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순화강기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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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동지께서는 식사를 마치자 정시명을 앞세우시고 마당앞에 있는 자그마한 련못가로 향하시였다.

련꽃들이 아직도 푸르싱싱한 잎사귀를 물우에 펼쳐놓았는데 그 사이사이로 금붕어들이 꼬리를 치며 유유히 떠다니고있었다.

련못가에 있는 긴 나무걸상에 자리잡자 정시명이 먼저 말씀을 드리였다.

《장군님, 이렇게 문득 기별도 없이 찾아와 장군님의 집무에 페를 끼치니 정말 죄송합니다.》

《원 그런 말씀을 마십시오. 내 어제 전화로 정숙동무에게도 말했지만 지금 바쁜 일이 만가지로서니 통일위업보다 긴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시며 김일성동지께서는 인차 통일운동에로 화제를 돌리시였다.

그이께서는 그동안 《흥국상회》가 련전련승의 쾌재를 올려온데 대하여 높은 평가와 치하를 주시고나서 현정세의 발전추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으시였다.

정시명이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그이께서는 손으로 제지하시였다.

《어서 담배를 태우십시오. 줄담배기호는 여전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서 태우십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소탈하게 말씀하시며 미소를 지으시였다.

정시명은 장군님의 정겨운 말씀에 무랍없이 곰방대를 꺼내면서 《장군님께서 세해전에 친히 주신것입니다.》하며 담배를 다져넣었다. 그리고는 잠시 동안을 두고 장군님의 물으심에 대답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미 생각하고 정리하여왔던 문제였지만 막상 장군님앞에서 꺼내놓자니 미흡한 구석이 많은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저는 오늘의 정세가 전쟁을 향해 움직이고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여러 조직에서 보고하여온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이것이 움직일수 없는 정세변화의 기본주류를 이루고있는것 같습니다.》

정시명은 자기 판단을 반증할수 있는 자료들을 말씀드리였다. 장개석과 리승만사이에 진행된 진해회담, 맥아더와 리승만사이에 오고간 문건들, 그 후속조치로 벌어지고있는 남조선정계와 군부의 부산스러운 움직임…

《제반 사실은 장군님께서 세해전에 벌써 미국놈들이 우리와의 대결상황을 전쟁에로 몰아갈수 있을것이라고 하신 예언이 천백번 지당하였다는것을 여실히 증명해주고있습니다. 전쟁은 피할수 없는 위험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있습니다.》

정시명은 여러 시간에 걸치는 정세이야기를 이렇게 결속지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정시명의 이야기를 주의깊이 들으시고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그의 상세한 정세개괄과 명석한 분석평가를 긍정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정시명이 입을 다물자 근엄하신 모습으로 멀리 남쪽하늘을 바라보시다가 련못가를 따라 걸음을 옮기시였다. 정시명도 곰방대를 털어쥐고 그이의 뒤를 따라섰다. 민족의 대재난에 대한 념려가 그이의 안광에 비끼여든것을 우러르며 정시명은 가슴에 차오르는 자책감을 누를길 없었다.

이윽고 김일성동지께서는 걸음을 멈추시더니 정시명에게로 고개를 돌리시며 엄숙하게 단언하시였다.

《옳습니다. 전쟁입니다.》

하시고는 다시 걸음을 옮기시며 말씀을 이으시였다.

《그러면 우리의 립장은 어떠한가?

그것은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 땅을 초대국들의 세력다툼을 위한 희생물로 되게 해서는 안되며 우리 민족의 보금자리에 불연기가 날리게 해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동족상잔은 내가 자꾸 강조하지만 민족의 수치입니다. 동족상잔이란 곧 집안싸움입니다. 명분이 어떠하든 집안싸움이란 남앞에서 부끄럽고 후손들앞에서도 욕된것입니다.

그러면 전쟁의 구름이 몰려오고있는 현 단계에서 우리는 어떤 기발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두말할것없이 전쟁을 반대하는 세력을 전쟁을 반대하는 투쟁에로 궐기시키는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신앙과 정견, 당파와 소속에 관계없이 북남정치인들이 모여앉은 훌륭한 전례가 있습니다. 반전투쟁은 보다 광범하고 거족적인 련합전선을 무어낼수 있습니다.

올해 남조선군부에서 5천명이나 되는 장교들이 숙청되였다고 하는데 이건 반전투쟁에서 군부도 례외가 되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실증합니다. 반전련합전선의 대문을 더 활짝 열어놓읍시다.

헌데 이젠 탁상공론이나 하고있을 때가 아닙니다. 제나름으로의 힘과 지혜를 내여 전쟁의 먹구름을 몰아내기 위한 실력전을 과감하게 벌려야 합니다.》

김일성동지의 안광에는 유난한 광채가 빛발치고 온몸에서는 백절불굴의 기상과 자신심이 넘쳤다.

《장군님!》

정시명은 자기도 어쩔새없이 격동된 심정으로 부르짖었다. 3천만의 운명을 두어깨에 걸머지신 그이의 영상을 우러러 높뛰는 심장의 고동을 더는 주체할수 없었던것이다. 그이의 그 위대한 사상과 불굴의 신념앞에서 자신이 적지 않은 나날 암중모색하던 모든것이 일시에 풀려지는듯싶었다. 그래 솔직하게 마음속의 고충을 아뢰였다.

《제가 장군님의 그 높은 리상과 도량을 헤아려 받들기에는 여러모로 부족되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서 말씀하시오. 정시명동지, 우리 사이에서야 주저할 말거리가 무엇이겠습니까.》

김일성동지께서는 정시명이 과연 풀기 난해한 문제를 가져온것이라고 짐작이 가시여 그를 고무해주시듯 다정하게 웃으시였다.

《사실은 제가 이번에 미국놈들의 전쟁도발에 맞세워볼 인물로 남조선의 총리노릇하는 리범석과 륙군사단장 방대광을 택하였습니다.》

《방대광?… 방대광이라… 아, 생각납니다. 만주에서 경찰서장노릇하면서 못되게 굴다가 우리한테 되게 얻어맞고 남방으로 달아났던자이지요. 내 언젠가 일본신문에서 보았는데 남방에 가서 련대를 맡아가지고 서양것들을 되게 답새겨서 〈천황〉놈의 감사까지 받았노라고 한바탕 춰주었더군요. 뭐 〈쟝글노부시〉라는 별명까지 달아주었다고 했더라…》

김일성동지께서는 감회깊은 추억에 잠기시며 잠시 동안을 두시였다.

《예, 옳습니다. 그 〈쟝글노부시〉입니다. 그런데 그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방대광은 그러루한 친일행적이 있는데다가 얼마전까지만 하여도 38°연선에서 인민군대와 겨루어보겠다고 못나게 굴던 놈인지라 여간 베차게 여겨지는게 아닙니다.》

일성동지께서는 정시명이 안고온 이야기가 담고있는 엄청난 의미를 음미하시듯 아까 자리를 잡으시였던 긴걸상에 가시여 자신께서 먼저 앉으시며 옆자리를 권하시였다.

《리범석과 방대광이라… 곁에 있는 동지들이 선뜻 동의하지 않았다는거지요? 음, 이것은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참으로 중대한 일입니다. 리범석과 방대광이라… 반공과 반북에서는 리승만의 쌍두말이 되여오던자들이지요.》

정시명은 자기가 지금껏 속에 꿍져가지고 시달려온 문제가 참으로 중대한것이였다는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실감하였다.

그러나 이왕 꺼내놓은 문제이므로 자신의 소신을 그대로 말씀드리기 시작하였다.

《예, 옳습니다. 제 생각에는 한번 해보고싶습니다. 아직도 모험이라고 할수 있지만 비상한 결단이 없으면 나라의 재변을 막아낼수 없다는 생각이 저로 하여금 그런 일견무모한 궁리도 하게 하였습니다. 리범석을 끌어당기면 리승만의 〈북벌〉론에 화평통일론을 대치시킬수 있는 발판이 생깁니다. 리범석은 제가 서안, 중경시절부터 잘 아는 사이입니다.》

《예, 나도 리범석의 얘기를 들은바 있습니다. 뭐 정시명동지에 대한 암살행위도 여러번 했다던데…》

《예, 더러 좀 있었습니다.》

정시명은 심상하게 대답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겨레를 위한 대의를 도모하고저 평생의 한도 뒤로 미루고 결연히 손을 잡으려는 정시명의 도량과 배포가 마음에 퍽 드시여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리범석도 광복전에는 상해림정의 〈광복군〉사령관으로 있으면서 미국놈들의 전략정보국에도 드나들었고 서울에 와서도 〈민족청년단〉이라는 반공청년조직에 미국고문까지 곁에 끼고 못난짓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를 돌려세우면 리승만을 견제할수 있는 큰 세력을 무어낼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립법권에서 화평통일안을 가지고 〈국회〉의 과반수를 묶어세웠습니다. 리범석이까지 여기에 끌어들이면 행정권도 돌려세울수 있습니다. 그러면 미국놈들과 리승만이 감히 내키는대로 제 볼장을 보지 못할겁니다. 그리고 방대광을 장악하면 그와 가까운 두개 사단도 장악할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륙군사단중에서 거의 절반을 반전세력으로 묶어세울수 있습니다.》

《리범석과 방대광이까지 돌려세운다!… 세개사단, 대단합니다. 대단해!》

김일성동지께서는 유난히 이글거리는 정시명의 눈을 미덥게 바라보며 다시한번 치하하시였다.

《현실적가능성은 있습니까?》

《리범석은 그 밑에 우리 사람들이 있습니다. 로숙하고 견결한 동지들인데 이미 그를 움직여본 실적이 있습니다. 리범석은 그들의 설복과 방조밑에 지금까지 리승만의 독선독주와 독재적전횡에 줄곧 맞서왔고 최근에는 공화국에 대한 몇차례의 도발에서 패배하자 심적동요가 커가고있습니다.

방대광도 지금 동요하고있습니다. 그놈은 우리와 지금껏 싸워오면서 차례질것은 수치와 파멸뿐이라는 교훈을 가지고있는자입니다. 얼마전에 있은 사단장들의 모임에서 리승만을 앉혀놓고 〈북벌〉론을 정면으로 반대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원래 직위불만이 크고 뚝심이 강한 인물인데 미국이나 리승만에 대해서 상당히 도전적입니다.》

《방대광이라…》

김일성동지께서는 혼자말처럼 조용히 외우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그이께서는 련못에서 한가롭게 떠다니는 금붕어들을 잠시 바라보시며 깊은 사색에 잠기시였다.

《장군님, 용서하십시오. 사실 우리 동무들도 방대광은 김구와는 질이 다른 인간이므로 한사코 반대립장을 표시하였습니다. 제가 주관에 빠져 공연한 문제를 들고와서 심려를 끼쳐드립니다.》

정시명이 이렇게 자책어린 어조로 말씀드리자 김일성동지께서는 손을 내저으시며 말씀하시였다.

《아니, 아니… 그런게 아닙니다.

정시명동지, 뭐 주저할것이 있습니까. 동요하지 마시오. 옳다고 결심이 되면 소리가 쩡쩡나게 밀어가십시오. 나는 만주의 험한 산중에 수많은 전우들을 묻고왔습니다. 잠자리에 들면 그들의 모습이 삼삼해서 쉬이 잠들지 못합니다. 백두산의 눈보라소리를 들으며 그들과 마음속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들의 뜻을 옳게 이끌어가는가…》

《장군님!》

정시명은 잠시나마 장군님의 바다같은 웅심을 헤아리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얼굴을 붉히였다.

《정시명동지, 아주 좋습니다. 나는 정시명동지의 결심을 애국적인 대용단으로 높이 평가하며 적극 지지합니다. 참으로 정시명동지다운 혁신적이며 배짱있는 발기입니다. 그런 문제라면 그 어려운 혈로를 괜히 헤치고왔습니다. 사실 남조선에서 통일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규정하는것은 남조선인민들과 남조선애국자들의 권리입니다. 그건 남조선에서 통일운동의 담당자는 어디까지나 남조선인민들과 남조선의 통일운동가들이기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명백히 밝혀두고싶은것은 조국통일에 나서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언제나 문을 활짝 열어놓으리라는것입니다. 방대광에게도 이야기하시오. 내가 손을 내민다고. 리범석이도 우리의 통일성업에 참군시킨다면 나쁠것이 없습니다. 나는 환영합니다. 그들이 참말로 통일을 위하여 인생전환을 해준다면 통일된 조국은 그들에게도 과거를 불문에 붙이고 애국자라는 고귀한 칭호를 안겨줄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한다면 인민들은 그들이 통일위업에 바친 공로에 따라 명예와 관직도 다 마련해줄것입니다.

정시명동지, 주저말고 그 멋진 구상을 펼쳐나가십시오.》

김일성동지께서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정시명이 가슴을 조이며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흔쾌하게 지지를 주시였다.

정시명은 순식간에 눈앞이 확 트이였다. 이제껏 흉중깊이에 꺾쇠처럼 박혀있던 고민거리가 다 사라졌다.

《장군님, 이제는 자신있게 해내겠습니다. 장군님께서 하해같은 도량을 베푸시여 우리의 조국통일운동에 또 하나의 승리를 마련해주시였습니다.》

정시명은 진심에 겨운 목메인 어조로 아뢰였다.

《우리의 합의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티끌만 한 싹이 있더라도 재생의 기미가 보이면 우리는 주저없이 손을 내밀어 인간을 구원해야 합니다. 위기에 처한 나라도 구원하고 인간본연의 아름다움을 잃고 사는 인간들도 구원합시다.

혁명도 애국도 본질에 있어서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겨레에 대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통일운동도 우리 민족모두의 운명을 책임지려는 그 사랑의 감정에 뿌리를 내려야 참말로 애국적이며 고귀한것으로 될수 있습니다. 방대광에게도 력사앞에서 속죄할수 있는 기회를 줍시다.》

《장군님, 감사합니다. 겨레에 대한 장군님의 그 사랑은 참으로 강토를 울리고 하늘을 울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시명은 장군님의 애국애족의 사상과 바다같이 넓고 깊은 도량에 자기의 마음속도 티없이 깨끗해지고 숭엄해져서 감격에 넘쳐 인사를 올렸다.

《아니 감사는 내가 드리고싶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에 몰려들고있는 대재변을 막아내자면 기존의 사고방식과 활동방법을 가지고서는 안됩니다. 참말로 하늘의 벼락을 휘잡아낼 담력과 방략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정시명동지의 방략과 담력이 마음에 푹 듭니다. 고맙습니다.》

《장군님, 이런 문제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잘 도와온 총사령관이던 송호정과 군정청통위부장 하던 류동명이 기맥이 통하는 측근 장병들을 모아가지고 리승만에 대한 테로를 해보겠다고 저더러 결론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테로라… 음… 리승만을 쳐갈긴다?…》

김일성동지의 눈가에 심중한 빛이 어리였다. 그이께서는 한동안 생각에 잠기셨다가 말씀을 이으시였다.

《테로란 일종의 자객행위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가 인류사회에 조직된 력량으로 자기 얼굴을 내놓은 때로부터 제국주의와 착취계급에 대한 항전을 공개하였습니다. 그러나 테로에 대하여서는 혁명투쟁방식과 량립될수 없는것이라고 명백하게 선언하여왔습니다. 무엇때문이겠습니까? 테로란, 력사앞에서 당당하지 못하기때문입니다. 우린 민족앞에 내놓는 구호도 그 실천방식도 당당해야 합니다.

나는 리승만에게도 나라앞에서 역적의 치욕을 벗을수 있는 기회를 계속 마련해주고있습니다. 지금 세간에서는 리승만을 매국노라 지탄합니다. 옳습니다. 리승만은 역적으로 되였습니다. 그러면 왜 리승만이 한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해왔노라 자화자찬하여왔는데 이런 락인이 찍혔겠습니까.

여기에 심오한 철리가 있습니다. 그건 여러 말로 설명할수 있겠지만 중요한것은 리승만이 자기 힘, 자기 민족의 힘을 신뢰하지 못하여온데 있습니다. 자기 주먹, 자기 머리를 믿어야 합니다. 내 언젠가도 이야기했지만 동서고금으로 외세란 자기의 리해관계를 떠나 남을 도와준 전례가 없습니다. 그 어떤 동맹도 혈맹보다 굳건할수 없습니다. 민족내부의 사정이 제아무리 복잡하고 풀기 어려워도 그건 집안일입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잠시 말씀을 끊으시고 미소를 지으시였다.

그이께서 들려주시는 심원한 세계에 취해 듣던 정시명도 그이를 따라 입가에 미소를 담았다. 그러나 그 미소는 인차 지워졌다. 쿵-하고 가슴을 치는 뜨거운것이 있었다. 그 어떤 범상치 않은 위대한 진리가 장군님의 통속적인 말씀속에서 서서히 륜곽을 드러내고있는듯싶었다. 그 어떤 동맹도 혈맹보다는 굳건할수 없다, 민족내부의 사정이 제아무리 복잡하고 풀기 어려워도 그건 집안일이다, 얼마나 민족에 대한 정애에 사무쳐있는 금언인가.

위대한 사상과 고결한 덕망과 담대한 심장을 지닌 거인만이 내놓을수 있는 강철의 론리앞에서 정시명은 격동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윽하신 눈길로 정시명의 붉게 상기된 얼굴을 지켜보시다가 말씀을 이으시였다.

《리승만을 만나는 기회가 있으면 똑똑히 밝혀주시오. 외세에 붙어서 정치적고아로 되지 말고 민족의 힘을 믿으라, 민족의 힘에 의거하여 통일위업에 나서서 통일공신으로 력사의 페지우에 자기 이름을 쪼아박으라, 이렇게 말입니다.

사실 지금 서울의 정치형편을 눈여겨보느라면 힘에 부친 대통령옥좌를 타고앉아 허둥거리고있는 령감이 가련하고 불쌍한 생각도 듭니다. 그 인간이 이제라도 양놈의 품에서 빠져나와 인민의 무한한 바다에 뛰여들면 그가 자화자찬하는 독립전 50여년을 력사는 공정하게 계산해줄것입니다. 그러면 그자신이나 나라를 위해서 얼마나 좋겠습니까. 방법은 치사스러운데가 있었지만 여하튼 리승만이 나라의 광복을 위해 동분서주했던것만은 사실이 아닙니까. 미국놈들이 뒤에서 의도적으로 리승만을 정치권의 벼랑끝으로 밀어붙이는 책략을 쓰는것 같습니다.》

김일성동지의 비범한 통찰력과 신견지명에 완전히 취해있던 정시명은 다시한번 커다란 놀라움에 휩싸이였다. 리승만의 인생에 대한 그이의 념려도 그의 가슴을 후덥게 하였지만 리승만의 정치적고립에 대한 장군님의 명석하신 분석과 평가는 너무도 예상밖이면서도 강한 설득력으로 그를 매혹시켰던것이다.

나라의 대소사를 다 맡아안으신 장군님께서 멀리 남쪽에서 벌어지는 정세발전의 추이와 흑막뒤의 움직임까지도 그렇듯 예리하게, 그렇듯 정확하게 장악하고계시는것이 참말로 신비하였다.

정시명은 《장군님, 말씀을 듣고보니 미국놈들이 노리는바가 쉽게 리해됩니다.》하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저녁해가 서쪽으로 넘어갔다. 그늘이 들자 찬바람이 불어오면서 나무가지들이 우수수 설레이고 락엽들이 흩날리기 시작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방으로 자리를 옮기신 후에도 장시간에 걸쳐 국내외의 정세를 개괄해주시면서 정시명이 내놓는 여러가지 문제들에 일일이 대답을 주시였다.

문득 그이께서 화제를 돌리시였다.

《참 정시명동지, 내 아까 만나는 자리에서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 걸음에 여기에 눌러앉아 좀 보양을 하고 떠나셔야겠습니다. 지금 정시명동지의 심장은 새로운 싸움을 향하여 뛰고있지만 몸은 휴식을 요구하고있습니다.》

그이의 다심한 눈길이 정시명의 온몸을 쓰다듬으며 유정한 빛을 뿌리였다.

정시명은 코마루가 찡- 저려들었다. 속안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눈길을 접으며 황황히 자리에서 일어었다.

《장군님!》

《아, 아, 고집을 쓰지 마시오. 우리의 싸움이 어디 다음달로 끝날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헌데 얼굴빛을 보면 안되겠습니다.》

《장군님, 장군님앞에서야 제가 뭘 숨기겠습니까. 제 원래 중경감옥살이를 7년간 보내고나니 위탈이요 신경통이요 관절염이요 별의별 때를 다 묻혀가지고 나왔지요. 헌데 그게 이젠 옛말이 되였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정시명의 이야기를 들으시며 틀이 없으면서도 다감하고 대가 굵은 인간의 진가를 재확인하게 되는것만 같으시였다. 그럴수록 곁에 가까이 두고 보살펴주고 아껴주며 못다 준 정을 다 주고싶은 심정이 간절하시였다.

《이번 길에 꼭 마음을 늦추고 좀 쉬고가도록 하십시오. 나는 이제부터는 우리 전우들의 건강문제와는 타협이 없다고 단단히 벼르고있습니다.

지난해에 나는 안길동무를 잃었습니다. 장장 스무해세월 만주의 혹한과 굶주림, 악전고투속에서 끄떡없이 버티여온 그 무쇠같은 인간이 그만 과로라는 가슴아픈 원인으로 쓰러져 영영 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람더러 몸을 돌보라고 몇번이나 타일렀겠습니까. 헌데 그 사람이 다른 말은 그렇게도 군말없이 따르면서도 휴식명령에는 에누리가 많더니 끝내 떠나갔지요.

정시명동지, 이번엔 꼭 보양을 하고 가야 합니다. 조건없이…》

《장군님, 보양이라 할것 같으면 김정숙녀사께서 먼저 받아야 할것 같습니다. 장군님께 오는 숱한 전우들과 인사들이 매일매시 녀사님을 만나겠는데 부담이 과중한것 같습니다. 제가 46년에 왔던 때보다 건강이 아주 나빠졌습니다. 이 일만은 잘되지 않은것 같습니다.》

《허허… 정시명동지가 고삐를 나에게 넘기는군요. 실은 김정숙동무도 산에서 얻은 탈로 해서 건강이 씨원치 못합니다. 산에서는 그렇게 단단하던 사람이 조국에 와서 몇해 바쁘게 지내더니 몸이 엉망으로 돼갑니다. 하기는 평양에 와서 정숙동무의 부담이 산에서보다 열곱, 스무곱으로 늘어났습니다.

헌데 그 사람이 어데 말을 들어주어야지요. 김책동무랑 큰일나겠다고 떠드는데 그 사람이 자기 초소를 누가 대신해주겠는가고 하니 누가 물리칠 말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장군님, 저도 같은 대답을 드릴수밖에 없습니다. 누가 제가 맡은 전구를 대신 맡아주겠습니까. 그래 이제 김책동무가 서울로 가겠습니까, 최현동무가 저를 대신해주겠습니까. 벌려갈 싸움이 당장 눈앞에 있고 할일은 산더미같은데 제가 누구도 대신해줄수 없다는걸 번연히 알면서 어찌 싸움터에서 피해설수가 있겠습니까.

장군님께서 저의 엉켜붙었던 속을 시원하게 다 풀어주셨으니 저는 모든 시름을 다 가시였습니다. 오늘 저녁부터는 밥사발도 다 밑굽을 낼것 같습니다. 그러나 김정숙녀사의 병세는 제 보건대도 당장 마련을 봐야겠습니다.》

《허허 참, 됐습니다. 보따리를 바꾸어멘것 같군. 후- 모두들 이런다니깐…》

김일성동지께서는 정시명의 고집을 더는 꺾을수 없으시여 나직이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시였다. 이렇듯 전우들이 자기 신상과 관련되는 일에는 아닌보살을 하고 떼질을 쓰듯 매달릴 때는 어찌할수 없어 물러서게 되시는 안타까움을 언제나 금하지 못하시는 그이이시였다.

《우리 동무들이 언제면 제 몸걱정을 하게 될런지… 좋습니다. 이 문제는 다시 토론해야겠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 손을 가벼이 저으시는데 김정숙녀사께서 조용히 방안에 들어서시였다.

《저녁상이 마련되였습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였는가?…》

그이께서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시며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정시명도 따라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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