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죄여드는 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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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역에서는 뜻밖에도 지난해초에 다이야사건으로 3국으로 탈출하였던 림인석이 정시명을 기다리고있었다.

새까만 양복에 넥타이를 꼼꼼히 조여매고 윤기가 알른거리는 밤색구두를 신고 동백기름까지 바른 머리에 가리마를 반듯이 낸 림인석은 확실히 외풍이 물씬 나는 신사가 틀림없다.

그는 얼굴에 반가움이 흠뻑했으나 내색을 보이지 않고 간단히 인사하였다.

《선생님, 어서 타십시오. 이제부터 제가 선생님을 모시게 되였습니다.》

《?…》

자동차의 뒤문을 여니 리범석의 후원으로 헌병사령부에 대령으로 돌아앉은 조태준이 운전대를 잡고 주변을 살피다가 고개를 돌리였다.

《길부회장의 지시로 제가 나왔습니다. 어제부터 대기하고있었습니다.》

《안지생동무는?》

정시명은 조태준까지 나선것을 보자 자기가 서울을 떠난 며칠사이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생긴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서둘러 물었다. 알쏭달쏭한것이 한꺼번에 덮쳐드는것 같아서 정시명은 저으기 얼떠름하였다.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동차는 이내 서울을 향해 쏜살같이 내달리기 시작하였다.

그제야 림인석이 반갑게 다시 인사를 올렸다.

《선생님, 그동안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우리 〈흥국상회〉가 정말 큰 일을 많이 하였습니다.》

《모두가 합심이 돼서 몸을 아끼지 않고 투쟁한 결과요. 인편에 림동무가 잘 싸우고있다는 소식을 듣군 하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나타났소? 가만… 얼굴생김이 좀 달라진것 같소.》

《예, 그럭저럭 그렇게 됐습니다.》

림인석이 가발을 벗으며 멋적은듯 웃었다.

《너무 편안히 지내자니 엉치가 쑤셔서 견딜수가 있더라구요. 저만 살겠다고 도망쳐간 죄인이 아닙니까. 더구나 회장동지에 대한 전국수배령소식이 실린 신문까지 보고서야 앉아있을수 있어야지요. 일도 크게 하지 못하고 도망쳐나왔는데 늦게라도 서울에 가서 회장동지의 심부름이라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지요. 이번에 박륭정동무도 함께 왔습니다.》

《박륭정이?… 아, 중경에 있을 때 동북으로 갔던 동무말이지?》

《예, 제가 3국에서 그 동무를 만나 함께 교포사업을 하였는데 이번에 제가 정선생님곁으로 간다고 했더니 기어이 함께 가겠노라 떼를 써서 함께 왔습니다.》

《고맙소. 다들 고맙소. 할 일이 많은데 때묻은 동무들이 원군을 와주어 정말 고맙소. 그동안 여러명의 동지들이 우리곁을 떠나갔소. 정말 고맙소.》

정시명은 정말 어려운 시기에 생사를 기약 못할 싸움터로 자진하여 찾아온 그들이 고맙고 미더워 림인석의 어깨를 꽉 틀어잡았다. 얼굴모색을 찬찬히 더듬어보니 달라진게 머리칼만이 아니다. 둥글던 볼이 훌쭉해지고 눈모양새도 쌍까풀이 져서 옛 모습이 없다.

림인석이 정시명의 눈길에서 그의 심중을 알아차리고 히쭉 웃었다.

《좀 정형수술도 하고 이발도 뽑아버렸습니다.》

《생이발을?!…》

《허허…》

림인석이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기는데 정시명이 《사람두 참…》하며 더 말을 잇지 못하였다. 투쟁의 간고성이 더욱 페부에 파고드는것만 같았다. 그리고 간고한 싸움의 짐을 나누어 짊어지려고 스스로 어려운 혈로에 오른 전우들의 의로운 량심과 기개가 흉중에 뜨겁게 젖어들었다.

《그래 처와 아이는 어떻게 하고 왔소?》

《함께 왔습니다. 그게 서울에 정착하는데 더 좋을듯싶어서…》

《사람두 참…》

잠시후 두 사람의 이야기는 흥심이 없는듯 앞길만 주의깊이 살피면서 입을 꾹 닫아붙이고있는 조태준을 보며 물었다.

《우리 대령은 왜 말이 없소?》

《길부회장동지가 회장님께 보고문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조태준이 여전히 도로에 눈길을 박은채 어깨너머로 쪽지를 넘겨주었다. 정시명은 그 쪽지가 자동차안에 서린 여러가지 의혹과 불안을 풀어줄듯싶어 재빨리 읽었다.

《김명호부회장과 례영이 서울역에서 체포되였습니다. 김창기동무가 뛰고있습니다. 조직들에 주의경보를 하달하였습니다. 그런데 김명호동무의 조직선에는 신호를 주지 못했습니다. 사모님은 김창기동무의 집으로 옮기였습니다. 안지생동무와 토론하고 내부사업과 안전사업을 림동무에게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안지생동무도 요즈음 미행이 붙은것 같은데 낌새가 좋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 회장동지의 결론을 받지 않은채 사업인계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박륭정동무는 택시사업소에 들이밀겠습니다. 이미 례영동무가 사귀여놓았던 명주철이라는 택시운전사가 그쪽에 있습니다.

저는 서병남선생댁으로 가렵니다. 우리 동무들중에 여러명이 그곳을 〈흥국상회〉의 기본거점으로 알고있기때문에 제가 그곳에 위치하는것이 좋을듯싶습니다.》

정시명에게 들이닥치고있는 위험을 제가 맡겠다는것이다.

정시명은 김명호와 례영이 체포되였다는 소식에 머리칼이 곤두서고 눈앞이 아찔해왔다. 장군님을 뵙고 기세충천해서 달려왔는데 받아안은 첫 소식이 너무도 치명적이고 심각하다. 김명호도 그렇고 례영이도 잡혀서는 안될 사람들이다. 어떻게 체포되였는지는 길철이 밝히지 않아 모르겠지만 례영이쪽이 더 걱정스러웠다. 김명호는 그런데는 단련된 사람이니 어떻게 시간을 끌면서 수습해갈수 있다. 그러나 례영이는 처음 당해보는 일이다. 벌써 전부터 례영이를 동열이한테 보내주자고 별러왔는데 종시 일을 치고말았다.

(한발 늦었구나. 내가 또 커다란 실책을 범했구나. 어찌된것인가, 동뚝이 터지기 시작한것인가, 내가 집안단속을 너무 허술히 한게 아닐가.)

한꺼번에 여러가지의 불안스러운 의문점들이 떠올랐다. 서울역에서 체포되였다면 나를 바래주느라고 개성에 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사고난것이 틀림없다. 그들을 그때 따라서지 못하도록 엄하게 눌러놓고 떠나야 하는건데 내가 쓸데없는 잔정에 몰려 일을 치게 했구나.

체포될 때의 형편이 못내 궁금하고 걱정스러웠다. 례영에게는 권총이 있다. 그걸 압수당했거나 체포당시 총격전이라도 있었다면 만회할수 없는 후과가 빚어질것이다. 리창순에게 혹시 걸려들수 있겠는데 그것도 실태는 절망적이다.

그놈이 례영이와 나와의 관계를 너무도 잘 알고있으니 수사본부놈들이 그걸 알고서야 날 잡을 때까지 그 앨 놔줄수 있겠는가. 아직 아성이도 구원하지 못했는데 이 무슨 변인가. 화는 쌍으로 온다고 하더니 조상들의 말 그른데 없구나. 아 아… 례영아, 네가 과연 이겨낼수 있겠느냐.…

이렇게 여러가지 자책과 의혹에 휩싸이니 만속으로 달리는 자동차도 굼뜨기 그지없다. 그는 김창기의 집에 이를 때까지 줄창 괴로움에 시달리며 종잡기 어려운 불안으로 가슴이 죄여들기만 하였다. 정시명은 림인석에게 시급히 길철과의 접선을 조직해달라고 당부하고는 김창기네 대문턱을 넘어섰다. 집에서는 김창기의 처와 민순임이 울상이 되여있다가 정시명이 나타나자 너무 기뻐 울기부터 한다.

민순임은 남편이 어느 지방에 출장을 갔다는 정도로 알고있었는데 함께 갔던 례영이 집에 들어서지 못한채 잡혀가고 부랴부랴 거처지를 옮기는 바람에 누구보고 캐묻지도 못하고 필경 남편도 잘못되지 않았는가 속을 썩이고있었다.

정시명이 웃방에 틀고앉자 민순임이 가마에 저녁쌀을 앉히고 들어와서 포단을 펴주었다.

《좀 허리를 펴시우. 례영이 붙잡혀간건 아십니까?》

《방금전에 듣고왔소. 뭐 일이 무사히 되겠지.》

정시명이 뚝뚝한 어조로 셈평좋게 대꾸하였다.

《총경어른(김창기)이 점심녘에 잠간 들어왔다갔는데 얼굴이 시꺼매진게 잘되지 않는가 봅데다.》

민순임은 너부죽한 얼굴에 근심이 산같이 실려있으면서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듯 한 배포가 실린 남편의 반석같은 모습을 보니 저으기 떨리던 가슴이 진정되였다.

《어떻게 될가요?》

그래도 민순임은 치마말기로 눈굽에 자꾸만 차드는 물기를 찍어내며 바질거리였다.

《걱정할게 없소. 우리 일이라는게 그런 일이지. 나 랭수나 한그릇 주오.》

민순임은 남편이 홀로 조용히 있고싶어하는것 같아서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는 구름노전에 더운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며 부엌으로 나갔다.

정시명은 안해가 떠다준 랭수 한사발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포단우에 길게 누웠다.

《생각해보자.…》

정시명은 여러가지 지겨운 생각을 털어버리듯 이렇게 혼자 말을 입밖에 내며 이내 일에 몰두하였다.

일의 출발점은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사색이다. 깊이있는 사색이야말로 활동의 출발계선이다. 머리에서 승리가 이룩된 사색만이 실천에서 풍만한 결실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할일은 많은데 발목을 잡힌 셈이지. 어떻게 수습해야 되겠는가?》

정시명은 천정의 한점을 쳐다보며 또다시 중얼거리였다.

오래동안 음지에서 홀로 살면서 양지를 위해 싸워온 그에게는 자신에게 묻고 대답하는것이 버릇으로 굳어져버렸다. 힘든 과제와 어려운 환경을 자신에게 제시해놓고는 그를 타개할 해법을 찾아내도록 뇌수를 흥분시키고 심장의 고동을 한곳으로 몰아뛰게 한다.

그는 지금도 《흥국상회》의 대문을 두드리고있는 비상경보속에서 장군님께 말씀드린 문제들, 스스로 걸머지고나선 막중한 과제들을 놓고 물고를 틔워나가도록 자기 몸의 모든 신경세포들을 집중시키려고 애를 썼다. 붙잡혀간 사람들의 석방문제는 이제 길철이도 만나고 김창기도 만나 자세한 정황을 알아봐야 될 일이지만 이제부터 벌려야 할 투쟁과제는 명백하다.

전쟁을 막기 위하여 뛰고 또 뛰여야 한다. 민족의 머리우에 드리운 동족상쟁의 비운을 막아내기 위함이라면 내 한몸을 백쪼각만쪼각으로 되게 한들 뭐가 두렵겠는가. 설사 내 한몸이 부서져 중도에서 쓰러진들 어떠랴. 나, 정시명은 민족과 함께, 민족의 운명과 더불어 살며 죽으리라던 필생의 맹세앞에서 떳떳할것이니 두렵지 않다.

이런 비장한 각오가 떠오르자 정시명은 자기가 지금 엄혹한 환경에서 흥분이 앞서고있다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어 그런 감정을 털어버리였다. 지나친 흥분이란 신경이 얄팍해지는데서 오는 동요의 변형된 표현이다. 침착하게… 정시명… 흔들리지 말라.…

장군님께서는 또다시 나에게 최상의 믿음과 행복을 베풀어주시였다. 일을 하자. 곬을 열어보자. 방대광을 우선 만나자. 어떻게?… 리범석은 어떻게 한다?… 조태준과 문진국에게 방향을 주고 방도를 토론해주어 그들이 주역으로 움직이게 하는것이 좋지 않을가? 김명호가 체포되였다니 그 일은 내가 주관해야 할가부다. 주타격대상은 어느쪽으로 선정해야 할가? 리승만과도 한번 만나 담판을 하는것이 좋지 않을가?… 아니, 그건 아직 시기상조다. 지금은 변죽을 치자. 그래, 전법에도 있지. 변두리를 쳐서 복장을 울리게 하자.…

정시명은 이렇게 절박한 현실에로 사색을 몰아가면서 문제를 설정하기도 하고 대상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눈앞에서 자꾸만 례영의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여 얼씬거리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자신이 이미 뼈에 사무치게 체험했던 어지러운 일들이 떠오른다. 철거덕거리는 족쇄며 곰팽이 낀 감옥의 담벽들, 악을 쓰는 형리들이며 살점을 물어뜯는 소가죽채찍이 앙칼진 소리를 내며 몸에 감겨들던 일이 그냥 눈앞에서 지꿎게 맴돌았다.

(그애가 견뎌낼가?)

밤 열두시를 알리는 싸이렌소리가 서울의 밤하늘에 처량한 여운을 남기며 사라질무렵에야 길철이가 김창기와 함께 나타났다. 두사람이 지금까지 김명호석방문제를 놓고 마주앉아있다가 온것 같았다. 김창기는 인사만 나누고는 그들에게 시간을 주느라고 이내 본채에 물러갔다.

《갔던 일은 잘되였습니까? 장군님은 만나뵈웠습니까?》

길철이 헤여진것이 며칠전이였지만 10여년만에 만난듯 반가와하였다.

《만나뵙고 왔소. 그분께서는 우리 〈흥국상회〉의 결심에 대하여 다 지지하여주시였소. 장군님께서는 전쟁문제를 놓고 무척 근심하시였소. 현 단계에서 최대의 임무는 미국놈들의 전쟁흉계를 파탄시키는 투쟁에 모든 반전세력을 묶어세우는것이라고 명백하게 밝혀주시였소.》

정시명은 장군님을 모시고 보낸 이틀밤, 이틀낮의 이야기를 상세히 들려주었다. 이야기를 하는 정시명도 흥분되였고 장군님의 말씀과 그이께서 베풀어주신 그 웅심깊은 사랑과 배려에 접한 길철이도 무척 흥분하였다.

《회장동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길철은 뜨거운 격정에 휩싸여 부르짖었다.

《최선을 다합시다.》

그들은 서로 손과 손을 틀어쥐고 엄숙하게 맹세를 다지였다.

이어 길철이가 며칠동안의 사업정형을 보고하였다. 김명호와 례영의 체포가 기본화제거리로 되였다.

《김창기동무가 형편을 알아보기 위해 부회장쪽에 직접 갔다왔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그를 구출할수 없다고 합니다. 김명호부회장은 자기 힘으로 나오겠으니 절대로 자기는 걱정말고 례영동무에게만 힘을 넣으라고 전해왔습니다. 련락선을 이어놓겠습니다.

사실 례영동무가 헤여나올 길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례영동문 묵비권을 선언하고 견결하게 맞서고있다고 하는데 그놈들의 행패질에 여러번 의식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탈옥시키는 방법을 써보자고 합니다. 김창기동무가 뾰족한 수가 없으면 그 방법으로 나가겠다고 합니다. 하여튼 서둘러야 할것 같습니다.》

《탈옥이라?… 특별수사본부가 나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할수 있는 인물을 쉽게 내놓을수 있을가?… 탈옥문제는 좀 생각해봅시다. 아성이한테서는 소식이 없습니까?》

《즉결심판을 받고 청주감옥에 끌려갔습니다. 우선 시간을 얻기 위하여 법무부에 항소서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그쪽에서 권재수판사가 맡아가지고 무슨 수가 날 때까지 시간을 끌도록 하자는겁니다.》

《잘했소. 그런데 형량은 뭐요?》

정시명은 뻔한 일이였지만 그래도 속이 트이는 대답이 있지 않을가싶어 물었다.

《저… 사형입니다.》

길철이 고개를 푹 떨구며 나직이 대답하였다.

《사형이라구?!》

예견한바였지만 막상 듣고나니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칼이 쭈빗이 일어섰다.

《김창기동무가 그곳에 줄을 뻗쳤습니다. 거기 부감옥장이 김창기의 영향을 받는 동무인데 아성동무와 련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음… 그거 잘했소. 그래서?》

《아성동무에게서 소식이 왔습니다. 그 동문 정면돌파하겠다고 제기하여왔습니다.》

《정면돌파? 어떻게?》

《탈옥투쟁을 벌리겠다는겁니다.》

《또 탈옥이요?》

정시명은 탈옥이라는 소리가 길철이한테서 비현실적인 공론처럼 너무 쉽게 나오는듯싶어 이마살을 찌프렸다.

《잘하면 아성이쪽에서는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도 우선은 지지해주었습니다. 사실상 아성동무에게는 그길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래, 아성이는 그게 유일한 방책일수 있지. 좋소. 그것도 더 연구합시다. 아성동무에게 항소서를 제출하게 하여 시간을 끌게 조직한것은 잘된 일이요. 다시 전하시오. 어떻게 하든지 형집행을 끌고 시간을 전취하라고. 청주감옥도 대전감옥과 서울형무소와 함께 일본놈때부터 독립운동자들과 사상범들의 원성이 높은 감옥이였소.》

《예, 저도 한때 그곳에서 지낸 일이 있습니다.》

《한번 잘 조직해보시오. 세월을 이어가며 애국자들의 목을 치는 그 악마의 소굴들을 통채로 날려버렸으면 씨원하겠소.

례영에게도 전달하도록 하시오. 절대로 마지막생각을 하지 말고 시간을 끌라고… 그러자면 그쪽에도 련락선을 이어야겠는데… 그것도 시급히…》

례영의 성미를 잘 아는 정시명은 그게 제일 걱정스러웠다. 례영은 더는 피해설수 없는 처지라는것을 인식하고있을것이다. 그러니 여차직하면 요절해버릴 결심을 할수 있다. 여러 전우들의 고결한 최후를 두고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인들 안하랴. 례영은 백번도 그렇게 할것이다. 정시명은 그게 두려웠고 불안하고 그래서 더구나 초조하였다.

《그리고 방대광과 리범석이, 리승만의 최근동향을 집중적으로 장악해야겠소. 모든걸 다그쳐야 하오. 정말 우리에겐 시간이 없소. 조직들에 다시금 주의경보를 내리고 밤시간에는 될수록 잠자리를 옮기도록 해야겠소. 조직선별로 혼선이 없는가를 재확인하고 이미 로출기미가 있거나 혼선이 되여있는 동무들은 깊이 잠복시켜야겠소. 안지생동무에게 잠복기를 준것은 매우 잘한 일이요.》

둘은 잠자리에 나란히 누운 다음에도 오랜 시간 부닥친 엄혹한 장애를 뚫고 겨레앞에서 걸머진 사명을 다해갈 각오를 굳히고 대책을 협의하였다.

자정도 지나 길철이는 잠소리를 내기 시작하였으나 정시명은 그냥 정신이 초롱초롱해만 졌다. 38°선을 헤치고 적들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오느라고 몸은 녹초가 되였지만 부닥친 일들이 계속 뇌리에 감겨들었다.

이 생각 저 생각에 시달리던 정시명은 아성이가 내놓았던 정면돌파라는 소리가 새삼스러워졌다. 아성의 돌진적인 성미에 꼭 알맞는 선택이다. 아성이 처한 막다른 골목에서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반공격일수 있다.

《정면돌파라…》

정시명은 입속으로 나직이 외우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길철이가 깨여날가봐 불도 켜지 않고 옷을 대충 걸친 다음 마당으로 나왔다.

가을의 밤기운은 싸늘하였다. 정시명은 마당을 조용히 거닐다가 사과나무밑에 가서 긴나무걸상에 걸터앉아 서쪽으로 곤두박히듯 기울어진 하현달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아지새로 푸릿하게 서려드는 어설픈 달빛이 그의 얼굴에서 부서져 미끄러지며 한결 창백하게 비쳐주었다.

《정면돌파라…》

그의 가슴에서 서서히 새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래, 생각이나 하고있을 때가 아니다. 정면으로 돌파해야 되는 일이다.》

그의 눈이 달빛을 받아 령롱하게 빛을 뿌리였다. 온몸이 약진의 서슬로 불붙기 시작한듯 자기스스로도 기운이 뻗쳐오르는것 같았다. 언제나 그러하듯 머리속에서 생각이 정리되고 돋쳐오른 결심이 확고해지고 행동계획이 뚜렷해지면 정시명은 모든 불안은 사라지고 결투장에 나선 검투사처럼 오직 목표를 향해 곧추 달려나간다.

《좋다, 정면돌파다!》

정시명은 나무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반달을 쳐다보면서 나직이 부르짖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다시금 비장하게 자기 마음을 가다듬었다.

(몸을 내대야 한다. 장군님께서 나를 아껴주시는것은 통일위업에 몸바치기로 한 나의 충의를 귀하게 받아주시기때문이다. 서울하늘에 벼락이 치고 떼구름장이 산지사방에서 덮쳐들고 강토가 신음하고있는데 제몸 사리고있으면 그 벼락에 그예 타버리고말것이다. 맞받아 몸을 내대야 한다. 정면돌파를 강행해야 한다. 정면돌파!…)

그는 자기의 어깨우에 솜저고리가 소리없이 씌워지는줄도 모르고 비상한 열정과 투쟁의욕에 사로잡혀있었다.

안해의 기척을 느낀것은 얼마후였다. 그는 자기의 어깨우에 씌워진 솜저고리를 띄여보고 돌아보았다. 민순임이 달빛을 받아 더욱 수심이 짙어보이는 얼굴로 내려다보고있었다.

《언제 나왔소?》

《아까… 당신이 나오시기에 따라나왔지요.》

《원, 난 통 모르고있었군. 여기 와서 앉소.》

민순임이 나무토막을 잘라 눕혀놓은 긴걸상에 와서 나란히 앉았다. 정시명은 그의 등에 솜저고리를 씌워주었다. 안해의 어진 얼굴에 실린 걱정과 불안을 감촉하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날 따라다니느라 당신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구려.》

그러자 민순임이 낯을 붉히며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서 망설이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였다.

《이번에 김정숙녀사께서 또다시 당신 걱정을 하시였소.》

《예?!… 그럼 당신은 평양에 가셨댔어요?》

민순임의 얼굴에서 수심이 걷히고 성냥불이라도 켜단듯 기쁨이 활짝 피여올랐다. 둥글넙적한 얼굴이 보름달처럼 훤해져서 온통 기쁨으로 설레인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무고하십디까?》

무고하시오. 여전히 정력이 왕성하시고 젊음에 넘쳐계시였소. 그런데 녀사님이 건강이 좋지 않더구만. 그래도 내색을 않고 나를 위하여 만경대앞에 있는 강변에서 어죽을 끓여주시며 성의를 다해주시였소. 장군님께서 자라신 고향의 수정같이 맑은 물에서 장군님께서 손수 낚으신 숭어, 붕어로 녀사께서 손수 어죽을 끓여주시고… 참, 당신이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더라면… 난 그분들앞에서 난생 처음 만시름을 잊고 웃고 떠들고 노래까지 불렀소.》

불과 며칠전의 일이였지만 어쩐지 꿈속처럼 멀게도 생각되고 정말이였던가 싶기도 하였다. 그 숭고한 추억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소란스럽게 뒤채이던 마음이 저도 모르게 고결해지고 맑고맑던 순화강물처럼 깨끗해졌다. 그는 벅찬 환희와 희열에 넘쳐 잊지 못할 순화강기슭에 얽혀진 사랑의 찬가를 단숨에 엮어놓았다.

《어마나, 그분들앞에서 노래까지 정말 부르셨는가요?》

민순임은 장군님앞에서 남편이 노래까지 불렀다는 얘기에 황홀해졌다.

《그것도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아오? 내 어린 시절 부르던 동요였지. 지렁이색시와 설설이총각이 시집장가 들던 노래… 참, 당신도 고향에서 불리워지던 아이적노래를 알고있겠지?》

《예?… 지렁이색시… 예… 호… 그런데 하필이면 그런 노래를… 그분들앞에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아이들 노래를 부르시다니…》

민순임도 한고향내기여서 어릴 때 멋모르고 부르던 그 노래 생각이 인차 났다. 제사 얼굴이 붉어지며 민망스러워하였다.

《허허, 어쩌겠소. 그분들앞에서 아이적마음이 되였거던.》

정시명은 자기의 노래를 기꺼이 들어주시며 호탕하게 웃으시던 장군님과 녀사의 정다운 모습들이 삼삼히 떠올라 저도 모르게 눈굽이 축축히 젖어들었다.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그분네들은 걱정감을 한짐지고 얼굴이 까매서 달려온 나를 조금이라도 즐겁게 해주고싶으시여 그런 좌석을 일부러 마련해주시였던거요.》

《참, 어쩌면 참!…》

민순임은 남편의 열띤 이야기에 부풀어오르는 행복감을 달리 표현할수 없어 이렇게 짧은 탄성을 올릴뿐이였다.

《이번 길에 말이요. 맏이도 만났소. 장가를 들었더구만. 애를 낳았다오. 다들 잘 있다오. 장군님께서 그애를 평양에 불러다가 공부를 시켜주신다오. 장군님께서 그애도 순화강에서 함께 만나 즐기도록 보살펴주시였다오.》

《그래요! 아, 참. 참… 난 어느새 할머니가 됐군요. 며늘애가 어떨가? 다들 보구싶구나.…》

둘은 한동안 달을 쳐다보며 그리움의 세계에 취해들었다. 가없는 바다같은 검푸른 하늘에서 미끄러져내리는 하현달은 이따금 연회색 구름장에 가리워 잠시 숨을 돌리고는 다시 희푸릿한 빛을 정가롭게 비쳐준다. 그 유난한 달빛이 키높은 느티나무가지새에 얼기설기 얽혀 마치도 분수처럼 휘뿌려 흩날리다가 두 사람의 사색을 저어할세라 조심스럽게 마당에 잦아든다. 달빛아래 노그라든 고달픈 인생의 잠자리마다 흐느낌처럼 찾아들던 남대문의 인경소리도 하염없는 메아리를 거둔지 이슥하고 서울거리에 때없이 질주하던 전차의 야지러진 동음도 뜨음해졌다. 삼라만상은 아슴푸레한 달빛에 싸인 신비스러운 고요로 행복한 량주의 따스한 추억의 세계를 지켜주는듯 싶다.

잠시후 민순임이 남편의 머리에 때일찍 덮이는 흰머리칼을 쓸어만지다가 혼자소리로 중얼거리였다.

《서울에 와서 당신은 정말 백발이 돼가요. 당신은 너무 지쳤어요. 제게 좀 기대고 쉬세요.》

정시명은 안해의 살뜰한 애무에 머리를 맡긴채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러자 흡사 포근한 햇솜포단에 네활개를 펴고 누울 때처럼 몸도 마음도 포근해졌다.

녀인들의 사랑은 쇠도 녹이고 불도 다스린다고 한다. 그 말이 그른데가 없는것 같다. 서울바닥에 들어서기 바쁘게 마치도 한바탕 격전을 치른것처럼 기운을 뽑고 마음이 천갈래만갈래로 찢겨졌는데 안해의 다심한 손길이 그 모든것을 깨끗이 정화시켜주는듯싶다.

녀인들의 사랑은 절대로 짐이 되지 않는다고, 힘이 되고 의지가 꼭 되여줄거라고 정답게 일깨워주시던 김정숙녀사의 말씀이 뜨겁게 떠올랐다. 참말로 민순임은 지난 세해동안 《흥국상회》에서 꼭 필요한 인물로 자기의 자리를 크게 차지하여온것 같다. 여러가지 치닥거리를 도맡아안고 군말없이 수걱수걱 해준다. 여러 전우들이 즐겨 찾아오고 조밥 한그릇에 된장 한숟가락 놓고도 달게 받아주고 허물없이 잠자리를 청하는것이 우연이 아니다. 민순임이 회장댁재세를 하면서 몸을 사리고 시중들기에 시름겨워하고 내키지 않는 일에 눈살이 꼿꼿해지면 《흥국상회》집안꼴이 지금처럼 기름기가 돌지 못할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서울에 와서 이 녀인을 위해 해준것이 무엇인가. 한시도 맘놓을수 없는 남편의 신상에 대한 걱정, 때없이 닥쳐드는 위험, 자신과 동지들에 대한 온갖 뒤시중… 그러면서도 남편과 호젓이 만나는 기회가 생기면 그 시간이 아까와 말없이 이렇게 눈을 감겨주고 편하게 해주느라고 애를 쓴다.

바치는것만 있고 받는것이 없는것이 녀자의 사랑이라고 누군가 이름지은적이 있었지. 길철이 말했더라, 안지생이 말했더라… 정말로 민순임의 사랑이야말로 바침만이 있고 보상은 따르지 못하는 헌신이고 사심이 없는 그런것이였지.

문득 자기의 이마우에 선뜩한 느낌이 갔다. 민순임이 얼른 손가락으로 이마를 닦아준다.

눈물이구나… 아… 정시명은 안해의 품에서 머리를 들기 싫어서 눈을 감은채 물었다.

《당신 우는구려.》

《울지 않아요. 전 울지 않아요.…》

민순임이 고집스럽게 되풀이하였다.

《정말 미안하오. 난 당신앞에 언제나 죄만 짓고 사는 구실하지 못한 남편이였소. 평생 고생만 시켰지. 평생 락은 없이 시름만 안고 살아오게 했구려.》

《이보세요. 오늘은 어찌된 일입니까?… 당신도 우시는구려.》

민순임은 꾹 감고있는 남편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눈귀에 맺히는 눈물을 보자 겁이 덜컥 나서 나직이 부르짖었다. 그는 얼른 옷고름으로 눈물을 자근자근 지워주며 달래이기도 하듯 축축히 젖어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봐요. 제가 세상에 드물게 뜻높이 세우고 한생을 바쁘게 살아오시는 당신한테 시집와서 겪은 일로 말하면 저 하늘을 종이로 삼아 적는대도 모자랄겁니다. 하지만 전 그걸 고생이라 생각지 않아요. 당신은 녀자들의 마음을 너무도 모르십니다. 뜻에 살다 뜻에 숨을 거두는 장한 주인들을 위해 흘리는 녀인들의 눈물은 기쁨이고 락이라고 말들 합데다. 참말로 녀인들의 서러운 눈물은 남정들이 못난이구실을 하여 흘리는 눈물이랍디다. 난 당신이 장군님께서 손수 잡으시고 녀사님이 끓이신 어죽을 대접받고 그분들앞에아이적 노래까지 불렀다는 그 하나만 가지고도 평생고생을 다 지워버리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되요. 전 참말이지 당신 만나서 눈물을 많이 흘리기도 했지만 제 신세가 가엾어서 울어본적은 없었어요.》

민순임은 말을 끊었다. 가슴에 세찬것이 꽉 차들었다.

세상에 자랑할만 한 남편, 이것이라면 만시름도 달게 여기고 오만가지 고행도 달게 넘길수 있다.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녀인의 기쁨이, 행복이 온몸에 물결치듯 뒤끓어번졌다.

하루를 함께 정을 나누었더라도 세상에 자랑할만 한 이를 섬겼다는것은 뭇녀자들에게는 쉽게 차례지지 않는 복이라 한다. 세상에 이 사람처럼 어질고 착하게, 바르게 오로지 나라생각, 동포생각만 하면서 살아오는 이가 몇몇이나 되랴. 이 사람처럼 사람들의 사랑과 행복을 귀하게 여겨주고 슬픔을 아프게 받아주며 악을 미워하고 선을 지켜 제 몸 돌봄이 없이 살아오는 이가 몇몇이 되랴. 야밤삼경 다 기울어지는 이 시간에 나라걱정, 동지걱정으로 잠들수 없어 저 서산에 미끄러지는 달을 쳐다보고있는 이가 도대체 이 서울하늘아래 몇몇이 되랴…

《전 정말 당신이 좋아요.》

민순임은 애틋한 정을 담아 이렇게 말하고는 숫저운 생각에 귀밑을 붉혔다.

정시명은 안해의 애절한 속삭임에 마음이 연연해져서 자기의 머리를 어루쓰다듬고있는 안해의 큰 손을 슬그머니 잡아쥐고 자기의 가슴우에 올려놓았다.

《고향에 가보고싶구만. 백범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마음이 심란해서 내 고향산천이 정말로 그립다하더니. 가만…》

심회에 젖어들던 정시명이 불쑥 허리를 세우고 일어나앉았다.

《여보, 당신이 한발 앞서 고향에 가야겠소.》

《고향에요?! 맏이도 장가들고 모두들 편히 지낸다는데… 장군님께서 보살펴주신다지 않았어요. 원, 제가 당장 집에 가서 볼일이 뭐입니까.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요. 생각해오던 문제요.… 돌아오지 마오. 그렇소. 돌아오지 마오. 당신이 여길 떠나면 난 하나의 걱정거리를 덜수 있을것 같소. 38°선은 넘겨주도록 하겠으니 래일이라도 당장 떠나오.》

《원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럼 저더러 홀로 고향으로 떠나라는겁니까? 당신을 서울에 혼자 남겨두고요?》

민순임이 자못 놀라와 남편을 쳐다보는데 정시명은 정색해서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나야 할 일이 있으니 가고파도 못가는게 아니요. 솔직히 말해서 난 당신이 걱정스럽소. 당신도 여러번 목격하지 않았소. 우리 싸움이 조련치 않다는걸 말이요. 사실말이지 위험은 무시로 눈섭밑에 매달려있소. 그렇게 해주오.》

《그게 참말입니까?》

그 어질디어진 녀인의 큰 눈에 노여움이 돋치고 목소리가 전에없이 매워졌다.

안해의 예상밖의 싸늘한 반발에 정시명은 일순 당황하였으나 인차 가라앉은 목소리로 주장을 굽히지 않고 각근히 타일렀다.

《여보, 성내지 마오. 지금 내속이 어떻다는걸 당신도 알지 않소. 옛날에 화불단행이라는 말이 있소. 화는 홀로 오지 않는다는 뜻이요. 난 당신까지 나쁜 놈들에게 모욕당하는건 보지 못하겠소. 정말 당신까지 혜숙이, 순애나 저 례영이를 따라간다면 난 자기를 더 지탱 못하오. 그리고 까놓고 말하면 내 신상에 있을수 있는 재난을 당신앞에서 보이게 될가봐 걱정이요. 내가 지금껏 어떤 각오를 하고 싸움을 벌려오는지 당신도 잘 알지 않소. 떠나주오. 내가 더 큰 힘과 배심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버티여낼수 있게 자리를 비워주오. 나를 도와주지. 응?》

《이봐요. 당신 소원이 정 그러시다면 그대로 하리다. 당신이 정말 저라는 하잘것 없는 계집때문에 발목이 묶이여 해야 할 일도 삼가하고 당해야 할 일도 피해야 한다면 전 떠나겠어요.

혜숙이생각이 납니다. 혜숙의 편지를 저도 읽었어요. 저같은거야 어찌 혜숙이 같은 훌륭한 녀인에 비길수 있겠어요. 그렇지만 한가지만은 알고 떠나야겠어요. 당신은 이 몇해 제가 곁에 있어준것이 그리도 부담스러웠는가요? 어디 말씀해보시우. 제가 그리도 못난 녀자가 돼서 남정네들의 발목을 잡아왔나요?》

《아, 아니… 그건 무슨 말이요? 당치않은 소리…》

정시명은 안해의 순하기만 한 마음의 어느 구석에 이렇게도 매몰찬것이 있었더냐 싶어 크게 놀라고 당황해서 그 엄청난 오해를 풀어주느라 성까지 냈다.

《평생 땅이나 뚜지다가 광복이 돼서야 까막눈을 틔운 평산촌계집이 어찌 나라의 큰일을 맡아보시는분의 짝에 어울리게 살아갈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남정네들을 하늘처럼 여기고 사는 녀인들의 마음을 너무도 몰라주십니다.》

안해의 너무도 여무지고 사리가 분명한 설분에 정시명은 불시에 목이 꽉 메여올라 《여보―》하며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갈린 음성으로 나직이 속삭이였다.

《내 잘못했소… 잘못했소… 원 참 당신두…》

민순임이 정시명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흔드는데 정시명은 서쪽 련봉재마루에 주저앉은 달을 쳐다보며 뒤산에서 슬피 우는 접동새의 처량한 울음소리에 귀를 강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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