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야금의 창안자 우륵
박사, 부교수 장영철

우륵은 A.D.500년대에 우수한 민족악기인 가야금을 만들고 가야금의 시초를 열어놓음으로써 조선의 발전된 음악문화수준을 내외에 널리 떨친 재능있는 음악가이다.
우륵은 후세사람들이 《악성》(음악의 성인)이라고 부를만큼 고유한 민족악기 가야금을 창안제작하고 그 음악창작과 연주 및 후비교육활동으로 민족음악예술발전에 커다란 업적을 쌓았다.
우륵은 우리 나라에서 B.C.1세기 말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의 기간에 고대진국의 변한땅인 락동강중하류지역에 있었던 봉건국가 가야국(《가락국》이라고도 함)의 민간음악가였다.
당시 가야국은 오늘의 김해지방에 자리잡은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거기에 속한 5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우륵은 그중 대가야(경상북도 고령군일대)라고 불리운 가야소국의 성열현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평민출신이였던것으로 하여 옛 책들(《삼국사기》 등)에 성이 없이 이름만 적혀 전해온 우륵의 출생시기는 대략 5세기말~6세기 초엽이며 활동기간은 주로 6세기 중엽까지로 보아진다.
남다른 음악적재능을 가졌던 우륵은 노래도 잘 부르고 춤도 잘 추었을뿐아니라 특히 고대진국에서부터 전해져온 악기인 슬을 매우 능숙하게 다룬 기악명수로서 가실왕대에는 왕궁의 전속음악가로 활동하였다.
당시 그가 정통하고있던 슬은 《삼한》(마한, 진한, 변한)으로 이루어진 고대진국의 한개 세력이였던 진한 사람들이 만들어 쓴 악기라는데서 일명 《진한금》이라고도 불리웠다. 우륵은 이 진한금을 다루는 과정에 그 악기의 우결함을 알게 되였으며 그것을 개량하여 새로운 악기를 만드어낼 결심으로 악기창안제작에 달라붙었다. 그는 갖은 신고와 고심끝에 마침내 진한금에 기초하여 독특한 음색과 보다 풍부한 형상력을 가진 새로운 민족악기를 만들어낼수 있게 되였으며 후세의 사람들은 이 악기를 가야국의 이름을 붙여 《가야금》이라고 하였다.
초기의 가야금은 앞뒤판이 따로없이 속을 파낸 오동나무를 공명통으로 하고 그 앞면에 이동괘를 세우고 일년열두달을 상징하여 음률을 제정한 12개의 줄을 메운 악기였다. 개개의 줄은 소리높이에 따라 굵은선으로부터 점차 가는선으로 하였고 매 줄을 받치는 이동괘도 그 높이에 따라 낮은형태의것으로부터 점차 높은 형태의것으로 음률을 고르는데 매우 편리하게 되였있었다. 이것은 창안자 우륵의 뛰여난 재능과 피타는 노력의 일면을 잘 알수 있게 한다.
우륵은 가야금을 만든데 이어 악기의 특성에 맞게 그 연주법을 보다 다양하게 하여 악기의 우수한 표현적특성이 더 잘 살아나도록 하였다. 그는 두손을 다 써서 줄을 뜯거나 튕기는 슬의 기본연주법을 기초로 하면서도 왼손으로 줄을 눌러 독특한 음색적 및 형상적효과를 얻는 롱현법을 착상하여 악기의 형상표현기능을 보다 다채롭고 풍부하게 하였다.
초기가야금의 이러한 구조적간편성과 음률조작의 편리성, 다양하고 풍부한 연주법과 인민들의 비위와 정서에 잘 맞는 음색적특성 등은 이 악기가 인민들의 사랑속에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될수 있게 한 중요한 요인으로 되였다.
우륵은 악기를 제작하고 그 연주법을 탐구한데 이어 가야금을 위한 12곡의 악곡들을 창작하여 연주보급함으로써 가야금음악발전의 시초를 열어놓았다.
옛문헌기록에 의하면 우륵이 창작한 12편의 가야금악곡들은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가실왕이 《나라의 방언도 각각 다른데 어찌 곡조를 하나로 할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우륵에게 명하여 짓게 한것이였다고 한다. 가야금이 제작된 후 처음으로 창작된것으로 보아지는 이 12편의 가야금악곡창작에 대가야의 왕이 관여하였다는 옛문헌기록(《삼국사기》권 32악지편)은 당시 가야금의 창안과 그 악곡창제가 국가적으로 매우 중시되고있었음을 알수 있게 한다.
우륵이 창작한 12편의 가야금악곡들은 옛문헌에 제목들만 기록되여 전해지고있으며 이 악곡의 제목들은 당시 가야국의 여러 지방의 옛 지명들과 결부되여있다.
《삼국사기》에 소개된 악곡제목들을 현재까지 밝혀진 해당 지방명과 결부시켜보면 다음과 같다.
① 하가라도(경상남도 함안지방)
② 상가라도(경상북도 고령지방)
③ 달기(경상북도 례천군 다인지방)
④ 사물(경상남도 사천지방)
⑤ 물혜(경상남도 함안군 리안지방)
⑥ 하기물(경상북도 금릉군 개녕지방)
⑦ 상기물(경상북도 금릉군 개녕지방)
⑧ 거열(경상남도 거창지방)
⑨ 사팔혜(경상남도 합천군 초계지방)
⑩ 보기
⑪ 이사
⑫ 사자기※ ⑫ 《사자기》는 민간에서 보급되던 사자춤음악에 기초하고있다.
이처럼 우륵이 창작한 12편의 가야금악곡들이 대개 가야국의 여러 지방의 이름들과 결부되여있는 사실은 한편으로 이 작품들이 각 지방의 민요들을 가지고 창작한것이거나 혹은 민간에 널리 보급되고있던 향토적인 음악들을 흡수리용한것임을 말해준다.
다른 한편 이러한 사실들은 오랜 기간의 연주활동을 통하여 여러 지방의 민요를 비롯한 인민음악들을 깊이 체득한 우륵의 폭넓은 음악지식과 견문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대 사람들의 생활감정과 정서적체험이 반영된 인민음악의 요소들을 자기의 음악창작에 받아들여 대중이 사랑하고 즐길수 있는 음악을 만들려고 시도한 우륵의 진지하고 원숙한 창작적태도와 자세를 엿볼수 있게 하여준다.
우륵은 가야국에서 활동하는 기간 가야금음악창작과 연주 그리고 후비육성에도 힘을 넣었다.
그는 새롭게 창안된 민족악기와 그 음악이 후세에 길이 보급계승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기의 가야금연주 및 창작기술을 넘겨줄 후비음악가들을 키우는 일에 적지 않은 관심을 돌렸다. 그가 키운 제자들중에는 니문과 같이 가야금연주와 창작으로 이름을 남긴 재능있는 사람도 있었다. 니문은 가야금연주로 뛰여났을뿐아니라 스승의 지도밑에 가야금음악창작에도 힘을 기울여 《오》(까마귀), 《설》(쥐), 《순》(메추리) 등 동물의 이름과 결부된 가야금곡들을 지었다.
6세기 중엽부터 우륵의 음악활동무대는 가야의 이웃 나라였던 신라에로 옮겨졌다.
가야는 한때 신라의 힘으로는 범접할수 없었던 강한 봉건국가였다. 그러나 6세기에 들어서면서 국력이 쇠퇴해져 급속히 강화된 신라의 압력에 눌리우게 되였다. 마침내 금관가야는 532년에 자기 존재를 마치고 신라에 통합되였으며 다른 소국들의 운명도 점차 기울어져가고있었다.
이러한 사회정치적환경과 어수선한 정세는 우륵에게 안착된 생활과 음악활동조건을 지어줄수 없었다.
그는 551년에 왕실전속음악가를 그만두고 제자 니문과 함께 가야금을 가지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이때는 가야소국들이 하나하나 자기의 존재를 잃어가던 시기였으며 대가야의 병합(562년)으로 가야국이 완전히 멸망되기 11년전이였다.
망국의 슬픔을 가야금에 담아 울리며 여러 지방을 거쳐 북상하던 우륵과 니문은 그해 3월에 신라의 랑비성(오늘의 충청북도 청주)에 이르렀다.
우륵은 한동안 이 지방 사람들속에서 머무르면서 가야금을 연주하였다. 처음으로 접하게 된 맑고 아름다운 가야금의 울림과 짙은 향토적인 정서는 그들속에서 경탄을 불러일으켰으며 우륵의 이름은 가야금과 더불어 사람들의 입과 입을 거쳐 널리 퍼져갔다.
그때 마침 이곳에 왔던 진흥왕(신라24대왕)이 우륵의 명성을 듣게 되였다.
그는 곧 사람을 보내여 우륵을 불러와 하림궁에서 그의 가야금연주를 들었다. 왕은 우륵이 타는 가야금의 신기묘묘한 음향과 심금을 울리는 형상력에 감동을 금치 못해하며 그를 당시 신라의 두번째 수도로 삼았던 국원성(오늘의 충청북도 청주)에 안착시키고 가야금음악을 전수보급하도록 하였다.
당시 신라의 위정자들이 우륵의 가야금과 그 음악을 받아들이고 장려하게 된데는 일정한 사정이 있었다.
신라는 삼국시기 세나라가운데서 뒤늦게 봉건제도를 수립한 나라로서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여러 방면에서 뒤떨어져있었다. 그런 까닭에 신라는 성립의 초기부터 일련의 락후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외부의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큰 관심을 돌리고있었다.
특히 6세기초부터 군주세습제에 기초한 봉건통치체계를 강화하는 한편 령토팽창정책을 통하여 6세기 중엽까지 가야국가들을 거의 통합하고 백제의 한강하류지역을 차지한 신라통치배들은 저들의 왕권과 중앙집권적통치체제를 강화해나가면서 그에 맞게 궁중음악을 새롭게 정비강화하여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가야로부터 신라에 이르는 여러 지역에 보급되면서 사람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던 가야금음악과 같은 민간음악을 장려하게 되였으며 귀족상층부의 일부 보수파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궁중음악에도 그것을 도입하게 되였던것이다.
우륵은 이때부터 신라의 국원성에서 생의 마지막까지 가야금음악창작과 연주활동 그리고 가야금음악후비육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여러곳에서 가야금을 배우러 찾아오는 수많은 희망자들을 스스럼없이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자기의 음악지식과 기술을 넘겨주기 위한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우륵이 신라에서 키운 제자들중에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계고, 법지, 만덕이라고 부르는 음악가들이다.
이들과 관련하여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진흥왕 13년(552년)의 기록에는 《왕이 계고, 법지, 만덕 세사람을 우륵에게 보내여 가야금음악을 전수받게 하였는데 우륵은 이들 세사람의 재능과 소질을 참작하여 계고에게는 가야금을, 법지에게는 노래를,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고 밝혀져있다. 이러한 기록내용은 많은것을 시사해준다.
기록은 우선 우륵의 다재다능한 예술적소양에 대하여 엿볼수 있게 한다. 그가 세명의 제자들에게 각각 가야금과 노래, 춤을 가르쳤다고 하는것은 우륵이 가야금뿐아니라 노래와 춤에 대하여서도 조예가 깊은 예술가였음을 알게 한다.
또한 왕이 우륵의 가야금음악을 전수받을 젊은 인재들을 우륵에게 보낸 사실을 통하여 당시 신라봉건지배층이 가야금음악을 궁중직업음악에 도입하고 후세에 계승되도록 하는데 크게 관심하고있었다는것과 이때 우륵의 나이도 이미 로년기에 이르렀을것으로 추정할수 있게 한다.
우륵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서도 언제나 성실하였으며 제자들속에서 발현되는 창조적재능과 독창성을 귀중히 여기고 그것이 훌륭한 결실을 보도록 이끌어준 진실한 교육자였다.
그는 세 제자들이 자기가 창작한 12곡을 배운 후에 그것을 다섯곡으로 개작정리하여 내놓았을 때 자기의 귀중한 창조물에 손을 댄 고까움이 아니라 훌륭한 음악형상을 창조할수 있게 된 제자들의 재능과 열정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기며 지지와 고무를 주었고 그들이 창작적환상을 마음껏 펼쳐나가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이것은 제자들을 대하는데서 자그마한 사심도 없이 허심하고 진실하게 량심을 바친 우륵의 참된 교육자적품성을 보여주는 한편의 일화라고 할수 있다.
우륵은 신라에서 후비육성과 함께 가야금음악을 널리 보급하기 위한 연주활동도 적극 벌렸다.
그는 국원성의 변두리를 굽이돌아 한강으로 흘러드는 달천기슭의 자그마한 언덕우에서 자기의 가야금음악을 듣고저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하여 가야금을 즐겨 타군하였다.
그가 늘 가야금을 타거나 가르치던 이곳을 가리켜 사람들은 《탄금대》라고 불러 후세에 전했는데 오늘도 이 탄금대는 충주지방의 오랜 유적의 하나로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먼 옛적 음악의 3대성인의 한사람이라고 일러온 우륵과 그가 즐겨 타던 가야금음악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해주고있다.
그리고 그가 즐겨 가야금을 타거나 가르치던 이곳에는 당시 그의 가야금음악을 듣거나 배우려고 모여든 사람들에 의하여 여러개의 마을까지 생겨났으며 그때부터 이곳을 청금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국원성에서의 우륵의 음악활동은 세나라시기 신라에서 민족기악이 급속히 발전하도록 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신라에서는 우륵의 활동과 더불어 가야금이 널리 보급되고 우륵을 비롯한 재능있는 음악가들에 의하여 수많은 가야금곡들이 창작되여 연주되였다. 자료에 의하면 우륵의 활동기를 중심으로 7세기초중엽에 이르는 기간에만도 신라의 궁중과 민간에서 창작연주된 가야금곡들은 무려 185곡이나 되였는데 그 악곡들은 하림조와 눈죽조라고 부르는 두개의 곡조에 기초한것들이였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전기 신라시대에 가야금음악이 활발이 창작보급되고 있은 정형과 함께 그 음악양식발전이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고있었음을 알게 한다.
가야금은 일본을 비롯한 이웃 나라들에도 전하여져 《신라금》(이것은 가야사람인 우륵이 신라에 넘어가 활동하면서부터 가야금과 그 음악이 널리 보급발전한데서 나온 말이다.)이라고 불리웠다.
이처럼 우륵은 한생을 가야금의 창안제작과 그 음악창작 및 연주활동, 후비육성에 바쳐 가야금음악의 전통을 마련하고 민족음악의 발전토대를 마련하는데 커다란 업적을 쌓았다.
음악가 우륵이 처음으로 만들고 보급전수한 가야금은 천수백년의 력사를 거쳐 후세에 전해지면서 우리 인민의 감정과 정서를 담는데 매우 적합한 대표적인 민족악기로 사랑을 받아왔으며 그 보급리용과정에 수많은 가야금명수들이 배출되였다.
가야금은 오늘 우리 시대에 와서 위대한 김일성주석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주체적인 민족음악건설방침과 현명한 령도밑에 현대적인 악기로 개량발전되고 그 음색과 음향, 연주법들이 더욱 발전되여 그 어떤 음악이든지 훌륭히 연주할수 있게 되였으며 전문예술단체 예술인들뿐만아니라 각계층 인민들과 청소년들의 사랑을 받는 대중적인 민족악기로 광범히 보급리용되고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