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음악가소개
작곡가 베르디와 그의 창작활동
김 원
베르디는 가극의 고향으로 불리우는 이딸리아에서 몬떼베르디, 따르띠니, 치마로자 등에 의하여 눈부신 발전의
길을 걸어오던 이딸리아가극이 위기를 겪고있던 시기에 태여나 창작활동을 벌리였다. 그는 이딸리아가극의 우수한 전통에 기초한 수많은 가극작품들을
창작하여 침체기에 빠져있던 이딸리아가극이 또다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쥬제뻬 베르디(Giuseppe Verdi)는 북부이딸리아의 자그마한 농촌마을 론꼴레에서 1813년 10월 10일에 태여났다. (그가 태여난 마을이름은 1963 년부터 론꼴레 베르디로 불리워지고있다.) 그의 아버지는 한적한 농촌 려인숙을 운영하였는데 보잘것 없는 수입으로 하여 집살림이 매우 어려웠다.
베르디는 어린시절 자기 집에서 이따금 묵어가는 방랑음악가들의 음악을 즐겨들으면서 자라났다. 7살이 되던 해의 어느 일요일 아침 베르디는 부모를 따라 마을에 있는 교회당으로 갔다가 처음으로 오르간소리를 듣게 되였다. 신기하게 들리는 그 소리에 매혹된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에게 나도 오르간을 배우겠으니 오르간을 사달라고 졸라댔다. 어린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는 낡은 스피네트 (클라브쌍의 일종) 를 사다주었다. 이때부터 베르디는 교회소년합창단에 들어가 교회오르간연주가인 바이스뜨로키에게서 3년동안 오르간을 배우게 되였다. 음악적감각이 매우 예민했던 베르디가 오르간을 얼마나 능숙하게 탔던지 선생은 더는 그에게 배워줄것이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12살때 베르디는 통학거리가 15리나 되는 부쎄트시에 있는 학교에 입학하여 음악공부를 계속하였다. 이때 벌써 베르디는 서곡과 행진곡을 작곡하여 음악적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학교를 졸업한 베르디는 한때 지휘자로 활동한 적도 있었고 시음악협회 회장직도 맡아보았던 페르디난또 바레찌에게서 음악을 배우게 되였다. 베르디는 그의 집에서 때때로 열리군 하는 음악회에 참가하여 사보도 해주고 편곡도 하고 때로는 대고도 쳐주었다. 그는 여기서 처음으로 하이든, 로씨니를 비롯한 여러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알게 되였다.
16살때 베르디는 교향곡을 작곡하여 시교향악단의 이목을 끌었으며 그후 교회에서 오르간연주도 하고 시음악협회가 조직한 음악회에 자주 출연도 하면서 꾸준히 음악적자질을 높여나갔다.
이때까지 음악을 한갖 취미로만 해오던 베르디는 이제는 음악으로 성공할수 있다는 자신심을 가지고 음악가가 될 결심을 품게 되였다. 그는 음악가로 성공하자면 개별지도가 아니라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832년에 커다란 희망과 포부를 안고 음악원이 있는 동경의 도시 밀라노로 갔다. 필답과 구답, 실기에 이르기까지 자신만만하게 밀라노음악원 입학시험을 치고 시험장을 나선 그는 틀림없이 최고점수로 시험에 합격되리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베르디는 유감스럽게도 그처럼 열망하던 밀라노음악원 입학시험에서 떨어지고말았다. 리유인즉 나이 (당시 베르디는 19살 이였다.)가 많다는것과 전문가적인 자질이 부족하다는것이였다.
미구에 가극의 《황제》로 명성을 떨친 베르디는 시험에서 높은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가난한 집 자식인 탓에 음악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신 후세에 아무런 이름도 남기지 못한 호부자집 자식들이 음악원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였다.
가난이 원쑤가 되여 아들이 밀라노음악원에 입학하지 못한 울분으로 모대기던 아버지는 그가 실망과 좌절을 모르고 기어이 음악의 길로 나가려는것을 한사코 가로막아 나섰다. 그러나 베르디의 선천적인 음악적재능을 발견한 옛날의 방랑악사였던 바가쎄또는 그의 아버지를 설복하여 베르디를 음악의 길에 내세워주었다.
베르디는 밀라노음악원 입학시험에서 락선된것을 한생토록 잊지 않았다. 그처럼 희망하던 음악원에서 배우고싶었던 간절한 소원이 무참히 짓밟힌 베르디는 후날 세계적인 음악가가 된 후에도 밀라노음악원에 대한 적의의 태도를 조금도 달리하지 않았다. 그는 밀라노음악원에서 교수로 와달라는 초빙도, 특강을 해달라는 청탁도 모조리 뿌리쳤다. 베르디가 사망한지 9년이 지난 1910년에 밀라노음악원은 베르디음악원으로 개칭되였다. 만약 그가 그때까지 살아있었더라면 이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했을지도 모른다.
베르디는 가난한 탓에 그처럼 바라던 전문음악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음악의 길을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밀라노음악원시험에서 떨어진 베르디는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성공의 그날을 하루빨리 앞당길 야심을 품고 더욱더 꾸준히 음악공부를 해나갔다.
1833년 6월부터 베르디는 부쎄트시 음악협회회원인 바레찌의 소개로 밀라노에 있는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빈첸찌노 라뷔나에게서 개별수업을 받았다. 그는 3년동안 작곡법을 착실히 배워가지고 1835년 7월 부쎄트로 돌아와 시 음악협회 지휘자, 교회의 오르간연주가 등을 겸하며 연주회에 출연도 하고 작곡도 하였다.
그때로부터 3년이 지나 베르디가 26살되는 해에 마침내 그의 처녀작 가극 《성 보나파끼오의 백작 오베르또》가 밀라노스깔라가극극장에서 상연되였다. 관중들의 평은 나쁘지 않았다. 극장경영주는 베르디에게 2년동안 상연할 3편의 가극을 주문하였다.
그러나 1840년에 불행하게도 두 자식과 련이어 사랑하는 안해마저 잃은 비극적인 환경에서 베르디가 창작한 두번째 가극 《일일천하》는 스깔라가극극장무대에 올랐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 가극은 그후 몇번이나 수정되였으나 베르디가 살아있는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있다가 1951년에 이딸리아방송국의 주최로 다시 상연되여서야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가정의 불행과 두번째 가극의 실패로 자신심을 잃은 베르디는 영원히 가극창작을 단념하고 《원한의 도시》 밀라노를 떠나 귀향하여 조용히 살기로 결심하였다. 이러한 때 극장경영주는 그에게 가극대본 《나부꼬》를 주면서 가극으로 만들어줄것을 청탁하였다. 자유와 해방에 관한 사상으로 일관된 가극대본의 내용은 베르디의 가슴을 창작적흥분으로 끓어번지게 하였다. 특히 바빌로니아로 끌려온 헤브리아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은 자기의 처지를 보여주는듯싶었다. 펜과 5선지를 쥔 베르디는 마음속에 가득차있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선률에 실어보내려는듯이 일사천리로 악보를 그려나갔다. 《나부꼬》는 짧은 기간에 가극으로 완성되였다.
1842년 봄 밀라노스깔라가극극장에서 가극 《나부꼬》의 첫 공연의 막이 올랐다. 이날 공연은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다. 막이 내려졌으나 박수가 그칠새 없이 계속되여 베르디는 몇번이나 무대에 올라가 답례의 인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베르디는 가극 《나부꼬》에 뒤이어 1842년 한해동안에 제1차 십자군원정시대의 중세기적이야기를 담은 가극 《롬바르디아사람들》을 완성하여 그 이듬해초 밀라노스깔라가극극장무대에 올렸다. 성황리에 진행된 첫 공연은 예상외로 관중들의 대호평을 받았다. 가극에서 예루살렘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에 일떠선 십자군이 부른 합창곡은 이딸리아의 모든 도시의 거리들에 울려퍼졌다. 그후 이 곡은 이딸리아독립운동가들속에서 널리 애창되였다.
베르디는 자만을 모르고 빅또르 유고의 희곡 《에르나니》를 가극으로 옮기는 일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가극에 담겨진 정치적내용이 문제시되여 일부 장면을 몇번에 걸쳐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가극 《에르나니》의 첫 공연은 1844년 3월에 베네찌아의 라 페니체극장에서 진행되였다. 원작에 깊이 공감했던 베르디는 이 작품에서 나라의 통일을 지향하는 이딸리아인민의 애국적감정을 잘 표현하였다. 가극 《에르나니》는 인차 이딸리아뿐아니라 다른 유럽나라들에서도 공연되였다.
2년후에 베르디는 가극 《아딸라》를 창작완성하여 베네찌아의 라 페니체극장에서의 첫 공연에서 관중들의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받았다. 5세기 흉노족의 침략을 반대하는 이딸리아인민들의 투쟁을 반영한 이 가극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반대하고 민족통일을 위해 싸우는 이딸리아애국자들의 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롬바르디아사람들》,《에르나니》,《아딸라》와 같은 애국주의정신이 차넘치는 가극을 창작한 베르디는 오스트리아의 지배와 예속을 반대하고 나라의 독립을 념원하는 이딸리아인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이딸리아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로 높은 존경을 받게 되였다.
이때 베르디는 이딸리아음악계에서 가장 명망높은 음악가로 자기의 지위를 확고히 차지하였을뿐아니라 절박한 사회적문제를 담은 가극작품을 창작한것으로 하여 사회계와 정계에서도 높은 권위를 지니게 되였다. 베르디는 1859 년 이딸리아에서 첫 국회가 열렸을 때 상원의원으로 선거(5년간)되였으며 1861년 이딸리아통일국가를 세우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빅또르 유고 작품의 애독자였던 베르디는 그의 희곡 《방탕한 왕》을 읽고서 깊은 감명을 받고 가극으로 창작하였다. 그전에 그는 영국시인 바이론의 《두 포스카리》, 쉐익스피어의 《마크베스》를 가극화하였다. 왕정을 반대하는 진보적사상의 류포를 두려워한 당국은 가극 《방탕한 왕》이 왕권에 대한 반항의식을 고취한 작품이라는 리유로 상연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작품에서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를 빠리가 아니라 이딸리아북부의 작은 지방도시 만또바로 옮기고 프랑스국왕을 만또바공작으로 바꾸어 놓았다. 제목도 《저주》로 바꾸었다가 정치적색갈이 짙은것 같아 다시 《리골레또》로 고치였다. 리골레또란 만또바궁정에서 어리광대노릇을 하는 곱사등이의 이름이다. 그렇게 해서야 공연허가를 받게 되였다.
1851년 3월 《리골레또》의 첫 공연이 베네찌아 라 페니체극장에서 초만원을 이룬 관중들의 대호평을 받으며 성황리에 진행되였다. 무미건조한 대화창대신 선률성이 넘쳐흐르는 성악과 관현악을 배합하여 노래하는 이 가극은 강한 극성으로 하여 관중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가지고 감상하게 하였다. 이딸리아가극사상 《리골레또》와 같이 성격묘사가 뚜렷하고 아름다운 선률로 된 가극은 없었다. 가극 《리골레또》로 하여 베르디의 음악생활에서는 새로운 기원이 열리였으며 그의 이름은 온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베르디는 2년후인 1853년에 또다시 2편의 가극 《일 뜨로바또레》와 《라 뜨라비아따》를 창작하여 사람들을 경탄시키였다. 이전의 가극들에서는 주로 고대 그리스신화를 소재로 하고 영웅적인물이나 귀족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그러나 베르디는 집씨녀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가극 《일 뜨로바또레》에서와 같이 부유하고 권세있는자들의 허위적인 사랑을 경멸하고 비천한 평민들을 내세워 그들의 순결한 사랑을 찬양하였다. 1853년 1월 로마 아폴로극장에서 처음으로 상연된 가극 《일 뜨로바또레》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같은해 베르디는 또다시 알렉싼드르 듀마 (아들) 의 소설 《 라 뜨라비아따》를 가극으로 만들어 베네찌아의 페니체극장무대에 올려 관중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와 환호를 받았다. 이 가극은 오늘 세계적으로 공연회수가 가장 많은 작품들중의 하나로 되고있다.
베르디는 《리골레또》, 《일 뜨로바또레》, 《라 뜨라비아따》를 창작함으로써 음악가로서의 전성기에 들어서게 되였다. 이 작품들로 하여 그는 세계 음악계에서의 자기의 음악적지위를 확고히 하게 되였다. 이때부터 18년후 베르디는 자기의 창작기량의 종합체라고 할수 있는 가극 《아이다》를 창작하여 가극작곡가로서의 천재적재능을 남김없이 시위하였다. 그 사이 베르디는 《씨몬 보까네그라》, 《가면무도회》, 《운명의 힘》, 《씨칠리아의 독사들》, 《돈 칼로스》를 비롯하여 음악사에 길이 남을 가극들을 내놓았다. 가극 《아이다》는 베르디의 가극중에서 공연회수가 가장 많고 무대규모가 가장 방대한 작품이다. 1869년 베르디는 에짚트국왕으로부터 수에즈운하의 력사적개통을 기념하여 공연할 가극을 청탁받고 이 작품을 창작하였다.
가극은 에티오피아에서 에짚트로 포로되여온 미모의 처녀 아이다와 에짚트군 사령관 라다메스의 열렬한 사랑의 이야기를 통하여 자유에 대한 갈망과 민족적독립을 념원하는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과 함께 에짚트통치자들의 억압과 증오심을 표현하고있다. 가극 《아이다》의 첫 공연은 1871년말 새로 건설한 까히라극장에서 에짚트국왕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히 진행되였다. 가극은 짧은 기간에 유럽의 모든 극장들을 휩쓸었으며 세계적인 환호를 받았다. 베르디는 생의 전기간 27편의 가극을 창작하였다. 그 대부분이 오늘도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널리 상연되고있다. 그중에서도 《리골레또》, 《일 뜨로바또레》, 《라 뜨라비아따》, 《아이다》는 그의 4대걸작으로 평가되고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베르디는 쉐익스피어의 희곡 《오쎌로》(보이또가 가극대본으로 만듬) 작품창작에 7년이라는 기간을 바치였다. 베르디는 74살이 되는 1887년 2월 밀라노스깔라가극극장에서 가극 《오쎌로》를 첫 공연무대에 올렸다. 이날 떠나갈듯 한 환성과 우뢰와 같은 박수로 극장안은 삽시에 감동과 환희, 흥분의 도가니로 끓어번졌다. 다음날 신문들은《오쎌로》는 이딸리아가극이 도달할수 있는 최고의 극치에 이른 작품이라고 극구찬양하였다. 세계는 고령의 베르디가 이러한 걸작을 내놓은 경이적사실에 경탄하였다.
가극 《오쎌로》를 첫 무대에 올린 때로부터 2년후 베르디는 보이또가 쉐익스피어의 희극 《윈저의 유쾌한 아낙네들》에 《팔스타프》라는 제목을 단 가극대본을 가지고 가극을 쓰기 시작하여 1893년 2월 밀라노스깔라가극극장에서 첫 공연을 하였다. 가극 《팔스타프》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세상사람들은 베르디가 80고령으로 또다시 새 가극을 무대에 올린데 대하여 경탄을 금치 못해하며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
1901년 1월 27일 60년세월의 창작적년륜을 새겨오던 베르디는 뇌출혈로 88살에 생을 마치였다.
베르디는 27편의 가극과 100여편의 성악곡을 비롯하여 수많은 음악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세계음악계에서는 베르디를 와그너와 함께 서방가극의 2대《거장》으로 부르고있다. 와그너가 기악적이고 대위법적으로 가극을 창작하였다면 베르디는 성악적이고 선률적이며 화성적인 기법으로 가극을 창작하여 유럽가극의 황금시대를 열어놓았다. 베르디의 가극은 노래와 관현악을 극적요소와 배합시켜 변화무쌍한 형상으로 전개시킴으로써 문학작품보다 더 생동하여 깊은 감명을 주고있다.
쥬제뻬 베르디의 음악, 특히 가극음악작품들은 이딸리아뿐아니라 세계가극사에 귀중한 유산으로 전해지고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