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음악가소개
리하르드 와그너와 그의 창작활동
김 원
지나온
유럽음악사를
더듬어
보면
유명한
음악가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리하르드
와그너는
독특한
미학적견해와
재능을
가졌던
작곡가로서
음악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영향력이
큰
음악가였다.
와그너는 19세기 도이췰란드인민이 낳은 뛰여난 작곡가, 지휘자였으며 극작가였고 평론가였다.
와그너는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찌히에서 아버지 프리드리히와 어머니 요한나의 아홉번째 아들로 태여났다. 당시 아버지는 검찰관의 서기였고 어머니는 빵을 만드는 로동자의 딸이였다. 출생한지 6개월이 되였을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의 가정은 드레즈덴으로 이사하였다.(와그너는 드레즈덴에서 이붓아버지를 맞이하였다. 이붓아버지는 그가 8살 되던 해에 사망하였다.)
와그너는 소년시기부터 문학에 취미가 있어 고대그리스의 신화들과 쉑스피어의 작품들을 탐독하였으며 14살이 되였을 때에는 쉑스피어의 비극과 같은 작품을 쓰려고까지 하였다. 문학에 대한 이러한 소질과 관심은 그가 그 이후 극작가로서 자기 작품의 대본을 자신이 직접 쓸수 있게 한 밑천으로 되였다.
와그너가 14살이 되였을 때 그의 가정은 다시 라이프찌히로 옮겨 왔다.
다음해에 그는 음악활동이 활발한 이 도시에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을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베토벤의 음악에 크게 감동되였던 그는 자기도 그와 같은 작곡가로 될 결심을 굳히게 되였으며 라이프찌히대학에 들어가 음악과 철학을 배웠고 한편으로는 교회합창장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와그너는 15살이 되여 비교적 늦게 음악공부를 시작하였으나 재능이 뛰여난것으로 하여 2년후부터는 창작품을 내놓게 되였다. 초기에는 피아노곡, 성악곡, 관현악곡들을 썼으나 그의 관심은 점차 가극에 돌려졌다.
1833년부터 1839년까지의 기간에 그는 도이췰란드의 여러 도시들에서 작곡가,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833년에 그의 《도‐대조》교향곡이 게반드하우스에서 처음으로 연주되고 첫 가극 《요정》이 완성되였다. 가극 《요정》은 도이췰란드의 전통적인 민족가극형식으로 씌여진 작품이였다.
1836년에 마그데부르그에서 봉건적인 륜리도덕을 비판한 와그너의 가극 《련애금지》가 막을 올렸다. 이 가극은 쉑스피어의 희극 《응당한 보복》에 기초한 작품이였다.
그해 11월에 와그너는 2년전부터 사랑하던 녀배우 민나 플라너와 결혼하였으나 이 결혼은 그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직업을 잃었던 그는 1837년에 로씨야의 리가에까지 가서 악장의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실업당하여 많은 빚을 갚지 못한채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1839년 9월에 빠리로 간 와그너는 1842년까지의 기간 여러 나라의 가극들을 편곡해주면서 어려운 생활을 계속하였다.
1840년에 평론 《도이췰란드음악론》을 집필하였고 2년전부터 시작하였던 가극 《리엔찌》를 완성하였다.
1842년에 조국으로 돌아온 와그너는 드레즈덴왕실가극극장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가극들을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이해 10월 드레즈덴에서는 가극 《리엔찌》가 성공적으로 상연되였는데 이 공연이 그가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한 첫 계기였다.
1843년에는 가극 《방황하는 네데를란드사람》이 창작상연되였고 1845년에는 가극 《탕호이저》총보가 완성되여 그해 10월에 처음으로 공연되였다.
3년후인 1848년에는 가극 《로엥그린》이 완성되였다. 이 시기부터 그는 자기 작품의 대본을 자신이 직접 썼다.
1840년대에 와그너가 창작한 가극들은 사실주의적창작수법의 견지에서 보나 음악에 의한 성격창조의 견지에서 보나 진보적인 작품들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이 작품들에서는 유도동기수법들이 리용되고 서곡에서 가극의 기본사상이 암시되는 등 이전 시기의 가극들에서 찾아볼수 없었던 새로운 특징들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 와그너는 자기 나라 가극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의 표시로 런던에 있던 웨버의 유해를 드레즈덴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견해를 가지고 사회정치활동에도 참가하였다. 1849년 5월 드레즈덴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무장을 들고 폭동대렬에도 뛰여들었다. 그러나 폭동의 실패와 체포령으로 하여 더는 조국에서 살수 없게 되자 리스트의 조언으로 스위스에 망명하였다. 와그너가 조국을 떠난 1850년에 와이마르에서는 리스트의 지휘하에 가극 《로엥그린》이 공연되였다.
와그너는 스위스에서의 망명초기 작곡을 중단하고 문필활동에 전념하였다. 이 과정에 《미래의 예술작품》(1850)과 《가극과 연극》(1851)이 집필되였다. 이 책들에는 예술에 대한 그의 진보적인 리념들이 표명되여있었다.
와그너의 이러한 견해를 반영하여 새로운 가극 《니벨룽겐의 반지》창작이 시작되였다. 그는 이 가극을 가극예술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구현한 철학적인 대작으로 구상하였다. 1852년에 대본완성에 이어 작곡에 들어가 1854년에 《라인의 황금》이, 1856년에 《발퀴레》가 창작되였다. 《지그프리드》는 창작도중에 중단되였다. 그것은 이 시기 그의 세계관적경향에서 변화가 일어났기때문이였다.
망명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있던 그는 대사령을 청원하여 도이췰란드에서의 추방을 해제받게 되였으며 국왕의 보호까지 받게 되였다. 또한 혁명에 대한 신념을 잃고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철학에 빠지였다. 이러한 사상정신적변화속에서 1859년에 가극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창작되였다.
1862년에 와그너는 조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윈, 모스크바 등 여러 도시들을 려행하면서 지휘를 계속하였으나 여전히 생활적곤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1864년에 망명지에서 돌아온 그는 다음해 뮨헨에서 가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첫 공연을 진행하였으며 1867년에 새로운 양식으로 된 가극 《뉘른베르그의 명가수》를 창작하여 다음해 뮨헨에서 공연하였다.
와그너는 안해가 사망하여 1870년에 리스트의 딸 코지마와 결혼하였다.
이 시기 그는 가극 《니벨룽겐의 반지》창작을 계속하여 《지그프리드》를 끝냈으며 이어 가극이 완성단계에 이르자 이 새로운 가극을 상연할수 있는 전문극장을 세울것을 결심하였다.
와그너는 문필활동에 정력을 들여 1871년에는 《가극의 사명에 대하여》, 1872년에는 《악극에 대하여》를 집필하여 내놓았다.
1874년에 바이로이트 반프리트의 새집으로 이사한 그는 그해 11월 21일에 가극 《신들의 황혼》창작을 끝냈다. 20여년간에 걸치는 가극창작은 드디여 끝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창작초기의 리념과는 모순된 작품이였다.
가극 《니벨룽겐의 반지》는 1876년에 바이로이트의 축전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와그너는 1882년에 가극 《파르지팔》총보를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바이로이트의 가극극장에서 수십번이나 공연되였다. 이 가극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되였다.
1883년 2월 13일 와그너는 가족과 함께 베네찌아에로의 려행도중 심장장애로 생을 마치였다. 그의 유해는 바이로이트의 집 정원에 안치되였다.
와그너의 이름은 그가 새로운 가극형식의 가극을 창작한것으로 하여 더 유명해졌다.
그는 음악과 극을 통일시키려는 지향으로부터 문학과 음악, 극연기, 무대미술이 하나로 결합되여 극적내용을 감동적으로 그려내는 독특한 무대극형식의 가극을 만들어냈다.
그의 가극에는 유럽가극의 기본형상수단인 아리아가 없으며 극음악의 기초에는 장면 또는 하나의 경을 관통하면서 부단히 전개되는 무한선률이 놓여있다. 극중인물들은 아리아가 아니라 선률성이 있고 표현력이 있는 레치타티보적인 극적선률로 노래하였다. 따라서 이 가극에서는 번호식가극들에서의 완결된 음악형식구조들을 찾아볼수 없다. 선률이 종지를 피하면서 종지가 없이 끊임없이 발전하는 선률전개에 맞게 화성진행도 그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났으며 긴장한 감7화음들이 리용되였다. 그것이 선률에 영향을 미쳐 조식과 조성이 해체되는데까지 이르렀다.
또한 음악적표현에서 관현악이 큰 몫을 담당하고있었다. 와그너는 가극에서 관현악의 표현력을 높이기 위하여 유도동기수법을 특별히 리용하였다. 그것은 《지그프리드》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나오는것과 같이 극중인물들, 칼, 잡스러운 물건, 도주, 재판과 같은 사건, 기쁨이나 슬픔과 같은 감정 등을 표현하는 짧은 선률이였는데 그의 가극들에서는 이러한 유도동기가 근 30개정도까지 리용되였다. 그는 이 유도동기들을 극적내용을 표현하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널리 리용하였다.
와그너는 관현악을 3관 또는 4관으로 편성하고 새롭고 다양한 편곡수법들로 관현악의 표현력을 높이였다. 가극에 포함되는 여러 예술형태들은 다같이 극적내용을 표현하는데 적극 이바지하였다.
와그너의 이러한 가극들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극적내용을 생동하게 보여줄수 있는 충분한 무대적조건을 갖춘 전문극장에서 당시까지 있어본적이 없는 색채적인 관현악을 동반하면서 가수들이 노래하고 연주하는 새로운 형식의 가극은 당시 대단히 혁신적인 작품으로서 사회적으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로 하여 그 시기뿐아니라 이후의 작곡가들속에서는 와그너의 이 가극을 적극 찬양하고 그의 창작방식을 추종하는 많은 신봉자들이 나타났다.
그러나 와그너는 이 가극들에서 성악의 지위를 떨어뜨림으로써 가극예술의 본성을 외곡하였다. 인간의 감정세계를 자연스럽게 표현한 아름다운 선률과 력사적으로 형성된 균형이 잡힌 형식구조와 화성의 법칙성들을 제거해버린것도 그의 가극개혁이 지지를 받지 못한 중요한 원인으로 되였다고 보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하르드 와그너의 가극과 가극, 관현악작품들은 그 예술적성과로 하여 자기의 생명력을 잃지 않고있으며 이것으로 하여 그의 이름은 후세에까지 전해지고있는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