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조국통일을 위해 싸우다 쓰러진 렬사들에 대한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사랑은 세월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여도 변함없이 이어지는 참으로 고결한 동지적사랑이였다.

1993년 설명절을 이틀 앞둔 1월 21일, 이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통일애국투사 김삼룡의 부인과 세 딸을 몸가까이 불러주시였다.

감격에 울먹이는 그들의 손을 다정히 잡아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래전부터 동무들을 만나보려고 하였지만 시간이 없어 미루어왔다고, 오늘에야 이렇게 만나게 되니 내 마음이 풀린다고 하시였다.

김삼룡이 세상을 떠난지 4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까지도 잊지 않고 내세워주시는것만도 한없이 고마운 일이였다. 그런데 자기들을 만나주시려 그토록 마음써오시였다고 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에 가족들은 뜨거운 격정의 눈물을 흘리였다.

어깨를 들먹이는 김삼룡의 딸들을 달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삼룡동무에게는 아들이 없는가고 물으시였다.

아들은 없고 딸만 셋이라는 대답을 들으신 그이께서는 경애, 영애, 해산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는 김삼룡의 딸들을 대견스럽게 바라보시다가 그들이 다 대학을 나오고 시집을 가서 행복한 살림을 폈으면 됐다고 친어버이정을 담아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들 매 사람을 자신의 곁에 세우시고 사진을 찍어주신 후 오찬회장으로 데리고 가시였다.

그러시고는 그들에게 음식들을 친히 권하시며 김삼룡에 대해 회고하시였다.

해방전에 벌써 위대한 수령님께서 파견하신 정치공작원들의 영향하에 비밀조직을 뭇고 그이의 전민항쟁방침을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였던 김삼룡은 해방후 남조선공산당의 책임적인 지위에서 사업하였다. 당시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3당합당사업은 미제의 고용간첩 박헌영의 종파적행위로 하여 좀처럼 진전을 보지 못하고있었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합당사업과 관련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담은 친서를 김삼룡을 비롯한 3당지도부 성원들에게 보내주시였다. 형형색색의 별의별 패거리들이 저마다의 주의주장을 내세우며 제노라고 하던 해방직후의 그 복잡한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해 안타까워하던 김삼룡은 수령님의 귀중한 가르치심을 자자구구 새기며 읽고 또 읽어나갔다. 보면 볼수록 자기들이 나아갈 앞길이 환히 열리는것만 같았다.

그의 모습에는 기쁨, 환희와 함께 수령님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 어리였다. 해방의 은인으로, 전설적위인으로 온 민족의 숭앙을 받고계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한번도 만나신적 없는 자기에게 남조선공산당과 서울시당조직앞에 나서는 중요한 과업들을 명시한 친서를 보내주시였으니 그의 심정을 그 무슨 말로 다 표현할수 있었으랴.

그때의 격정이 얼마나 컸던지 그는 안해에게 김일성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친서를 받아안았다고, 우리 장군님을 만나뵙고 직접 가르치심을 받는것만 같다고, 친서를 한자한자 읽어내려가느라니 태양과도 같은 장군님의 환하신 모습이 안겨오고 우렁우렁한 음성이 그대로 들려오는것 같더라고 자기의 격동된 심정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절세의 위인의 크나큰 믿음을 받아안은 김삼룡은 그이께 삼가 편지를 올리면서 서울시당 내부형편과 합당준비사업정형을 구체적으로 보고드리고 친서에서 제시해주신 과업을 기어이 실현할 굳은 결의를 아뢰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녘의 한 전사가 올린 편지를 받아보시고 그를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이께서는 그의 불타는 애국충정을 굳게 믿으시고 그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으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내세워주시였다.

김삼룡의 투쟁에 대하여 회고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삼룡은 조국해방전쟁이 일어난 직후에 희생되였다고 하시면서 자신께서는 성시백, 김삼룡, 리주하가 체포되였을 때 적들에게 공화국에서 악질반동이였던자들과 그들을 바꾸자고 제기하였다고, 그러나 적들이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총살하였다고 가슴아픈 어조로 말씀하시였다.

그때 그토록 사랑하시던 전사들이 체포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침식을 잊다싶이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주체39(1950)년 5월 18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통일애국투사들의 석방운동을 강력히 전개할데 대한 문제를 정식 의제로 토의하도록 하시고 그들에 대한 리승만괴뢰도당의 탄압만행을 규탄하며 석방을 요구하는 여러 정당, 사회단체들의 성명서와 개별적인사들의 담화를 신문과 방송에 대대적으로 보도하도록 하시였다. 다른 한편 비상협의회를 여시고 사형언도를 받은 통일애국투사들을 극악한 반동분자들과 교환할데 대한 놀라운 제안까지 내놓으시였다.

그리고 이 제안을 적들에게 속히 알리기 위해 6월 10일 심야방송으로 공화국 내무상의 성명을 발표하게 하시였다. 이 제안은 우리 인민뿐아니라 세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 소식에 접한 김삼룡은 평양하늘을 우러러 뜨거운 눈물을 흘리였다. 그럴수록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 걱정만을 끼쳐드린 자신이 더없이 민망스러웠고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그이의 전사답게 꿋꿋이 싸울 각오를 가다듬었다.

괴뢰들의 기만적인 법정에서 장내를 들었다놓은 그의 웨침은 오늘도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울리고있다.

《너희들이 감히 우리 애국자들을 재판할 권리가 있는가? 가소롭다. 만일 우리에게 잘못이 있다면 김일성동지께서 주신 과업을 끝까지 실천하지 못한것이다. 때문에 나의 죄를 따질분은 오직 우리의 수령이신 김일성장군님뿐이시다.》

원쑤들은 사형장으로 나가는 그가 도중에 말을 할수 없게 총탁으로 입을 내리쳤다고 한다.

언젠가 남조선의 한 출판물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륙군특무대장 김창룡과 그 휘하 헌병들은 남산헌병사령부 뒤문으로부터 150m 상거한 개천근방 소나무에 김삼룡을 결박하였다.

결박진 그는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북향으로 몸을 돌리고 수갑을 채운 손을 세번 높이 들었다내렸다 하였다. …

수갑을 채운 손을 세번 높이 든 이 무언의 동작이 그의 최후의 모습이였다. …》

그가 마지막순간에 무엇을 말하고싶어했는지, 그의 손동작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너무도 자명한것이였다.

남녘의 한 전사에게 믿음을 주시고 사랑을 주시고 통일애국투사의 참된 삶을 주신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 그 위대한분의 품을 너무도 일찍 떠나는것이 한스러워 마음속으로나마 북녘하늘을 우러러 《김일성장군 만세!》를 피타게 부르며 생을 마친 김삼룡렬사.

그는 절세의 위인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자기의 생을 빛나게 장식한 견결한 통일애국투사였다.

인민군대의 즉시적인 반공격을 명령하시면서 관계일군들에게 김삼룡을 비롯한 애국자들을 구원할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삼룡이 희생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해방된 서울에서 그 동무를 만나보려고 하였는데 그렇게 되였다고 하시며 몹시 비통해하시였다.

그의 희생을 두고 가슴아파하시던 수령님께서는 김삼룡의 희생에 대한 당중앙위원회 보도를 내고 서울에서 그의 장례식을 잘해주라고 거듭 이르시였다.

그후에도 언제나 그를 잊지 않고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45(1956)년 4월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3차대회에서 우리 나라에서는 당 및 국가활동가들인 김책동지, 강건동지, 허헌동지, 김삼룡동지를 비롯한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아끼지 않고 투쟁한 적지 않은 당원들과 애국자들을 잃었다고 하시면서 김삼룡의 위훈을 높이 내세워주시였다.

김삼룡의 가족들에게 그의 영웅적인 투쟁업적에 대하여 말씀하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는 김삼룡을 만나지 못한것 같다고 나직이 뇌이시였다.

김삼룡의 부인 리옥숙녀성은 남편이 1948년 8월에 있은 남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련합전원회의때 회의에 참가하였지만 박헌영의 방해로 수령님을 만나뵙지 못하였다고 말씀드렸다.

사실 그때 김삼룡은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남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련합전원회의에 참가하였는데 연설을 하시는 그이를 뵈옵게 되였다.

해방직후 갈길 몰라 방황하던 자기들에게 친서까지 보내주시며 앞길을 환히 밝혀주시던 젊음에 넘치신 김일성장군님의 모습을 우러르며 김삼룡은 조국통일의 전도에 대한 확신으로 가슴들먹이였다.

회의에서 남조선사태를 속속들이 꿰뚫어보시고 조국통일과 관련한 중요한 연설을 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삼룡에게 새로 조직된 남북조선로동당 련합중앙위원회 정치위원, 서울지역지도부 책임자의 중책을 맡겨주시였다.

평양을 다녀온 후 김삼룡은 먼발치에서나마 위대한 수령님을 뵈온 영광을 잊지 못해하며 조국통일성업에 한몸바치였다.

그러던 그는 미제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도당의 배신행위에 의하여 적들에게 체포되였으며 전쟁이 일어난 바로 다음날 적들에게 학살되였다.

사형장으로 끌려나가기 전에 그는 옆감방에 있는 조직성원에게 이런 통방을 보냈다고 한다.

《최후를 맞고보니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전사로 그이의 믿음속에 일해온것이 제일 기쁘다. 그리고 장군님의 기대에 보답 못하고 가는것이 한스럽다. 앞으로 감옥에서 나가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게 되면 나의 인사도 함께 올려달라. 나에게 셋째아이가 태여나면 바다처럼 넓고 깊은 마음으로 산처럼 변함없이 장군님을 받들라는 뜻에서 해산이라고 지어달라. …》

그가 희생된 후 그의 안해는 남편이 평양에 갔다온 후 아이들을 데리고 김일성장군님을 찾아가라고 늘 이르던 말을 잊지 않고 평양으로 떠났다.

그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김삼룡의 가족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김삼룡의 가족을 찾으라고 대책을 세웠는데 그 먼길을 어떻게 왔느냐고 놀라와하시면서 우선 병치료부터 해야겠다고 하시며 큰 병원의 입원치료를 받도록 해주시였다.

그리고 김삼룡의 부인의 해산달까지 헤아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어려운 시기에도 옷과 생활필수품, 거액의 돈까지 마련해주시였으며 전쟁기간 렬사의 가족을 최고사령부가까이에서 살도록 하시고 친히 보살펴주시였다.

그후 김삼룡의 세 딸은 위대한 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속에 아무런 근심걱정없이 자라 대학을 졸업하고 중요한 초소에서 일하였다.

사랑하는 남녘의 통일애국투사를 두고두고 잊지 못하시며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그의 해방전과 해방후의 투쟁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김삼룡은 강의한 신념과 능숙한 조직력을 가진 당활동가였으며 나라와 민족과 혁명위업을 위해 한생을 바친 애국자였다고 그의 생을 값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자기 남편에게 베풀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하늘같은 믿음과 사랑을 되새겨보며 감사의 마음을 금치 못하던 리옥숙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밤새워 준비한 자작시를 읊어드리였다.

이어 김삼룡의 둘째딸도 대를 이어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정일장군님을 받들어나갈 결의를 담은 시를 읊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80나이에 거의 이른 김삼룡의 부인이 좋은 시를 읊었다고 하시며 박수를 쳐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대를 이어 정일동지를 잘 받들라고, 그 길에 동무들의 행복이 있고 미래도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한번도 가까이에서 만나보신적이 없는 전사이지만 그의 남다른 충실성과 통일애국의지를 굳게 믿으시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고 그가 희생된 후에는 그의 가족들의 친어버이가 되시여 따뜻이 보살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한없는 사랑과 고결한 의리는 경애하는 정일장군님에 의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 은정, 그 사랑속에 오늘도 김삼룡은 공화국영웅, 조국통일상수상자로 애국렬사릉에 영생의 모습으로 서있다.

참으로 절세의 위인들의 고결한 사랑과 의리가 세월의 언덕 넘어 줄기차게 흐르고있기에 이 땅에서는 떠나간 전사도, 그의 후대들도 복된 삶을 누리고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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