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 장  정 면 돌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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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범석은 요즈음 늘 불안하였다. 마치도 풍랑속에 닻을 올린 범선을 끌고가는 기분이였다. 들볶는 파도에 휘청거리는게 도무지 마음을 놓을수 없다. 게다가 그 종착점이 투명치 않다. 어디로 가는것인가, 무엇때문에 가는가, 노를 저어도 향방이 없고 달려도 보람이 없는 길이다. 어디까지 가려나, 가면 어쩐다는거야?

광복전에는 소리뿐이고 별로 일을 친것은 없더라도 마음을 사로잡는 목표가 있고 피를 뛰게하는 리상이 있었다. 왜놈을 치고 나라를 되찾자, 인생목표가 명확하였다.

사람들은 《광복군사령관》이라는 명색이 야단스러운 자리에 올려놓아주었고 리장군이라 곱게 불러주었다.

그 시절에는 백의동포를 위한다는 나름으로의 고결한 멋이 있었다. 그래서 장개석과도 손을 잡아보았다. 내키지는 않았어도 미전략정보국의 중경지국에도 들락날락하면서 《나라를 찾자니…》하는것으로써 외세와 손을 잡게 된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위로할수 있었다.

헌데 서울에 와서 권력쟁탈전에 말려들면서부터 이 모든것이 일조에 부서져나가고말았다. 생활에서도 정사를 보는데서도 선과 악이 혼탁이 되고 정의와 부정의가 가늠이 잘되지 않는다. 그 모든게 주위에서 뒤섞여 돌아가는게 꼭 어둠속에 길잃고 떠다니는 나그네의 방랑살이격이다.

도대체 리승만정권이 무엇을 위해 세워졌으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 리승만정권의 우두머리격인 자신은 무엇을 위해 방을 지키고 세월을 분주하게 헤염질해가는거냐.

총리집무의 그 어디에 자신을 흥분시키고 만족시킬만 한 명분이 깔려있는가, 지난 한두해 가까와오도록 총리감투를 쓰고 해놓은 일이 무엇이며 이제 또 무엇을 하려는건가?…

리범석은 가끔 이렇게 자기를 세워놓고 자문자답하기도 하였다. 답이라는게 참으로 너절하고 시시껄렁하다. 리승만의 독재를 비호해주고 양놈들에게 먹이감을 마련해주는것이다. 국토의 분렬을 고정화하고 미구하여 전쟁을 일으켜 양놈들이 씨비리까지 타고앉도록 도와주는것이다. 흥, 이게 이 나라의 총리벼슬감투가 뜻하는것이다. 이러자고 광복전에 허위단심 별별 고초 다 겪으며 이몸을 던져왔더냐.

리범석의 이러한 번민은 요사이 오성도가 두고간 문건들을 읽어가면서 더욱 짙어갔다.

리범석은 해종일 들이닥치는 결재문건들을 처리하고 방문객들을 만나는 고달픈 집무를 마친 늦은 밤시간이면 비서실 사람들까지 다 들여보내고 탁상등밑에서 정향의 《죄상》으로 묶어온 자료를 밑줄을 그어가면서 훑었다. 페지들을 넘길수록 리범석은 《흥국상회》가 내놓은 원대한 리상에 흥분하였고 그들이 해놓은 일들에 자못 경탄해마지 않았다. 쏘미공동위원회 사업을 걸고든 미국의 기도를 거듭 파탄시킨것이라든지 《유엔조선위원단》을 움직여낸것이라든지, 4월남북련석회의를 밀어준것이라든지, 《국회》를 움직여 양놈들의 눈이 뒤집히게 한것이라든지 어느 하나 무심히 건너보낼수 없는것이였다.

리범석을 더욱 감복시키는것은 그 문건의 페지마다 새겨지는 정향의 얼굴이다. 광복을 전후하여 여러번 해치려고 했던 그 인물이 지금 그의 눈앞에서 미국놈들의 강도질로부터 민족의 사활을 지켜선 거인으로 우뚝 솟아오른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 대결하고있는 그 인물이 이토록 정감을 주는것이 참말로 괴상하고 야릇한 일이였다.

아침저녁 쉬임없이 맞다드는 문건들중 태반은 미국과의 관계를 깊이하고 국민에 대한 수탈을 더욱 교묘하게 하며 동족을 대상으로 하는 전쟁준비를 위한 공문서들이다. 그 공문서마다에 《한국》이라는 리승만의 《공국》을 유지하기 위한 더러운 인간들의 어지러운 얼굴이 비껴있다.

그런데 이 오성도가 걷어모았다는 자료에는 애국이 있으며 겨레에 대한 헌신이 있다. 나라의 앞날을 책임지려는 지사들의 얼굴이 있다. 거기에는 또한 양놈들을 눈아래 굽어보는 조선사람의 배짱과 슬기가 있다. 양놈들앞에서 민족의 존엄을 지켜가는 드높은 기개가 있다.

뜻을 잃고 사는 보람을 잃어버린 권력의 수난자… 리범석은 자기의 처량한 신세가 정향의 넋에 을비쳐지자 저으기 서글퍼지기만 하였다.

며칠전에 리승만앞에서 《국회》선거를 헌법대로 치르자고 주장했는데 무엇때문에 리승만의 빈축을 사면서 언성을 높였는가.

설명을 하자면 구구히 늘어놓을수 있겠지만 구경은 리승만을 권좌에서 몰아내자는것이다. 그런데 가령 리승만을 정계에서 추방해치우고 내각제개헌을 해서 실권을 장악하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한다는건가. 이 리범석이 나라의 통치권을 잡은들 저 양놈들의 훈시놀음을 차던질수 있으며 또 양놈들의 손끝에서 놀지 않고서야 이 나라를 움직여나갈수 있는가. 이 나라는 미국이 세워준 나라이니 미국의 지령과 후원이 없으면 제발로 걸어나갈수 없게 토대가 잡히고 기틀이 만들어져있다.

미국것들은 공공연히 경제원조를 차단하며 무기공급도 보류할것이라고 위협하군 한다. 언론에서는 그까짓 속시원히 걷어치우라고, 왜 독립국의 주권행사를 포기하느냐고 까박을 붙여오지만 네놈들이 이 자리에 앉아봐라. 그런 시비를 붙여볼 엄두나 낼상싶으냐. 미국것들이 돈을 내지 않으면 다음날로 공장이 멎고 기차가 멎는판이다. 그것들이 무기를 주지 않으면 만들어놓은 군대는 몽둥이를 들고 38°선을 지키겠느냐.

미국놈들의 삿대질을 아침저녁으로 받자니 속이 불끈불끈거리지만 뾰족한 재주가 없으니 호미난방격이다.

총리직을 걷어치우고 남은 여생을 야인으로 돌아앉겠다고 하니 문진국이며 조태준이 달려와 야단들이다. 뼈대무른것들만 리승만곁에 설치게 해두고 심기가 불편하다고 물러나면 장차 이 나라 정사는 진창에 빠질것이 분명한데 뒤날에 후손들이 뭐라고 하겠느냐고 입을 모아 공격을 해온다.

《그러니 이거야 야단이 아닌가. 조정에 간신들만 남아 씨글거리니 그 누가 바른소리 한마디 해볼가. 리승만의 코밑이 꼭 그 꼴이야. 틀고앉아있자니 속만 끓고 나가자니 틈새가 없고 돌아서자니 그것 또한 절벽강산이라…》

리범석은 눈밑에서 결재를 기다리고있는 문서장을 흘 밀어던지며 짜증이 나서 중얼중얼거렸다.

어느결에 들어섰는지 문진국비서가 나직이 보고하였다.

《총리각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뵙기를 희망합니다.》

《손님? 오늘 오전에는 무쵸대사와의 면담이 있으므로 일체 면회를 사절하라고 하지 않았소?》

리범석은 힐책조로 퉁명스럽게 면허사절의사를 분명하게 하였다.

한시간후에 무쵸가 찾아오게 되여있었다. 무슨 일때문에 그러는지 노불서기관을 대동해오겠다면서 국방장관도 참석시켜달라는 의향을 전해왔다.

《손님이 하도 부탁하기에… 저도 사절할수 없는 딱한 처지이고 그 무슨 특별사연도 있는것 같기도 하고…》

문진국이 일단 잘라버린 문제를 거두려 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고집을 부리자 리범석은 화가 나서 물었다.

《방문자면담은 이틀전에 제기하게 되지 않았소. 도대체 어떤 손님이요?》

문진국은 얼른 손에 쥐고있던 명함장을 내놓았다.

리범석이 명함장을 훑고나자 눈부터 휘둥그래졌다.

《〈흥국상사〉리사 정향?… 정향… 어느 정향이요?》

《총리각하도 잘 아시는 그 정향선생입니다. 서안판사처 처장하던…》

《뭐야?!… 정향이? 다름아닌 그 정향이 총리공관에 들어섰다는 말이냐?》

리범석은 낯빛이 단번에 붉으락푸르락 돌변하더니 두눈을 부릅떴다. 눈꼬리가 쳐들린데다가 두눈이 우멍해져서 독기를 풍기니 그 꼴이 꼭 당장 먹이감에 달려들 맹수의 눈빛이다. 무슨 어줍잖은 소린가. 이 사람이 얼빠진 수작을 붙이는게 아닌가. 저를 붙잡겠다고 특별수배령까지 내리고 현상금 500만원이 붙어있는데 제발로 걸어들어오다니. 호박쓰고 돼지굴 뛰여드는 격인가, 아니면 내 앞에 와서 무릎 꿇자는건가?… 아니 정향은 백번 죽어도 그럴 사람은 아니다. 도대체 이 리범석앞에서 야료를 부리는건가?

이건 총리에 대한 희롱질이라도 너무도 분수에 지나치다.

리범석은 정향에 대해 새롭게 떠돌던 잠시전의 생각은 다 가셔던지고 분기가 치밀어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장 체포해! 비서, 전화로 오성도를 찾으라. 무장경찰 한두명 끌고 총리공관에 10분안으로 오라구 지시해.》

《오성도?… 그러면?…》

문진국이 리범석의 고함질에 화닥닥 놀라 큰소리로 되받았다.

《정향선생이 대기실에 와있습니다.》

《뭐야?! 어쩌자는건가, 비서? 자네도 벌써 중경서부터 그자를 제껴버리려고 따라다니지 않았나. 감히 누구를 어째보자고 덤벼든단 말인가? 이 총리를 뭘로 보는거야. 정향이 김구를 평양으로 움직이도록 했다더니 리범석도 흔들어 평양정권의 둘러리로 만들려는건가?… 전화를 걸어. 자네도 떨떨해. 대기실까지 들여놓다니… 〈국가보안법〉에 어떻게 돼있는지 모르는가? 어서!》

《자중하십시오, 총리각하. 그래도 친히 찾아올것 같으면 긴하게 여쭐 말거리를 가지고 나타났을게 아닙니까. 그 사람이 제 목숨이 백척간두에 올라있는걸 모르고 각하를 뵈오려 이런 곳에 나타났겠습니까.》

《안돼. 그 사람은 이남의 국체를 뒤집으려는 사람이고 이 리범석은 그걸 수호해야 할 최고의 공직자야. 그와 무릎을 맞대고 뭘 수군거릴게 있다는건가?》

리범석은 원망과 애원이 어린 문진국의 얼굴을 사납게 흘겨보다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가로저었다. 문진국의 거동이 수상쩍게 여겨졌던것이다.

그는 문진국이 움직일 낌새를 보이지 않자 자기가 전화를 들고 특별합동수사본부 오성도를 찾아 전화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문진국은 리범석이 전화까지 하는것을 보자 얼굴이 재빛이 되였다. 예상은 하였지만 리범석이 이렇게까지 인사불성일줄은 몰랐다.

어제 조태준으로부터 총리와 정시명의 상면을 조직할데 대한 임무를 받았다. 문진국은 처음에는 그건 모험이라고, 범의 굴에 찾아드는 일이라고 강하게 난색을 보이였었다. 그런데 이건 회장동지의 최종결심이라고 조태준이 단마디로 일축하는 바람에 더는 어쩔수 없어 받아들였다.

온밤 불안속에 잠조차 제대로 자지 못하고 나왔다. 중경서부터 정시명을 이를 갈며 쫓아다닌 리범석을 문진국은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사정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침 일찌기 다시 나타난 조태준과 면담조직문제를 심중히 토의하였다.

미리 통고하지 말고 정시명을 대기실에 앉혀놓고 기습적인 방법으로 성사시키는것이 좋겠다고 락착이 되였다. 미리 앞질러 밝혀놓으면 리범석이 잘 나오는 경우라야 외면할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소동을 벌릴것이 뻔하였다. 그래서 대기실까지는 조태준이 정시명을 안내하여오고 그다음 문진국이 총리방에 나타났던것이다. 그런데 예상했던 일이 터지고야말았다.

문진국은 위기일발이라는 생각에 지금 제정신이 아니였다. 사태를 역전시킬수 없게 된것이다. 이제라도 회장동지를 돌려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총리공관 앞마당 접수실에서는 지금 조태준이 자기 사람 한명을 데리고 만약의 경우를 가상하여 자동차를 가지고 대기하고있었다.

이 시각 대기실에 앉아있던 정시명은 문진국이 지체하고있는것으로 보아 면회요청이 잘 접수되지 않고있다고 예측하였다. 고집쟁이요, 트집쟁이요, 심술쟁이요하고 고약한 의미의 쟁이라는 말이 수태 붙어다니고있는 리범석이 이쯤되면 문진국의 재주로는 돌려세우기가 코집이 틀렸다. 그렇다고 물러설수는 없었다.

원체 정시명은 리범석과의 사업은 방대광을 돌려세운 뒤에 그의 힘까지 빌려 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례영의 목숨이 경각에 처했다는 각박한 사태가 사업순차를 바꾸게 하였던것이다. 례영이 병원에 실려갔다고 한다. 오히려 그것이 더 례영이로 하여금 자결이라는 극한투쟁에로 나갈수 있게 할것 같았다. 당장은 례영이를 풀어놓자면 오성도를 움직일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진 인물이 나서주어야 한다. 그런 인물로는 리범석이쯤 되여야 한다.

그래 막다른 골목에서 정면돌파로 해결대책을 찾아낸 김아성이처럼 정면돌파를 결심하고 총리공관에 들어선것이다. 그렇게 떠나온 길인데 총리의 문간에서 장애에 부닥쳤다. 여기서도 정면돌파하는수밖에 없게 되였다.

어물거리며 상대측 후방을 교란하고 익측을 후려치며 유인, 매복, 포위소멸할 겨를이 없어 정면돌파하리라 굳이 결심하고 나선 길인데 리범석의 문전에서 상판도 보지 못한채 물러날수 있겠는가, 정면돌파가 정면에서 좌절된다면 싸움은 점점 피동에 빠지고 지금 갇혀있는 례영이도 구원할 길이 묘연해진다.

김명호도 최근에는 머저리흉내놀음이 깨지고 오히려 지도적인물로 점이 찍혀져 중죄인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곧 재판이 열리고 사형이 언도될것이라 한다. 며칠전에 길철에게 소식이 전해졌는데 절대로 자신때문에 조직을 로출시키는 일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정시명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대기실의 작은 방을 초조하게 거닐며 문진국이 나오기만 기다렸다. 그러나 10분이 지나도록 문진국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더는 지체할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순간을 놓치면 첫 싸움부터 만회할수 없는 패배에 부닥친다. 그게 전조가 되여 점점 헤여나기 힘든 함정에 빠질수 있다.

정시명은 방음장치를 한 육중한 문을 열고 리범석의 넓다란 사무실에 들어섰다.

무엇인가 열을 올리고있던 두사람이 무작정 문을 열고 들어선 정시명을 서로 다른 낯빛으로 바라보았다.

리범석은 어디서 굴러든 수염쟁이령감이 감히 총리방에 뛰여드느냐 하는 어줍잖으면서도 의혹이 서린 빛이였다. 리범석앞에 마주서있던 문진국은 절망적이고도 아연해진 빛이다.

그는 지금 전화를 걸어온 오성도에게 즉시 무장경찰을 데리고 자기 방에 도착하라고 한 리범석의 명령을 취소시켜보려고 치렬하게 설전을 벌리고있던중이였다.

리범석이 문진국을 다시금 사납게 흘겨보고나서 일견 자객이 아닌가싶어 권총탄이 만탄창되여있는 자기 책상앞으로 다가갔다. 공포와 경계의 빛이 력력해서 심술궂게 꽥 소리질렀다.

《령감은 누구요?》

《내가 당신이 찾고있는 정향이요. 다른 이름은 정시명이고…》

《정시명?… 정향… 당신이?!…》

리범석은 와뜰 놀라 흰자위를 희뜩거리며 걸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자기의 예감이 옳았다. 서안판사처 처장 정향은 벌써 그 시절부터 거인으로 살아왔다. 하지도 노불도 리승만도 안개에 휩싸인 거물로 찾고있는 신비한 인물이 다름아닌 자기의 주위에서 돌아친 정향임을 알면 기절초풍해질것이다. 헌데 제발로 총리공관에 쳐들어오다니!…

문진국은 더욱 놀란 낯빛이였다. 정향이 정시명이라는 미지의 인물이라고는 여적 생각해보지 못했던것이다.

《당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놓았소.》

최면술에 걸려들기라도 한듯 얼떠름해진 표정들인 두사람을 보던 정시명이 채수염을 내리쓸며 빙그레 웃었다.

그제야 문진국도 정시명을 우선 구원해야 할 자기의 직분을 깨달은듯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서며 다급하나 나직하게 말하였다.

《선생님, 빨리 여기를 떠야겠습니다. 총리가 오성도를 불렀습니다.》

《음, 그랬댔구만.》

《선생님, 이러고있을새가 없습니다. 총리각하, 다시한번 부탁드립니다. 이것은 초보적인 도덕도 량심도 없는 더러운짓입니다.

총리각하가 어쩌면 이런 몰지각하고 상식에 없는 일을 할수 있습니까? 빨리 오성도를 철수시켜주십시오.》

《비서… 그만두지 못할가.》

리범석이 그래도 량심에는 켕기는듯 문진국을 똑바로 보지 못하면서도 분을 삭이지 못해 헐떡거리였다.

정시명은 사태의 전말이 대체로 리해되였다. 위험이 눈섭끝에 와있는것이다. 그러나 당황함이 없이 리범석을 쏘아보며 태연자약하게 말문을 열었다.

《음, 다 알만 하군.… 총리, 당신은 인사범절이 없군. 우리가 중경에서 헤여진지도 10년이 되여오는데 심양에는 자객을 보내오더니만 오늘은 알현하려고 문턱을 넘어선 사람에게 손을 내밀기는커녕 오라를 지우려고 경찰을 불러들인단 말이요?

좋습니다. 문비서선생, 대기실에 나가 그 사람들을 잠시 지체시켜주시오. 끌려갈 땐 끌려가더라도 이 사람과 회포나 풀고 나서야 될게 아니요.》

문진국이 정말 당장이라도 경찰들이 쓸어들가봐 두말없이 나서려는데 리범석이 고함을 질렀다.

《게 섰거라. 넌 도대체 누구의 사람이고 어느 편이냐?》

리범석은 그들사이에 오가는 이야기에서 딱히는 짐작이 되지 않는 배신감이 치밀어올랐던것이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전과 같이 기운이 없었다. 처량한 넉두리 같았다.

그 소리에 문진국은 가슴을 쭉 폈다. 리범석을 맞받아 경멸의 빛이 번쩍거리는 눈길을 보내다가 화가 나서 꿋꿋하게 맞섰다.

《나는 이 나라 국민의 한 사람이고 편으로 말하면 애국의 편입니다.》

리범석의 눈꼬리가 치섰다. 대답의 의미도 그러하지만 도전조의 눈길이 밸머리를 동하게 했던것이다.

《애국의 편?… 그럼 나는 어느 편이라는거냐?》

리범석은 사납게 따지고들었다. 수틀리면 권총이라도 빼들고 쏴갈길 판이다.

문진국은 그 소리에도 여전히 떡심좋게 내뱉았다.

《리장군의 편으로 말하면 어제날에는 리해가 되였습니다. 오늘은 잘 가늠이 안됩니다.》

《뭐야?! 건방지다.… 나가! 어서 나가!》

리범석은 15년나마 가까이 데리고오던 혈붙이같던 사람이 처음으로 한걸음도 비켜섬이 없이 맞대꾸질을 신랄하게 하자 분노가 굴뚝같이 뻗쳐 방이 떠나갈듯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문진국은 그냥 두다리를 강대처럼 뻗치고 서서 리범석을 향해 어깨를 솟구고있다가 홱 돌아섰다. 분기가 솟구쳐 신경질적으로 구두발소리를 뚜벅뚜벅내며 나가버렸다.

방안에는 한동안 문진국이 던지고 간 분노와 절망과 환멸이 무겁게 서리여 두사람의 몸에 칭칭 감겨들었다.

리범석은 아래사람이 서슴없이 들이댄 모욕과 반발을 정시명앞에서 당한게 더욱 기가 차서 성난 범처럼 숨을 거칠게 씩씩거리며 으르릉거리였다.

《노루인줄 알고 키웠더니 이리가 됐군.》

《리장군, 그 젊은이를 탓하지 마시오. 그 사람은 어제도 오늘도 노루요. 그리고 비서의 대답이 애매할것 같으면 내가 대신 대답해주리다. 편가름을 할진대 당신은 지금 매국의 편이요. 애국을 반대하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겨레의 적편에 서있소.》

《뭐요? 당신이 항일전장터를 누벼온 사람을 세워놓고 감히…》

《리장군의 항일영웅사는 지난 5년사이 미국의 흥정판에서 당신자신이 다 말아먹었소. 지금 리범석총리를 두고 항일장군 리범석을 추억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소.》

정시명은 이렇게 위엄있게 그의 정체를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그는 두루마기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고 천천히 쏘파에 가서 다리를 틀고앉았다.

리범석은 푹신푹신한 량수걸이걸상에 앉지 못하고 엉거주춤거리다가 앞책상으로 나왔는데 서지도 앉지도 못하고 처신이 난감해서 서성거리였다.

《리장군, 날 이제 감옥에 보내겠다고 하니 우리 광복된 조국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사라고 생각하고 말 좀 해봅시다. 이자 방금 여기서 문비서 말을 듣고 당신은 화를 내고있는데 당신 생각에는 리장군은 지금 어느 편이라고 생각되시오?》

《그래, 당신은 그 말을 듣고싶어 왔소?》

《그렇소. 그 대답을 듣고야 내 하고픈 말을 하고 일어나겠소. 문비서로부터 듣자하니 한시간후에 무쵸대사와의 회견이 약속되였다고 하는데 당신이 이제 나를 위해 내줄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소. 구태여 이 좌석으로 말하면 당신자신을 위하여 마련된것이요. 그렇소. 항일전사 리범석장군자신을 위해 마련된 시간이요. 그리고 내가 찾아온 또 하나의 리유는 당신만이 들어줄수 있는 부탁이 하나 있기때문이요. 당신이 정히 항일경력을 자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도와줄수 있는 부탁이요.》

《좋소. 부탁부터 내놓으시오. 길게 이야기할새가 없소.》

부탁이라는 소리에 리범석은 걸상을 들고와서 정시명의 앞에 자리잡으며 회중시계를 꺼내보았다.

《부탁이란건 이런거요. 내가 사랑하는 항일렬사의 딸이 오성도의 손에 잡혀가있소. 그 렬사로 말하면 광복전에 10년동안 왜놈과 싸우던 항일영웅이요. 남들이 다 권력을 찾아 서울에 달려올 때 귀국동포들의 안전을 지켜주고저 심양에 눌러있다가 무장도배들의 총탄에 숨이 진 애국렬사요. 그런데 오성도가 내가 양딸삼아 데리고있었다는 한가지 리유로 잡아다가 애를 초주검을 만들어놨다고 하오. 페일언하고 석방시키시오.

나도 당신도 이국땅에서 이방인의 총탄에 숨진 겨레를 품에 안을 때면 피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이 아닌가. 내놓아야 하오. 선렬의 피와 씨를 욕되게 하는건 리유불문하고 천추로 저주받을 죄악이요. 당신은 내놓아야 하오.》

정시명은 담담한 어조로 조리있게 항의하고 준절하게 요구하였다.

부탁이라고 해서 비상히 심각한 문제를 담을듯싶었는데 뜻밖에 렬사의 딸을 내놓으라니 리범석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러면 렬사의 딸때문에 자기의 생명을 내걸고 여기로 왔는가.

거물 정시명이 잔정에 끌려 호박쓰고 돼지굴에 제발로 찾아드는 모험을 한다는건가? 어쩐지 속이 뜨끔해났다. 이건 참 보통의 속셈으로는 가량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 역시 쉽게 용단을 내리고 풀어줄 일은 아니다.

《죄가 없다면야… 헌데 당신이 나를 위해 마련된 시간이라는데 그건 무슨 소리요? 당신에게는 법이 마련해놓은 형장이 기다리고있소. 당신의 배포가 얼마나 큰지 두고봅시다.》

리범석은 다소 분기가 가라앉자 누글누글하게 비웃으며 늘어진 수작을 꺼내놓았다. 그는 심히 불안하고 초조해진 자기의 속을 가리워보려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여러번 비볐다.

《그건 뭐 두고보시구려. 당신 물음에 대답하리다. 그렇소, 당신을 위해 시간을 냈소. 당신의 한생이 이 나라 사람들에게 끝까지 아름답게 전해지기를 바라서 말이요. 바꾸어 말해서 당신이 인생을 그냥 가꾸어간다면 이 나라에도 복이 되기때문에 나도 당신이 포승을 갖춰놓고 기다리는줄 알면서도 찾아온거요.

광복 네돌기가 지났지만 이 나라가 돼가는 꼴 한번 돌아보시오. 백범은 국민을 위해 평생을 살아왔다고 했건만 광복이 됐다고 이 나라 국민의 밥상에 찬거리 하나 더 올려놓았나, 사람들의 볼에 기름기 돌게 했나 하면서 통탄해마지 않았소. 자고로 임금의 정사 평하자면 국민의 밥상을 보라고 했는데 지금 민생고는 최악의 위기에 빠져 사람들은 주림과 헐벗음에 울고있다며 탄식했소.

광복된 내 나라에 이른바 정치범들이 차고넘쳐 감옥이 네배로 늘어나고 못살겠다고 주먹을 쳐든 수천수만의 젊은이들이 산을 타고앉아 항전기발을 들었소. 그 항전대오에는 광복전에 일본놈들과 싸웠던 사람들이 주력을 이루고있소. 이를테면 그들은 두번째 광복전을 벌려가고있는거요.

헌데 정치하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큰 감투를 쓰겠다고 버둥거리면서 미국놈들의 발바닥을 핥아주느라고 나라리권을 팔아먹는 경쟁을 벌리고있소. 그래 우리가 이런 못난 나라를 만들려고 사생결단하고 뛰여다녔소? 천만에!

리장군도 광복전쟁때 왜놈들의 품에 기여든 그 요사스러운 역적무리들이 얼마나 눈꼴 사나왔소. 왜놈이나 양놈이나 우리 겨레 등을 쳐먹자는 그 시커먼 속은 같고같은 오랑캐무리들이라는걸 그래 리장군이 모른단 말이요? 남의 나라 위해주는 외세란 없다는걸 당신이 모른단 말이요?

그 외세에 복무하는 요사스러운 무리들의 두번째에 리장군이름이 있소. 결국 당신은 이역만리에서 그리도 목놓아 부르며 그리던 내 나라 강산을 양놈들에게 팔아 인간불모지로 만들어놓은 두번째 죄인으로 됐소.》

《그만두시오! 정선생, 난 그따위 시라소니가 아니요. 그래도 양놈들과 리승만앞에서 제 밸대로 말하고 제 목대를 세우는건 이 리범석인줄 아시오.》

리범석은 정말 이 나라의 존엄을 떠메고나선 대들보라도 된듯 기고만장해서 정시명이 사정없이 휘두르는 타매의 채찍에서 피해보려고 노성을 터뜨렸다.

《흥, 당신은 원체 제 밸은 양놈들에게 저당잡히고 살아왔소. 당신은 중경시절부터 미국의 첩자라는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소?》

《중경?》

리범석이 대뜸 얼굴에 찬바람이 이는듯 살진 볼편이 실룩거리고 눈꼬리가 곧추섰다. 그는 걸상을 뒤축으로 걷어차며 자리에서 솟구치듯 일어났다.

《아 아… 아, 그때야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놈들과 싸운 나라가 아닌가? 일본놈을 치기 위해 일본을 족쳐대는 동맹국을 도와준것도 역적행위인가?》

리범석이 서울로 와서 귀가 아프게 들어온 이야기가 미국의 첩자노릇했다는 말이다. 자기와 도전하는 세력들은 의도적으로 상해림시정부의 무장력이던 《광복군》의 사령관의 자리를 타고앉아 일본과 접전하여온 경력을 빼버리고 이걸 들쑤셔놓으며 몸값을 떨구군 한다. 정시명이 또 그걸 쑤셔대는 바람에 울기가 버쩍 치솟고 눈알이 휑하니 돌아가기까지 하였다.

그는 속이 울뚝울뚝거리는걸 참을수 없는듯 자기 책상으로 가서 책상서랍을 소리나게 열었다닫았다 하면서 담배를 찾아들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손님대접할 생각이 그제야 드는지 정시명에게도 한대를 권하고 성냥을 건늬여주었다.

둘은 잠시 휴전이라도 한듯 담배만 걸탐스럽게 빨았다.

정시명은 상대가 고함은 질렀지만 잠시전의 적의나 분기가 잦아들고 노여움과 안타까움이 지글지글 끓는것만 같았다.

그건 좋은 일이다. 사람이 자기도 인간이라는것을 깨닫는것은 인간된 구실을 할수 있다는것을 말해준다. 인간으로서의 본연의 의미를 갖추는것은 자신의 비인간적인 요소를 경멸하고 수치를 감수할줄 알게 하는것이다. 리범석에게서 이것을 보게 된것이 기뻤다.

정시명은 담배불을 꺼버렸다. 리범석을 향해 자신감을 가지고 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좋소, 당신이 자기 한 일에 대해 그렇게 주견머리있게 애국으로 변호하는걸 보니 나도 속이 시원하구만. 헌데 그때처럼 나라를 위해, 후손들을 위해 뜻을 세우고 살아가야 될게 아닌가. 당신이 참여한 건국이 어떤 결과를 낳았소? 미국의 꼭두각시들이 모여 미국을 위해 국민의 머리우에 군림하면서 국민탄압과 수탈에 혈안이 되였소. 공산주의를 박멸한다고 아침저녁으로 싸울 생각이나 하니 그래 이북에 있는 사람들은 제 동포, 제 형제가 아니란 말이요?

뭐 듣자니 지난해 리장군이 국제경기에 나가는 서울 권투팀을 만나 혹 다른 나라들과는 져도 무방하지만 이북팀과 맞다들면 물고뜯어서라도 이기라고 말했다는데 전해지면서 보태진 말이겠지만 듣기가 좋지 않소. 어쩌면 그럴수 있는가. 이게 한조상의 피를 나눈 배달의 후손들이 할 소리인가. 세상사람들앞에서 남이요, 북이요, 형제끼리 맞서 아귀다툼질을 하는것부터 기가 막힌 일인데 물고뜯어 이북만은 제끼라니 세상에 이런 미개족속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당신들은 지금은 민족의 대재난을 향해 곤두박질하며 달려가고있소. 이제 당신이 총리가 돼서 동족상쟁을 빚어놓게 되였으니 후환이 무섭지 않소?》

정시명은 그냥 무게있는 열변으로 리범석의 가슴을 나사조이듯 틀어조이기 시작하였다. 마디마디가 부서진 얼음장처럼 날이 서고 선뜩한것이 비껴있었다. 그러나 그 밑으로는 더없이 뜨겁고도 고결한 넋이 쇠물처럼 끓어번지고있었다.

내 조국, 내 겨레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는 그 심장앞에서 가드라들었던 가슴을 터쳐놓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이 땅의 정기를 안고 솟아난 인간이겠는가.

리범석의 표정에서 점차 랭랭한 기운이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쏘아보던 눈길은 어데다 건사할지 겁난듯 창밖으로 돌렸다가 천정으로, 천정에서 다시 방바닥으로 향방없이 헤매였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하자는거요? 당신이 생각하는 바른 인생이란 어떤거요? 당신이 한번 내 자리에 앉아서 정사를 주관해보시오. 무슨 용빼는 수가 있는가.》

《민족을 위해서는 죽어도 영광이라는 항일시절의 얼만 남아있다면 용빼는 수는 얼마든지 있소. 당신은 이 방의 주인이기때문에 오히려 겨레를 위해 더 좋고 더 큰 몫을 할수 있지 않소. 나는 그렇게 생각하오.》

《그건 정치가의 꿈에 불과하오. 현실은 리상과는 너무도 거리가 있소. 정치가가 제 소리 낸다는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나는 이제야 알기 시작했소.》

《그래도 제 소리를 내야 하오. 바른 소리, 인간다운 소리, 애국하는 소리를 내야 하오. 당신이 만약 나더러 용빼는 수를 내놓으라면 전쟁의 불구름이 몰려오고있는 오늘의 정세속에서 화평통일론을 계속 들고나설것을 권하고싶소. 화평통일론은 분렬론을 제창하는 외세에 대한 도전이며 전쟁나발을 불어대고있는 호전세력들에 대한 반공격이요. 아 참, 인젠 시간이 돼오는구려. 내 하고픈 말은 많지만 이만하겠소.》

정시명은 안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 기다리시오.》

리범석도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책상에 가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자 문진국이 인차 긴장한 얼굴로 들어왔다.

《오성도가 아직 안왔는가?》

《방금전에 도착하였습니다. 대기실에 와있습니다.》

《들여보내.》

《예?!》

《어서!…》

문진국이 두사람을 번갈아보다가 불시에 다리를 후들거리기 시작하였다.

지금 대기실에는 오성도가 무장경찰 두명을 데리고 리범석의 호출을 기다리고있다. 정향을 체포하러온것이다.

《어쩌자는겁니까?》

방안을 처절하게 울리는 문진국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슬픔과 원망이 서리서리 맺혀있는듯 하였다.

《뭘 어쩌자는거야? 도대체 어쩌자는거냐?》

리범석이 지글지글 끓기 시작한 가슴속의 번민을 통채로 뽑아버릴듯 탁한 어조로 또다시 맞고함을 내질렀다.

《문비서, 리장군 분부대로 하시오.》

정시명의 나직한 말에 문진국은 여기서 시비를 가리는것이 소용없는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비틀거리며 방을 나갔다. 우선은 오성도를 들여보내놓고 정문접수에서 기다리고있는 조태준에게 사태를 빨리 알리는것이 좋을듯 하였다. 정 못나게 놀면 리범석도 까눕히고 오성도일행도 족치고 정시명을 탈환할 심산이였다.

인차 오성도가 들어와 깍듯이 인사를 하였다.

리범석은 뒤잔등에 두팔을 올리고 잠시 방안을 오락가락하다가 성난 어조로 물었다.

《본부장, 잡아왔다는 그 뭐라더라. 철학자와 아가씨는 아직도 놓아주지 않았는가?》

《예, 철학자랍시고 얼뜨기 흉내내는 놈은 사실은 정향의 곁에서 움직이는 큰 인물같습니다. 틀림없습니다. 고문을 들이대니 본색이 드러나고있습니다. 그런데 휘여들것 같지 않다고 합니다. 이제 재판을 벌려 처리하려고 합니다. 아가씨란 정향의 양딸이라는데…》

《그래, 그 녀자의 죄명은 뭐야?》

 리범석이 루루이 엮어대는 오성도의 말허리를 퉁명스럽게 꺾으며 물었다.

《입을 좀체로 열지 않으니… 아직은 그 녀자도 덜미를 잡은게 없고 해서 병원에 보냈습니다. 우리 사람들이 너무 험하게 다룬것 같습니다.》

《병원에?… 녀자의 죄상을 따지지도 않고 고문부터 해?》

《글쎄… 그래서…》

《이것봐, 오성도! 내가 평생 제일 미워하는 놈이 어떤것들인지 아는가? 왜놈경찰들이야. 경찰이 왜놈때 때벗이 못했다는 말 아직도 무성해. 죄가 없는 사람 죄가 있을듯싶어 마구잡이로 쓸어넣는다면 이 나라 국민을 다 감옥에 끌어가야 할게 아닌가. 그리고 그놈의 수사본때도 돼먹지 않았어.》

《글쎄 그런데 그 녀자는…》

오성도는 여전히 멈칫거리였다.

《풀어놔. 그 녀자는 독립렬사의 후생이야. 독립렬사가 남긴 혈붙이를 거두어주는건 정향이 했던지 박향이 했던지, 그리고 리유가 뭐든지 좋은 일 아니겠는가. 이제 당장 데리고 온 경찰들을 보내 그 녀자를 석방시키라구. 그래서 불렀소. 다요.》

《아, 아…》

오성도는 리범석의 지시를 선뜻 받아들일수 없어 갑자르다가 그의 눈길을 외면하여 얼결에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오성도는 쏘파에 무겁게 앉아있는 수염쟁이를 보았다.

순간 그의 뇌리에 그 어떤 직업적인 비상한 륙감이 섬광처럼 번뜩거렸다.

수염쟁이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함께 긴장감이 서린것 같다. 저 수염쟁이의 출현이 그 녀자에 대한 총리의 뜻밖의 석방명령과 련결된것이 아닐가. 그러고보니 방안의 분위기도 별로 침중하게 느껴졌다. 리범석의 때없는 신경질과 까닭모를 호령기에도 보다 심각한것이 숨어있는것 같다.

(저 사람이 혹시…)
이렇게 생각하니 오성도는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등골에 식은 땀이 둘둘 굴러내렸다.

오성도는 떠오른 직감과 자기의 직분을 의식하자 쉽게 물러설수 없다고 결심하였다. 그래 한발자국 내밟으며 메마른 어조로 불렀다.

《총리각하!》

다시 강한 어조로 말을 떼였으나 그의 결심은 리범석의 거센 호령에 단번에 부서지고말았다.

《본부장!》

리범석은 오성도가 두눈을 가늘게 찌프리고 이마살이 뎅뎅해서 바재이자 화증이 우쩍 들려 벽력같이 고함을 질렀다.

《석방하라, 당장! 그리고 오후 첫 시간에 나에게 보고했!》

오성도는 총리가 밸머리가 수틀리면 책상서랍안에 있는 권총을 꺼내 함부로 발사한다는 소리를 들은바가 있다. 그게 생각나자 오성도는 허리부터 굽석거리고는 다시한번 수염쟁이에게로 야릇한 눈길을 보내며 도망치듯 사무실에서 나가버렸다.

《정처장, 다시 만나지 말기를 바랍니다.》

리범석은 오성도가 잰걸음으로 도망치듯 방안에서 사라지는것을 쏘아보다가 정시명에게로 돌아서며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리범석이 첫눈에도 반지럽기 그지없어보이는 오성도를 호되게 닦아세우는것을 통쾌하면서도 일견 가슴을 조이며 살피고있던 정시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고맙소, 리장군. 정말 고맙소. 그러나 나는 아마도 자주 찾아와야 할가 보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된셈이요.》

《나는 만나주지 않겠소. 여긴 총리공관이요. 다시 나타난다면 나는 당신의 안전을 더는 지켜주지 않겠소. 저놈이 누군지 아오?

당신 체포를 전담한 수사본부 우두머리요.

나는 방금 저 사람이 작성해온 당신에 대한 조사문건을 보던 참이요. 보시오. 이거요. 당신은 분명 애국자요. 나는 그걸 인정하오. 그러나 〈보안법〉의 칼날에 그 애국이라는것이 죄로 맞게 되여있소. 저 사람들은 당신을 잡아내고야말것이요. 그러면 당신 운명은 끝장이요. 나는 당신이 서울을 떠날것을 바라오. 때를 놓치면 평생의 후회로 남을거요.》

리범석이 툭툭 던지는 말에는 사뭇 솔직하고 절절한것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떤 고민의 흔적이 력력하였다.

정시명은 잘 다듬은 수염발을 쓸어내리며 빙그레 웃었다. 그에게서 인간다운 리성의 쪼각을 드디여 확인하게 된것이 무척 반갑고 기뻤던것이다.

《리장군, 나는 당신같은 사람들을 놔두고서는 떠나지 않을거요. 나는 이 서울에도 오랑캐들에게 등을 돌리고 국민을 위해 살고 국민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하는 그런 참정권이 서면 누가 떠밀지 않아도 고향에 가겠소. 기꺼이 돌아가 농사를 짓든지, 아이들을 가르치든지 하려고 하오. 그런 정권이 들어서면 통일은 될거요. 당신 시간을 더 빼앗지 않겠소. 안녕히 계시오. 고맙소.》

리범석은 정시명이 나가자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서 닫겨진 문을 멍하니 내다보다가 불시에 머리를 싸쥐고 쏘파에 주저앉았다.

《무서운 사람이군!》

리범석은 신음소리처럼 괴롭게 중얼거렸다. 방안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져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가슴속으로 끝없는 허탈과 공허가 쓸어들었다.

리범석은 문득 한 생각이 떠올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가로 다가가 마당을 살피였다. 바늘로 찔러도 피가 날것 같지 않은 그 매끄러운 오성도가 눈치를 채고 마당 어느 곳에 그물을 치지 않았을가 싶은 걱정이 떠올랐던것이다.

노랗게 색이 바랜 은행나무잎들이 가을바람결에 밀려다니는 인적없는 조용한 마당을 꿰질러 정시명이 머리를 쳐들고 방정한 걸음새로 걸어가고있다. 팔을 휘휘 저으며 가는것이 참으로 태평스러운 모양새다.

《염통이 저러하니…》

리범석은 부지중 다시 혼자소리를 하였다.

접수실에서 두세명의 사람들이 그를 마중한다. 그중에는 군복쟁이도 끼여있다. 문진국의 주의경보를 받은 조태준일행이 긴장하게 대기하고있다가 정시명이 가볍게 총리공관 대문턱을 넘어서자 그를 에워싸고 자동차에 오르는것이였다.

《후―》 리범석은 모든것이 다행스러운듯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때 뒤에서 인기척소리가 났다.

리범석이 돌아서니 문진국이 고개를 떨군채 서있었다.

심신이 괴로워 나른해졌던 리범석은 또다시 불시에 나타난 비서의 거동이 상서롭지 않아 시커먼 눈섭꼬리를 쳐들며 거칠게 물었다.

《뭣때문이야?》

문진국은 가까이 다가와 손에 무겁게 들고온 종이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사직서였다.

리범석이 눈으로 대강 훑어보고나서 그에게 내밀며 눈을 부라렸다.

《제입으로 소리내서 읽으라구.》

그러나 문진국은 그 자리에 굳어진듯 서있을뿐이였다.

그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리범석은 또다시 자기도 딱히 까닭모를 분노와 무기력에 빠져들어 사직서를 빡빡 찢어서 방바닥우에 홱 던져버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방안을 오락가락하다가 밸이 사납게 꿈틀거려 소리질렀다.

《그래, 네놈만이 애국을 한다는건가? 고현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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