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농악(1)

 

한휘국

우리 나라에서 농악은 오랜 력사적전통을 가지고있다.

농악이라는 용어는 그것이 력사적으로 농업생산과 농민들의 생활속에서 계승발전되여온 음악이라는 뜻에서 근세에 와서 쓰이게 말이다. 원래는 《매귀》(《매굿》또는 《화반》이라고도 하였다.), 《두레》, 《풍재》, 《걸궁》, 《군물》, 《마당놀이》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왔다.

농악이 이렇게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된것은 그것이 농촌생활의 각이한 분야에 널리 리용되면서 그에 해당한 이름이 붙게 되였고 지방에 따라 형식이 서로 달랐기때문이다.

농악이 전승되여온 기본적인 민속행사는 《두레》, 《매귀》 등이였다.

《두레》는 원시공동체사회에서 집단적로동의 유습으로부터 생겨난것으로서 우리 나라 농민들의 농업로동과정에 이루어진 공동로동조직이다. 그러므로 《두레》를 기본으로 하여 전승되여온 농악은 《두레》의 력사와 더불어 시원이 매우 오랜것이다. 특히 《매귀》는 우리 나라의 고대음악 《매악》과 련관된것으로 농악이 B. C. 10세기 훨씬 이전 시기에 력사적시원을 두고있다는것을 알수 있다.

《후한서》를 비롯한 주변 나라의 문헌들에서는 우리 나라 고대음악을 《매악》으로 기록하고있는데 그에 의하면 16명의 무용수와 이에 따르는 40명의 인원이 긴창을 휘두르면서 춤을 추었다고 전하고있다.

고대시기 우리 인민들의 민간예술생활에서는 종족적인 제천행사와 결부된 집단적인 가무놀이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문헌자료들을 보면 당시 여러 종족들이 진행하는 제천행사들에서는 남녀로소의 구별이 없이 밤낮을 이어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었으며 가는 곳마다 노래소리가 그치지 않았다는것을 알수 있다. 종족적인 제천행사들은 원시공동체사회에서부터 내려오던 풍속으로서 여기서 벌어지는 가무예술은 원시시대 혼합예술의 성격을 가지는것이였다.

제천행사와 결부된 집단적가무놀이들은 고려시기에 와서 년중행사로 널리 성행하였다. 력사문헌인 《삼국지》에 의하면 고조선의 기본종족을 이룬 예족들이 10월에 진행하는 제천행사와 가무놀이는 《무천》이라 하였으며 《후한서》에 의하면 부여에서는 12월에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하늘에 제사지내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는 행사를 《영고》라고 하였다.

주로 농업생산활동과 밀접히 련관된 제천행사놀이를 통하여 발전하여온 농악의 고대적형태는 그후 사람들의 사회적생산활동의 발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이 깊어짐에 따라 점차 신앙적인 의식행사의 내에서 벗어져나와 농민들의 전통적인 공동로동조직인 두레와 기타 여러가지 민속놀이와 밀접히 결합되여 발전하게 되였다.

과정에 보다 생활적이며 독특한 민족예술로서의 농악의 전통적인 면모가 확고히 갖추어지게 되였다고 볼수 있다.

중세기에 이르러 우리 인민들의 사회생활에서는 농업생산이 위주로 되면서 이와 관련한 공동생활풍습이 더욱 발전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품앗이, 두레, 황두 공동로동조직의 상호부조조직들이 발전하였으며 년초를 계기로 설명절(음력설), 정월대보름놀이들과 화전놀이, 류두놀이와 추석 여러가지 민속적인 행사와 놀이들이 점차 널리 성행하였다. 바로 농악은 이와 같은 민속적인 행사 놀이와 직접 결합되여 발전하여왔으며 광범한 농민들이 가장 널리 즐기는 인민적인 예술로  되였다. 그리하여 17~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농민들의 농업생산활동이 더욱 적극화되고 공동로동조직과 상호부조조직 그리고 농촌에서의 여러가지 민속적인 놀이들이 전국적으로 널리 성행하였으며 농악예술이 전성기를 이루었다.

당시 농악에서 기본을 이루며 가장 널리 보급된것은 두레놀이였다.

부락공동로동조직인 두레에는 반드시 농악이 동반되였다. 두레의 공동건물은 농기구와 함께 농악기를 비롯한 공동소유물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그리고 성원들의 집합장소로도 리용되였다.

아침 일찍 모여든 두레군(농악패)들은 농악을 한바탕 울린 다음 기발을 앞세우고 농악을 울리며 기세있게 논밭으로 일하러 나간다. 이때 두레군들이 울리는 농악은 《길군악》이였다.

두레군들은 농사일의 쉴참이면 농악을 울리고 그에 맞추어 춤을 추고 노래도 부르면서 로동의 피로를 풀고 사기를 돋구었다. 모내기나 논김매기와 같은 작업을 진행할 때에도 1~2명의 북잡이 또는 꽹과리를 치는 풍물잡이와 선소리군이 논두렁에 나서서 일하는 사람들과 노래를 먹이고 받으면서 사기를 돋구어주었다.

두레는 6 15일의 《류두놀이》나 7 15일의 《호미씻기놀이》와 같은 민속놀이와도 결합되여있었다.

《류두놀이》때에는 두레군들이 한고비의 농번기를 넘긴 기쁨으로 강물에서 몸을 깨끗이 씻고 농악을 울리면서 하루를 즐겼다.

《호미씻기놀이》는 김매기를 하던 호미를 비롯한 농쟁기들에 묻은 흙을 씻어낸다는 뜻에서 유래된것이며 놀이때에는 세벌김매기를 끝낸 두레군들이 농악을 울리면서 한여름동안 힘겨운 농사일을 피로를 풀며 즐겁게 놀았다. 이에 대해서는 18세기말~19세기초에 우하영이 《천일록》에 상세히 기록되여있다.

《류두놀이》나 《호미씻기놀이》는 농번기의 농산작업과정의 일정한 계기에 즐기는 두레군들의 민속적인 놀이이면서도 여기에는 가을의 풍작을 바라는 그들의 념원도 반영되여있다. 그러한 내용을 반영하여 울리는 농악을 《풍쟁》이라고도 하였다.

농악은 또한 《매귀》, 《매굿》 또는 《화반》 등으로 불리워진 여러가지 민속행사와 결부되여 발전하였다.

섣달 그믐날밤과 정월초하루부터 보름까지 두레군들이 이른바 한해의 《잡귀신》을 쫓아내고 《천복만행》을 맞아들인다는 뜻에서 농악을 울리며 동네의 집집들을 돌았는데 이런 행사를 《지신밟기》라고도 하였으며 이때 울리는 농악을 지방에 따라 《매귀》나 《매굿》또는 《화반》이라고 하였다. 특히 평안도와 함경도지방의 농민들은 섣달 그믐날밤에 지나온 한해의 온갖 불길한것들을 없애버리고 새해를 깨끗한 마음으로 맞이하며 한해를  행복하게 보내기를 바란다는 의미에서 밤늦도록 농악을 울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즐기였다. (다음호에 계속)

이전페지  차례  다음페지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