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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의 좌표속에

 

오보에, 하프, 소관현악을 위한 2중협주곡 《견우와 직녀》

프랑크 슈나이더

 

1. 접근시도

 

우리가 알다싶이 유럽의 음악은 그 특성이 수세기가 넘도록 다른 세계로부터 이렇다할 영향을 받지 않고 발전되여왔다.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도 음악이 실행된다고 알고있었더라도 그런 알려진 사실을 《원시적》이라든가 그저 낯설어서 유럽고유의 음악사상과는 량립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던것이 지난 세기말 유럽의 자본이 세계시장을 완전히 손에 넣고 난 후에야 유럽의 문화 역시 그 영향을 입어 지금의 의식에 접하게 되였다.

무쏘르그스끼라든가 드뷔시나 부조니같은 작곡가들은 서아시아와 동아시아, 또는 인디아의 민요들을 단순히 그림같이 아름다운 리해로만 묘사하지 않았다. 이제 우리 시대의 신음악(die neue Musik)은 이미 유럽에서만 요긴하게 제기되는것이 아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지역에서는 오히려 신음악이 옛날 유럽음악의 주도권에 대한 반작용으로 되고있을뿐 아니라 전위음악의 기본령내에서조차 유럽밖의 전통으로의 의식적인 복귀를 통해 새롭게 생겨나고있다. 물론 역시 다수의 작곡가들에게서 창조적인 매개, 즉 《서양》으로부터의 발전된 현대적인 작곡방식과 종종 판이한, 례를 들어 음악적사고와 그 실제에 있어서 《동북아시아》형태간의 조화로운 합성을 찾을수 있다.

이런 시도에 대한 의지도 의지려니와 무엇보다도 능력을 갖춘 소수의 작곡가들중에서 윤이상을 꼽을수 있다.

 

2. 얼마나 멀고 얼마나 가까운가?

 

윤이상의 광범위한 작품을 한마디로 말하기도 물론 어렵다. 양식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윤이상을 어느 특정한 풍조의 흐름에 넣을수도 없고 또 저 먼곳으로부터 온 그의 《작업마당》의 정신적, 심리적, 구조적규칙들은 극히 제한된 한에서만 해명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선 자주 전용되는 장식구, 즉 윤이상의 특이성이 향토에 뿌리박힌 생활양식과 세계관 그리고 그가 완전히 획득해낸 현대 유럽의 음악적사고의 표준과의 실로 조직적인 화합에서 힘입은것이기때문이며 그동안에 비교가 가능한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음악적현상의 정확한 통찰은 오히려 저지하는 라태한 모방의 경향도 나타났기때문이다.

다음은 사전적인 예비지식에 그치겠지만 분석시 그의 음향언어의 두드러진 특색중 몇가지를 고려에 넣기 위해서는 아마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첫째로 유럽적전통의 구조적인 결정론에 대한 차이로서 개별음들과 조성적으로 중심측을 정하는 음향동작들의 선호적작용들, 요컨대 음색의 고유성전반을 들수 있다.

또한 그의 음악은 그 특유의 관조적시간개념이 지배하는데 이 시간개념은 한 작품에 맴도는 흐름의, 즉흥을 위한 미완의, 끝없는 충만의, 비완력적형상의 성격을 부여한다.

다음으로 이 음악은 하나의 특정한, 교체되는 긴장상태들의 비회화적이며 반주관적인 《의미심상성》을 암시하는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것은 긴장상태를 말할 때는 우리(유럽)에게 익숙한 갈등극이나 전투목적의 틀이나 전략전술에 따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음양원리의 융화적인 도교적변증법에 의해 조정되는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긴장상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의 음악을 처음 들을 때조차 그것이 《표현주의적인》양식으로 규정될수 있거나 《구성주의적인》양식으로 규정지을수 있거나간에 균형이 잘 잡힌 내적일관성과 정서적리해의 용이성, 지성적명석성 등을 어느 특정한 전통음악에서의 귀익은 표절같은 느낌이 없이 감득하게 된다. 다시말해서 윤이상의 음악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국적인 면이 없으면서도 어딘가모르게 조선적이며 동시에 비결의 배경이 없으면서도 어딘가모르게 유럽적이다.

그의 음악은 어느 틀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그의 음악은 민족사와 초현대의 보편적인 처세경륜사이의 갈등지대속에서의 그의 인격의 표출이다. 그리고 그의 말을 빌리면 그의 음악은 곳곳이 확고한 섭리에 의한 질서로 채워진 세계에 다소 《조직적인 무질서》를 가져오는데 이는 움직임을 창출해내고 유지할수 있는 저 훌륭한 정신의 한쪼각이라 여겨진다.

 

 

3. 최초의 륜곽

 

이 곡은 윤이상의 창작품중에서 첫 협주적작품은 아니고 1972년의 《협주적음형들》로부터 시작되여 소관현악을 위한 《협주적단편》, 첼로협주곡(1975∼76), 플류트협주곡(1977)으로 펼쳐지는 일련의 협주곡작품대렬의 뒤를 잇는 곡이다.

이 곡은 1977년초 연주가 흘리거부부(Heinz und Ursuia Holliger)를 위해 씌여졌고 역시 그들에게 주어져 그해 9월 26일 도이췰란드 베를린의 필하모니에서 프란시스 트라비스(Francis Travis)의 지휘로 처음으로 연주되였다. 특기할만 한것은 두 연주거장들이 고도의 연주기법적어려움과 각 독주부분의 무한한 음향상의 섬세함을 가능케 했을뿐아니라 그들의 각별한 동반자적연기를 서로의 관련에서나 관현악과의 대치에서나 훌륭히 연출해냈다는 점이다. 독주부분들의 처리는 정말 부지중에 한쌍의 비유체를, 즉 영향이 큰 주변정황속에서 무엇인가를 체험하거나 고통을 겪는 대조적인 주역들의 표현적으로 전개되는 극적인 련계를 나타낸다.

오보에와 하프를 여기서 음향이 큰 편이 아닌 악기로 통용시키기 위해 윤이상은 이것들을 음이 약하도록 편성한 《작은》관현악과 조화시켰다. 즉 현악기외에 각각 두대씩의 플류트, 클라리네트, 화고트 그리고 오보에 한대, 호른 두대, 트럼베트와 트롬본이 각각 한대씩에, 두명의 연주자를 위한 풍부한 타악기들이 그 편성이다.

여기서도 하나의 특유한 무리적움직임이 눈에 띄는데 례하면 금관악기군같은 개별음향군들이 특히 무리를 지어 특정한 동기적인 형상종목을 가지고 등장하기도 하고 혹은 이들이 독주자들과의 협주적인 교대연주속에서 정확히 유발된 대응방식을 나타냄으로써 우리가 쉽게 알수 있는 동조자들이라든가, 반대자들이라든가, 중립적인 단역들 등을 그려내기도 하는것이다. 어쨌든 동등한 악기의 형세가 더해주는 인상은 여기서의 초점이 반주를 수반한 빛나는 걸작도, 상례적인 영웅의 숙명을 담은 교향악극도 아니라는것이다. 우리는 가벼운 소설적구조속에 담겨있고 조형적인 장면의 표상력에 의거해있는 하나의 비유적인 음향으로 양식화된 줄거리를 체험하게 되는것이다.

이 협주곡은 단악장이기는 하지만 뚜렷이 구분되는 여러 단계로 나누어진다. 즉 에피소드들의 련속인데 이들을 대략 고전적인 3부분형식구조(빠르게, 느리게, 빠르게)에 따라 하나의 되풀이형식을 이룬다. 때때로 《자기들》만을 위한 정적이고 부드러운 명상속에서 오보에와 하프가 하나의 음향길을 질주하는데 이 길은 그들을 구체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종종 극심한 《피안》의 지역까지 몰고가는것처럼 보이나 결국 그들보다 훨씬 세속적인 다른 악기들의 등장과 함께 하나의 예정된 조화를 찾도록 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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