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음악가소개

작곡가 뿌치니와 그의 창작활동

 

인류문화의 재부들가운데는 이딸리아작곡가 쟈꼬모 뿌치니가 창작한 가극유산들도 있다.

뿌치니(1858-1924) 19세기말 20세기초에 활동한 유명한 가극작곡가이다.

당시 이딸리아에서는 베르디의 가극창작으로 사실주의적인 가극발전이 절정에 오르고있었으며 마스까니와 레온까발로가 진실주의가극(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방한다는 반랑만주의문학운동으로서 그에 따르는 가극을 진실주의가극이라고 불렀으며 19세기말에 류행되였다. 일명 베리즈모가극이라고도 한다.)을 만들어 인기를 끌고있었다.

뿌치니는 당시의 이러한 영향속에 12편의 가극을 창작하여 세상에 명성을 떨치고 가극력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

뿌치니 이후부터 이딸리아에서는 더는 이전과 같이 고전적인 음악양식과 내용을 가진 가극작품들이 나오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사람들은 뿌치니를 가리켜 흔히 이딸리아가극의 《마지막작곡가》라고 부르고있다.

뿌치니는 1858 12 22일 이딸리아 루까의 대대로 내려오는 이름있는 음악가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일찌기 아버지를 잃은 그는 어머니의 깊은 관심속에 친척들에게서 오르간, 피아노연주와 작곡을 배우며 음악적기초를 튼튼히 닦았다.

뿌치니는 10살나던 해에 성 마르띠니성당과 성 미켈레성당의 소년고음가수로 되였으며 14살부터는 성당에서 교회의식이 진행될 때 부르는 그레고리오성가의 오르간반주를 할수 있게 되였다.

직업적인 오르간연주가로 될것을 결심하고 꾸준히 련습하는 속에서도 그는 16살부터는 음악수업을 하여 집살림에 보탬을 주었으며 작곡에도 관심을 돌려 대위법과 관현악창작수법을 련마하였다.

20살때인 1878년에 그는 빠올리노성당의 명절미사에서 자기가 창작한 종교합창곡들인 《모테토》와 《그레토》를 울려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2년후에 작곡한 관현악반주를 가진 4성부미사는 《영광의 미사곡》으로서 출판까지 되였다.

한편 1876 8월의 어느날 밤 밀라노의 스깔라극장에서 상연된 베르디의 가극 《아이다》는 젊은 뿌치니에게 참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가극을 본 그는 세상에 가극을 쓰는것보다 더 훌륭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창작방향을 전환시켜 가극을 쓸것을 결심하였다.

뿌치니는 베르디와 같은 가극작곡가가 되려는 커다란 포부를 안고 1880년에 고향을 떠나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에는 이름있는 음악원과 함께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훌륭한것으로 알려진 스깔라극장이 있었다.

뿌치니는 1880년부터 밀라노왕실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으며 밀라노음악원에서 공부하였다.

시절에 그는 바찌니와 아밀까레 뽄끼엘리에게서 작곡을 배우면서 그들이 창작한 가극을 알게 되였다.

뽄끼엘리의 가극 《죠콘다》는 베르디의 가극을 모방한 작품으로서 서정적이였으나 과장된것이 많았다. 이것은 뿌치니로 하여금 보다 새롭고 진실주의적인 가극창작에 대한 리념을 가지게 하였다.

1883 7월 밀라노음악원을 졸업한 뿌치니는 그해 7월말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 가극작곡가로서의 그의 창작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다음해인 1884 12월에 첫 가극 《요정 빌리》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상연되여 뿌치니는 가극창작의 전망을 내다볼수 있게 되였다. 이 시기에 창작된 가극 《요정 빌리》에서는 마스까니의 진실주의가극의 영향이 나타나고있었다.

1887년에 두번째 가극 《에드가》가 18개월동안 창작되여 1889 4 21일 스깔라극장에서 상연되였으나 청중들에게 그 어떤 새로운 맛도 주지 못한것으로 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는 1891년에 마쌰추꼬리호반에 있는 조용한 어촌 또레 델 라고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부터 그의 거의 모든 가극작품들이 이곳에서 창작되였다.

1893 2월에 가극 《마농 레스꼬》가 창작되여 또리노의 레죠극장에서 성공적으로 상연되였다. 대본은 프랑스작가 쁘레노의 소설에 기초하여 작곡가자신이 썼다.

가극은 기병 그리예와 아름다운 처녀 마농 레스꼬의 정열적인 사랑과 비극적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있다.

아미양의 어느 려인숙에서 알게 된 그리예와 레스꼬는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레스꼬의 가정에서는 그를 제론트의 첩으로 만든다. 그러나 제론트는 레스꼬가 그리예를 잊지 못하고있다는것을 알고는 레스꼬를 미국으로 추방한다. 그리예는 레스꼬를 찾아 미국으로 가서 그와 만나게 되지만 지칠대로 지친 두사람은 뉴오린즈의 광야에서 끝내 쓰러져 영영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가극은 사실주의적인 전통에 기초하여 개성적으로 씌여져있다. 가극의 노래들은 생동하고 열정적이며 관현악적인 묘사가 진실하고 특색있는 음향적효과를 잘 나타내고있다.

가극 《마농 레스꼬》는 뿌치니의 첫 성공작으로서 가극작곡가로서의 그의 이름을 이딸리아전역에 알려지게 한 작품이다.

이 가극이 상연된 때로부터 9일 후에 밀라노의 스깔라극장에서는 베르디의 마지막가극 《팔스타프》가 공연되였는데 이 2편의 가극상연은 그대로 한 인생의 총화와 새로운 한 인생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의 사변과 같은것이라고 할수 있다.

가극 《마농 레스꼬》의 성공으로 뿌치니는 극심한 생활난에서 완전히 벗어나 창작에만 전심할수 있게 되였다.

뿌치니의 네번째 가극은 1895년에 창작된 《보엠》이였다. 대본은 프랑스작가 앙리 뮈르제의 소설 《방랑예술가들의 생활풍경》에 기초하여 쟈꼬자와 일리까가 썼다.

가극은 1896 2 1일 또리노의 레죠극장에서 젊은 지휘자 토스까니니의 지휘로 처음 상연되였다.

《보엠》은 이딸리아어로 방랑예술가라는 뜻이다. 가극에서는 돈 한푼 없는 4명의 방랑지식인들의 우정과 그들사이의 쾌활하나 어려운 생활모습을 그리고있다.

작품은 3명의 젊은 예술가와 1명의 젊은 철학가가 프랑스의 수도 빠리의 빈민촌 아빠트 다락방에서 추위에 떨고 굶주리며 세방살이를 하고있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시인 로돌포와 같은 아빠트 다락방에서 수를 놓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처녀 미미는 서로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로돌포는 미미가 가난속에 병까지 들어 죽어가는것을 보면서도 구원할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면서 그를 위해 리별을 선언한다.

한편 화가 마르첼로의 애인인 뮤제따는 그가 가난하다고 하여 마르첼로를 배반하고 부유한 알찐도르의 유혹에 빠진다. 그러나 참된 사랑이 돈보다 더 귀중하다는것을 깨닫고 다시 마르첼로의 품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에 대한  오해와 질투로 하여 또다시 리별하게 된다.

그후 다락방에서 로돌포는 시를 쓰고 마르첼로는 그림을 그리면서 저마끔 헤여진 자기의 옛 애인들을 생각한다.

여기로 애인의 품에서 숨지고싶어하는 미미를 부축하고 뮤제따가 찾아온다.

의사를 청해오기 위해 뮤제따는 애용하던 귀걸이를 내놓고 철학가 콜리네는 단벌 외투를 벗어놓는다. 미미와 로돌포는 이곳에서 서로 사랑을 언약하던 그 시절을 회상하며 행복한 생활을 갈망한다. 그러나 미미는 로돌포의 손을 꼭 잡은채 조용히 눈을 감는다. 젊은이들이 애타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몸부림치나 미미는 끝내 소생하지 못한다.

뿌치니는 자기가 어릴 때 체험한바있던 방랑예술가들의 생활을 머리속에 그리며 가극에 담겨진 내용을 진실하게 형상하였다.

그는 가극에서 등장인물들의 생활을 자기 나라의 가극전통에 의거하여 서정적으로 섬세하게 형상하였다.

가극에 나오는 로돌포의 노래 《차거운 이 손을》이나 미미의 노래 《나의 이름은 미미랍니다》는 감정표현이 강렬하고 선률성이 풍부한것으로 하여 가극의 범위를 벗어나 일반 음악회무대들에서 오늘까지도 널리 불리우고있다.

가극은 떠들썩한 술집의 소음과 인물들의 거친 형상을 병에 시달리는 미미의 형상, 가난한 사람들사이에 오가는 뜨거운 인간미와 대조시켜 극적효과를 나타내는 수법으로 진실주의가극의 경향성을 드러낸다.

뿌치니의 대표적인 가극작품들중의 하나인 가극 《토스까》는 1900년초에 완성되였다.

대본은 프랑스작가 빅토리아 사르듀의 비극소설에 기초하여 쟈꼬자와 일리까가 썼다.

가극은 창작되자마자 곧 로마의 꼬스딴찌극장에서 성공적으로 상연되였다.

가극은 프랑스의 나뽈레옹군이 오스트리아와 이딸리아련합군과의 치렬한 싸움을 벌리고있던 1800년을 시대적배경으로 하여 당시의 사회적모순과 그속에서 생활을 사랑하는 주인공들이 무참히 희생되는 내용을 형상하고있다.

작곡가는 예리한 정치적성격을 띠는 줄거리를 통하여 공화제를 옹호하는 자기의 정치적립장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가극 《토스까》는 조잡하고 극적인 선률과 관현악의 거친 울림에 의한 폭발적인 효과를 추구하는것으로 진실주의가극양식의 경향성을 뚜렷이 나타냈다.

가극의 노래들은 길지 않으나 선률이 아름답고 가창성이 풍부하며 열정이 넘친다.

《별들은 반짝이고》는 가극의 3막에서 카바라도씨가 사형선고를 받고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부르는 표현력이 풍부하고 매력적인 노래이다. 가극의 2막에서 토스까가 부르는 《노래에 살며 사랑에 살며》와 1막에서 카바라도씨가 부르는 《신묘한 조화》는 이 가극의 주요 아리아들이다.

가극 《보엠》과 《토스까》는 뿌치니의 가극창작의 절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로서 이 가극들의 창작으로 그의 이름은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였다.

가극 《보엠》과 《토스까》는 현재까지 가장 많이 상연된 가극들로 손꼽히고있다.

1904 2월에 창작된 가극 《나비부인》은 이딸리아의 음악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나라의 생활을 그린 작품으로서 인상주의적인 요소가 다분히 나타나고있다.

6년후인 1910년에는 이딸리아력사에 있었던 단편적인 사실을 소재로 한 가극 《서부의 처녀》가 창작되여 그해 12월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가극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그후에 창작된 가극들인 《제비》와 3부작가극인 《의혹》, 《수녀 안젤리까》, 《쟌니 스끼끼》는 오늘날 크게 평가되지 않고있다.

가극 《뚜란도뜨》는 뿌치니가 창작한 대표적가극들중의 하나이면서도 마지막가극으로 가극력사에 전해지고있다.

뿌치니의 미완성작품인 이 가극은 그가 남긴 초안에 기초하여 제자이며 친우인 프란꼬 알파노가 완성하였으며 1926 4 25일에 밀라노의 스깔라극장에서 처음 상연되였다.

대본은 꼬쯔와 쉴러의 희곡에 기초하여 아담과 씨몬이 썼다.

가극은 중국의 매정한 왕녀 뚜란도뜨가 사랑의 힘앞에서 어쩔수 없이 머리를 숙이고 마는 모습을 형상하고있다.

유럽가극사에 지울수 없는 자욱을 남긴 작곡가 뿌치니는 1924 11 29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침대 머리에는 가극 《뚜란도뜨》의 완성하지 못한 사랑의 2중창 악보가 놓여있었다.

뿌치니의 가극창작에서는 사람들의 생활을 계급적관계에서 심도있게 그리지 못하고 흥미본위적이고 지나치게 무대적효과만을 추구한 경향성도 있지만 자기 나라뿐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생활과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사실주의적인 전통에 기초하여 민족성이 두드러지게 형상한 특징도 찾아볼수 있다.

그는 가극창작에서 성악성부에 큰 관심을 돌리고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률, 표현력이 풍부하고 극적이며 감동적인 선률로 인물들을 깊이있게 묘사하였다.

가극의 성악성부에서는 콜로라투라적인 높은 기교가 적용되지 않으면서도 가수들에게 어렵고 흥미있는 과제들을 제기하고있다.

뿌치니의 이러한 가극작품들은 그가 살던 시대는 물론이고 후세의 가극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고있다.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