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곡가 슈만과 그의 창작활동
김 원

유럽랑만주의음악의 대표적작곡가이며 진보적인 음악평론가인 알렉싼더 로베르트 슈만(Alexander Robert Schumann)은 1810년 6월 8일 도이췰란드의 동부도시 츠브카우에서 책방주인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6남매중 막내였던 슈만은 라이프찌히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가 되려는 희망을 가졌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아버지로부터 문학적취미를, 도시에서 이름난 의사의 딸인 어머니로부터 예민한 예술적감각을 물려받았다.
슈만은 어릴 때부터 음악과 문학을 매우 좋아하였다.
그는 7살에 작곡을 시작하여 10살때에는 피아노공개연주회를 가지였으며 11살때에는 벌써 합창곡과 관현악곡을 썼다.
슈만은 음악 못지 않게 문학에도 대단한 흥미를 가지고있었다.
당시 그의 아버지의 책방에는 문학과 예술, 력사와 철학 등 여러 분야의 책들이 수없이 많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학의 세계에 깊숙이 빠져 고전작품으로부터 시작하여 당대의 이름난 작가들의 작품들을 빠짐없이 탐독하였으며 어린 나이에 벌써 어른들도 리해하기 힘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철학가들의 저서들과 《플라타크 영웅전》같은 력사책들을 즐겨 읽었다.
이처럼 슈만은 어린시절부터 다방면에 걸쳐 견문을 넓히고 풍부한 지식을 소유하여 식견을 높이였다.
이것은 장차 그로 하여금 지성이 높은 음악가로서 자기 고유의 고상한 예술을 창조할수 있게 한 자양분으로 되였다.
7살때 슈만은 요한 고트프르드 쿤츠에게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음악선생인 쿤츠는 제한된 교육자로서 어린 제자에게 가장 일반적이고 초보적인 지식외에 아무것도 가르칠수 없었다.
이처럼 불충분한 교육을 받은 슈만이였으나 피아노연주회에서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가정음악회와 중학교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자주 출연하여 《신동》으로 이름을 날리였다.
슈만은 9살때 당시 유명한 피아노연주가였던 모셀레스의 연주를 보고 완전히 매혹되여 어떻게 해서라도 훌륭한 피아노연주가로 되여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창작적재능이 뛰여났던 슈만은 지방도시의 뒤떨어진 조건에서도 생동하고 흥미있는 예술생활과 접촉할수 있었다.
학교시절에 그는 음악을 사랑하는 학생들과 피아노련탄으로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의 작품들을 완벽하게 연주하였으며 특히 놀랄만 한 관찰력과 재능을 가지고 친구들의 특징적이며 전형적인 성격을 찾아내여 음악으로 묘사해내군 하였다.
친구들은 슈만의 음악을 듣고 어렵지 않게 자기들의 모습을 찾아볼수 있었다.
이렇듯 슈만은 어린시절부터 인물을 음악적으로 형상하는데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있었다.
또한 슈만은 이 시기에 친구들과 함께 크지 않은 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직접 지휘도 맡아 하면서 이름난 음악가들의 작품들과 함께 자기가 13살때 창작한 《찬미가》를 연주하여 사람들속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다.
슈만은 1826년에 아버지를 잃었다
이것은 음악가로 되려던 그의 꿈이 빨리 이루어질수 없게 하였다.
18살때 슈만은 어머니의 강요에 못이겨 라이프찌히종합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배웠다.
그는 여기에서 라이프찌히의 귄위있는 음악가이며 교육자였던 위크와 그의 딸 클라라를 알게 되였다.
클라라와의 상봉은 슈만의 인생에서 매우 의미심장한것으로 되였다.
슈만의 이후 생활과 창작은 대부분 클라라의 이름과 그리고 그들의 사랑과 련결되여있었다.
슈만은 클라라의 피아노연주에서 엄격하게 교육된 훌륭한 측면들을 보았으며 그를 통하여 자신의 결함을 발견할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피아노연주가이며 교수인 클라라의 아버지 위크에게서 방조를 받으려고 하였다.
위크는 슈만의 뛰여난 재능을 보고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으며 이때부터 슈만은 유능한 선생의 지도밑에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슈만은 슈베르트와 바흐의 작품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것은 그가 음악적으로 성장하는데 매우 큰 의의를 가지였다.
1829년 봄에 슈만은 하이텔베르크종합대학으로 전학하였으나 《메마르고 랭담한 법률학》보다 음악공부에 더 열중하였으며 20살때부터는 음악을 전공하는 길로 나아갔다.
피아노훈련을 지나치게 하여 손가락을 상한 슈만은 유명한 피아노연주가로 되려던 희망을 버리고 작곡의 길을 택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100여편의 가곡을 창작하였다.
1834년에 슈만은 잡지 《음악신보》를 발간하고 15년동안 여러가지 난관을 이겨내면서 문필활동을 정열적으로 벌리였다.
문필가이며 음악가인 슈만의 평론들은 도이췰란드음악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는 《음악신보》를 통하여 당시의 형식주의적이며 보수적인 음악경향을 반대하고 새롭고 자유로운 음악을 창조하는 운동의 앞장에 섰다.
또한 《음악에 대한 가정교육과 생활규범》을 비롯한 음악평론들에서 새로 창조된 음악작품들의 우단점을 공정하게 평가하였으며 부유한 계층의 취미주의적쌀롱음악들에 예리한 필체로 랭소를 퍼부었다.
슈만은 1830년부터 1835년까지의 기간에 예술가로서 성숙되고 높은 기술을 보여주는 많은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특히 이 시기 그의 창작적관심은 피아노음악창작이였다.
피아노연주가였던 슈만은 자기 피아노음악의 독특한 세계를 느끼였으며 피아노음악을 성악이나 교향곡보다 훨씬 자유로운것으로 인식하고있었다. 피아노음악이야말로 자기의 환상을 기묘하게 표현할수 있고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서정적감정과 기분을 섬세하게 전달할수 있는 분야였던것이다.
슈만의 창작유산에서 가장 훌륭한것은 피아노음악이며 특히 1830년대에 창작된 작품들이다.
《사육제》, 《교향악적련습곡》, 《도대조환상곡》, 《클레이슬리아나》, 《환상적소품》, 《어린이정경》이 우수한 피아노작품들로 손꼽힌다.
1840년대에 들어와 슈만의 창작적범위는 더욱 넓어져 교향곡, 실내악, 오라토리오, 가극에까지 미치였으며 이 시기 피아노곡은 보다 적게 창작되였다.
1843년부터 슈만은 멘델스존이 세운 라이프찌히음악학교 작곡교수로 일하면서 새 세대 음악가들을 교육육성하는 사업에 정열을 기울였다.
다음해 10월에 슈만은 드레즈덴으로 자리를 옮기였다.
여기에서 어느 한 악단의 지휘자로 된 그는 클라라와 함께 베를린, 윈, 쁘라하, 뻬쩨르부르그, 모스크바 등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하여 음악가들과 음악애호가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한편 이 시기에 슈만은 작품창작에 전심하여 《청소년들을 위한 피아노곡집》 등 많은 곡들을 창작하였다
이 피아노곡집으로 하여 슈만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피아노곡집에 들어있는 《사나운 기마수》와 《유쾌한 농부》는 피아노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연주할줄 알아야 하는 지정곡으로 되고있다.
1848년 도이췰란드 전역에서 부르죠아민주주의혁명이 폭발하자 슈만은 이 혁명을 지지하여 《검은것, 붉은것, 노란것》 등 3편의 남성합창곡을 창작하여 폭동군중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1850년부터 슈만은 라인강반의 도시 듀쎌도르프에서 관현악단과 합창단 지휘자로 음악활동을 벌리였다.
그러나 슈만은 이전에 생긴 정신병이 해가 갈수록 악화되고 청각마비와 불면증까지 겹쳐 1853년에는 지휘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수 없게 되였다.
1854년에 슈만은 절망에 빠져 자살을 시도하여 라인강에 몸을 던지기까지 하였다.
그후 슈만은 본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2년동안 치료를 받다가 이 병원에서 1856년 7 월 29일에 46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슈만은 《봄》, 《라인》 등 4편의 교향곡, 3편의 현악4중주곡을 비롯하여 수많은 피아노소품들과 실내악곡, 관현악을 동반한 합창곡, 수백편에 달하는 가곡들을 인류음악의 고귀한 유산으로 남기였다.
피아노곡집 《어린이정경》과 함께 《라소조》로 불리우는 피아노협주곡도 슈만의 대표작의 하나로 되고있다.
슈만은 1840년에 단악장으로 된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을 작곡하여 클라라의 연주로 다음해 2월에 첫 공연을 하였으나 출판업자들의 출판거부로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하게 되자 여기에 2, 3악장을 보충하여 피아노협주곡 《라소조》로 완성하였다.
슈만의 유일한 협주곡인 이 작품은 외형적인 화려함보다는 내면적인 아름다움과 서정성을 더 추구한 랑만주의음악의 대표작의 하나로 알려져있다.
교향곡 《라인》도 역시 슈만의 대표작의 하나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있다.
일명 《라인교향곡》(5개의 악장)으로 불리워지는 이 작품은 슈만의 작품가운데서 가장 밝고 아름다운 곡으로서 삶의 긍지와 환희가 차넘치는 랑만주의적교향곡의 하나로 되고있다.
이밖에도 피아노곡집 《어린시절의 추억》, 극음악 《만프레드》와 《파우스트》, 가곡작품들인 《시인의 사랑》, 《녀자의 사랑과 생애》 등을 비롯하여 가곡집과 합창곡 《악단의 요정》, 교성곡 《청주와 페리》, 가극 《게노페파》 등이 널리 알려져있다.
《옛 스승에게는 영예를, 새 세대들에게는 열정을 주라!》, 슈만은 한생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
슈만의 공적을 칭송하여 1913년에 그의 고향도시에는 슈만박물관이 건립되고 1920년에는 로베르트 슈만음악협회가 결성되여 그의 작품을 널리 보급하였다.
슈만의 창작에서 기본은 피아노곡과 가곡이다.
그는 피아노음악에서 기교보다도 능숙한 화성의 리용, 성부배치의 변화, 페달의 효과적인 사용 등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슈만은 가곡창작에서 슈베르트의 계승자로서 가사에 대한 깊은 심리적분석에 기초하여섬세한 선률의 가곡들을 창작하였으며 또한 반주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지위를 성악과 같은 위치에까지 높여놓았다.
슈만은 또한 근대음악평론의 길을 개척한 음악리론가이다.
그는 예술의 반동화를 반대하고 음악의 진보적리념을 실현하기 위한 평론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슈만은 도이췰란드랑만주의음악의 표제음악의 창시자이다.
슈만은 19세기 랑만주의음악의 가장 대표적인 작곡가, 음악평론가, 지성도가 높은 지성인으로서 도이췰란드랑만주의음악의 전성기를 이룩한것으로 하여 도이췰란드음악과 유럽음악발전사에서 뚜렷한 지위를 차지하고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