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나 인생의 봄에 산 명가수 왕수복
왕수복은 해방전시기부터 우리 인민들의 가슴속에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 넋을 안겨주는 신민요와 민요가창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려온 오랜 민요가수의 한사람이다.
그는 1917년 4월 23일 평양시 삼석구역 호남리(당시 강동군 립석면 남경리)의 화전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렸을 때 그의 이름은 왕성실이였다.
왕수복이 2살나던 해에 화전민이였던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어머니는 철부지 세남매를 이끌고 평양시내로 들어와 이모네 집에 의지하여 살면서 막벌이에 나섰다.
어린 왕수복은 빈곤한 가정살림을 돕기 위해 7살때부터 교회당으로 다니는 부자집 아이들의 길잡이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그때 부자집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소리는 어린 왕수복의 가슴에 음악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착을 안겨주었다. 그는 조용히 그 노래들을 따라부르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밖에서 들려오는 노래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음악교사는 그를 데려다 노래를 시켜보았다. 어린 소녀에게는 천성적으로 타고난듯싶은 맑은 목소리와 음악적재능이 있었다. 왕수복의 남다른 재능의 싹을 발견한 음악교사는 그를 자기가 잘 알고있는 보통학교 음악선생에게 소개하였다.
이때부터 왕수복은 윤두선이라고 부르는 음악선생의 방조로 보통학교에 다니면서 노래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윤두선은 왕수복을 제자로 삼고 수업이 끝난 후 따로 발성훈련을 시키고 노래를 배워주군 하였다. 때마침 평양가무양성소가 생겨나 학생모집을 하자 선생은 왕수복을 양성소에 입학시켜 노래공부를 전문적으로 할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왕수복은 1928년 3월부터 평양가무양성소에 들어가 전통적인 노래들인 가곡, 가사를 전공으로 하면서 가야금, 장고, 무용, 미술 등을 배우게 되였다.
당시 평양가무양성소는 평양지방의 이름난 가수였던 김미라주(예술가로서 불리워지던 이름, 《예명》이라고 함)를 비롯하여 평양지방의 량심적인 유지들이 민족음악예술을 고수발전시킬 목적으로 전통적인 민족음악 가수 및 연주가후비들을 양성하는 민간음악교육기관으로 내온것이였다.
평양의 경상골(현재 중구역 경상동)근방에 있던 비교적 큰 건물을 차지한 가무양성소는 성악(가곡, 가사를 기본으로 수업함), 가야금, 거문고, 양금, 피리, 풍금, 무용, 미술 등의 10여개 학과를 과목으로 정하여 배워주면서 그 가운데서 각자의 재능에 따라 전공을 설정하여 전문교육을 주는 식으로 후비들을 육성하는 일종의 종합예술학교(3년제)였다.
여기에는 성악교원으로 김미라주, 리산호주외에 가야금, 거문고, 피리 등 과목에 따르는 교원들이 있었다. 후에 해금산조로 이름을 날린 류대복도 그때 거문고교원으로 일하고있었다.
일제는 1928년초에 세워진 이 학교에 자기들의 학과목이 없다는것에 대해 시비하면서 일본고전음악과목을 내오도록 하고 일본인교원을 끌어넣었으며 학교자체를 일본화하려고 책동하다가 제놈들의 대륙침략전쟁도발과 더불어 1938년경에 학교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렸다.
왕수복은 김미라주의 지도밑에 3년간 가곡, 가사를 전공으로 하여 음악을 공부한 후 13살나던 1931년 2월에 양성소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하고 선생의 요구에 따라 그의 조수로 일하게 되였다. 나이가 많아 학생들을 가르칠 때 직접 소리를 내기 힘들었던 스승이 가창법과 여러 고전작품들을 익히는데서 남다른 자질을 가지고있던 수제자 왕수복을 자기의 조수로 택하였던것이다.
그후 2년간의 조수생활은 왕수복에게 있어서 자기의 성악기량을 더욱 련마해갈수 있는 좋은 기회로 되였다.
왕수복이 직업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한것은 16살나던 1933년 봄부터였다.
이때 왕수복은 《콜롬비아》레코드회사의 요청으로 신인가수였지만 9곡이나 되는 노래를 록음하였다. 그중에는 신민요 《련꽃따는 처녀》와 대중가요 《울지 말어요》, 《한탄》 등이 들어있었다.
이 노래들의 록음으로 하여 가요계의 화제에 올랐던 왕수복을 일약 인기가수로 끌어올린것은 《콜롬비아》레코드회사와 《포리돌》레코드회사간에 벌어진 가수쟁탈전이였다.
그의 첫 노래 록음 이후 련속으로 전속계약을 하고있던 《콜롬비아》레코드회사와 그보다 한발 먼저 계약을 맺은 《포리돌》레코드회사사이의 이 가수쟁탈전사건을 놓고 당시 재판까지 벌어졌다.
이 일이 평양과 서울의 신문들에 소개되고 미지의 인물이였던 왕수복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커가던 속에 그가 《포리돌》레코드에 록음한 노래 《칠석날(고도의 정한)》이 나왔다.
왕수복의 청아한 목소리와 독특한 발성으로 형상된 이 노래는 레코드와 함께 삽시에 전국에 퍼져가면서 망국의 한이 맺힌 겨레의 설음을 달래주었다.
《포리돌》레코드회사는 설립후 처음으로 최고의 매상고를 올렸고 왕수복의 이름은 레코드판과 더불어 전국의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져갔음은 물론이다.
어제날 교회당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에 귀를 강구고 조심스레 목소리를 터쳐보던 어린 소녀였던 왕수복의 가수생활은 이렇듯 짓밟힌 민족의 설음과 슬픔을 담은 비탄조의 노래를 부르는것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왕수복이 비탄조의 노래로부터 밝고 명랑하면서도 서정적인 신민요와 민요가창에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데는 계기점이 있었다.
어렸을적부터 가곡, 가사를 비롯한 전통적인 민족가요들과 서도민요를 배우며 민족적인 가락들과 창법을 터득하였던 그는 가수생활을 시작하면서 예술적형상미가 높으면서도 민족적인 정서가 풍부한 노래를 부를것을 희망하였지만 그에게 알맞는 노래를 창작해주는 작곡가가 없었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음악창작과 보급의 유일한 통로로 되고있던 레코드회사들에 전속된 작곡가들은 회사측의 강요에 따라 류행가풍의 대중가요창작에만 몰두하면서 신민요와 같은 민요풍의 가요창작에는 눈을 돌리지 못하고있었으며 신민요곡들이 일부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 창작이 활발하지는 못하였다.
다른 한편 민요풍의 가요들을 짓는다고 하여도 그것을 훌륭하게 형상할수 있도록 민족적인 발성과 창법을 깊이 체득한 가수들이 매우 적었던것과 가곡, 가사 등 전통적인 민족가요가창에 능한 가수들의 경우에도 신민요를 류행가의 일종으로 보면서 그 가창에 선듯 나서지 않고있었던것도 작곡가들이 신민요창작에 적극 나서지 못하게 된 까닭이라고 볼수 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리면상이 창작하여 내놓은 신민요 《뻐꾹새》야말로 왕수복에게 잠재되여있는 민요가수로서의 재능을 한껏 터칠수 있게 한 노래였다.
화창한 봄날의 생신한 정서가 짙게 풍기는 가볍고 흥겨운 음조들로 일관된 《뻐꾹새》의 가락들은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민요창법을 완전히 체득한 왕수복에게 매우 적합한 곡조였다.
그는 이 노래를 부르는것을 계기로 하여 신민요를 위주로 한 민요가창에로 방향각을 세우게 되였고 《뻐꾹새》를 자기의 애창곡으로 즐겨부르면서부터 인기있는 민요가수로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왕수복은 이 노래를 록음한 때부터 1942년에 이르는 기간 《포리돌》레코드회사의 전속가수로 있으면서 많은 신민요와 민요들을 불렀다. 그는 《봄맞이아리랑》, 《출범》을 비롯하여 《조선타령》, 《능수버들》, 《노들강변》 등 수많은 신민요들을 여러 음악회와 순회공연무대들에서 부르거나 레코드에 록음하여 보급하면서 도탄에 빠진 겨레의 가슴에 민족의 얼을 심어주기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왕수복은 이 시기에 신민요들과 함께 《청춘을 찾아서》, 《조선의 달》, 《인생의 봄》을 비롯한 서정적성격이 짙은 대중가요들도 잘 형상하여 관중을 끌었다.
청아한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 민족적정서가 짙은 창법에 기초하여 높은 예술적형상력으로 노래의 예술적품위를 살려나가는 그의 독특한 가창재능을 두고 당시의 출판물들에서는 《설레이는 바다》에 비유하여 평하기까지 하였다.
왕수복은 1934년에 잡지 《삼천리》가 조직한 전조선인기가수투표에서 단연 1등을 함으로써 예술계와 민간에 더욱 널리 알려졌으며 《조선의 꾀꼴새》로 온 삼천리에 이름을 날렸다.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민족적정서가 풍부한 민요와 신민요들을 즐겨부른 왕수복의 가창활동은 일제의 악랄한 민족음악말살책동으로부터 우리의 고유한 음악유산들을 고수하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애국적이고 진보적인 음악활동의 일환인것으로 하여 의의가 있었다.
그의 가창활동은 또한 망국의 슬픔과 비탄속에 눈물로 살아가던 겨레의 가슴에 민족의 얼을 심어주고 빼앗긴 조국과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기고 자주적발전의 길을 잃었던 민족수난기에 사그러져가는 민족의 넋을 노래로나마 불러일으키려던 그의 가창활동도 일제의 탄압대상으로 되였다.
나날이 뼈에 사무치는것은 식민지예술인의 설음과 고통이였고 민족적인 천대와 멸시였으며 그 어떤 보람도 없고 희망도 없는 숨막히는 《반도가수》생활로 인한 절망감이였다.
더우기 1940년대에 들어와 《태평양전쟁》도발과 함께 조선인민을 이른바 《성전완수》에로 총동원하기 위해 발악하면서 가수들에게 《내선일체》를 고취하는 노래들과 침략적인 군가들만을 부를것을 강요하는 일제의 책동은 왕수복의 가슴에 찬서리만을 덧쌓아주었다.
왕수복은 짓밟힌 민족의 넋조차 마음대로 노래할수 없고 재능도 참답게 꽃피울수 없는 현실을 저주하며 1942년에 끝내 예술계와 결별하고 말았다.
비탄에 젖은 겨레의 가슴속에 봄날의 따뜻한 정서와 희망을 안겨주는 신민요 《뻐꾹새》와 더불어 《조선의 꾀꼴새》로 명성을 날리던 인기가수 왕수복의 은퇴는 말그대로 식민지민족의 비극적운명을 그대로 보여주는것이였다.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태양이신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안아오신 8. 15해방은 왕수복의 재능과 희망을 참답게 꽃피워갈수 있는 넓은 길을 열어주었다.
어버이수령님은 나라없던 그 세월 식민지가수의 가련한 신세와 설음을 한탄하며 무대를 떠났던 왕수복이 인민이 주인이 된 새 조선의 음악무대에서 인민이 사랑하는 《새 조선의 꾀꼴새》로 보람찬 예술활동을 벌려나가도록 이끌어주신 재생의 은인이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해방후 첫시기부터 민족음악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킬데 대한 문예로선을 제시하여주시면서 해방전시기에 수많은 민요와 신민요들을 불러 인민들에게 민족의 넋을 안겨주었던 왕수복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가정에 묻혀있던 그가 새 조선의 민족음악발전을 위한 길에서 보람찬 음악활동을 해나가도록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속에 1955년 3월부터 국립교향악단 성악가수로 활동하게 된 왕수복은 그해 7월초 수령님을 모시고 처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이날 왕수복은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속에 가수로서, 인간으로서 인생의 새 출발을 하는 흥분된 마음을 안고 민요 《긴아리랑》과 신민요 《능수버들》을 불러드렸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의 노래가 끝나자 몸소 재청을 요구하시고 동행한 외국손님들에게 그를 소개하시면서 오랜 예술인인데 아직도 노래를 잘 부른다고, 저 동무의 노래는 민족적감정이 풍부해서 좋다고 못내 만족해하시였다. 그러시면서 민요의 형식을 계승하고 군중이 좋아하는 노래는 발전시켜야 한다고 하시며 왕수복의 노래를 널리 소개할데 대한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지난날 수모받고 억눌리던 예술인이기에 더 큰 용기와 신심을 가지고 새 조선의 무대에서 마음껏 재능을 꽃펴가도록 내세워주시고 고무해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사랑과 은정은 왕수복의 가슴속에 조국과 인민을 위한 심장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수령님의 대해같은 은덕에 보답할 숭고한 자각과 열정의 샘이 용솟음치게 해주었다. 하여 그는 조선중앙방송위원회 독창가수로 있으면서 중앙과 지방, 도시와 농어촌을 비롯한 온 나라 방방곡곡에서 흥겨운 민요들을 부르며 인민들을 사회주의건설에로 고무추동하는 공연활동을 힘있게 벌려나갔다.
그러나 그의 예술활동은 순탄하게만 진행된것이 아니였다.
때로는 사대주의에 물젖은 사람들이 그의 노래를 시비하면서 그런 민요조를 가지고는 《현대음악》의 무대에 나설수 없다고 공격해나섰고 때로는 복고주의의 바람이 그의 앞길에 실망의 그늘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신심을 잃고 주저앉으려는 그를 깨우쳐주고 손잡아 이끌어주신분은 우리 수령님이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걸음마를 떼는 어린 아기를 손잡아 부축하고 이끌어주듯이 세심한 지도와 가르치심을 주시였고 국가적인 중요행사공연과 외국공연무대들에 그를 선참으로 내세워주시였으며 자그마한 성과라도 있을 때면 누구보다 기뻐하시면서 그 영광을 고스란히 그에게 돌려주시군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주체48(1959)년 1월 새해경축공연 때에도 그가 부르는 《어화 우리 농민들아》, 《조선팔경가》 등의 신민요들을 들으시고 왕수복동무의 노래는 조선사람의 감정이 푹 배여있어 우리 인민들이 다 좋아한다, 그의 노래를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하시며 그에게 후비들을 붙여서 많이 양성하게 하도록 크나큰 믿음을 주시였으며 몸소 공훈배우칭호를 수여하도록 배려하여주시였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불러주시고 사랑과 은정, 힘을 주시며 건강한 몸으로 노래를 많이 부르라고 영광의 축배잔까지 부어주신적은 또 얼마였던가.
왕수복은 어버이수령님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새로 태여난 혁명적예술인의 긍지와 자부심을 안고 온 나라가 천리마대고조로 들끓던 1960년대와 사회주의대건설의 불바람이 몰아치던 1970년대의 나날에 수령님의 현지지도의 거룩한 자욱들이 뜨겁게 새겨진 로정을 따라 공연활동을 줄기차게 벌려나갔다.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현명한 령도밑에 사회주의경제건설의 돌파구를 열어나가는 주요 공장, 기업소들에 달려나가 수개월간씩 로동자들과 현장에서 침식을 같이하면서 일도 하고 혁명적인 노래들도 부르며 그들의 로력투쟁을 힘있게 고무추동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현지지도에서 제시하신 가르치심을 받들고 생산에서 새로운 비약과 혁신이 창조되는 강선과 기양, 강계와 희천, 해주와 송림 등 강철 및 기계공업부문을 비롯한 여러 생산현장에서 작업복차림의 왕수복이 부르는 노래소리는 수령님의 품속에서 재생의 기쁨을 찾은 한 오랜 예술인의 심장에서 터져나오는 충정의 박동소리로 높이 울려퍼지며 로동계급의 전투적사기를 북돋아주고 더 높은 생산적앙양을 일으키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주체61(1972)년 4월 12일 공작기계 1만대고지를 점령한 희천의 로동계급을 축하해주시기 위하여 외국의 국가수반과 총련일군들과 함께 희천공작기계공장을 찾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현장에서 로동자들과 같이 일하며 전투적인 예술선동을 하고있던 왕수복을 친히 몸가까이 부르시였다.
그이께서는 왕수복을 손님들앞에 내세워주시며 이 동무는 공훈배우 왕수복동무인데 조선의 이름난 가수라고, 영원히 당을 받들고 조국에 복무하려고 하는 혁명화된 예술인이라고 고귀한 칭호를 안겨주시였으며 오늘 우리 나라에서는 수많은 예술인들이 다 당을 따르고있으며 오랜 인테리들도 영원히 당에 충실할것을 다짐하고 일을 잘하고있다고 한없는 사랑과 믿음이 담긴 말씀을 하여주시였다.
참으로 왕수복의 보람찬 예술활동의 갈피마다에는 나라없는 설음속에 수난의 가수로 짓밟혀온 그를 행복과 영광의 절정에서 인민들이 사랑하는 민요가수로 보람찬 삶을 빛내가도록 이끌어주시고 내세워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육친적인 사랑과 은정이 뜨겁게 스며있었다.
어버이수령님의 위대한 사랑과 고매한 덕성을 그대로 체현하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수령님의 품에서 새롭게 태여난 재생의 기쁨을 안고 일해가는 왕수복이 참다운 예술활동으로 은혜로운 조국을 목청껏 노래하며 민족음악발전에 이바지할수 있도록 그에게 깊은 관심과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주체62(1973)년 8월 그가 기양뜨락또르공장확장공사건설장에 달려나가 10개월간이나 경제선동을 활발히 벌리고있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그의 수고를 높이 평가하시면서 높은 국가수훈의 영예도 안겨주시였으며 그가 생일 60돐을 맞을 때에는 사랑의 60돐 생일상을 보내주시고 로력훈장을 수여해주도록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일군들과 민족음악발전문제를 토론하실 때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민들이 사랑하는 민요를 많이 불렀던 그의 활동과 생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민요는 왕수복동무가 제일 잘 불렀다고 분에 넘치는 치하도 주시고 그가 후비들을 많이 양성하도록 크나큰 믿음도 주시였다.
그러시고도 그가 말년에도 민족음악발전의 길에서 보람찬 삶을 누려가도록 윤이상음악연구소의 명예가수로 일하도록 하여주시였으며 주체86(1997)년 4월 23일에는 또다시 생일 80돐을 맞는 그에게 은정깊은 생일 80돐상을 보내주시고 《왕수복민요독창회》를 열도록 주실수 있는 사랑과 배려를 다 베풀어주시였다.
왕수복은 자기에게 음악예술인으로서의 최고의 영예와 값높은 삶을 안겨주시고 빛나는 인생의 보람을 찾아주신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대해같은 은덕에
보답할 일념을 안고 고령의 나이에도 언제나 정열에 넘쳐 일하였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의 각별한 사랑과 은정속에서 윤이상음악연구소의 명예가수로 있으면서 재능있는 민요가수후비들을 육성하는데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바쳤으며 민족음악발표회를 비롯한 음악회무대들에 자주 올라 민족적정서가 짙은 민요들과 전통적인 가곡들을 부르며 사람들에게 어제날의 인기가수에 대한 감미로운 추억을 불러일으켜주던 로가수는 2003년 86살을 일기로 사망하였다.
저멀리 1930년대의 민족수난의 시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년세월 식을줄 모르는 열정을 안고 민족음악발전의 길에 정력을 다 바쳐온 오랜 민요가수 왕수복의 한생은 참으로 위대한 대원수님들의 은혜로운 품이 있어 언제나 인생의 봄을 안고 청춘에 살수 있었다는것을 현실로 보여준 값높은 삶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