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일화

쓰거운 추억

 

와그너의 생활에 연극 다음으로 영향을 준것은 음악이였다. 특히 유년시절에 음악적감명을 강하게 받은것은 드레즈덴에서 가극 《마탄의 사수》를 보았을 때였다.

도이췰란드 민족가극의 대표작이라고 하는 《마탄의 사수》가 그에게 커다란 흥분과 감명을 불러일으켰지만 연극에 흥미를 가졌던 그로서는 음악을 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고향에 다시 돌아와서도 언제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것은 극세계였다.

1828 와그너는 라이프치히의 게반드하우스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고전주의음악의 거인》이라고 불리우는 베토벤의 마지막 교향곡 9 《환희》를 처음으로 듣게 되였다.

장엄하고 웅장한 관현악과 합창으로 울리는 베토벤의 음악은 15살의 애젊은 와그너의 마음을 송두리채 그러잡았다. 작품은 그에게 있어서 마치 앞으로 가야 길이 어딘가고 비쳐주는 등대와도 같았다. 가슴은 (음악가가 되자. 베토벤의 음악과 같은 음악을 쓰자.) 생각으로 달아올랐다.

아직 작곡에 대한 파악이 전혀 없었던 와그너였으나 음악을 만들어보려는 생각으로 일에 달라붙었다. 그의 목표는 이미전에 써놓았던 비극 《베이발드와 아델라이다》를 음악화하는것이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수 없어 생각끝에 도서관에 가서 음악과 관련한 여러가지 책들을 빌려다 보기 시작하였다.

와그너의 일을 놓고 놀란것은 가족들이였다. 피아노도 치기 싫다고 그만두었던 그가 음악가로, 더우기는 작곡가로 된다는것이 하늘의 별을 따오겠다는것만큼이나 막연한 일처럼 생각되였던것이다. 집에서는 이러저러하게 말들을 하였지만 그만두라고는 하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벌써 두번씩이나 아버지를 잃고 자란 막내가 불쌍히 여겨졌기때문이였다.

와그너는 음악책들을 보면서 작곡하려고 하였지만 기초가 없는 그로서는 한발자욱도 전진할수 없었다. 18살이 되던 해에 그는 라이프찌히대학에 입학하여 언어학, 미학과 함께 정규적인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와그너가 노력끝에 만난 선생이 교회합창장이며 오르간연주가인 테오도르 와인리히였다. 선생은 자기의 제자에게 있어서 당시의 관습적인 교육방법이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것을 인차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무엇인가 새로운 방법을 생각해내지 않으면 안되였다.

인리히는 처음에 와그너에게 모짜르트나 하이든이 작품의 악보들을 보여주며 그들이 음악을 어떻게 꾸며나갔는가, 여러가지 성부들을 어떻게 리용하였는가를 분석해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와그너는 방법에 응해나서지 않았다. 특히 매우 어렵게 전개되여나가는 부분을 분석시키면 참으로 난감해하였다. 그는 자기가 우상화하는 베토벤의 교향곡을 따서 곡을 짓거나 그것을 연구하는 이전의 자기식의 방법으로 공부하는것을  좋아하였다.

다행히 선생도 베토벤음악의 신봉자였으므로 와그너에게 자기가 하는 수업이 베토벤의 음악을 부정하는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욱 폭넓고 깊이있게 알수 있게 한다는것을 리해시킬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 와그너는 남들이 4~5년은 걸려야 배울수 있다는 작곡리론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습득하고 여러 음악들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에게는 다양한 악기들에 대한 리해와 그것들을 어떻게 리용하겠는가 하는 관현악법에 대한 지식은 부족하였다. 그것은 와그너가 처음으로 작곡한 서곡의 연주회가 라이프찌히에서 열렸을 여지없이 드러났다.

그는 악기들의 효과와 조화를 알지 못한데로부터 서곡에서 대고소리를 집요하게 반복시켜주었다. 처음에는 그런가부다 하고 듣고있던 청중들은 격에 어울리지 않게 계속 울리는 대고소리에 완전히 실망하여 세상에 이런 음악도 있는가고 비웃음속에 야유하였다. 누가 들어도 경험없는 풋내기작곡가의 음악이라는것을 인차 알수 있었다.

자기의 작품이 어떻게 연주되는가 하여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앉아있던 와그너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창피하고 부끄러웠던 그는 얼굴조차 들수 없었다. 급하게 먹은 떡이 목에 걸린다고 단숨에 작곡의 세계에 뛰여든 와그너에게 차례진 응당한 결과라고 할수 있었다. 와그너에게 있어서 이것은 오래도록 쓰거운 추억으로 되였다.

1

히틀러에게 리용당한 와그너의 음악

 

무릇 작곡가라면 누구나 자기의 음악이 사람들속에 영원히 알려지기를 원할것이다. 살아있을 때나 죽은 후에나 사람들이 언제나 자기의 음악을 즐겨부르며 연주하고 듣는것을 바라지 않는 작곡가는 아마 세상에 없을것이다.

예로부터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작곡가는 죽어 자기의 음악을 남긴다. 인류를 위하여 좋은 음악을 창작한 작곡가의 작품은 비록 그가 세상을 떠난지 오래 되여도 그의 이름과 더불어 세상에 계속 울려퍼지게 된다.

지금 세계 방방곡곡에서 울리고있는 많은 음악들이 그것을 말해주고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와 정반대의 일이 오늘까지도 벌어져 사람들의 특별한 관심을 모으고있다.

1992 1 어느 나라의 교향악단이 와그너의 작품을 공연종목으로 선정한 일이 있었다. 이렇게 되자 나라에서는 와그너의 작품을 연주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론쟁이 광범하게 벌어졌다.

와그너는 도이췰란드 작곡가이며 그가 남긴 작품들에는 인류음악사의 한페지를 장식하는 좋은 음악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어이하여 나라에서는 다른 작곡가도 아니고 유독 와그너의 음악만이 그것을 연주하겠는가 말겠는가 하는 론쟁거리가 되여 사회적여론을 불러일으켰는가 하는것이다.

원래 나라에서 와그너음악은 20세기 중엽에 연주된 이후 더는 연주되지 않았다. 1970년대에 유명한 음악가가 음악회에서 관중들의 재청으로 와그너의 음악을 연주한 일이 있었다. 이때에도 역시 찬성과 반대의 론쟁이 분분하였다. 이와 같이 나라에서 와그너음악에 대한 연주론의는 오래전부터 시작된것이라고 할수 있다.

나라에서 와그너음악이 이렇게 주목되게 된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히틀러나치스도당들때문이였다.

히틀러는 1930년대에 정권을 잡은 다음 극악한 민족배타주의정책을 실시하면서 특히 이른바 《반유태인운동》을 검질기게 벌렸다. 나치스도당은 유태인종을 지구상에서 멸살시키라고 고아대면서 유태인이라면 누구를 불문하고 죽여버리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여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할수 없는 무서운 고통을 주었다.

예술계에서도 다를바 없었다. 파쑈도이췰란드가 음악계에서 소위 《아리아족의 우월성》을 제창하면서 내세운 음악가가 바로 리하르드 와그너였다.

와그너는 1883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보면 그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50여년전에 이미 없어진 음악가였다.

히틀러나치스도당은 와그너음악을 순수한 게르만족의 혈통에서 나온 전통적인것이라고 하면서 그의 음악을 도이췰란드사람들만이 아니라 강제수용소안에 갇힌 사람들도 듣도록 강요하였다.

흔히 사람들속에서는 자기의 적수가 좋아하는것을 자기도 좋아하는 일은 드물다. 더우기 자기들에게 죽음과 고통, 불행과 아픔을 원쑤가 좋아하는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것이라고 할지라도 혐오감이나 지어 증오감까지 가지게 할수 있다.

와그너음악도 마찬가지였다. 히틀러나치스도당이 좋아하며 선전한 음악이 그놈들에게 죽음과 고통을 강요당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던 사람들속에서 어떻게 아름답게 느껴질수 있었겠는가. 와그너음악으로 하여 여론이 격증되자 신문은 일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있는 여러 유태인출신 음악가들의 견해를 실었다.

히틀러나치스도당의 강제수용소 생존자이며 연주가인 어느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강제수용소에 있을 와그너의 음악을 듣지 못하였으며 그후에야 겨우 와그너를 알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수용소에서의 체험을 와그너와 련관시켜 생각할수 없다. 와그너의 음악연주를 반대하는 강제수용소 생존자들은 수용소에서 음악을 들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와그너음악을 연주하지 못하게 하는것은 지나친 극단이라고 생각한다. 와그너가 실지 히틀러와 같이 살면서 창작하였다면 몰라도 그는  히틀러가 태여나기도 전에 이미 죽었다. 그런 사람의 음악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하는것은 일종의 편견이라고 말하고싶다.

다른 나라에서 살고있는 연주가는 자기의 격정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강제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도 각각 다른 체험을 할수 있다. 그래서 론쟁에서 어느 편이 옳다고 대답하기는 힘들다. 오랜 기간의 모대김과 노력끝에 나는 공포에서 벗어났고 아무러한 고통도 느끼지 않으며 관현악단에서 와그너음악을 연주한다. 와그너의 음악은 히틀러가 좋아하였다. 나는 와그너의 음악을 들으면서 고통스러운 추억을 하게 되는 사람이 있는 연주되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야기의 대부분이 모두 이러한 론조였다. 결과적으로 30여만명의 유태인 강제수용소생존자들과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항의로 하여 와그너음악의 연주는 여론조사를 거친 다음 결정하자는것으로 일단락 마무리되였다.

와그너자신은 생전에 자기 음악이 영원히 울려퍼지기를 바라마지 않았을것이다. 그러나 지금 땅속에 있는 그가 일에 대하여 안다면 자기의 음악이 히틀러파쑈에게 리용된것을 두고두고 한탄할것이다.

2

음악상식

쏘프라노

 

쏘프라노는 녀성성음중에서 가장 높은 음역을 가진 성음 즉 녀성고음을 말한다.

쏘프라노는 음역과 음질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세가지로 분류된다.

 

장식적쏘프라노(soprano coloratura)

 

가장 높은 음역을 가진 가볍고 투명한 울림의 녀성고음을 말한다.

《화려한 기법을 가진 쏘프라노》라고도 불리우는데 형상에서 고도의 경쾌함을 발휘하고 빠른 수식구를 다룰수 있는 성악적인 능력과 넓은 음역을 가질것을 요구한다.

가극 《람메르무어의 루치아》(도니제티 작곡)에서의 루치아역, 가극 《마술피리》(모짜르트 작곡)에서의 밤의 녀왕역이 전형적인 장식적쏘프라노라고 할수 있다.

 

서정적쏘프라노(soprano lirico)

 

밝고 부드러우며 우아한 울림의 녀성고음을 말한다.

가극 《돈 죠반니》(모짜르트 작곡)에서의 돈나 엘비라역, 가극 《보엠》(뿌치니 작곡)에서의 미미역, 가극 《뉘른베르그의 명가수》(와그너 작곡)에서의 에바역이 전형적인 서정적쏘프라노라고 할수 있다.

 

극적쏘프라노(soprano dramatico)

 

일정한 금속성음질을 가진 무게있고 강한 울림의 녀성고음을 말한다.

극적인 연기력과 대사전달능력을 가질것을 요구한다.

가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와그너 작곡)에서의 이졸데역, 가극 《로엥그린》(와그너 작곡)에서의 브륀힐데역이 전형적인 극적쏘프라노라고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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