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순화강기슭

1

 

뎅- 뎅- 벽시계가 부르르 떨더니 열두점을 때렸다. 정갈하고도 소박하게 꾸려진 침실에 해빛이 밝게 비쳐들고있었다.

창밖에서는 노랗게 단풍이 든 활엽수의 넓은 잎사귀들이 소슬한 초가을바람에 실려 너울너울 춤추며 내리고있었다.

정시명은 아침녘부터 장군님께서 최근에 발표하신 로작들에 심취되여있다가 시계종소리에 기지개를 켜며 고개를 들었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였군.》

그는 급히 책을 덮어놓고 거울앞에 가서 옷매무시를 바로잡았다. 어제 오후에 평양에 도착한 정시명은 어두울무렵에야 장군님댁을 찾아왔다.

보초소에서 하는 말이 장군님께서 지방에 나가계시는데 며칠이 지나서 평양에 오실것이라는것이였다.

정시명은 려관에 들어 려장을 풀어놓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김정숙녀사께서 보초소의 보고를 받으시고 려관으로 나오시였다.

녀사께서는 정시명이 장군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려관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자 장군님을 찾아오신 정시명동지를 어떻게 려관에 모시겠는가고 하시면서 한사코 댁으로 안내하시였다.

그렇게 되여 김정숙녀사의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으며 하루를 댁에서 묵었다.

녀사께서는 아침녘에 장군님께서 정시명동지의 도착보고를 받으시고 일정을 당겨서 오늘 점심전으로 평양에 돌아오신다고 전해주시였다.

정시명은 장군님께서 현지지도의 일정을 자기때문에 당기신다는 기별에 송구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자기는 그저 장군님이 그리워 찾아왔으니 자기때문에 마음쓰시지 말아달라고 김정숙녀사께 말씀드렸는데 그이의 말씀이 가슴을 그지없이 달구어주었다.

《아무 념려마시고 장군님을 기다려주십시오. 장군님께서는 정시명동지가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이윽고 밖에서 자동차소리가 나더니 귀에 익은 우렁우렁한 음성이 울려왔다.

《정시명동지가 왔다구?》

정시명은 용수철에서 튕겨오르듯 벌떡 일어나서 허둥지둥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현관문이 열러더니 장군님께서 만면에 서글서글한 미소를 담으시고 들어오시였다.

《장군님!》

정시명은 허리를 깊이 숙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잠시 정시명의 달라진 얼굴이며 옻차림을 보시다가 그에게로 급한 걸음으로 다가오시였다.

《아, 정시명동지! 보고싶었습니다. 무척 보고싶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으시며 반가움에 젖은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장군님, 여전히 옥체건강하신 장군님을 뵈오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제 무엄하게도 수염을 달고 이런 람루로 장군님을 뵙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정시명은 채수염을 길게 드리우고 흰 무명으로 지은 조선바지저고리차림으로 장군님앞에 나타난것이 죄송스러워 사죄의 말씀부터 드리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두어깨를 정겹게 잡으시고 한걸음 비켜서시며 다시금 정시명의 달라진 겉모양새를 유심히 지켜보시다가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으시였다.

《참 길가에서 마주치면 아예 몰라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축가다니요. 정시명동지가 벌려온 악전고투의 자취가 다 어리여있습니다. 자, 어서 들어갑시다. 밤은 편히 쉬셨습니까?》

《예, 녀사께서 너무 분에 넘치게 대우를 해주셔서 황송스럽습니다.》

《나는 정시명동지가 왔다는 기별을 듣고 혹 려관에서 쉬지 않나 걱정했는데 내 집에 모시였다고 하기에 마음을 놓았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그의 팔을 끼고 식당칸으로 향하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 이내 김이 무럭무럭 피여오르는 토장뚝배기를 쟁반에 받쳐들고 오시였다.

《정시명동지가 험로역경을 헤치고 모처럼 오셨는데 식찬이 변변치 않아 죄송스럽습니다.》

녀사께서는 상냥하게 량해를 구하시였다.

정시명은 그 정겨운 말씀에 자기 집에서 밥상을 받은듯 마음이 그지없이 편안해졌다. 그러나 뚝배기의 뚜껑이 열리고 노르끼레한 토장국을 보는 순간 뚝배기장을 그리도 좋아하던 김승원의 얼굴부터 떠올라 눈부리가 찌릿해왔다.

최후의 결전장으로 향하면서 가막소 갔다올 동안 안사람에게 뚝배기장국 만드는 법을 배워주라고 당부하던 김승원이… 사지가 찢기고 창자가 터지면서도 통일찬가를 높이 부른 김승원이… 아!… 정시명은 속에 메여오는 생각때문에 좌석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흐려놓을가봐 이내 생각을 털어버리려고 애쓰며 말씀올리였다.

《녀사님, 괜한 말씀이십니다. 저라는 사람이 워낙 입이 밭아 식성이 까다롭기는 하지만 보리밥 한그릇에 된장찌개 한종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올시다. 이렇게 두분을 모시고 식탁에 앉으니 영광된 마음 이를데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정시명동지, 우리가 이렇게 마주앉아보는것이 꼭 3년만입니다. 낮시간이지만 한잔씩 듭시다.》

김일성동지께서는 김정숙녀사께서 따르시는 놋술잔을 드시였다.

정시명도 두손으로 잔을 받쳐들고 일어났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술잔을 드신채 잠시 창밖으로 추연하게 눈길을 보내시다가 갈리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정시명동지! 우리는 통일성전에서 우리 민족의 우수한 아들딸들을 수많이 잃었습니다. 먼저 간 전우들을 위하여, 그들의 명복을 빌어 듭시다.》

그이의 말씀에 접하는 순간 정시명은 점심상에 술잔을 올리게 하신 그이의 심중이 짚이워 목이 꺽 메여올랐다. 그는 비감이 어리신 그이의 모습을 우러르다가 급기야 고개를 떨구고야말았다. 노르무레한 빛갈의 유정한 술잔을 굽어보노라니 뜨거운 격류가 속깊은 곳에서 갈기를 쳐들었다. 평소에는 그리도 술을 맛스럽게 들군 하던 김승원이 최후의 결사전에 나서면서 고별잔같다며 끝내 부어놓은 술을 내지 않던 생각이 떠올랐던것이다. 혜숙이 빨찌산으로 떠나면서 보내왔던 동래감술도 떠올랐다.

그런가 하면 순애의 모습도 이 술잔에 비껴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의 령전에 술 한잔 부어주지 못한채 이렇게 급한 마음에 쫒겨왔다는 때늦은 후회가 가슴을 쳤다. 38°선까지 따라와 석별의 정을 금치 못하던 김명호의 얼굴도 떠올랐다.

아- 아- 정시명은 술 한잔에 비쳐든 전우들의 모습에 눈앞이 뿌얘져 잔을 받쳐든 손을 가벼이 떨었다.

장군님께서 그 의로운 고인들의 명복을 기원하신다! 장군님께서 비애와 분노를 이 한잔 술로 다 헤아려주신다!

《장군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가까스로 목메여 말씀올리는 정시명의 눈굽에 더운것이 차올랐다.

정시명은 눈물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장군님, 사실 저는 바로 엊그저께 또 우리의 훌륭한 동지를 적들에게 잃고 떠나왔습니다. 스무살을 갓 넘긴 꽃나이처녀입니다. 륙군참모부 타자수로서 공로를 많이 세운 동지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전번 일요일에 결혼식을 하기로 하고 상까지 차려놓고 기다렸는데 마지막임무를 수행하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학살되였습니다. 신랑되는 동지는 그를 구원하러 갔다가 체포되여 즉결심판을 기다리고있습니다.

모든게 제가 불민하여 미리미리 대책을 세워놓지 못한탓입니다. 헌데 전 그의 령전에 술 한잔 부어주지 못하였습니다. 장군님께서 저의 심정을 헤아리시고 그들의 명복을 빌어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정시명은 흐느끼는듯 한 떨리는 음성으로 말씀드리고 북받치는 감격과 함께 고패쳐오르는 슬픔을 걷잡을수 없어 식탁수건을 들어 눈굽을 훔치였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술잔을 상우에 놓으시고 정시명의 옆으로 다가오시였다. 전사가 짓씹는 비분을 함께 나누고싶으신 장군님께서는잔을 모아쥔 정시명의 두손을 꼭 감싸잡으시고 한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였다. 장군님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히시였다. 그이께서는 정시명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히시고 옆자리에 나란히 자리를 잡으시였다.

잠시 방안에는 비장하고도 추연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속에 김일성동지께서는 사랑하여마지 않는 이 나라의 훌륭한 아들인 정시명과 함께 피바다에 잠긴 남녘의 항쟁의 거리들을 련상하시였으며 외세의 압제에 짓밟힌 겨레의 신음소리를 들으시였다. 수백수천 애국자들의 불사신같은 모습들을 더듬으시였다. 결코 비탄과 눈물과 하소연으로써는 가셔낼수 없는 이 땅에 칭칭 서린 민족의 원한을 풀고야말 거룩한 사명감과 억척의 맹세를 마음속으로 나누고계시였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눈물이 그렁하시여 정시명앞으로 밥사발과 뚝배기를 옮겨주시였다.

《수저를 잡으십시오. 정시명동지가 토장뚝배기를 특별히 좋아하시고 부인님이 토장뚝배기를 잘 끓인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김정숙녀사께서는 무거워진 방안의 공기를 가볍게 하려고 수저를 정시명의 손에 들려주시고 뚝배기의 뚜껑을 열어주시며 곡진하게 권하시였다.

정시명은 또다시 희생된 한 동지가 이 뚝배기장을 무척 좋아하였다고, 마지막길에 오르면서도 뚝배기이야기를 하였다고 말씀을 드릴가 하다가 인차 말을 삼키였다. 그는 뚝배기장을 한숟가락 푸지게 떴다. 그리고는 안색을 밝게 하느라고 애를 썼다.

《뭐 우리 집사람의 뚝배기수준이란 말이 아닙니다. 서울사람들이 하도 그 맛을 모르다가 한그릇씩 받아들고는 괜한 치사를 한답니다.… 하, 이거야 정말 일품입니다. 뚝배기맛이 꿀맛입니다. 과시 녀사님의 뚝배기솜씨가 대단하십니다.》

정시명이 장국을 맛보다가 들큰하고 구수한 냄새부터 기가 막혀 입귀가 벙글써 들리였다.

《허허허… 됐습니다. 정숙동무의 뚝배기솜씨가 식성이 까다롭다는 정시명동지로부터 꿀맛같다는 후한 평가를 받았으니 다행입니다. 그러니 이걸 다 드셔야 합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정시명의 얼굴빛이 밝아지는것이 기쁘시여 껄껄 웃으시였다.

정시명은 두분의 다심한 눈길속에 햇당콩을 다문다문 박은 밥은 적게 들면서도 뚝배기장국은 밑굽을 다 비우고서야 숟가락을 놓았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독자감상글쓰기
Change the CAPTCHA codeSpeak the CAPTCHA code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19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