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저자와 그의 후대들

 

주체82(1993)년 4월 21일 애국렬사릉에서는 한 애국렬사를 안치하는 의식이 진행되였다.

애국렬사릉에 안치되는 애국렬사는 해방후에 남조선에서 출판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의 저자로서 널리 알려져있는 최일천이였다.

의식에는 미국에서 살고있는 그의 부인과 자녀들, 조국에 살고있는 자녀들이 참가하였다.

《반일애국렬사 최일천동지》라고 씌여있는 묘비앞에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보내주신 화환과 제상이 놓여있었다.

그 화환과 제상을 보며 최일천의 가족들은 물론 의식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은 최일천이 세상을 떠난지 40여년이 지났지만 그를 잊지 않으시고 이렇듯 영생의 언덕에 세워주시는 그 숭고한 사랑과 고결한 의리에 커다란 감동을 금치 못하였다.

그 다음날인 4월 22일 최일천의 부인과 자녀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는 크나큰 영광을 지니였다.

그이를 만나뵙는 순간 최일천의 부인 유태정녀성은 너무도 크나큰 격정에 휩싸여 그만 바닥에 주저앉은채 흐느껴울었다.

남편이 생전에 그리도 만나뵙고싶어하던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수십년전에 세상을 떠난 전사를 잊지 못하시여 이렇듯 그의 가족들을 친히 몸가까이 불러주시였으니 어찌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있으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는 그의 손을 다정히 잡아 일으켜주시며 이렇게 만나니 정말 반갑다고, 먼길을 오느라고 수고했다고 따뜻이 말씀하시였다. 그러시고는 눈물을 흘리는 최일천의 자녀들의 손도 하나하나 잡아주시며 이 기쁜 날에 왜 우는가고 달래시였다.

그 인자한 음성, 자애로운 모습이 꼭 아버지같이 느껴져 그들은 그이의 품에 와락 안기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을 한동안 바라보시다가 최일천과 승소옥의 아들인 최동주를 가리키시며 아버지를 닮았다고 기쁘신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 말씀에 최일천의 자녀들은 60여년전에 헤여져 이제는 희미해진 아버지의 모습을 되살려주시는 그이의 다심하신 심중이 헤아려져 가슴뜨거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이께서는 기념으로 사진을 찍자고 하시며 그들을 자신의 곁에 세워주시였다.

잠시후 그들은 위대한 수령님의 주위에 친아버지를 모신 한집안식구처럼 오붓이 둘러앉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감회깊은 눈길로 그들을 둘러보시다가 나직한 음성으로 나는 최일천이네 집에 여러번 갔댔소, 그때는 내가 19살때요, 최일천은 나보다 나이가 우였소라고 감회깊은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이어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곁에 자리잡은 유태정녀성에게 어머니, 조국에 오니 어떻습니까라고 다정히 물으시였다.

자기를 어머니라고 불러주시는데 너무나 감격한 유태정녀성은 몸둘바를 몰라하다가 지금껏 떠돌아다니던 남편의 령혼을 이번에 애국렬사릉에 안장시켜주시니 너무나 감사해서 잠을 못 잤다고, 이 은혜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조국에 와보니 모두들 수령님을 하느님처럼 모시고 받드는데 해외에서도 수령님을 그렇게 받들고있다고 하면서 부디 건강하시라고 말씀드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의를 표하시고나서 미국에는 언제 갔는가, 생활은 일없는가고 다심히 물으시였다.

유태정녀성은 전쟁시기 남편과 헤여진 후 그의 생사여부도 모르고 지내다가 남편때문에 들씌워지는 박해를 견딜수 없어 1970년에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던 일이며 현재의 살림형편을 말씀올렸다. 그리고 전쟁시기 헤여져 소식을 모르는 변달덕의 아이들에 대해서도 덧붙여 말씀드렸다.

그의 말을 들으신 수령님께서는 오늘신문에 최일천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하고 장례식을 한 소식이 나갔으니 살아있으면 찾아올것이라고 유태정녀성을 위로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조용히 먼곳을 바라보시다가 최일천은 내가 처음 조직한 《ㅌ.ㄷ》성원이고 반제청년동맹원, 공산주의청년동맹원이요라고 하시고는 오가자에 갔을 때 최일천의 집에도 있었다고, 그는 똑똑하고 글도 잘 썼다고, 그래서 장춘에 나가 신문사일을 하라고 과업을 주었는데 우리 일을 위해 글도 쓰고 많은 사업을 하였다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홍안의 젊은 시절에 국권회복의 뜻을 품고 정의부 군사위원장 겸 독립군 사령인 오동진의 서기로 활약하였고 조선혁명당의 정치부장도 하였던 최일천은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고서야 조선독립의 참된 길을 찾게 되였다. 만나뵙는 첫 순간에 그 출중한 인품과 조선독립의 위대한 경륜에 매혹된 그는 그이의 지도밑에 《농우》잡지 주필도 하고 오가자반제청년동맹 위원장으로 활약하였으며 그 나날 우리 겨레가 김일성장군님께 태양의 존함을 지어드리던 격동적인 사변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그후 그는 《동아일보》장춘지국장의 공직을 가지고 조국광복회 장춘비밀조직 책임자로 사업하면서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끄시는 항일무장투쟁을 적극 원호하였다.

최일천은 깐지고 사업에서 책임감이 높았다고 하시며 항일혁명투쟁시기 최일천이 한 일들에 대하여 회고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계시다가 최일천의 뼈는 없어도 비석을 세우는것이 나쁘지 않소, 시신이 없는 사람이야 많지라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오래전에 떠나간 전사를 내세워주고싶어하시는 그이의 사랑이 또다시 가슴을 울려 유태정녀성은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거듭 외웠다.

그러자 그이께서는 다 최일천의 덕입니다, 최일천이 있어 어머니를 알게 되고 63년만에 나의 혁명동지인 최일천동무를 회고하게 됩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번에는 최동주를 가리키시며 그가 지식인대회 방송야회에서 토론을 잘했다는 보고를 받고 최일천의 아들이라도 만나자고 했는데 당력사연구소 소장이 미국에 있는 어머니가 온 다음에 만나달라고 제기하기에 지금까지 기다렸다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최동주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지식인대회참가자들이 모인 방송야회에서 지식인들을 한품에 안아 어엿한 혁명가로 키워주시고 한량없는 은정을 베풀어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믿음과 사랑에 대하여 토론하였는데 그이께서는 그 사실을 다 알고계시였던것이다.

어느덧 점심참이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하자고 하시며 그들을 식탁으로 이끄시였다.

그이께서는 상에 놓인 료리이름도 알려주시고 그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면서 많이 들라고 살뜰히 권하시였다.

예로부터 본가집에 왔다가는 자식들에게 따끈한 밥 한끼라도 더 해먹이고싶어하는것이 친정어머니의 심정이라고 하였지만 친어머니의 정인들 이보다 더하랴싶어 그들은 가슴뜨거움을 금치 못하였다.

친자식들에게 하듯 허물없이 대해주시는 그이의 자애로운 인품에 매혹된 그들은 어느새 어려움도 잊고 음식들을 맛있게 들었다.

정말 친아버지를 모시고 밥상에 둘러앉은 한가정의 다정한 모습이였다.

그들과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나의 혁명생활중에서 가장 중요한 페지가 오가자생활이요, 오가자생활은 회고할것도 많소, 그중 최일천이와 관계되는것이 많소, 최일천은 가만있기를 좋아하지 않고 글쓰기를 좋아했소, 그는 자기 가시아버지 변대우를 돌려세우는데서 역할을 많이 하였소라고 회억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완고하기로 소문난 변대우로인을 사리정연한 론리와 뛰여난 인품, 고상한 례의로 감복시킨 이야기는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자신의 공적마저 최일천의 공적으로 돌려주시니 진정 그이의 고결한 풍모앞에 최일천의 가족들은 깊이 탄복하였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것이 희미해지건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최일천의 신상에 있었던 일을 어느 하나도 잊지 않고계시다가 그의 가족들에게 일일이 알려주시였다.

최일천의 아들 최동주가 가슴속에 넘쳐나는 감사의 마음을 누를길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지가 집필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중에서 한 대목을 외워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는 그이의 거듭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령님의 항일혁명투쟁과 관련한 내용을 외워드리였다.

《…남으로 가면 남만이 흩어지고 북으로 가면 북녘이 물러났다. … 어쨌던 김일성의 활약은 그야말로 종횡무쌍했으며 혁명운동선상에 끼친 공적이 허다하여 금일의 그의 이름은 세계사에 한자리를 잡아도 손색이 없게 되였다. …》

그가 랑독을 마치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수를 크게 쳐주시였다.

이리하여 화제는 자연히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로 번져지게 되였다.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이 책은 해방직후 최일천이 서울에서 집필출판한 1, 2집으로 된 크지 않은 력사문헌이였다.

최일천이 이 책을 서둘러 집필하게 된데는 사연이 있었다.

1930년대에 위대한 수령님과 헤여진 후 다시 뵈옵지 못하고 서울에서 8. 15해방을 맞이한 최일천은 그이에 대한 그리움을 잠재울길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평양으로 갈것을 결심했으나 복잡한 서울의 정세가 북행길의 여유를 주지 않았다.

당시 남조선인민들은 김일성장군님의 서울개선을 일일천추로 고대하면서 그이에 대하여 알고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서울의 한 지식인은 출판물에 《과연 김일성장군님은 어떤분이실가? 년세는 얼마나 되시며 고향은 어디에 두셨을가? 나는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머리속에 그 어떤 전설적인 거인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천하를 한손에 틀어쥐시고 뒤흔드시던분이니 아마 50대는 훨씬 지나셨으리라. 무인답게 수염을 기르시고 위엄있는 체격을 가지셨으리라. 인민들에게 축지법이라는 신화적인 전법의 소유자로 알려졌고 일제의 100만 관동군을 때려이기신분이니 그이께서는 용모에서부터 보통인물이 아닐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썼다. 이것은 그이를 뵙고싶어하는 남녘민심의 반영이였다.

한편 앞잡이 리승만을 내세워 식민지통치의 지반을 닦으려는 미제의 책동이 로골화되였고 저들만이 애국지사이고 독립투사인듯이 허황한 요설로 인민들을 기만우롱하는 어중이떠중이들, 황당한 책들을 써내여 우리 인민의 해방투쟁사를 더럽히고있는 매문가들이 또한 서울장안을 돌아쳤다.

이런 혼잡속에서 진실을 밝히고 진정한 위인을 세상에 알려야 할 지성인의 력사적사명감을 깨달은 최일천은 려운형, 홍명희 등 애국인사들과 함께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연설, 강연으로 낮과 밤을 보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을 통절히 느낀 그는 어느날 안해인 유태정에게 지금 형세로 보아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혁명투쟁자료들을 가지고 글을 써서 책으로 찍어내는것은 우리 지성인들앞에 나서는 가장 중대한 과제라고 하면서 자신이 이 력사적과제를 곧 해결하기로 결심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지금껏 수집해온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활동자료와 그것을 수록한 신문, 잡지들, 만주일대에서의 조선독립운동자료들을 궤짝에서 꺼내였다. 그 자료 한점한점을 위해 간난신고를 겪으며 만저우광야를 헤매였고 때로는 부엌바닥에 파묻은 장독안에 숨기기도 하고 먼길을 걸어 남에게 맡기기도 하면서 귀중히 보관해온 그였다.

그날부터 최일천은 필자가 되고 그의 안해는 조수가 되여 절세의 위인에 대한 책자집필에 달라붙었다.

그 시기 조선혁명당 정치부장, 김일성장군환영준비위원회 위원 등을 력임하면서 애국적인 정치활동으로 늘 바쁜 몸이였던 그에게 차례진 시간은 주로 밤뿐이였다.

유태정녀성은 앉은뱅이책상에 마주앉아 날이 새도록 집필에 전념하던 남편에게 살림이 너무 구차하여 흰쌀밥 한그릇 대접 못한 그때의 한스러움에 대하여 후날에도 두고두고 외우군 하였다고 한다.

두달후 제1집 원고가 탈고되였다.

출판하는 일도 수월하지 않았다. 식솔많은 그의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였던 손재봉기마저 팔고도 부족하여 친척,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종이, 인쇄잉크, 륜전기와 조선문활자들을 마련하였다.

드디여 1945년 12월 10일 도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제1집이 세상에 나왔다.

자금사정이 너무 어려워 1 000부밖에 찍지 못하였는데 구독요청이 불같아 재판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여기에서 힘을 얻은 최일천은 제2집의 집필도 시작하여 두달후에는 출판본을 내놓게 되였다.

책의 파격적인 영향력에 불안을 느낀 남조선통치배들이 서점을 페쇄한다, 책을 압수한다 하며 소동을 피웠지만 해빛은 손바닥으로 가리울수 없었고 위인에 대한 숭앙심은 총칼로 베여버릴수 없었다. 남녘인민들은 놈들의 눈을 피해 책장이 보풀이 일도록 탐독했고 어떤 젊은이들은 전문을 옮겨베끼기까지 했는데 책은 류례없는 인기도서가 되였다.

최일천의 부인으로부터 이런 사연에 대하여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머리를 끄덕이시며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는 최일천이 혁명사업을 한 기록이라고 할수 있다고 나직한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사실 최일천이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쓴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영광스러운 혁명활동의 목격자, 참가자로서 응당한 소행이였고 그이의 품속에서 혁명가의 참삶을 받아안은 한 지성인의 량심과 의리의 결정체였다.

그런데도 수령님께서는 그 책이 자기 아버지가 혁명사업을 한 기록이라고 그렇듯 높이 평가해주시니 유자녀들은 옛 전우에 대한 그이의 의리깊은 사랑에 감격을 금할수 없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이 책을 처음 받아보신것은 1966년 8월 어느날이였다. 그때 이 책에는 집필자의 이름이 최형우라고 씌여져있었다.

책을 보시던 그이께서는 내용을 신통히 잘 아는 사람이 썼다고, 그런것을 보아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쓴것 같다고 하시며 그때 최일천이라고도 부른 최천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이름을 최형우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그는 《ㅌ. ㄷ》에도 관계하고 신문사지국에서도 일한 사람인데 글재간이 있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후 정주에 살고있던 최일천의 누이로부터 최형우가 최일천이라는것이 확인되였다.

그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수령님께서는 못내 기뻐하시며 일군들에게 자신께서도 찾아보겠으니 동무들도 최일천을 찾아보라고 간곡히 이르시였다.

하지만 여러해가 지나도록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였다. 자식들도 아버지의 생사여부를 모르고있었다. 전쟁시기 의용군으로 탄원한 자식들을 불러앉히고 《이제부터 너희들은 김일성장군님의 전사다. 이 영예를 깊이 새기고 언제나 용감하게 싸워라. 혹시 장군님을 뵙게 되거든 이 아버지는 오가자시절처럼 영원히 장군님을 따를것이라고 말씀올려라.》라고 하면서 바래워준 후로는 종무소식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먼길 떠나 소식없는 자식을 찾는 어버이의 심정으로 수십년세월 최일천을 찾고 또 찾으시였다.

최일천은 1950년 9월 21일경 서울의 성남그릴에서 특별강의를 하던중 반동들에게 랍치되여 11월 5일에 살해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아시게 된 그이께서는 못내 가슴아파하시였으며 최일천의 자녀들에게 애국렬사증을 수여해주시고 그들의 친어버이가 되시여 전사에게 베풀지 못한 사랑을 그의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일천과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며 그의 생을 값높이 빛내여주시였다.

언제인가는 최일천에 대하여 회고하시다가 최일천의 공로가운데서 제일 큰 공로는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를 쓴것이라고, 내가 이번에 그 책에서 나에 대하여 쓴 대목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해방직후 남조선에서 그런 책을 써서 내놓았다는것은 높이 평가할만 한 일이라고, 그는 남조선의 많은 민족주의자들과 밀접한 련계를 가지고 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를 성공시키기 위하여 투쟁하였으므로 조국통일상을 수여받을만 한 공로를 세웠다고 뜨겁게 말씀하신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최일천의 한생을 값높이 빛내여주시고 그의 후대들에게 주실수 있는 사랑과 은정을 다 베풀어주시고도 또다시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미국에 있는 최일천의 부인과 자식, 공화국에 있는 자식들을 몸가까이 부르시여 한량없는 은정을 또다시 베풀어주시는것이였다.

그날 유자녀들에게 자식들도 모르고있던 아버지의 공적에 대하여 되새겨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제는 자주 만나자고, 아버지를 찾아오는것처럼 아무때나 찾아오라고 다정한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사람이 한생을 살아가느라면 많은 인연을 맺게 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오래동안 헤여져있느라면 그중 많은 사람들에 대해 잊게 되는것이 상례이다. 하지만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많은 세월이 멀리 흘러도 잊지 않고 그들의 공적을 높이 내세워주시며 그 후대들까지 따뜻이 보살펴주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 같으신분은 이 세상에 없다.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로 위대한 태양의 력사를 칭송한 최일천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민족앞에 공헌한 애국렬사들에 대한 김일성주석의 혁명적의리의 력사는 끝없이 이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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