지안에는 페니실린병이 있었다. 거기에는 김명호의 조직망이 적혀져있는 문건을 북한산 로송나무밑에 매몰한 지점을 표식한 지형도가 있었다.

《국회》투쟁후 전우들에 대한 추도모임을 마치고 나서 김명호를 《흥국상회》의 회장대리로 결정하고 정시명이 그에게 이 비슷한것을 넘겨준 일이 있었다. 그걸 접수하자 김명호도 만약의 경우를 가상하여 자기가 관할하는 조직명단을 작성하여 북한산에 매몰했던것이다.

그런데 며칠후 간수가 데려내간 홍민표는 더는 감방에 나타나지 않았으며 《왜가리》도 사라졌다.

김명호는 자기가 함정에 빠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밖에서는 뜻밖의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고있었다.

홍민표는 바로 한달전에 모진 고문을 못이기고 변절하여 극비밀리에 서울검찰청에서 좌익관계만 담당취급하는 《대공분실》의 분실장으로 임명되였던것이다.

김명호가 《흥국상회》의 거물급이라는 오성도의 직감을 확인해준것은 홍민표였다.

홍민표는 오성도가 세번째로 김명호와 만나고있을 때 심문실의 곁방에서 감시구멍으로 김명호를 살펴보고나서 그가 47년부터 정향의 밑에서 신문발간과 정당들과의 사업을 비롯한 중요사업을 주관해온 주변인물이라고 고자질하였다.

이 더러운 배신자는 김명호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나서 오성도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곤봉과 채찍으로 공산주의자들의 입을 열려는건 어리석은짓이요. 이제 내가 정향을 찾아내겠으니 한달만 시간을 주시오.》

이렇게 되여 홍민표는 온몸에 있던 고문흔적을 들쑤셔가지고 김명호의 감방에 나타났던것이다.

김명호는 즉시 길철에게 자기의 불안을 전하려고 애를 썼으나 통로가 없었다.

김명호의 암호지시문을 손에 쥔 수사본부는 여러날 밤샘을 해가며 암호문을 해득해보았으나 종시 풀수 없었다.

김명호는 3중4중으로 암호화했던것이다.

보고를 받은 오성도는 지시문을 곧 김명호의 처에게 전달하도록 하고 주야 미행감시를 조직하였다.

닷새째 되는 날 밀정들에게 김명호의 처가 물독밑에서 약병을 파냈다는것이 포착되였다. 곧 그 녀자가 감시를 눈치채고 일체 움직이지 않는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사실 김명호는 평소에 자기 처를 조직적으로 키우는데 품을 들여왔었다.

그 녀자는 남편의 지시가 초긴급지시며 반드시 집행되여야 한다는 촉박감을 느끼면서도 여러날동안 밀정들의 경계심을 늦추어주면서 안지생과 접선할 기회를 노리였다.

어느날 점심무렵에 그 녀자는 적들의 감시가 뜨음해진 기회에 안지생을 자기의 리발관으로 불러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접선시각에 공교롭게도 일단 철수하였던 밀정놈들이 완력으로 《약병》을 뽑아낼데 대한 최운하의 명령을 받고 리발관을 덮쳤다.

결국 안지생과 김명호의 처는 약병안의 미농지에 불을 다는 순간 체포되였다.

서울을 비롯한 남조선전역에서 《흥국상회》성원들에 대한 대검거선풍이 일었다. 2백여명의 사람들이 불의의 습격에 끌리여왔다. 대체로 김명호의 지도를 받던 《흥국상회》의 핵심인물들이였다.

오성도는 검거자수가 너무 많아 서대문감옥에서 한채의 건물을 내고 그들을 수감하였다. 그리고는 리범석과 노불에게 통보하지도 않고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특별합동수사본부의 상보라는걸 발표하였다.

오성도는 이번 검거가 《흥국상회》에 대한 1차검거라고 찍어놓고 이번 검거에서 회장 정향을 놓치기는 하였으나 다음번에는 종말을 보게 될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흥국상회》를 휩쓴 백색테로의 회오리는 이날중으로 《서울정가의 배후에서 암약해온 최대의 조직》이라는 표제를 달고 서울신문들에 대서특필로 실리였다.

지휘부에서는 안지생과 최남수가 체포되고 김승원의 처 윤미향도 철창으로 끌려갔다. 다행으로 계속 거처를 옮겨가던 길철이가 적들의 검거작전에서 빠져나왔다.

조직선이 피해를 입지 않고 건재한것은 길철의 지도를 받던 성원들과 정시명과 직접 련계를 가지고있는 인물들이였다.

 

이튿날 《흥국상회》에는 치안국 수사지도과장 김창기가 체포되였다는 또 하나의 가슴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김창기의 체포는 다른 리유에서였다.

김아성에 대한 사형집행날자가 하루하루 다가옴에 따라 자기의 결심을 굳혀온 김창기는 며칠전에 치안국장에게 경무대 경찰서에 뻗칠수 있는 적색선을 찾아보겠다는 리유를 걸고 김아성에 대한 심문의뢰서를 제출하였다.

치안국장은 군말없이 비준하였다.

김창기는 즉시 수사관 한놈을 차고 청주감옥에로 갔다. 감옥장을 만나 김아성을 호출하게 하고 그를 치안본부로 압송하겠다고 하였다.

그를 차에 싣고 서울로 오다가 도중에 기회를 보아 함께 빨찌산에 들어갈 생각이였다.

그런데 함께 따라간 수사관놈이 무슨 낌새를 맡았는지 현지에서 심문하자고 우기였다. 정 서울로 가야 할것 같으면 수인호송차를 부르자고 주장해나섰다. 감옥장도 김아성의 몸상태와 수인관리세칙을 내들고 수사관의 립장을 지지하였다.

옥신각신끝에 김창기는 상관의 권한으로 자기의 결심을 관철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손과 발에 수갑과 족쇄를 채운 김아성을 실은 김창기의 차는 청주감옥을 떠나 서울길에 올랐다.

김아성은 김창기를 알아본 순간에 그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러나 김창기는 감옥장놈이 수사관의 지시를 받고 치안국에 전화를 걸어 호송차를 마중오게 했다는것은 모르고있었다. 김창기는 관악산기슭의 어느 한 령에 이르러 차를 세웠다. 눈치만 살살 보고있는 수사관놈을 해치우고 차를 돌려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예상밖으로 서울에서 마주쳐온 두대의 경찰차가 들이닥쳤다. 차에서는 애국자들을 색출하는데 악명을 떨쳐온 치안국 대내범죄수사과장이 내렸다.

김창기는 대뜸 사태가 급전직하로 번져진 케속을 간파하였다.

김창기는 더 지체하지 않고 운전대를 붙잡고 눈알을 뱅글뱅글 돌리는 수사관놈에게 총탄을 안기고 다가서는 놈도 쏴제꼈다. 그리고는 운전대를 잡고 자동차를 돌려세웠다.

두대의 경찰차들이 추격하여왔다. 치렬한 접전끝에 끝내 김창기는 체포되고 김아성은 다시 청주감옥으로 끌려갔다.

그 며칠후 《흥국상회》에는 김창기의 타살과 관련한 흉보가 날아들었다. 치안국놈들은 김창기가 지하조직과 련계가 있다는것을 알게 되자 김창룡의 특무대나 오성도의 수사본부가 덮쳐들기 전에 조직선을 들춰내고 사건을 마무리짓기 위하여 갖은 악행을 다하였다. 놈들은 짐승처럼 달려들어 곤봉으로 란타하고 목줄을 각목으로 누르기도 하면서 배후인물을 대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창기는 숨이 질 때까지 한마디로 버티였다.

《모른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그렇다! 나는 통일애국에 나선 사람이다!》

광복전에는 왜놈의 순사가 되여 아무런 삶의 목표도 없이 살아온 김창기는 이렇듯 통일위업을 위한 영광의 길에서 영웅적으로 최후를 마치였다. 김창기는 량심의 궤도에서 순결해진 붉은 피로 이 나라의 통일실록에 자기 이름을 새겨넣은것이다.

련이어 닥쳐드는 비보에 정시명은 심장이 뻐개지는듯싶었다.

더구나 김창기의 절명은 정시명에게 더더욱 가슴속을 허비는 아물수 없는 상처를 만들어놓았다.

그의 운명은 정시명과 류다른 인연으로 얽혀들었다.

왜놈경찰서장까지 한 그를 두고 전우들 누구나 고개를 가로저었었다.

그가 드디여 애국의 길에 나서게 되였을 때 정시명은 인간사랑의 무한한 힘을 다시금 절감하면서 투쟁의 보람으로 가슴을 들먹이였다. 그리고는 그에게도 기어이 통일조국에서 공로많은 애국자로서의 영예와 행복을 마음껏 누리게 해주리라 속다짐해왔었다.

헌데 그도 통일애국의 중도에서 비장하게 쓰러진것이다.

김창기의 희생은 김아성의 구출작전에도 어두운 그늘을 던지였다. 김아성에 대한 사형집행을 당장 하라는 독촉이 치안국에서 연방 내려온다고 한다. 부감옥장이 나서서 법원에 항소를 제기한 사형수에게 고등법원의 재심이 없이는 안된다고 가까스로 버틴다고 한다.

정시명은 항소리유서를 접수한 고등법원이 그에 대한 검토조사를 무조건 끌어 시간을 얻어내라고 권재수판사에게 엄격하게 지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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