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소개

작곡가 브람스와 그의 창작활동

 

김 원

 

바흐, 베토벤과 함께 세계음악의 《3대거성》으로 불리우고있는 요한네스 브람스 (Johannes Brahms)는 19세기 후반기 도이췰란드 랑만주의음악의 대표적인 작곡가의 한사람이다.

브람스는 1833년 5월 7일 도이췰란드의 북부항구도시 함부르그의 빈민촌에서 함부르그시립관현악단 콘드라바스연주가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브람스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매우 사랑하였다. 아버지가 집에서 악기를 연주할 때면 놀이감도 다 내던지고 눈이 동그래서 쳐다보군 하였으며 학교에 가기 전에 벌써 마을에서 불리우는 노래들을 다 부를줄 알았다. 아버지가 임의의 노래를 지적해도 그는 맑은 목소리로 정확하게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놀래웠다. 아직 글쓰는 법과 읽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어떻게 하면 노래를 글처럼 쓸수 없겠는가를 공상해보던 브람스는 자기만이 알수 있는 악보체계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아직 이 세상에 5선지라는것이 있고 그 우에 선률을 기록할수 있다는것을 모를 때였다.

6살때부터 그는 아버지를 따라 자주 악단에 가서 바이올린과 첼로연주법을 배웠으며 때로는 아버지와 함께 연주회에도 참가하군 하였다.

아버지에게서 음악의 기초를 배운 브람스는 당시 함부르그의 이름난 음악교육자였던 에두아르드 마르크센에게서 음악교육을 받았다.

10살때 처음으로 어느 한 공개음악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여 청중들의 절찬을 받았으며 이때부터 함부르그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신동》이라고 불렀다.

브람스는 어린 나이에 한푼의 돈이라도 벌어 가정살림을 위해 애쓰는 부모들을 도우려고 악기를 메고 무도장을 찾아다니였다. 이 과정에 그는 도이췰란드의 인민음악과 도시음악(렌들레르와 그밖의 도이췰란드 무곡들, 대중가요들)에 접촉할수 있었으며 이것은 그의 앞으로의 음악창작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였다.

브람스는 15살때부터 작곡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 창작된 그의 작품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후날 그는 고향집에 들렸을 때 그 시기에 창작하였던 작품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20살이 되던 해에 브람스는 정든 고향을 떠나 마쟈르망명객인 바이올린연주가 에두아르드 레메니와 함께 연주려행의 길에 올랐다. 그들은 여러 도시들에서 베토벤의 바이올린쏘나타와 함께 마쟈르의 무곡과 가곡들을 가지고 순회공연을 하였다.

브람스는 레메니에게서 많은 마쟈르의 노래를 배울수 있었다. 그가 마쟈르의 음악에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 하는것은 유명한 《마쟈르무곡》이 잘 말하여준다.

브람스에게 있어서 이 연주려행은 유럽에서 이름있는 음악가들과 상봉할수 있는 좋은 기회로 되였다.

그는 와이마르에서 당시 유럽적으로 명성을 떨치고있던 리스트와 만났다. 그러나 고전음악가들의 창작원칙에만 매여달리고있던 브람스는 내용과 형식이 시문학적형상에 의하여 규정되는 리스트의 음악창작과 음악에서의 표제성, 쏘나타 《씨》소조를 리해할수도 평가할수도 없었다. 이들 두 사람은 그후에도 여러 음악축전들에서 만나는 기회들이 있었으나 서로 가까운 친구로는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에 마련된 브람스와 슈만과의 상봉은 전혀 다른 긍정적결과를 가져왔다.

브람스는 1853년에 마쟈르의 바이올린연주가 요제프 요아힘의 소개신을 가지고 듀쎌도르프에 있는 슈만을 찾아갔다.

당시 정신병으로 심한 고통속에서 모대기고있던 슈만은 브람스의 작품들을 보고 그의 음악적재능을 간파하였으며 젊은 작곡가의 재능을 칭찬하는 글을 써서 자기가 창간한 잡지 《음악신보》에 널리 소개하였다. 잡지에 실린 슈만의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의 론문은 브람스의 생애와 창작활동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였다. 이 론문으로 하여 브람스의 명성은 도이췰란드의 지경을 벗어나 다른 나라들에도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이 시기에 브람스는 피아노쏘나타 제1번 《도》대조, 피아노스케르쪼 《미내림》대조 등 여러편의 실내악과 가곡들을 창작하였다. 그리하여 와이마르파와 라히프찌히파 작곡가들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주시하는 대상으로 되였다.

1857년부터 1860년사이에 브람스는 데트몰드에서 생활하였다. 슈만이 사망한 이후 그의 창작문제를 둘러싸고 라히프찌히파와 와이마르파사이에 론쟁이 벌어졌는데 이때 브람스는 출판물에 와이마르파를 비난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큰 후과를 빚어냈다.

많은 음악가들이 브람스와 견해를 달리 하였으며 특히 와이마르파의 중심적인물이였던 와그너는 브람스에게 드센 공격을 들이대였다. 이것으로 하여 브람스의 창작은 응당한 평가를 받을수 없었다. 1859년 1월 라히프찌히에서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제1번이 연주되였으나 비참하게 실패하였다.

1860년부터 1862년까지 브람스는 고향도시 함부르그에서 녀성합창단을 지휘하면서 여러편의 합창곡들을 작곡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도이췰란드음악의 전통을 고수하려는데로부터 도이췰란드민요와 윈고전주의음악연구에 큰 힘을 기울이였다.

1862년 9월부터 브람스는 하이든과 모짜르트,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음악활동을 벌리였던 유럽의 음악중심지 오스트리아의 윈에 거처를 정하고 창작활동을 진행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첫 작품으로 고향을 멀리 떠나 향수에 잠겨 모대기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랑만적으로 펼쳐보인 4성부 가곡 《고향에 부치여》를 작곡하였다.

다음해 브람스는 윈합창단 악장으로 되였으나 여러가지 일감이 많이 제기되여 창작할수 있는 시간이 없었으므로 그 자리를 포기하고 창작에만 전심할수 있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다녔다. 이 시기에 그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를 추모하여 《도이췰란드진혼곡》을 창작하였다. 이 노래는 지금까지 창작된 《진혼곡》들중에서 가장 애절한 선률을 가진것으로 하여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추도곡으로 리용되고있다. 이 작품으로 하여 브람스의 명성은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되였다.

라이프찌히, 브레슬라우, 뮨헨 등 도이췰란드의 여러 도시들에서는 브람스음악감상회가 조직되였고 영국에서는 그의 음악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또한 네데를란드에서 보내온 초청장을 받고 그는 1876년 이후부터 그 나라에서 여러차례 순회공연도 하였다.

40대에 들어서서 브람스는 《음악친우회》회장으로 있으면서 이 조직이 주최하는 교향악연주회들을 지휘하는 한편 창작활동도 활발히 벌리였다.

이전까지 그는 가곡들과 피아노음악들, 실내악을 기본으로 작곡하였지만 이 시기에 와서는 4편의 대교향곡과 2편의 피아노협주곡, 1편의 바이올린협주곡 등을 창작하였다.

자기에게 음악에로의 길을 열어준 슈만의 은혜를 잊지 않고있던 브람스는 슈만처럼 새 세대들을 내세우고 그들의 재능을 출판사에 소개하는 사업을 중단없이 진행하였다.

이 시기 그가 내세우고 관심한 음악가들중의 한사람이 체스꼬작곡가 드보르쟈크이다. 브람스는 자기의 어린시절을 생각하여 가난한 가정의 출신인 드보르쟈크에게 학비도 대주고 그의 작품이 인쇄될수 있도록 출판사에 소개도 해주었다.

브람스는 또한 윈음악가협회에서 예술총재직과 지휘자를 겸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윈고전주의음악의 선배들이 마련해놓은 전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바흐와 하이든, 베토벤의 작품들을 다시 무대에 올렸으며 자기의 창작활동도 그에 기초하여 진행하였다.

브람스는 1874년에 프로씨아예술아까데미아 명예회원으로 선출되였으며 1879년에는 브레슬라우종합대학 명예박사칭호를 수여받았다. 그의 사회적권위와 명예는 비상히 높아졌으며 이에 대한 사례로 창작된 작품이 《대학축전서곡》이다.

1889년 브람스의 고향도시 함부르그에서는 그에게 명예시민칭호를 수여하였다. 이날 그는 눈물이 어려와 앞을 가려볼수 없었다고 한다. 그 옛날 함부르그의 빈민촌에서 맨발로 뛰여다니며 음악을 배우던 일, 한밤중에 주막집 문앞에서 악기를 연주하여 푼전을 동냥하던 잊지 못할 그 어린시절이 떠올랐기때문이였다.

이해에 브람스는 감기를 심하게 앓은 후부터 기력이 약화되면서 점차 창작력을 잃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해부터는 거의나 작품을 창작하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주로 지난 시기의 미완성작품들을 더 다듬고 정리하는 일만 하였다.

브람스의 건강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였으며 1896년에는 가장 친근한 벗인 슈만의 미망인 클라라가 세상을 떠나자 또다시 강한 정신적충격을 받았다. 그는 클라라와 영결하면서 그의 딸들에게 주는 4편의 가곡을 창작하였다.

그 이후 놀라운 정력을 발휘하여 병든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면서 1897년 1월부터 3월까지 윈에서 열린 음악회에 여러번 참가한 브람스는 다시 병석에 누워 더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1897년 4월 3일 요한네스 브람스는 일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64살에 간암으로 윈에서 생을 마치였다. 그의 시신은 윈중앙공동묘지에 있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묘곁에 안치되였다.

브람스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도시 함부르그에서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모든 배들에 조기를 띄우고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브람스는 도이췰란드고전음악전통의 철저한 계승자였다.

그는 문예부흥기로부터 19세기 전반기 슈만에 이르는 도이췰란드의 고전음악을 깊이 연구하고 그 전통에 의거하여 자기 시대의 새로운 민주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음악작품을 창작하려고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의 음악에서는 바로크시기의 음악, 윈고전주의음악과 련결된 형상들이 특징적으로 나타나고있다. 사람들이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을 들으면서 베토벤의 교향곡 제10번으로 느꼈다는 사실은 그의 창작이 고전음악전통과 밀접히 련결되여있었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말하여준다.

브람스는 다른 음악가들이 새로운 표현수단과 수법들을 탐구하면서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표제음악창작에로 지향하고있던 시기에 그에 맞서 객관적인 창작태도를 가지고 옛형식을 그대로 리용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랑만주의문학예술의 특징으로 되였던 풍부한 서정성은 브람스의 음악에서도 결코 례외로 되지 않았다.

브람스는 도이췰란드민요에 대해서도 각별한 애착을 가지고있었다. 하기에 그의 작품은 어느것이라 할것없이 모두 민요의 선률에 기초하고있다.

브람스는 다른 나라의 민요들에 대해서도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 않았다. 때문에 브람스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편견이 없고 객관적인 음악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라이프찌히에서 브람스와 만난적이 있는 챠이꼽스끼는 브람스의 성실성, 열정적인 창작활동과 확고한 창작적신념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그의 음악작품들을 높이 평가하였다고 한다.

그는 인민의 음악적재능을 인정하고 도이췰란드와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나라 인민음악, 특히 무곡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창작에서 그 특징을 다방면적으로 살려 썼다. 20년 가까운 오랜 기간에 걸쳐 창작된 21편의 《마쟈르무곡》만 놓고 보아도 그가 생기발랄하고 선명한 인민음악의 우수한 특징을 솜씨있게 구사하여 얼마나 생활애호적이고 대중성있는 음악을 창작하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브람스는 일생동안 4편의 교향곡, 2편의 소야곡, 2편의 피아노협주곡, 3편의 현악4중주, 2편의 현악5중주, 2편의 현악6중주, 3편의 피아노쏘나타를 비롯하여 수많은 피아노소품들과 합창곡들, 간주곡, 실내악들과 광상곡들 그리고 200여편의 가곡들을 창작하였으며 수많은 민요들을 다듬어 도이췰란드음악의 보물고를 풍부히 하였다.

브람스는 유럽에서 퇴페주의음악조류들이 발생발전하고있던 시기에 활동하였으나 사실주의적립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고전전통에 대한 숭배와 인민음악에 대한 애착이 있었기때문이였다고 말할수 있다.

요한네스 브람스는 북부도이췰란드적인 웅장함과 윈적인 밝고 명쾌함 그리고 고전음악전통을 하나로 융합시킨것으로 하여 유럽의 음악가들의 창작활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음악유산들은 오늘도 세계의 많은 음악전문가들과 애호가들의 각별한 관심속에 널리 연주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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