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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멘델스존과 그의 창작활동

 

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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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췰란드 랑만주의음악의 대표자의 한사람인 펠릭스 멘델스존 ― 바르톨디(Felix Mendelsson Bartholdy)는 1809년 2월 3일 함부르그에서 태여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한 멘델스존은 유리한 조건에서 마음껏 공부하여 음악가로서의 튼튼한 기초를 닦았다.

그의 성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것은 할아버지와 부모들 그리고 음악선생들의 미학사상과 리론이였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는 당시의 이름난 철학가였으며 은행가였던 아버지는 계몽주의의 신봉자로서 아들의 스승으로, 조언자로 되였다. 그의 어머니는 은행가의 딸로서 음악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있었다. 이 가정에는 펠릭스 외에도 세 형제가 있었는데 그중 맏누이 파니는 특출한 음악적재능을 가지고있었으며 여러편의 가곡집을 출판하였다.

멘델스존의 가정은 1812년 프랑스에 의하여 함부르그가 점령되자 베를린으로 이사하였다.

6살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멘델스존은 인차 자기의 뛰여난 음악적재능을 나타내였으며 부모들은 그를 베를린의 이름있는 음악교육자들에게 보내여 전문음악교육을 받게 하였다.

그리하여 멘델스존은 베르거의 지도밑에 유럽의 훌륭한 피아노연주가들의 대렬에 들어설수 있는 기술을 련마하게 되였으며 괴테의 친구였던 첼터에게서 음악리론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소유할수 있었다.

또한 어린 멘델스존이 성장할 당시 그의 가정환경은 그가 정신적으로나 창작면에서 급속히 발전할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가져다 주었다.

멘델스존의 가정은 그 시기의 뛰여난 지식인들과 문학가, 예술가들이 많이 모이는 흥미있는 문화적환경이였다.

그의 집에서 열리는 음악회에는 언제나 하이네, 웨버, 모쉘레스 등 이름있는 문학가와 음악가들이 많이 참가하였는데 그 과정에 멘델스존은 일찍부터 그들과 따뜻한 친교관계를 가질수 있었다.

이처럼 유리한 교육조건과 음악적인 환경은 멘델스존이 어려서부터 뛰여난 음악적재능을 나타내는데 작용하였다.

9살나던 해인 1818년에 어느 한 음악회에 출연하여 어려운 피아노협주곡을 능숙하게 연주함으로써 사람들을 놀래운 멘델스존은 이때부터 음악연주와 창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1살때 그는 교향곡과 가곡들을 창작하여 연주함으로써 이름난 소설가 괴테를 비롯한 여러 음악가들을 감탄시켰으며 첼터의 지도밑에 자기나라의 고전음악을 숭상하는 정신을 키우게 되였다.

1821년 베를린에서 웨버의 랑만주의적작품인 가극 《마탄의 사수》공연을 본 멘델스존은 여기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것은 그가 음악가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17살이 되던 1826년에 쉐익스피어의 희곡에 기초하여 창작한 서곡 《한여름밤의 꿈》으로 유럽음악계를 경탄시켰다. 이 서곡은 음악형상적측면에서는 물론이고 작곡기술면에 있어서나 관현악을 솜씨있게 리용한 점으로 보나 그가 이후에 창작한 그 어느 작품들보다 우수한것으로서 아마 멘델스존은 이 한곡만으로도 세계적인 작곡가로 명성을 떨칠수 있었을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서곡 《한여름밤의 꿈》외에도 여러 편의 교향곡들과 많은 피아노소품들, 가극 《까마호의 결혼》 등 다양한 종류의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이때부터 멘델스존의 작품들은 공개음악회에서 자주 연주되게 되였으며 그는 작곡가, 피아노연주가, 지휘자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이 시기 멘델스존은 음악뿐아니라 다른 분야의 지식수준을 높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서곡 《한여름밤의 꿈》을 창작한 그해에 멘델스존은 베를린종합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력사학을 배웠다.

그리하여 21살에는 다방면적으로 준비되고 보다 성숙된 음악가로 성장할수 있었다.

랑만주의음악가로서의 멘델스존의 첫 걸음은 1829년에 바흐의 작품 《마태수난곡》을 찾아내여 다시 연주지휘함으로써 근 한세기동안 파묻혀있던 바흐의 음악을 재생시킬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데서부터 시작되였다.

1829년 여름 멘델스존은 첫 외국려행의 길에 올랐다.

그는 영국, 아일랜드, 스위스, 프랑스 등 여러 나라들을 려행하면서 피아노연주가, 지휘자로 출연하여 유럽의 제일가는 음악가로 인정받았으며 여러편의 음악작품들도 창작하여 내놓았다. 교향곡 《스코틀랜드》, 서곡 《핑갈의 동굴》이 바로 이 시기에 창작된 작품들이다.

1830년에 멘델스존은 일명 《음악의 고향》이라고 불리우는 이딸리아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당시 이딸리아의 음악실태는 매우 한심한 지경에 있었으며 이러한 현실은 멘델스존으로 하여금 커다란 실망감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려행기간 이 나라의 음악실태보다도 자연풍경이나 그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세태생활에 더 큰 관심을 돌렸으며 거기에서 받은 인상들에 기초하여 교향곡 《이딸리아》, 《무언가》1권, 교성곡 《발리뿌르기예브의 밤》을 창작하였다.

1832년에 멘델스존은 3년간의 려행을 마치고 조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도이췰란드는 여전히 보수적이고 소부르죠아적인 근성을 타파하지 못하고있었으며 진보적인 모든것이 프로시아왕의 군사독재와 관료통치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자유해방투사들이 류혈적인 박해와 억압을 받고있었다.

천태만상의 세계상과 인간생활을 목격하고 돌아온 멘델스존은 고리타분하고 구태의연하며 보수적이고 소부르죠아적인 도이췰란드의 분위기와 타협할수 없었다. 그는 오히려 더 굳센 의지를 가지고 음악창작에 달라붙었다.

1833년 멘델스존은 듀쎌도르프시 음악회장으로 되였다. 이것은 그에게 음악조직자로, 연주가로, 작곡가로서의 재능을 다방면적으로 나타낼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가 회장으로 활동한 근 2년간의 기간에 듀쎌도르프의 음악생활은 현저하게 높은 수준에 올라서게 되였으며 그의 지도밑에 팔레스트리나, 바흐, 핸델, 모짜르트 등 많은 음악가들의 작품들이 활발히 연주되게 되였다.

특히 이 시기 멘델스존의 음악적재능은 관현악지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는 제1바이올린연주가가 지휘를 담당하던 기존관습을 깨뜨리고 처음으로 보면대우에 총보를 놓고 지휘봉을 들고 음악회에 출연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멘델스존을 현대관현악지휘의 시초를 열어놓은 음악가라고 말할수 있다.

멘델스존은 여러가지 사업들을 맡아보는 속에서도 많은 음악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오라토리오 《파벨》, 서곡 《아름다운 멜루치나에 대한 이야기》, 《무언가》2권을 비롯한 작품들이 듀쎌도르프에서 완성되였거나 창작을 시작하였다.

1835년부터 멘델스존은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관현악단 지휘자로 일하였다.

라이프찌히는 그가 그처럼 숭배하는 바흐의 반생의 자취가 어려있는 도시였고 또한 이름난 음악가들이 많은것으로 유명한 곳이였다.

멘델스존의 정력적인 활동으로 게반트하우스관현악단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관현악단으로 명성을 떨칠수 있었으며 그는 이 악단에서 관현악지휘수법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였다.

그는 항상 도이췰란드고전음악의 선배들인 바흐, 핸델, 하이든, 모짜르트,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는데 커다란 주목을 돌렸으며 슈베르트의 《씨대조 교향곡》을 찾아내여 첫공연을 성과적으로 진행함으로써 이 교향곡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하였다.

이 시기 멘델스존은 고전음악작품들뿐아니라 동시대음악가들의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는데도 주의를 돌리였다.

그는 1843년에 라이프찌히 음악원을 개설하고 초대원장으로 사업하면서 이곳에서 수많은 음악가후비들을 훌륭히 키워내였다.

멘델스존은 라이프찌히종합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이 시기 그는 바쁜 나날을 보내는 속에서도 많은 음악작품들을 창작공연하였다.

지칠줄 모르는 창작생활과 영국에서 진행된 과도한 초대공연 등으로 하여 그의 육체는 급격히 쇠약해지게 되였다.

그러나 그는 료양생활을 하는 기간에도 중단함이 없이 19세기 오라토리오분야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성 파울》과 《엘리아스》를 창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 창작된 그의 바이올린협주곡은 오늘도 세계적인 범위에서 많이 연주되고있다.

멘델스존은 1837년에 프랑크푸르트 교회목사의 딸인 쎄실 쟌레노와 결혼하였다. 이것은 그에게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당시 사회에서 멘델스존은 안락한 생활을 유지해나갈수 없었으며 계속되는 정신적타격으로 고민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는 도이췰란드사회의 완고한 편견과 소시민적근성, 특권층들의 거만하고 무례한 행동과 충돌하였으며 이것은 그를 참을수 없이 괴롭혔다. 이때마다 행복한 가정생활과 창작적성과들은 그의 고통을 조금씩 덜어주고 손상된 자존심을 달래주군 하였다.

멘델스존은 음악창작과 사회적인 활동에 자신을 너무나 혹사시킨것으로 하여 점차 몸이 허약해졌으며 마지막 시기에는 두통증과 신경쇠약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러한 상태에서 부닥친 사랑하는 누이 파니의 죽음은 그에게 결정적타격으로 되였다.

1847년 11월 4일 멘델스존은 겹쌓이는 정신적타격에 의한 뇌졸중으로 38년이라는 길지 않은 생을 마치였다.

멘델스존은 교향곡과 피아노소품을 비롯하여 가극, 교성곡, 오라토리오, 가곡 등 각이한 종류에 거쳐 밝고 아름다운 정서가 넘치는 수많은 음악작품들을 창작하였을뿐아니라 피아노연주가,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문필가로서 서한집도 집필하였으며 화가이상으로 그림도 잘 그리였다.

그의 음악은 한마디로 말하여 끝없이 맑고 아름다우며 우아할뿐아니라 수려한것이 특징이다.

그가 남긴 서곡 《한여름밤의 꿈》, 바이올린협주곡들과 서정가곡들, 합창곡들은 도이췰란드에서뿐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널리 애호되고있는 중요한 음악재보로 되고있다. 특히 가곡들인 《고요히 내 마음 파고드네》, 《골짜기와 봉우리》 등은 도이췰란드민요의 보물고를 장식하는 주요작품들로 되고있다.

히틀러파쑈도당은 그가 유태인출신이라고 하여 1943년 라이프찌히에 세워져 있던 멘델스존의 동상을 파괴해버리고도 성차지 않아 그의 작품들을 불태우고 작품연주를 금지시켰으며 그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거리와 건물들을 고쳐부르게 하였다. 하지만 그 어떤것으로도 사람들의 머리속에 깊이 새겨진 그의 음악을 말살해버릴수는 없었다.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은 뛰여난 음악창작활동으로 하여 도이췰란드음악사의 한페지를 빛나게 장식하고있을뿐아니라 그의 음악은 인류음악의 귀중한 유산으로 세기를 이어가며 전해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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