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교육과 조선음악사연구에 기여한 문하연

문하연(1909 –1988)은 1930년대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 우리 나라 민족음악예술의 보급발전을 위하여 적극 활동한 음악교육가이며 음악리론가였다.
그는1909년 2월23일 함경북도 길주군 길북리(당시 길주군 길주면 길성리)에서 가난한 선비가정의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문하연은 리조말엽 궁중의 학자로 복무한바 있는 아버지 문하응의 영향밑에 서당에 다니며 글공부를 하는 한편 삼촌들의 방조로 음악과 미술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천성인듯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잘한 문하연은 미술에도 남다른 취미가 있어 그림그리기를 무척 좋아하였다. 하여 한때 부모들의 권고로 미술공부에 뜻을 두기도 하였었다.
18살나던 1927년에 미술공부를 목적으로 현해탄을 건너간 문하연은 엄청난 학비를 요구하는 일본땅에서 미술공부를 한다는것은 자기 처지에 엄두도 못낼 일임을 알고 실망하여 돌아서고말았다.
그리하여 미술보다는 학비부담이 낮은편인 음악을 택하게 되였던것이다.
음악과 함께 한생을 살아온 문하연의 음악적생은 이렇게 시작되였다.
남달리 좋은 목소리와 음악적재능을 소유하였던 그는 어렵지 않게 입학시험에 통과하여 일본동양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음악공부 역시 집에서 푼푼히 모아 이따금 보내오는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는 피눈물나는 수모와 멸시를 참고 견디며 식당에서 그릇가시는 일, 우유배달 등 맞다드는대로 일거리를 찾아 학비를 보충해가면서 이악하게 공부하였다.
문하연은 학교에서 성악적재능을 인정받았고 성악가로서의 앞날을 전망할수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성악에 있지 않았다.
제 민족의 노래조차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게 하는 일제의 파쑈통치밑에서 성악을 배운들 남의 나라 노래를 누구를 위해 불러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날로 커갔던것이다.
문하연은 성악보다도 음악기초리론과 작곡, 악기편성법 등 다방면적인 음악지식을 소유하는데 모를 박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장차 조국의 음악후비들을 육성하는데 쓸모있는 지식을 습득하려는 결심에서였다.
1932년 힘겨운 고학으로 학교를 졸업한 문하연은 음악교원이 되여 후대들에게 음악의 나래를 달아주려는 푸른 꿈을 안고 고향 길주로 돌아왔다.
허나 조선인민의 민족적인 모든것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탄압과 폭행속에서 수난당하는 조국의 현실을 보며 빼앗긴 조국땅에서 진정한 민족교육이란 허황한 꿈이였음을 치솟는 울분속에 감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자기를 아끼고 위해주던 고향땅의 선생들과 벗들의 권고로 《귀국독창회》를 가진 후 음악창작과 교육활동을 자유롭게 할수 있는 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갔다.
정든 고향땅을 등지고 살길을 찾아 간도땅으로 흘러가는 류랑민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느면서 문하연은 피눈물이 고이는 심정을 담아 가요 《두만강 배사공》을 지어 불렀다.
문하연은 당시 조선사람들이 많이 모여사는 룡정으로 갔다.
1880년대초 두 세대의 조선사람들이 용드레촌에 자리잡은 후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룡정은 1920년대∼30년대에 이르러서는 수만명의 조선사람들이 사는 도시로 되였다.
따라서 시내의 여러곳에 소학교, 중학교들이 세워져 청소년들에 대한 민족교육을 진행하였고 조선과 중국의 여러 지역과 쏘련의 원동지방에서까지 많은 조선청년들이 배움의 길을 찾아 모여듦으로써 말그대로 룡정은 조선사람들의 민족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로 되고있었다.
이러한 조선학교들에서는 국내와 일본 등에서 음악전문교육을 받은 윤극연(일본동양음악학교 졸업후 룡정동흥중학교, 광명녀자고등중학교 등에서 음악교원), 김선문(평양숭실전문학교 졸업후 룡정명신녀자고등학교 음악교원), 허흥순(서울 리화전문학교 피아노과 졸업후 룡정명신녀자전문학교 음악교원), 박창해(서울연희전문학교 졸업후 룡정은진중학교 음악교원) 등의 음악가들이 활동함으로써 중학교는 음악인재양성과 함께 음악창작 및 예술창조활동의 거점으로 되고있었다.
문하연은 룡정에 온 후 대성중학교 음악교원을 하였다.
그는 학생들에게 음악기초지식과 노래를 가르치는 한편 취주악대를 조직하고 그 연주자들을 많이 양성함으로써 연변지구의 조선학교들에서 취주악이 널리 보급발전하도록 하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문하연은 또한 학교내에 하모니카합주단을 새롭게 조직하고 운영해나갔는데 이 합주단은 그 규모가 크고 연주기량이 높은 독특한 연주단체로 널리 소문이 났었다.
문하연은 해방전 시기 룡정의 녀자국민고등학교와 연길에 있는 간도사도학교에서도 음악교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시 간도사도학교는 농업과 관련한 교육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범교육과정안을 취급하는 일종의 교원양성기관의 구실을 하였는데 문하연이 교육양성한 많은 제자들은 이후 동북의 여러 지방들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에 사는 조선사람들에 대한 음악교육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8.15 해방후 문하연은 룡정의 근화녀자중학교와 영신중학교에서 교장으로 사업하면서 음악가후비육성을 계속하였다.
무슨 일에서나 열정적이며 활동적인 성격을 소유하였던 그는 음악교수에서도 깊은 음악리론지식과 구수한 언변, 높은 교육자적책임성으로 하여 학생들속에서 인망이 높았으며 해방을 전후한 시기 연변지역 음악교육계의 대표적인 교육자로 인정받아왔다.
문하연은 1946년 7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찾아주신 조국땅에서 음악인재육성에 기여할 일념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국후 문하연은 길주녀자고급중학교 교장, 농업전문학교 교장으로 사업하였다.
이 시기 그는 새 조국건설로 들끓는 현실을 격동된 심정으로 체험하면서 교육활동을 적극 벌려나가는 한편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를 비롯한 당과 국가의 민주주의적시책들을 해설선전하는 예술활동을 정열적으로 조직해나갔다.
그러던 1947년 말 문하연은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두터운 신임과 배려로 평양에 갓 창설된 음악전문학교 교장으로 임명받게 되였다.
해방후 새 조선의 음악예술을 떠메고나갈 음악인재양성문제에 깊은 관심을 돌려오신 위대한 주석께서 1947년 9월 평양음악전문학교[평양음악전문학교는 1949년 3월에 해주음악학원과 통합하여 대학제(본과 3년, 연구부 2년)에 의한 국립음악학교 (평양음악대학의 전신)로 창립되였으며 1952년 11월 명칭을 평양음악대학으로 개칭하고 예과 2년, 학부3년의 5년제 학제를 가진 민족음악간부양성기지로 강화발전되였다.]를 내오도록 조치를 취해주시고 전국각지에서 활동하는 유능한 음악가들을 찾아 학교의 교육진영을 꾸려주시면서 문하연을 소환하여 공화국의 첫 음악전문학교의 초대교장으로 내세워주시였던것이다.
해방전 민족의 음악인재육성에 바치려는 불타는 열정조차 제 나라땅에서는 쏟을수가 없어 피눈물을 뿌리며 두만강을 건너갔던 문하연이였다.
지난날 청춘의 희망도, 창작과 교육의 자유도 송두리채 빼앗기고 망국노의 설음과 울분이 골수에 사무쳤던 그였기에 해방된 조국땅에서 나라의 음악인재들을 양성할 영예롭고도 무거운 임무를 받아안은 감격과 기쁨은 류달리 큰것이였다.
문하연은 식민지 오랜 인테리들을 차별없이 한품에 안아 부강조국을 건설하는 역군으로 내세워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대해같은 은덕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보답할 뜨거운 열정을 안고 교육사업에 달라붙었다.
그는 평양과 여러 지방을 다니며 유능한 음악가들과 재능있는 후비들을 찾아 학교의 교육진영과 학생들을 꾸려나가는 한편 음악전문가들을 양성하는 원종장으로서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나가는 사업을 착실하게 벌려나갔다.
때로는 자신이 직접 교단에 서서 음악리론과 성악, 조선음악사를 가르치며 재능있는 음악후비들을 키우는데 시간과 정력을 아끼지 않았다.
1950년 6월 우리 공화국에 대한 미제의 침략으로 이 땅에 전쟁의 불구름이 일자 문하연은 서슴없이 교단을 떠나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성전에 뛰여들었다.
조국해방전쟁기간 문하연은 조선인민군 해군협주단 단장,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선전부 문화예술과장으로 활동하면서 인민군군인들을 전쟁승리를 위한 싸움에로 고무추동하는데 적극 기여하였다.
전쟁의 승리와 함께 다시 교단으로 돌아온 문하연은 평양음악대학(당시) 성악학부장, 과학연구부장으로 사업하면서 음악후비육성과 민족음악의 계승발전을 위한 연구집필활동을 정력적으로 벌려나갔다.
그는 성악가후비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이는 한편 조선음악사강의를 담당하여 교육하면서 학생들이 우리 민족음악의 유구한 전통과 자랑찬 유산들을 잘 알고 귀중히 여기며 그것을 현대적미감에 맞게 옳게 계승발전시켜 나갈데 대한 조선로동당의 주체적문예방침을 철저히 관철해나가는 유능한 음악전문가, 민족음악간부로 자라나도록 적극 노력하였다.
이 시기 문하연의 과학연구 및 집필활동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것은 해방후 처음으로 《조선음악사》(고대 및 중세편)교과서를 집필하여 내놓은것이다.
그는 음악사집필에서 고대와 중세의 매 력사적시기에 따르는 우리 민족음악의 사회적조류와 다양한 종류 및 양식들의 발생발전에 대하여 체계성있게 밝히는 한편 대표적인 음악작품유산들과 당대의 음악발전에 기여한 이름있는 음악가들의 예술창조활동도 많이 소개함으로써 우리 나라 고대, 중세의 음악발전력사를 전면적으로 깊이있게 리해할수 있도록 하였다.
문하연이 집필하여 출판보급된 《조선음악사》(1966년판)는 학생들과 예술인들속에 유구한 력사를 가진 우리 나라 민족음악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 그리고 음악유산들의 다양성과 풍부성에 대한 깊은 지식을 주며 높은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는데 기여하였으며 그후 조선음악사연구를 더욱 심화발전시켜나갈수 있는 기초로 되였다.
문하연은 이밖에도 《조선문화사》(음악무용부문)와 《화성학기초》를 비롯한 여러편의 음악리론도서들과 소론문, 평론, 민족음악유산상식자료 등 수십여편의 가치있는 연구자료들을 집필발표하여 민족음악보급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러한 리론적공로로 하여 그는 1964년에 공화국의 첫 예술학 학사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문하연은 위대한 수령님과 당의 크나큰 사랑과 신임속에 1959년 체스꼬슬로벤스꼬(당시)의 쁘라하에서 진행된 《쁘라하의 봄》음악축전에 조선음악가대표단 성원으로 참가하였으며 공화국의 많은 훈장과 메달을 수여받았다.
그는 환갑나이가 지난 후에도 민족음악발전과 예술교육에 도움이 되는 집필활동을 정력적으로 벌렸으며 1977년부터는 과학백과사전출판사 편집원으로 사업하면서 가치있는 음악리론도서들을 담당편집하여 내놓았다.
해방전 일제식민지통치의 암흑속에서도 민족의 광명한 앞날을 그리며 이국땅에서 민족음악교육에 이바지하여왔고 해방후에는 새 조선의 음악인재양성과 예술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해온 문하연은 말년에도 손에서 펜을 놓지 않고 《조선음악사》를 보충완성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문하연은 자기가 해방전에 이루지 못하였던 미술공부에 대한 뜻을 이어 공화국의 품에서 재능있는 미술가로, 공훈예술가로 자라난 아들의 가족과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다가 1988년 5월13일 79살을 일기로 사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