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도민요의 명창 인민배우 김진명
인민배우 김진명(1914-1997)은 해방후
어버이수령님께서 찾아주신 은혜로운 조국의 품속에서 자기의 재능을 마음껏 꽃피우며 인민의 사랑을 받는 민요가수로,
음악창작가로서 조선민족음악예술발전에 크게 기여한 오랜 민족음악가의 한사람이다.
김진명은 1914년 2월 16일 황해남도 벽성군 화양면 신왕리(현재 황해남도 청단군 화양리)의 가난한 빈농가의 둘째 아들로 태여났다.
그는 8살부터 서당에 다니며 글공부를 시작하였으나 학비를 대지 못하여 중도에 그만두고 부모들의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다. 이 시기 무연한 논판에서 울리는 농군들의 구수한 로동민요가락들과 농악소리들은 남다른 음악적감수성을 가졌던 김진명에게 음악에 대한 동경심을 불러일으켰다.
맑은 목소리를 타고 난 그는 13살때 벌써 벽성지방의 농사일소리들과 서도민요가락들을 구성지게 뽑아넘기군 하여 마을사람들을 놀래웠다.
사람들의 칭찬이 잦을수록 소리공부를 하고싶은 열망은 나날이 커갔으나 빈곤한 살림인데다가 당시만해도 《소리하는 사람》을 난봉군으로 천하게 여기던 관념이 뿌리깊었던 때이므로 부모들을 설복시킬수 없었다.
김진명이 그리도 갈망하던 소리공부를 전문으로 하게 된것은 17살때 고학의 길을 떠나가던 도중 사리원(당시 봉산군소재지)에서 신봉익이라는 민간음악가를 만나게 되면서부터였다.
신봉익은 한때 가객들과 사귀면서 가곡, 가사, 가락들을 익혀 그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선소리패소리군들과 어울려다니며 경서지방의 민요나 잡가들을 어지간히 터득하였던 민간가수였다.
김진명을 만날 당시 신봉익은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으로 하여 사그러져가는 전통적인 민족음악을 지켜보려는 애국적량심에서 자기 집에 일종의 《양성소》를 차리고 민요가수를 지망하는 제자들을 받아 량심적으로 가르치고있었다.
김진명은 민요가수들의 소리공부에서 이전부터 법도화되여오던대로 먼저 시조와 가곡, 가사 가락들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서도지방의 대표적인 긴잡가들인 《놀량사거리》와 《배따라기》를 비롯하여 《룡강기나리》와 《타령》, 《수심가》, 《도라지타령》 등이 기본곡목으로 정해져있었다.
그는 주인집의 일손을 도와 나무하러 다니면서도 산이 떠나갈듯이 노래를 불렀고 논밭에 나가서는 농군들이 부르는 구수한 민요가락들을 귀담아 들었다. 현실을 통하여 인민들이 즐기고 좋아하는 가창법과 소리기교들을 터득한 그는 그것을 창조적으로 자기의 가창형상에 적용하여 보다 구성지게 엮는 묘리를 익혔다.
김진명이 서도민요의 명창으로 알려지기 시작한것은 《동아일보》가 주최한 서선명창대회(서선-《서조선》의 준말)에 참가하면서부터이다.
이 명창대회에서 18살의 김진명은 민요 《도라지타령》을 불러 단연 1등으로 당선되였고 당선자에게 차례지는 특혜로 《빅터》레코드회사의 전속가수(2년계약)로 채용되게 되였다.
첫 록음곡으로 《도라지타령》을 부른것이 소리판을 통해 전국에 보급되면서 그의 이름이 사람들의 화제에 올랐다. 이어 《놀량사거리》, 《배따라기》, 《초한가》, 《풍구타령》, 《개성난봉가》 등의 노래들을 록음하였는데 이것으로 하여 김진명은 당시 서도명창으로 이름났던 최순경, 김종조 등과 어깨를 겨루는 신진명창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러나 사람도 강산도 망국의 비운에 몸부림치던 수난의 세월은 그렇게도 재능있고 장래가 촉망되던 이 청년가수의 앞길에 어두운 그늘만을 몰아왔다.
당시 조선에 들어온 일제의 레코드회사들이란 다 일본에 본사를 둔 지사(일본 《빅터》축음기회사 조선지점 등…)들로서 계약을 맺고 채용한 가수들을 련습시켜서 록음할 때에만 일본으로 데려가군 하였는데 일본인가수들에 비하여 절반밖에 안되는 돈을 주었다. 뿐만아니라 록음만 끝나면 전속가수들에게 예술인으로서의 인격을 모독하는 온갖 잡일을 시키고 저들의 돈벌이를 위한 치부수단으로 롱락하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김진명이 일본에 가서 록음을 하고 돌아오니 회사에서는 그에게 자기가 부른 노래가 수록된 소리판들을 본인이 직접 매점에 나가 팔라고 강요하였다. 그때 소리판소개프로그람에는 록음한 가수의 사진이 붙어있었는데 사진의 주인공인 가수가 직접 소리판을 팔면 그자체가 인기있는 광고여서 상품매상고가 올라갔기때문이였다.
회사의 강압으로 김진명은 서울 빠고다공원앞에 차려놓은 소리판판매점에 서서 판매원노릇을 하게 되였는데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가슴속에서는 환멸감과 모멸감만이 차올랐다. 더우기 참을수 없는것은 일제의 총독부 학무국 《검열관》이라는자와 그 앞잡이들이 조선민요는 천한것이라고 업신여기면서 그에게 일본민요를 부르라고 강요해나선것이였다. 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설음만해도 가슴이 터져오는데 그놈들에게서 민족의 노래까지 멸시와 조소를 당하는데 반발이 난 김진명은 재털이를 집어들어 그자들의 면상에 들어던지고는 회사에서 나오고말았다.
이 사건으로 하여 그는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일주일간 악형을 당하면서 회사측에 《사죄》할것과 일본노래를 부르겠다는 다짐을 할것을 강요당하였다.
김진명은 끝내 레코드계와 결별하고 민족의 노래를 마음껏 부를 자유조차 무참히 짓밟는 어지러운 세상을 저주하며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가 1935년 6월이였다.
이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서도 자유롭게 꽃피워볼 길조차 잃은 한 식민지가수의 수난에 찬 방랑생활이 시작되였다.
그는 생계를 위해 겸이포(현재 송림시)에 가서 품팔이로동도 해보고 장돌뱅이신세가 되여 촌락의 장마당을 찾아다니며 물감 몇봉지를 팔기 위해 노래를 부르며 사구려타령을 하여야만 했다.
그러다가 개성 서본정이라는 곳에 머물러 민요가수후비들을 양성하게 되였다. 세월을 허무하게 살기보다는 적은 힘으로나마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책동으로 하여 빛을 잃어가는 민족음악을 지켜보려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모진 세상은 그의 이 자그마한 소망과 량심의 몸부림마저 무정하게 짓밟아버렸다.
군사기지건설동원의 징용령장을 받아쥔 김진명은 고배를 마시며 《징용기피자》의 딱지를 단채 물우에 뜬 부평초마냥 청진을 비롯한 함경도지방과 중국 동북의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며 방랑생활을 하게 되였다.
그는 고향으로 갈 길도 막히고 제이름조차 내놓고 쓸수도 없는 서글픈 신세를 담아 전에는 입에 올리지도 않던 《타향살이 몇해던가 손꼽아 헤여보니 고향떠나 십여년에 청춘만 늙어 부평같은 이내 신세 혼자서도 기가 막혀 창문열고 바라보니 하늘만 저쪽…》이라는 류행가 (《타향살이》)를 목메여 부르며 이역땅의 동포들과 함께 애향심에 북받쳐 한탄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였다.
1942년 봄에 김진명은 소리공부시절에 사귀였던 동료들과 함께 서로 의지하여 음악활동을 다시 해보려는 한가닥의 기대를 안고 평양에 왔으나 그때는 멸망을 앞두고 최후발악하던 일제의 파쑈적폭압으로 하여 모든 예술활동이 금지당한 상태였다.
이렇듯 그의 전반생은 눈물겨운 수난속에서 덧없이 흘러갔고 무정한 세월과 더불어 그의 재능도 이름도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져갔다.
김진명의 음악적재능은 8. 15해방후에야 비로소 어버이수령님의 품속에서 은혜로운 봄빛을 받아 활짝 피여날수 있었다.
해방의 기쁨과 함께 그토록 소원하던 민족의 노래를 마음껏 부르게 된 그는 어버이수령님께서 력사적인 개선연설에서 밝히신 건국로선을 받들고 음악으로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할 일념으로 류대복, 홍탄실 등 여러 음악가들과 함께 《한일가무단》을 뭇고 3. 1극장(해방전의 《금천대좌》)에서 공연활동을 벌려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열정과 욕망은 컸지만 해방된 조국땅에서 어떻게 새 음악문화를 건설하고 발전시켜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문화인들은 문화전선의 투사로 되여야 한다》〔주체35(1946)년 5월 24일〕, 《음악예술인들은 새 민주조선건설에 적극 이바지하여야 한다》〔주체35(1946)년 8월 8일〕를 비롯한 력사적인 연설들과 고전적로작들에서 새 조선건설에서 음악예술인들의 임무와 역할, 새 음악문화의 성격과 민주주의민족음악건설의 길을 환히 밝혀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음악예술인대렬을 꾸리는 사업에 깊은 관심과 배려를 돌려주시며 일제의 갖은 천대와 박해로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던 음악예술인들을 나라의 방방곡곡에서 한사람한사람 찾아주시고 예술활동을 조직적으로 벌려나가도록 북조선음악건설동맹을 비롯한 부문별 음악전문단체들을 조직하여주시였으며 주체36(1947)년 4월에는 첫 민족음악단체인 조선고전악연구소를 내오도록 하시고 지난날 수난에 찬 방랑생활을 강요당하였던 김진명을 비롯한 민족음악가들을 불러주시였다.
김진명은 나라없던 그 세월 길가의 막돌처럼 버림받던 자기를 해방된 조선의 첫 음악예술인대오에 내세워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은덕을 가슴뜨겁게 새기며 민족의 유구한 음악유산을 적극 발굴복구하고 계승발전시켜 찬란히 꽃피우라고 하신 수령님의 귀중한 가르치심을 기어이 관철할 일념으로 가슴불태웠다.
그는 고전악연구소 민요부 가수로서 공연활동에 참가하는 한편 신인가수들을 키우는 후비육성사업도 맡아하였으며 민족고전과 창극유산들을 발굴정리하여 무대에 올리는 활동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김진명은 주체37(1948)년 12월 고전악연구소가 다른 예술단체들과 함께 국립예술극장으로 통합된 다음에는 국립예술극장 협률단(합동후 고전악연구소는 《협률단》으로 명칭을 바꿈) 민요부 부장으로 사업하였으며 민요가수양성과 함께 공연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는 민주개혁을 축하하는 경축공연을 비롯한 력사적의의가 있는 공연무대들에서 그리고 공장과 농촌 등 생산현장들에서 구수한 서도민요독창으로 관중들과 근로자들을 기쁘게 해주었으며 인민들의 전진운동을 적극 고무하였다.
준엄하였던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그는 우리 군대와 인민을 전쟁승리에로 고무추동하는 가요 《양키토벌가》를 비롯하여 《산천가》, 《얼룩소야 어서 가자》, 《후방가정》, 《춘경가》 등의 노래들을 류창하고 구성진 민족적선률로 창작하여 보급함으로써 인민군용사들과 후방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주는데 이바지하였다.
김진명은 전후복구건설시기와 사회주의건설시기에도 민요가창활동과 함께 민족적색채가 짙은 노래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전후시기에 그는 국립고전예술극장〔주체41(1952)년 11월에 독립적인 민족음악단체로 창설〕 민요부 부장으로, 그후 민족가극단 등에서 활동하면서 민족음악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였다.
민요가창에 뛰여났을뿐아니라 연기와 화술에도 능하였던 그는 창극과 민족가극의 주요배역들을 맡아 훌륭히 형상하여 관중들의 호평을 받군 하였는데 창극 《춘향전》에서는 변학도의 역을, 《심청전》에서는 왕의 역을, 《배뱅이굿》에서는 배뱅이아버지의 역을 담당하였다.
김진명은 대외공연활동에도 많이 참가하여 조선민족음악예술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소개선전하고 빛내이는데 기여하였다.
그는 아시아와 유럽을 방문하는 여러 예술단체들에 망라되여 민요독창과 창극의 주역을 담당하군 하였으며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주체46(1957)년 8월)에 자기가 작곡한 민요합창 《어부의 노래》를 가지고 참가하여 은메달을 받았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해방후 첫시기부터 나라의 민족음악예술발전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하여온 김진명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주체44(1955)년 8월 그에게 자신의 존함으로 된 표창장을 수여해주시고 공훈배우칭호도 안겨주시였다.
크나큰 사랑과 믿음을 받아안고 김진명은 더욱 분발하여 음악창조활동을 벌려나갔으며 들끓는 현실에 들어가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민족적형식에 사회주의적내용을 담은 새로운 양식의 창극 《강건너마을에서 새 노래 들려온다》(윤영환과 합작)를 창작하여 내놓았다.
이 작품은 사회주의현실을 처음으로 취급하였을뿐아니라 서도민요에 기초하여 판소리창극의 음악극작술을 새롭게 혁신한것으로 하여 의의가 컸다.
김진명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주체47(1958)년 12월 창극 《선화공주》를 보시면서 몸소 종자를 잡아주신 이 작품의 작곡을 담당하였다. 그는 시대적미감에 맞지 않는 판소리창극의 틀을 대담하게 마스고 《룡강기나리》를 비롯한 서도민요의 음조를 기본바탕으로 하여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생활을 민요적인 음조와 안삼블로 형상하는 등 새로운 음악극작술을 창조하였다.
주체49(1960)년 3월 어느날 이 창극을 보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인민들을 공산주의사상으로 교양하는 좋은 작품이라고 무척 기뻐하시며 조선적인 맛도 있고 들으면 용기도 난다고 높은 평가의 말씀을 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작품을 잊지 않으시고 서도민요가 바탕으로 되여있는 《강건너마을에서 새 노래 들려온다》는 탁성이 없으니 얼마나 듣기 좋은가고, 민족음악은 이것을 표준으로 하여 발전시키는것이 좋겠다는 뜻깊은 말씀을 하시였으며 그 음악창작에 기여한 김진명에게 인민배우칭호〔주체51(1962)년 10월〕를 안겨주시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만지는 어버이수령님의 육친적인 사랑과 믿음속에서 김진명은 인민들을 전후복구건설과 사회주의건설에로 고무추동하는 다양한 주제의 노래들을 많이 창작보급하였다.
그는 오늘도 우리 인민들의 사랑속에 널리 불리우고있는 민요 《모란봉》, 《개나리》, 《바다의 노래》를 비롯하여 《공화국 은덕일세》, 《림진강나루는 리별의 나루》, 《향로봉에서》, 《님마중가세》, 《지방산업 꽃핍니다》, 《풍년맞이》 등 수십여편의 노래들을 창작하였다. 이와 함께 민족가극 《해빛을 안고》, 《아름다운 시절》을 창작하여 민족가극을 시대의 요구에 맞게 보다 혁신하는데 기여하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오래동안 키워 내세워오신 김진명을 조선민족음악의 로장으로 아껴주시며 그의 예술활동과 생활에 각별한 관심을 돌려주시였다.
예술인 한사람한사람을 끝없이 사랑하시며 그들의 창작품을 국보처럼 귀중히 여기시는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김진명이 창작하였던 창극 《강건너마을에서 새 노래 들려온다》는 사상적내용도 좋고 음악도 좋고 배우들이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니 더욱 좋다고 하시며 방송으로 많이 내보내여 널리 보급하도록 하여주시였다.
그리고 김진명을 평양음악무용대학(당시)의 명예교수로 교단에 내세워주시고 민요가수후비들을 육성하도록 하시였으며 그의 생활에 불편이 있을세라 대학까지의 출퇴근거리도 가늠하시여 좋은 위치에 살림집을 배정해주도록 하시고 현대적인 문화기재도 남먼저 보내주군 하시였다.
주체79(1990)년 10월 조국통일운동력사에 새로운 장을 펼친 《범민족통일음악회》의 진행정형을 료해하시던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전에 김진명동무가 서도민요를 잘 불렀는데 그것을 잘 살려야 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며 서도민요과 함께 남도민요도 적극 찾아내여 우리 식 민요창법으로 그 본색을 살려 옳게 형상하여야 한다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러시면서 지금 민요를 당의 문예방침에 맞게 발전시켜나가자고 하여도 키를 잡아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하시며 민요를 발전시킬 사람을 찾아내기도 하고 키워내기도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시였다.
그로부터 얼마후 그이께서는 음악가동맹에서 민요가수들의 강습을 체계적으로 조직하도록 대책을 세워주시면서 김진명을 비롯한 관록있는 로가수들이 강사가 되여 민요가수후비들을 전망성있게 키워나가도록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지난날 천대와 수모속에 떠돌아다니는 방랑가수로 불리우며 노래와 재능마저 짓밟히고 빼앗겼던 로가수이기에 말년까지 그 재능을 세상에 떨치며 보람찬 삶을 누려가도록 이끌어주시고 내세워주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사랑과 은정은 정녕 끝이 없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이어 서울에서 《90송년통일전통음악회》가 열리게 되자 김진명을 통일의 음악사절로 그 대오에 세워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한량없는 사랑과 두터운 믿음은 80이 다 된 로가수에게 청춘의 활력과 창조적열정이 더욱 샘솟게 하였다.
김진명은 서울의 한 신문이 《년로한 김옹의 목소리가 이외로 찌렁찌렁 울려나오자 모두가 감탄》하였다고 대서특필로 소개하리만큼 공연무대들에서 민요 《배따라기》, 《산천가》를 비롯한 구성진 서도민요들을 우렁찬 목소리로 정력에 넘쳐 부름으로써 남녘동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통일의 의지와 열기를 북돋아주었다.
서울에서의 그의 출연은 은혜로운 공화국의 품속에서 지난날 짓밟혔던 재능을 활짝 꽃피우며 인민의 사랑을 받는 인민배우로 성장한 로가수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현실로 보여주었으며 오랜 민족음악가들을 끝없이 아끼고 보살펴주는 조선로동당 정책의 인민적성격과 생활력을 과시하였다.
그가 서울에서 50여년전에 헤여진 후 생사는 물론 행방조차 모르고있던 친동생을 만나 혈육의 뜨거운 정을 나눌수 있었던것도 인간사랑의 정화로 빛나시는 위대한 장군님의 세심한 보살피심속에 받아안은 행복이였다.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그후에도 김진명선생의 생활과 음악활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돌려주시며 일군들에게 선생은 우리 당의 보배라고, 이런 선생을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으며 예술의 후배들이 선배들을 돌보아주는것은 응당한 일이라고 하시면서 그의 생일 80돐 때에는 은정깊은 생일상을 보내주시고 국가수훈도 해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어버이사랑이 깃들어있는 생일상을 받아안은 그날 김진명은 눈물에 젖어 친지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로 말하면 나라를 지키는 전투에서 위훈을 세운 사람도, 사회주의건설장에서 로력적위훈을 세운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80나이가 되도록 노래를 불러온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우리의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 생일 80돐상까지 보내주시니 무엇으로 이 은혜를 다 갚는단말입니까. 세상에 우리처럼 긍지높은 예술인들은 없을것입니다. 위대한 령도자를 모시여 발전하는 우리의 음악예술이 있고 행복의 꽃방석에 앉아 삶을 누리는 우리 음악예술인들이 있다는것을 온 세상에 소리높이 자랑하고싶습니다.》
절세의 위인들의 이처럼 은정깊은 어버이사랑속에서 김진명은 조선음악가동맹 고문으로, 윤이상음악연구소 민족음악연구실 명예가수로 있으면서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민요가수후비양성과 민족음악유산들을 발굴정리하는 사업에 헌신하다가 1997년 5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다.
해방후부터 50여년간 절세의 위인들의 손길따라 공화국의 민족음악예술발전을 위하여 성실한 노력과 땀을 바쳐온 인민배우 김진명의 장례는 위대한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과 관심속에 기관장으로 의의깊게 진행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