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가을날의 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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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명은 한강상류의 깎아지른듯 한 절벽우에 솟아있는 정각에서 《호국군》사령관으로 내리먹은 송호정과 《국방부》고문으로 돌아앉은 류동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있었다. 몇달전에 김구를 만나 마곡사로 떠나던 걸음을 돌려세운 곳이였다.

정시명은 곰방대에서 담배연기를 올리고있는데 박달처럼 다부진 송호정과 백발의 머리를 떠인 류동명은 전례없이 매우 흥분한 모습들이였다.

송호정의 요구로 이루어진 이날의 긴급상면에서 정시명에게 제기된 문제는 매우 심각하였다. 리승만의 목을 치겠다는것이였다.

78명의 현역과 예비역의 장성, 장교들이 따라나섰다고 한다.

그들이 송호정의 주위에 뭉쳐 리승만암살을 들고나선 기본동기는 김구의 장례식에 참가한 군관계인물들을 리승만이 흘겨보기 시작하다가 하나둘 온당치 않은 구실을 붙여 옥에 처넣거나 퇴역시키고 압력을 가하고있는데 있었다. 대체로 지난날 상해《림정》이나 독립군계렬출신으로 김구와 깊은 인맥을 유지해온 인물들이였다. 리승만의 처사에 분격한 그들은 송호정을 찾아와 리승만을 테로해버리겠다고 윽윽 벼른다는것이다.

그중에서 특별히 주창자로 나선 인물은 인천방어려단장이다. 그는 광복전에 김구에게 가까이 붙어다니며 일본놈들을 징벌하는 여러차례의 테로작전에도 관여한바가 있었다.

정시명은 《흥국상회》 회장으로서 립장을 밝히였다.

《호정, 테로는 반대요. 테로란 한 인간에 대한 다른 인간의 복수인데 우리의 싸움을 왜 정정당당하게 하지 않고 렵기적인 활극에로 끌어가려고 하오? 〈흥국상회〉의 목적과 투쟁방법에서 용납이 될수 없는 문제이므로 원칙적으로 론의할 필요도 없다고 보오.》

그래도 조직적인 지지와 함께 지도와 지원을 기대하였던 송호정은 물론이거니와 송호정과 쉽게 의사소통이 되여 따라섰던 류동명이마저 정시명의 명백한 거부반응에 속이 내려가지 않았다.

얼마전부터 코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송호정은 짧게 다스린 코수염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다가 정시명이 길게 생각을 굴려보지도 않고 첫마디에 퉁을 주는 바람에 어지간히 골이 나기까지 하였다.

《맑스도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구만. 공산주의자들은 테로를 애들의 군사유희로 평한다고… 정형이야 그렇게 나올수 있겠지. 정형이야 신사니깐.》

격하기 쉬운 다혈질의 성격인 송호정이 어지간히 밸이 뒤틀려 내뱉는 소리에 정시명은 히죽이 웃었다. 그 소리가 무쇠쪽같은 송호정의 성미에 어울리지 않아 류동명도 《허허―》하고 사람좋은 웃음을 터쳐놓았다.

정시명은 잠시 담배연기만 내뿜으면서 먼산을 바라보다가 대답하였다.

《빈정거리지 말게. 리승만을 제껴버리면 두번째 리승만을 제꺽 골라낼걸세. 미국놈들이 말일세. 력사에 통치자들에 대한 테로는 하많았지만 당대사회의 모습을 바꾸어놓은 전례는 참으로 희귀하네.》

《그럼 어떻게 하자는건가? 저놈의 늙다리에게 더이상 나라를 맡겨서는 안된다는걸 정형이 모른단 말인가! 난 뭐 정권을 가로챙길라고 하는것도 아닐세. 부자 하나에 세 동네가 망한다고 했는데 못된 임금 하나때문에 천만백성이 화를 입고있지 않나. 시국이 지금 어떻게 돼가는가. 참말로 이 〈한국〉의 력사는 굼벵이처럼 기여가고있네.》

《그러니 이 나라 력사가 굼벵이처럼 굼뜨게 굴러가기때문에 자네가 뒤를 밀어주겠다는건가? 대단한 영웅인걸. 이보게 호정, 테로란 력사를 앞당기는것이 아니라 새로운 독재자의 출현을 앞당기게 한다는걸 명심하라구.》

《좋네. 이 일에는 정형이 더 껴들지 말게. 난 내 량심이 가리키는 길로 걸어가려네. 난 자기 일생에서 제가 거느린 군대가 숱한 백성을 쓸어눕히는것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치욕을 씻지 못하고 죽을 사람이네.》

송호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울분에 차서 나직이 부르짖었다.

고뇌를 짓씹으며 삶의 순간순간을 괴롭게 태워가고있는 순결한 무사의 처절한 비애와 원한이 정시명의 가슴을 비수처럼 예리하게 찔렀다.

《이 사람 사령관, 그게 어디 자네의 탓인가. 자신을 너무 박대하지 말게. 백성앞에 지은 그 만고의 죄인즉 나도 함께 나누어야 할바이고 백성이 주는 초달을 함께 받아야 마땅할줄로 믿네.

정처장, 리승만의 목을 쳐서 나라앞에 지은 죄를 덜고 백성앞에 보상하려는 늙은 무장들의 억하심정을 알아주게.》

류동명이 따뜻한 온기가 배인 두손으로 정시명의 한손을 슬그머니 감싸잡고는 희고 긴 장미를 꿈틀거리며 자못 비분강개한 목소리로 송호정의 말을 받았다.

엇바꾸어 들이대는 그들의 열렬한 우국지정과 강직한 주장에 정시명은 속이 확 더워올랐다. 겨레에 대한 헌신을 인생의 꿈으로, 락으로 영위해가는 이 뜻높은 지사들의 결곡한 넋앞에 무릎꿇고 고개를 숙이고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거사제의에 공감을 해줄수는 없어 대답을 미처 주지 못하고있는데 정각을 오락가락하던 송호정이 그의 앞에 와서 장승처럼 버티고 섰다. 그는 정시명의 사려깊은 눈을 록록치 않은 눈초리로 마주 쏘아보다가 코수염을 푸르르 떨고는 장중하게 선언을 하였다.

《나를 막지 말게. 리승만이 노는 꼴 더는 눈뜨고 못보겠네. 저놈이 백날 붉은 꽃 없고 10년 긴 세도 없다는걸 몰라 죽을 때까지 독판칠 잡도릴 하고있다 그걸세. 그놈의 놀음에 녹아나는게 국민이고 통일이야. 나라통일을 위하여 쓰러진 려수의 6천 원혼들의 넋이 지금도 내 가슴에서 칼탕을 치고있네.

나는 통일조국을 위함이라면 정몽주처럼 선죽교에서 칼에 맞아 피를 토해도 좋고 성삼문처럼 한강모래밭에서 목잘려도 좋네. 저따위를 임금이라고 더는 섬길수 없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도 있지 않나.》

참나무처럼 단단하고 담찬 사나이가 터뜨리는 비분에 정시명은 더욱 가슴이 끓어올랐다. 그는 송호정의 결연한 결심이 더는 드팀이 없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송호정이 저쯤되면 속대를 후려내기가 힘들다. 더구나 지금 내놓은 제안이 어제오늘 순간의 흥분끝에 솟아난것은 아닐것이다. 민족앞에서 자기의 몫을 다하지 못한 인간이 비로소 자기를 깨닫고 마지막혼신의 힘을 다 짜내여 의로운 성전을 펴보려는 저 비장한 몸부림을 어찌 순간의 충동이나 우직한 영웅심리나 력사에 이름 석자를 남겨보려는 명예욕으로 평가할수 있으랴.

두사람의 대화에 끼여들지 않고 정시명의 침착한 모습을 정을 담아 지켜보기만 하던 류동명도 송호정의 결단에 다시한번 공감과 지지를 표명하듯 백발이 서린 머리를 힘있게 끄덕여준다.

정시명은 그들의 의거제안이 그들뿐이 아니라 리승만에게 환멸을 가진 정의인들의 심정을 대변하고있다고 생각하였다.

얼마전에는 리승만의 심복부하로 공인되여온 《대동청년단》 단장이던 리청천이 쿠데타를 준비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였다. 그의 동기라는것이 국방장관을 노리던 꿈이 실현되지 않은데 있다고 한다. 하지만 생사기약이 없는 혈투에 목숨을 내건 그 비상한 용단이 단순한 탐위욕에서 출발되였겠는가.

정시명은 서울 정치권의 동향에서 주류를 이루고있는 반리승만적인 움직임을 하나로 묶어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송호정의 격한 속을 달래여주듯 조용히 물었다.

《그래 승산은 보이나?》

《현역이 얼마 없고 무기준비가 돼있지 않네. 우리 〈호국군〉이란건 말이 예비군이지 총 한자루 변변치 않은 바지저고리부대거든. 그래 난 무기를 일본에서 사들이려고 하네. 인천려단장이 거사가 있으면 자기 려단이 주력이 돼서 서울을 타고앉겠다고 약속했네.》

벌써 송호정을 중심으로 거사의 구체적인 협의가 되여가는 모양이다.

정시명은 좀 뜸을 두어 생각하기로 하고 화제를 돌리였다.

《나도 좀 생각해보겠네. 하여튼 난 옛날 의렬단이나 광복군에서 한것처럼 적장의 목을 치려고 몰려다니는 개인테로는 반대일세. 우리의 리념과 목표가 고상하다는걸 생각해주게. 그에 따르는 우리의 싸움도 공명정대하고 그 수법도 만민의 지지와 공감대가 이루어지도록 되여야 하네. 좋네. 좀 연구해보세. 헌데 새겨두게,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은 결코 정의가 아니라는걸. 그런데 방대광을 만나달라는 부탁은 어떻게 되였나?》

정시명은 지난달에 1선사단장 방대광이 리승만앞에서 《북벌》중지를 주장했다는 자료를 입수한 후로 길철에게 자료의 정확성을 재확인하도록 하고 송호정에게는 방대광을 만나 동향을 다시 구체적으로 타진해볼데 대한 과업을 준 일이 있었다. 길철에게서는 틀림없다는 보고가 왔는데 지금껏 송호정한테서는 이렇다하는 보고가 없었다. 송호정이 암살거사준비에 골몰하다보니 임무를잊어버리고있는것 같다. 그래 지나가는 어조로 물었는데 그의 낯빛이 바뀌였다.

《아 참, 내가 그것부터 보고해야 되는건데 미안하게 되였네. 한주일전에 개성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났네. 소문대로 우직한 인간인것만은 사실일세. 나더러 참모총장자리를 왜 광복전에 조병창이나 하면서 장사질이나 해먹던 채소좌에게 넘겨주었는가고 야단이더구만.》

채소좌란 이번에 륙군참모총장으로 승진한 채병덕을 얕잡아 부르는 소리다.

채병덕은 광복전에 일본군소좌로서 인천에서 군수창 창장으로 있었다. 광복후에 리승만의 눈에 들어 륙군참모총장으로까지 오르게 되였던것이다. 일본에서 대좌로 복무한 방대광은 채병덕을 공공연히 면전에서도 채소좌라고 불렀고 뒤에서는 햇내기창장이라고 비꼬군 하였다.

《미국놈들이나 리승만을 몰밀어 싸잡고 조겨대더구만. 하지만 그를 돌려세운다는건 하늘의 별따길세. 한번 맞서보려나?》

정시명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채 고개를 끄덕이였다.

《에, 에… 안될걸. 그자의 별명이 뭔지 아나? 왜놈말로 쟝글노부시라오. 쟝글의 무사라는 그 별명이 우연히 붙은줄 아나. 그놈이 지난봄에 38°선에서 불질을 할 때 내가 찾아가 그만두라고 무슨 말인들 안하였겠나. 헌데 만주에서 경찰서장노릇하다가 유격대에 두들겨맞은 성풀이를 한다고 그냥 뻗치다가 끝내 사등뼈가 부러지게 만신창이 되였네. 에, 그자는 안되네.》

송호정은 제사 역증이 나서 목에 피대를 세우고 안된다고 떠들었다.

두사람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듣기만 하던 류동명이 눈앞에 흐트러져내린 백발을 쓸어올리고 마른 기침을 몇번 컹컹하고나서 조심스럽게 자기 의사를 꺼내놓았다.

《방대광을 먹자는 생각을 거두는게 좋을상싶수다. 만주말이 나왔으니말이지 어쩌구저쩌구 해도 광복전에 저지른 그자의 친일경력을 뭘로 지워버릴수 있겠소. 천황의 감사패까지 받았던 과거사를 광복렬사들이 어떻게 용납한단 말이시오?》

절제가 있는 류동명의 의미심장한 말에 정시명은 고개를 끄덕이였을뿐이였다.

사실 한생을 항일의 기치를 들고 살아온 오랜 무관으로서 방대광이라는 친일분자와는 타협의 여지도 없는것이 우연치 않다. 숱한 부하들을 무주고혼으로 만들면서 독립군과 광복군시절을 피로써 헤쳐온 저 강직한 반일지사가 어찌 왜놈의 충견노릇을 해온 놈과 한처마밑에 들려고 하겠는가.

정시명은 류동명의 그 대쪽같은 마음을 흐려놓을세라 허심하게 대꾸하였다.

《아직은 방대광과 어떻게 해볼 결심은 서지 않았습니다. 리승만의 면전에서 〈북벌〉무용론을 폈다기에 흥미를 가졌을뿐입니다.》

《하긴 그것도 메돼지같은 우직한 밸통이 있으니 그렇지 웬간한 담력이 없이야 엄두를 못내지요. 리승만의 눈밖에 단통날 소리를 그 령감앞에서 했다는게 헐치 않거든.》

송호정이 혀를 찼다. 송호정은 방대광에게서 들은 소리라면서 간단하게 그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리승만이 지난 8월달에 여섯명의 보병사단장들을 경무대에 불러다놓고 술잔을 권하면서 《북벌》을 강행할데 대하여 일장 훈시를 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방대광이 술 몇잔을 걸치더니 《대통령각하, 〈북벌〉은 무용합니다. 그리고 승산도 없습니다.》 하고 리승만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나섰다.

술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방대광의 방자하다 할만 한, 기상이 꿋꿋한 반발에 아연실색하였다. 그 좌석에는 방대광의 사돈과 사위도 있었다. 그들은 너무 급하여 사위는 바지가랭이를 잡아당기고 사돈은 《여보게. 각하앞에서 무슨 실언인가.》 하고 자못 랑패스러워 꾸짖었다.

그러나 방대광은 여전히 리승만의 험악해진 면상을 맞받아 눈길을 세우고 자기의 소신에 설명까지 늘어진 어조로 붙이였다.

《가만있게. 어깨에 왕별을 얹고도 대통령앞에서 속간지러운 말만 해서야 별값을 어떻게 치르겠는가.

각하, 우선 우린 〈북벌〉할만큼 준비되지 못했지요. 양놈들이 우리 숨통을 막았다열었다 하면서 무기를 준다안준다 재세하는데 우리에게 비행기 살 돈 있나, 변변한 땅크 한대 앞세울수 있나, 한데다가 북군과 맞붙어보니 우리 사병들이 약골들입니다. 장교들이란건 맹물들이구요. 북군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실전경험자들이 주력을 이루고있습니다.》

방대광이 예까지 단숨에 속을 털어놓고 술잔을 기울이자 한동안 술좌석이 랭랭해졌다. 리승만도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마침 좌석에 있던 리승만의 처 프란체스까가 방대광에게 술잔을 권하면서 《장군의 무사다운 주장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말씀하세요.》하고 이쪽저쪽을 돌아보며 애교있는 웃음을 던지는 바람에 약간 자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날 리승만은 두시간으로 예정했던 술좌석에서 한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자리를 뜨고말았다고 하오. 방대광이 이 소릴 하면서 껄껄 웃습디다. 리승만의 밑에는 간신들만 씨글거려서 어느 놈 하나 충신답게 제소리 내는 놈이 없다고 말이요. 한번 배짱을 세워보니 령감상이 가관이더라며 웃습디다. 그놈의 밸통이 여간이 아닌것만은 사실이요.》

방대광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났다.

정시명은 고개를 끄덕였을뿐 더 캐여묻지 않았다.

그들은 무거운 정치담에서 벗어나 올농사작황이요, 가을남새요, 환절기 몸관리요 하는따위의 한담을 하다가 자리를 거두었다.

송호정과 류동명을 떠나보낸지 얼마 되지 않아 김아성의 차가 정각밑에 나타났다.

정시명은 김아성이 순애와 만나서 시간을 보낼줄 알고 정각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사색을 정리하고싶었는데 때일찍 자동차가 나타났기에 천천히 계단을 내리였다.

그런데 차에서 내려 마주쳐오는 김아성의 낯빛이 례사롭지 않아보였다. 한바탕 누구와 맞붙어 딩굴고온 사람처럼 입을 앙다물고 스적스적 걸어오는데 숲속에서 나온 례영이가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는듯싶다.

《선생님,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김아성이 앞뒤가 없이 터친 첫 이야기는 통곡처럼 울분과 격정에 휩싸여있다. 감때사나운 눈이 더욱 사납게 번들거리고 주먹이 와들거린다.

그는 정시명의 소매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떨군다.

《무슨 일이요?》

정시명은 자기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김아성을 굽어보며 물었다. 김아성이 그 무슨 엄청난 비보를 몰아온듯 한 불길한 예감이 앞섰다. 그는 얼굴이 재빛으로 타든 청년의 실팍한 허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김아성은 여전히 그 무슨 커다란 격정에 혀바닥이 말려드는지 연신 떠듬거리며 부르짖었다.

《리승만, 저놈이 글쎄… 장개석과 마주앉아… 아, 글쎄…》

정시명이 제 먼저 돌계단에 앉아 그의 손목을 잡아끌었으나 아성은 참나무뿌리처럼 든든한 두다리를 땅에 뻗딛고서서 거친 숨만 몰아쉴뿐이였다. 잠시후에야 김아성은 품에서 순애가 가져온 미농지를 꺼내며 《선생님, 이건 벼락이 친다는 소립니다.》 하고 절통하게 부르짖었다.

《?…》

정시명은 아직도 청년의 흥분을 종잡을수 없어 그와 미농지를 번갈아보다가 미농지를 계단우에 펴놓았다. 깨알같이 박아쓴 글들을 더듬어가는 정시명의 숱많은 눈섭이 급기야 푸드드 떨렸다. 정시명은 자료가 담고있는 엄청난 재변에 대한 예고를 다시한번 훑고나서 미농지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채 한동안 앉은 자세로 굳어져있었다. 숨소리가 커가고 심장이 들먹거리기 시작하였다. 억대우같은 청년의 심혼을 여지없이 짓이겨놓은 공포의 정체가 헤아려지자 그의 가슴속에도 일찌기 체험하지 못한 무서운 전률이 휩쓸어들었다.

잠시후에야 정시명은 아직도 시커먼 구름장들이 떠도는 하늘을 보며 천근의 무게를 담아 비통하게 부르짖었다.

《구름장이 잦더니 벼락이 치는구나!》

그 열찬 웨침에 화답하기나 한듯 서쪽하늘에서 한결 맥이 풀린 천둥이 《쾅― 꽈르릉―》 하고 시름겹게 울부짖었다.

그때 지금껏 정각뒤에 있는 숲속에서 주위를 경계하고있던 례영이 나타났다.

《아버님, 어서 떠납시다. 너무 시간을 보냈습니다.》

떠나올 때 안지생이 절대로 정각에서 한시간이상 지체하지 말라고 례영에게 지시하였던것이다. 안지생은 송호정에게도 될수록 짧게 시간을 잡으라고 당부하였다.

안지생은 최근에 《흥국상회》를 노리는 여러가지 흉흉한 정보에 접하군 하였다. 일전에 례영이와 마주쳤다가 강릉의 어느 산골마을로 도망치듯이 내려갔던 변절자 리창순이 서울시 경찰청 부청장 최운하에 의해 서울에 다시 압송되여왔다고 한다.

그놈은 최근에 별 하나 더 얻어달고 제법 졸개 몇놈까지 거느리고 《흥국상회》의 대문앞에서 어슬렁거리군 하였다.

보름전에는 리범석《총리》의 주재밑에 오성도가 본부장으로 있는 특별합동수사본부에서 발족후의 사찰정형이 총화되였는데 오성도를 비롯하여 수사본부 두목들이 직무태만이라고 리범석과 거기에 참가하였던 미대사관 1등서기관이며 미중앙정보국 서울책임자인 노불의 된추궁을 받았다고 한다. 그날 회의에서는 대책으로서 력량을 보강하여 정시명이라는 미지의 인물을 하루속히 색출하는데 힘을 집중할데 대한 모의가 있었다. 주목되는것은 정시명을 잡자면 정향부터 체포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안지생은 《흥국상회》에서 조직관계자들을 지방들에 분산배치하여놓고 정시명의 움직임에는 철저한 연막을 치도록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정시명이 움직일 때는 반드시 김아성이나 법무부 판사로 있는 권재수가 자기 자동차를 가지고 동행하도록 하고 자신이나 례영이 따라움직이도록 하였다.

자동차는 한강변을 따라 서병남의 집으로 질주하였다.

방금전까지만 하여도 무섭게 태를 치던 구름장들이 엷어지고 군데군데 하늘이 뿌옇게 들리기 시작하였다.

번개가 휘번쩍거리고 천둥이 울려오던 서쪽하늘에도 락조의 잔광이 피빛으로 불그레 비꼈다가 서서히 꺼져가고있었다.

서병남의 집근처에서 김아성은 차를 세웠다.

정시명은 뒤문을 열고 한발을 땅바닥에 짚은채 무뚝뚝하게 지시하였다.

《순애에게 이야기하오. 이제부터 자료를 나에게 직송하라고 하오. 당장은 벼락이 어디서 시작되였는가, 확실한가, 자료의 신빙성… 전쟁의 가능성에 대하여 연구해야 하오. 헛눈을 팔지 마오.》

《예.》

김아성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시명은 미농지를 례영에게 내밀었다.

《이걸 두통을 필사해서 부회장동무들에게 전하거라. 그리고 일요일 오후 다섯시에 여의도의 낚시터에서 만나자고 하여라. 안동무에게도 그렇게 보고해다구.》

례영은 여느때없이 엄숙해진 정시명의 거동에서 무엇인가 례사롭지 않은것을 감촉하였다. 저으기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례영이까지 서병남의 집으로 들어가자 정시명은 갑자기 그 어떤 이름못할 고독과 허탈감이 쓸어들었다. 그는 어둠이 깔린 한강의 거무레한 물결을 내려다보며 자리를 인차 뜨지 못하였다.

순애가 가져온 자료의 내용을 음미해볼수록 기가 찼다.

미국놈들이 쫓겨간다는 소식에 어지간히 속이 풀리고 통일의 려명이 밝아온다는 환희 비슷한 세계에서 날을 보내오던 그였다.  《흥국상회》는 비록 대오안에 비통한 희생과 가슴아픈 상실이 적지 않았어도 투쟁의 승리가 가져온 밝은 희망과 래일에 대한 확신은 그 모든것을 이겨낼수 있게 하였다. 누구라없이 고난과 시련, 괴로움과 슬픔의 바다를 건너 미래에 대한 락관과 희열로 충만되였었다. 통일은 눈앞에 성큼 다가선것 같았다. 피로써 민족의 재결합을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이바지하였다는 숭고한 자부심을 누구나 한껏 소중히 건사하고있다. 그런데 전쟁이라는 이 뜻밖의 흉보가 그 모든것을 일시에 털어버렸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당황한 압박감으로 하여 자꾸 주먹이 후들거리고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

리승만 이놈!… 네놈이 전쟁이라는 소리를 이렇게도 쉽게 입에 올릴수 있단 말이냐. 네놈의 《북벌》잠꼬대가 정말로 전면전쟁을 준비해온것이 확실한가. 고대로마의 폭군 네로는 로마를 불바다로 만들어놓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을 보며 최대의 쾌락을 즐겼다고 한다. 그래 네놈은 삼천리를 기어이 불속에 몰아넣고 제 동포의 아우성을 장송곡처럼 들으며 황천길에 오르고싶은가. 정말 네놈을 없애버리는것이 겨레를 위한 최선의 방책이 아니겠는가. 불행의 화근은 일찌감치 뽑아던져야 한다. 네놈을 철저히 제거해버려야 한다.

정시명은 새로운 단계에서 《흥국상회》의 전술적과제를 며칠새에 완성해보려고 별러왔으나 오리무중에 빠져든 지금의 혼탁한 기분을 가지고서는 론리적인 평가와 사고가 되지 않는다. 벅차게 끓어번지는 감정만이 앞설뿐이고 그냥 심장이 미칠듯 뛰고있을뿐이다.

(네놈을 정말 송호정에게 맡겨버릴가부다.)

정시명은 온몸에 뻗쳐오르는 분격을 누를길 없어 해묵은 돼지같은 그놈의 주글주글한 상통을 눈앞에 그려놓고 이렇게 속깊이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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