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도지방민속음악에 대한 일반적리해
(1)
부교수 최기정
서도지방민속음악은 이 지방 인민들의 민속생활을 구체적으로 반영하고 력사적으로 형성발전하여온 귀중한 음악유산이다.
서도지방의 민속음악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이 지방의 지형학적리해를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서도지방은 력사지리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평안남북도일대와 황해남북도일대 그리고 자강도의 일부를 포괄하는 조선반도의 북서부지역이다.
우리 나라에서 서도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것은 고려초기 995년 (성종4년)에 지방행정체계를 고쳐 전국을 10개 도로 개편할 때 서경(평양)관할하의 군현들을 망라하여 패서도가 설치되면서부터이다.
옛날에 대동강을 패강 또는 패수라고 부르던데로부터 그 서쪽에 있는 지방이라고 하여 대동강이북(오늘의 평안남북도와 자강도의 일부)지방을 패서도라고 정하고 정식 행정구역명칭으로 불렀다. 그후 고려에서는 10도제가 1036년부터 5도량계제로 개편되면서 오늘의 강원도, 함경남도지방에 있었던 삭방도의 북부가 동계로 고쳐지고 오늘의 평안남북도지방에 두었던 패서도가 북계로 되였다. 당시 북계는 서북면, 서북계 또는 서도 등으로도 불리웠다.
또한 이때에 서도지방의 중심지인 평양을 《서경》 또는 서쪽에 있는 수도라는 의미에서 《서도》라고 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관서지방에 속해있었던 서해안지역을 《서도》라고 하였다. 관서지방은 조선봉건왕조시기의 평안도지방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지금의 평양시, 평안남북도와 자강도의 대부분이 속한다. 당시 평안도란 1413년 전국을 8도로 나눌 때 부른 정식 행정단위명칭이며 관서란 평안도에 대한 사회적인 통속명칭이였다. 서해안지대에 있는 당시의 평양, 중화, 룡강, 강서, 숙천, 안주, 곽산, 정주, 구성, 철산, 룡천, 의주, 황성, 삭주 등 지역을 서도라고 하였으며 내륙지대인 상원, 강동, 은산, 성천, 순천, 덕천, 맹산, 양덕, 개천, 녕원, 녕변, 박천, 운산, 벽동, 희천, 강계, 위원 등 지역을 북도 또는 청북지방이라고 하였으며 그 이남지방을 남도 혹은 청남지방이라고 불렀다. (13도개편은 1896년에 있었음)
이와 같이 서도라는 표현은 고려초기부터 쓰인 말로서 서쪽에 있는 지방 또는 서쪽에 있는 수도라는 의미를 담고있다.
고려시기나 조선봉건왕조시기에 쓰이던 서도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서도지방은 그 지역적으로 볼 때 서로 같지 않다. 우에서 본것처럼 고려시기나 조선봉건왕조시기의 서도에는 오늘의 평안남북도와 자강도의 일부 지역만이 속하지만 오늘날의 서도지방은 황해남북도까지 포괄하는 조선반도 북서부의 전지역을 의미한다.
오늘 우리 나라의 국토 전체에 대한 지방구분에서는 지난 시기의 평안도와 황해도를 불가분적관계에 있는 지역으로 인정하면서 서도지방이라고 하고있다.
지난 시기의 황해도를 평안도와 같이 서도지방으로 보고있는것은 황해도가 력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평안도와 공통성을 가지고있기때문이다.
황해도는 력사지리적으로 평안도와 함께 오랜 시기를 거쳐 우리 나라의 서쪽에 있으면서 하나의 겨레가 정치경제적으로 같은 생활을 하여온 지역이다.
황해도는 력사지리적으로 고대에 평안도와 함께 고조선의 령토였으며 삼국시기에도 역시 평안도와 같이 고구려에 속해있었다.
황해도는 고려나 조선봉건왕조시기에도 같은 지역에 있으면서 다같이 서쪽을 의미하는 지방이름으로 불리웠다.
고려시기 평양을 서쪽에 있는 수도라고 하여 《서경》, 《서도》라고 부르고 평안남북도와 자강도의 일부를 포괄하는 지역을 패서도라고 할 때 황해도는 서쪽에 있는 해변가의 지역이라고 하여 서해도라고 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에 평안도를 관서지방이라고 하였다면 황해도는 해서지방이라고 하였다. 해서란 말도 역시 이 지역이 우리 나라의 제일 서쪽바다가에 자리잡고있다는 뜻이다.
서해도나 해서에서 《서》자는 당시 서쪽을 가리킨것으로서 역시 서도지방의 의미를 담고있다고 볼수 있다. 이것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하나의 지역적공통성을 가진 지역으로 보아왔음을 말해주는 뚜렷한 증거로 된다.
평안도와 황해도는 또한 주민구성에서도 일정하게 공통성을 가지고있다.
력사적으로 이루어진 평안도지방의 주민구성과 황해도지방의 주민구성에 대한 자료들이 그것을 립증하고있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고려정부는 평안도의 중심지인 평양을 군사정치적중심지로 꾸릴 목적으로 건국직후인 918년 9월에 황주, 봉주(봉산), 해주, 벽주 (벽성) 등 황해도지역의 인민들을 평양에 집단적으로 이주시켰다.(《고려사》권1세가 태조 원년 9월 병신)
황해도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평안도로 들어오게 되여 두 지역 인민들사이의 왕래가 잦아지게 된것은 주민구성에서의 공통성을 가져오게 한 요인으로 되였다.
평안도와 황해도는 자연지리적으로 가까이 린접되여있으므로 하여 두 지방 인민들은 왕래를 자주하는 과정에 서로의 생활적련계를 깊이 하였다.
옛문헌《일성록》에서는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을 지나 곡산군 말흘탄(지금의 신평군)까지 배가 통하였다. 이곳 화총면 장평리는 량곡무역선들이 드나든 거점으로서 19세기초에 수백섬의 알곡을 무역하여 평양을 비롯한 강구의 증남포(진남포)로 내다파는 상인들이 적지 않았다고 전하고있다.(《일성록》순종11년 3월 1일)
황해도 재령군과 봉산군으로 흐르는 재령강은 삼지강부근에 이르러 은파천과 합쳐 다시 대동강과 합류된다. 지난 시기 재령, 봉산, 은파벌에서 생산되는 알곡들이 재령강을 통하여 대동강어구로 대량 반출되는 과정에 주민들의 생활적련계가 더욱 깊어졌으리라는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와 같이 서도지방은 평안도나 황해도를 막론하고 다같이 력사지리적으로 우리 민족의 발상지이며 고대문화의 중심지인 평양과의 생활적련계가 깊고 처음부터 같은 계급사회에서 생활을 하여온 공통성이 많은 지역으로서 자기의 고유한 지방적특성을 가진다.
이것은 력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황해도와 평안도지역이 일찌기 같은 서도지방으로 인정받고 취급되였다는것을 말하여준다.
서도지방은 우리 민족의 발상지로서 오랜 력사를 통하여 민속세태생활을 반영한 자기 지방의 고유한 민속음악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모든 예술이 다 생활속에서 나왔지만 특히 음악은 무용과 함께 직접 로동과정에서 나오고 또 로동과정에서 불리워온것으로 하여 그 어느 예술보다도 생활과의 련계가 깊다.》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더불어 기름진 땅과 아름다운 산천경개를 가진 살기 좋은 곳에 삶의 터전을 잡은 서도지방 인민들은 자연을 변혁하고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로동생활속에서 자기의 고유한 생활풍습을 가지게 되면서 일찌기 자기 지방의 고유한 민속음악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
서도지방의 민속음악은 서도지방 인민들의 근면한 로동생활과 생활풍습과의 직접적인 련관속에서 창조되고 불리워진 인민적인 음악이다.
모든 예술이 다 생활속에서 나왔지만 특히 민속음악은 인민들의 근면한 로동생활을 비롯한 다양한 생활풍습과의 직접적인 련관속에서 창조되고 불리워온것으로 하여 그 어느 예술보다도 생활과의 련계가 깊다.
자연을 변혁하고 사회를 개조하기 위한 사람들의 창조적로동생활과 인간관계에서 맺게 되는 여러가지 생활은 그에 따르는 생활풍습을 반영한 음악을 낳기 마련이다. 로동생활풍습, 세태생활풍습, 민속놀이생활풍습, 사회정치생활풍습 등은 그에 따르는 고유한 민속음악을 낳게 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