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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음악가 소개

작곡가 쇼뺑과 그의 창작활동

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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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랑만주의음악의 대표적작곡가이며 뽈스까의 재능있는 피아노연주가인 프레데리크 프랑쑤아 쇼뺑(Frederic Francois Chopin)은 1810년 3월 1일 와르샤와에서 20Km 떨어진 젤라조바 볼랴촌에서 태여났다.

아버지 니꼴라스는 뽈스까에 귀화한 프랑스사람으로서 스깔벡끄백작의 아이들에게 프랑스어를 배워주는 개별교사였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어머니는 뽈스까녀성으로서 피아노를 훌륭히 연주하였다. 누이 루도윅까 역시 어릴적부터 피아노연주솜씨가 놀라울 정도였다. 이러한 가정적분위기는 어린 쇼뺑에게 음악을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을 키워주었다.

쇼뺑은 모짜르트처럼 유년시절부터 매우 민감한 음악적감수성을 가지고있었으며 환상력이 풍부하였을뿐아니라 4살때 벌써 피아노연주에서도 뛰여난 재능을 보여주어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다.

쇼뺑은 6살부터 바이올린연주가, 피아노연주가 겸 작곡가인 보이체브 아다르트 지브니에게서 체계적인 피아노교육을 받았으며 8살때에는 와르샤와 궁정에서 열린 공개연주회에 출연하여 《뽈스까의 모짜르트》라는 찬사를 받았다.

12살 나던 해에 와르샤와음악원장 엘스너에게서 화성법과 대위법들을 교육받기 시작하면서 부터 쇼뺑의 음악적재능은 매우 빠른 속도로 발전하게 되였다. 엘스너는 쇼뺑의 독특한 음악적재능을 귀중히 여기고 그의 피아노연주와 창작을 세심히 지도해주었다.

쇼뺑이 대담하고 새로운 작곡방식으로 두각을 나타내고있을 때 일부 작곡가들은 그를 비난하였지만 엘스너는 그들에게 《그를 가만히 둬두십시오. 그는 평범한 길을 걷지 않고있으며 그의 창작적재능은 독특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쇼뺑은 예술가로 성장하던 초기에 활발히 벌어지는 와르샤와의 음악생활에서 참으로 선명하고 다양한 인상을 받았다. 당시 와르샤와의 가극극장들에서는 뽈스까민족가극의 첫 거장들인 까멘스끼, 스쩨빤, 엘스너의 많은 가극들이 공연되고있었다. 민족적성격이 뚜렷하고 자기 민족의 전통음악선률로 가득찬 뽈스까의 민족가극들은 이 나라 인민들속에서 애국적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가극극장들에서는 민족가극들과 함께 웨버, 로씨니, 오베르 등 서유럽작곡가들의 이름난 가극들이 공연되였으며 빠가니니를 비롯한 외국의 이름난 연주가들도 출연하였다.

쇼뺑은 여러가지 음악적인 모임과 음악회들에 빠짐없이 참가하여 새로운 음악적형상들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발전풍부화시키였다.

빠가니니의 연주는 쇼뺑에게 새로운 랑만주의적연주법을 발전시킬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며 그로하여금 화려한 기교와 풍부한 표현력을 소유하기 위하여 정열적으로 탐구하도록 하였다.

쇼뺑에게 있어서 와르샤와에서의 창작시기는 특별히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이 시기에 그는 벌써 민족적인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뚜렷이 보여주었으며 그의 창작의 장래를 내다볼수 있게 하였다.

그가 뽈스까에서 창작한 작품들에서는 그의 사상적경향성과 창작적, 예술적원칙들이 나타났다.

쇼뺑은 창작에서 인민적이며 민족적인 특징을 살리면서도 서유럽음악이 이룩한 성과에도 커다란 관심을 돌리였다. 이것은 그가 진보적인류의 사랑을 받는 음악가로 성장할수 있는 중요한 조건의 하나로 되였다.

와르샤와에서의 쇼뺑의 창작은 뽈스까예술의 일반적인 경향성들을 반영하면서 민족적인 성격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였다. 그가 창작한 마주르까풍의 《론도》, 관현악을위한 《끄라꼬뱌크》, 뽈스까주제에 기초한 《환상곡》은 독특한 주제와 특색있는 선률, 화성, 리듬으로 하여 당시 류행하고있던 기교본위적인 음악과 구별되였으며 서술양식과 주제의 발전수법에서는 민족적특성이 강조되고있다.

2편의 피아노협주곡 e-moll과 f-moll은 쇼뺑이 뽈스까에서 창작한 가장 우수한 작품들이다. 이 협주곡들은 협주곡종류에 동반되는 화려하고 기교적인 특징들을 감정정서적으로 훌륭히 표현하고있다.

그의 음악에 구현된 서정성과 시적인 아름다움은 협주곡뿐아니라 야상곡, 왈쯔, 변주곡 등 모든 소품작품들에서도 나타나고있다.

그가 17살에 창작한 모짜르트의 《돈 쥬앙》의 주제에 기초한 변주곡을 평가하여 슈만은 《여러분, 모자를 벗으십시오. 당신들앞에 천재가 나타났습니다.》라고 자기의 기사에 썼다.

뽈스까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창작된 쇼뺑의 우수한 작품들은 사실주의적인 창작방법과 민족적형식의 구현, 깊은 서정과 독특한 시적인 피아노연주기교 등 그의 창작의 고유한 특징들을 뚜렷이 보여주고있다.

쇼뺑은 1820년대말까지 조국에서 피아노연주가, 작곡가로 이름 떨치면서 음악생활을 하였다. 그는 자기의 작품들을 가지고 자주 음악회에 출연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뽈스까를 빛내이는 민족적인 음악수재로 인정하였다.

쇼뺑은 20살때인 1830년 스승과 벗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사랑하는 조국 뽈스까를 떠나 외국에로의 연주려행길에 올랐다. 그러나 이것이 어머니조국과의 영원한 리별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알수 없었다. 떠나기 전날 송별회에서 친우들은 그에게 뽈스까의 흙이 담긴 은잔을 선물로 주었다. 그는 벗들과 헤여지면서 《나는 이 흙냄새를 맡으며 사랑하는 어머니조국 뽈스까를 한시도 잊지 않겠다.》라고 작별인사를 하였다.

쇼뺑이 11월말 윈을 거쳐 프랑스로 가던 도중 조국에서는 폭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이 소식을 들은 그는 폭풍같은 감정에 휩싸였다. 그는 조국에 돌아가 혁명투쟁에 참가할 결심을 품었다. 함께 온 친구가 그에게 《총을 잡고 싸워야만 혁명투쟁에 참가하는것이 아니다. 너는 음악으로써 조국을 구원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그를 말리였다.

쇼뺑은 윈에서 음악회를 열어 뽈스까의 넋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려하였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는 로씨야와 동맹을 맺고 뽈스까의 독립을 막기위해 뽈스까에 자기의 군대를 출동시켰으며 뽈스까민족을 적대시하는 감정을 품고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쇼뺑이 음악회를 연다는것은 거의나 불가능하였다.

쇼뺑은 1831년 7월 20일 윈을 떠나 빠리로 향하던중 도이췰란드의 슈트하르트에서 뽈스까혁명의 실패에 대한 가슴아픈 소식을 듣고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피아노련습곡을 창작하였다. 이 곡에서는 조국을 잃은 슬픔, 외래강점자들에 대한 증오와 매국노에 대한 쇼뺑자신의 분노가 노호하며 격랑을 일으키고있다. 《혁명》은 조국의 암담한 운명에 대한 쇼뺑의 통곡이였으며 뜨거운 조국애의 토로였다. 이때부터 그의 창작에서는 조국과 련결된 사색이 주되는 주제분야로 되였다.

그해 가을 빠리에 도착한 쇼뺑은 생의 말년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빠리에 체류한 초시기에 쇼뺑은 물질적인 곤난으로 매우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는 생활유지를 위해 귀족자녀들의 가정교사노릇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뽈스까의 망명귀족들이나 지식인들과 친교를 맺고 뽈스까문학협회에 가입하여 혁명적인 랑만주의자들과 교제하였다.

1832년 2월 26일 빠리에서 쇼뺑의 첫 공개연주회가 있었다. 연주회는 음악가들과 평론가들속에서 폭풍같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 음악회를 계기로 빠리예술계의 인정과 평가를 받았다.

이 음악회와 이후에 열린 음악회들은 쇼뺑으로 하여금 빠리에서 뛰여난 피아노연주가로서 명성을 떨칠수 있게 하였다. 쇼뺑의 연주는 그의 창작에 불필요한 장식이나 인위적인 감정이 없듯이 아무런 가식이 없이 진실하고 소박하였으며 인간의 감정에 깊이 스며들었다. 바로 여기에 피아노연주가로서의 쇼뺑의 매력이 있었다.

당시 쇼뺑의 연주에서의 고유한 특성은 피아노울림의 아름다움에 있었다. 그가 나타낸 색채의 다양성과 울림의 아름다움은 그의 음악의 표현적특성, 음악적형상들의 아름다움과 련결되고있다.

리스트는 쇼뺑의 음악을 듣고 심장은 형언할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으며 감탄과 전률, 두려움은 극도에 달하였다고 말하였다. 쇼뺑이 빠리에 체류하는 기간 이딸리아와 프랑스가극의 다양한 형식들과 가창예술, 당시의 모든 피아노기교들을 받아들일수 있었던것은 그가 재능있는 작곡가, 뛰여난 연주가로 빨리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 시기의 창작에서는 서정적인 소품과 무곡종류와 같은 크지 않은 피아노곡들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Op.10에 들어있는 련습곡들과 몇편의 전주곡들이 출판되였으며 특히 이 시기에 창작된 스케르쪼와 발라드는 우수한 작품들중의 하나로 알려져있다.

1830년대 중엽에 쇼뺑의 생활에서는 의의있고 흥미있는 상봉들이 있었으며 후날 불행을 가져다준 애정관계들이 나타났다. 이것은 그의 창작에 흔적을 남기였다.

1834년 봄 아테네음악축전에 참가한 쇼뺑은 그곳에서 멘델스존을 만나 함께 라인강을 따라 연주려행을 하였다. 쇼뺑의 연주를 듣고 멘델스존은 그를 빠가니니에 비교할수 있는 음악가라고 하였으며 《첫째가는 피아노연주가》라고 찬양하였다.

그후 쇼뺑은 라이프치히를 두차례 방문하여 멘델스존과 다시 상봉하였으며 슈만과 그의 안해 클라라도 만났다. 또한 첫 발라드연주로 사람들에게 특별히 강한 인상을 남기였다.

1838년 여름 쇼뺑은 료양중에 있는 부모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드레즈덴에 있는 친구의 집에 들려 이미전부터 알고있던 그의 누이동생 마리아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리유는 처녀의 큰아버지가 백작가문의 딸이 신분이 낮고 수입도 없는 쇼뺑과 결혼할수 없다고 반대해나선데도 있었지만 쇼뺑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큰아버지의 낡은 관념에 엇서나갈만큼 마리아의 성격이 강하지 못한데 있었다.

쇼뺑의 마리아에 대한 애끓는 사랑의 감정과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한 서글픈 감정을 음악에 옮긴것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피아노곡 《리별》이다.

쇼뺑이 프랑스랑만주의문학의 《꽃》으로 불리우는 죠르쥬 쌍드를 처음으로 알게 된것은 1836년 12월이였다. 문학과 음악이라는 큰 힘이 그들의 마음을 서로 통하게 하였다. 쇼뺑과 그보다 6살우인 쌍드의 사랑은 점점 깊어갔다. 그 녀자는 헌신적으로 쇼뺑의 생활을 도와주었다.

1838년 서로 정열적으로 사랑해오던 쇼뺑과 쌍드는 지중해상의 마요르까섬으로 려행을 떠났다. 쇼뺑은 섬에서 생활하면서 받은 다양한 감정에 기초하여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그중에서 대표적작품이 전주곡 《락수》이다.

그들은 1839년 가을에 바로쎌로나를 거쳐 빠리로 돌아와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을 상대로 연주활동을 벌려나갔다. 쇼뺑은 1830년대말부터 1840년대초까지 거의나 연주회에는 출연하지 않고 자기의 음악을 깊이 리해하고 평가해주는 몇몇 사람들앞에서만 연주하기 좋아하였다.

이 시기 쇼뺑은 교육사업에 열정을 다 바치였다.

피아노강의만이 그에게 생활에 필요한 물질적수단들을 보장해줄수 있었다. 그는 매일 5~6시간씩 수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으며 그로 인해 육체적피로가 겹쳐 창작을 중단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것은 쇼뺑을 몹시 괴롭혔다.

1838년부터 1845년까지의 기간은 쇼뺑의 창작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시기였다. 이 시기에 그는 발라드, 쏘나타, 환상곡, 뽈로네즈, 마주르까와 야상곡을 비롯한 수많은 음악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창작의 성숙기라고도 할수 있는 이 시기에 창작된 그의 작품들은 초시기의 일부 작품들에서 나타났던 화려한 색채와 기교본위적인 틀에서 완전히 벗어났으며 이 작품들에서 그의 음악양식은 확고히 다져지고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고있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쇼뺑음악의 민족적성격과 특성을 더욱 선명하고 다방면적으로 발전시킬수 있게 하였으며 그의 음악양식을 보다 공고화시킬수 있게 하였다. 작품들에서는 그가 극성을 가진 방대한 형식의 작품들, 교향악적으로 전개되는 작품들을 창작하는데로 지향한 흔적이 뚜렷이 나타나고있다. 또한 사상정서적내용이 깊어지고 그 정서적감흥이 훨씬 커졌다.

쇼뺑의 한생은 부단한 노력속에서 유유하게 정상적으로 흘러갔다. 그는 겨울이면 많은 수업을 하기에 분주하였으며 어쩌다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벗들을 만나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기도 하였으며 음악회에도 참석하였다. 그리고 여름이 오면 창작에 힘을 넣었다.

아버지의 사망과 쌍드의 자식문제로 인한 그 녀자와의 결별은 쇼뺑에게 커다란 정신적타격을 주었으며 그의 병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는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는 속에서도 피아노수업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되였으며 음악회에 출연까지 하였다.

쇼뺑의 마지막 시기는 그의 일생에서 가장 침울하고 불행한 시기였다. 그러한 속에서도 그는 생활난에서 헤여나기 위해 1848년 4월 영국으로 연주려행을 떠났다. 그는 런던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에서 음악회를 열었다.

쇼뺑은 무리한 연주일정으로 완전히 페인이 되여 그해 11월에 빠리로 돌아왔다. 그는 이미전부터 앓고있던 페결핵에 합병증으로 장결핵까지 겹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였다.

그의 생의 마지막 나날에 사랑하는 누이 루도윅까는 쇼뺑에게 큰 기쁨을 주었다. 그는 누이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기였다. 《나는 저주로운 로씨야군주가 나의 시체를 와르샤와에 받아들이지 않으리라는것을 잘 알고있어요. 그러니 나의 심장만이라도 와르샤와에 가져다주십시오.》

1849년 10월 17일 밤에 쇼뺑은 39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령구는 빠리에 묻혔으며 무덤우에는 그가 평생 가슴속에 품고다닌 은잔에 담긴 뽈스까의 흙, 조국의 흙이 덮혀졌다.

쇼뺑의 심장은 유언대로 와르샤와에 운반되여 크레스트사원에 안치되였다.

히틀러파시스트들이 뽈스까를 침입하였던 제2차 세계대전시기 뽈스까애국자들은 그의 심장을 외국에 가져다 보관하였다. 그들은 뽈스까가 해방된 후 쇼뺑의 사망기념일에 그의 심장을 조국에 가져왔다.

쇼뺑이 창작한 작품들을 보면 17편의 가요와 첼로곡 3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피아노곡이다. 그는 피아노협주곡 2편, 피아노쏘나타 3편, 56편의 마주르까, 15편의 뽈로네즈, 27편의 련습곡, 25편의 전주곡, 3편의 발라드, 3편의 환상곡 등 200여곡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쇼뺑은 음악사에서 랑만주의음악의 대표적작곡가로 알려져있다.

그의 창작에서 랑만성은 작품들이 자유롭고 시적인 형식을 갖추고있으며 누구보다 깊은 감정세계를 파고든데서 나타나고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부르고있다. 리스트의 작품이 위풍당당하고 웅장한데 비하여 쇼뺑의 작품들은 섬세하고 정서적이면서도 격정과 애수가 흘러넘치고있다.

쇼뺑은 전반생을 뽈스까에서, 후반생은 프랑스에서 보냈다. 하지만 그의 음악전체에 맥맥히 흐르는것은 뽈스까적인 민족성이다. 그는 이국땅에서 생활하는동안 민족성과 향토애적인 색채를 세련된 창작수법으로 작품에 담아 세계적인것으로 만들었다.

쇼뺑은 피아노연주에서 세계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는 《피아노의 마음, 피아노의 령혼》으로 불리우고있다.

시적인 서정과 끓어넘치는 열정이 담겨져있는 수많은 피아노곡들을 창작한 프레데리크 프랑쑤아 쇼뺑은 작곡가로, 완벽한 피아노연주솜씨를 지닌 피아노연주가로 세계음악사에 널리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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