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연도중에 병원으로 실려간 명배우 석금성
석금성은 1920년대 중엽에 우리 나라 연극무대에 등장한 인기배우였다.
그는 토월회, 조선연극사, 미나도좌, 신무대, 태양극장, 신건설, 신흥극장, 극예술연구회 등 여러 극단을 옮겨가며 무대생활을 하였다. 그것은 당시 일제의 거듭되는 탄압과 자금난으로 하여 극단이 조직된다하여도 인차 해산되군 하였기때문이다.
이 시기는 녀배우들이 귀한 때였다. 1910년대에 여러 극단들이 존재하였지만 녀배우가 없어서 남자들이 녀역을 대신하다가 1918년에 취성좌의 마호정이 우리 나라의 첫 녀배우로 등장하면서부터 녀자들이 녀배역을 담당하였다.
당시 석금성은 연기와 화술, 키와 몸매, 생김새가 구비된 배우로서 인기가 있었다.
그는 라운규, 심영, 최승일과 함께 미나도좌와 신무대에서 중역배우로 활동하였지만 일제의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검열》로 인한 거듭되는 탄압속에서 눈물겨운 배우생활의 나날을 보내고있었다.
이 시기 석금성은 카프작가 최승일과 가정을 이루었는데 맏딸이 태여나던 이야기를 통해서도 그 시기 배우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가 하는것을 알수 있다.
1930년대초에 이르러 신흥극장은 갑오농민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리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사전 《검열》에서 연극대본이 《불온색채농후》라는 리유로 기각되자 할수 없이 1920년대 중엽에 공연한바 있는 프랑스 작가 듀마의 소설을 각색한 《동백꽃아가씨》를 다시 공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녀주인공의 역을 담당할만 한 배우가 없었다.
특히 10분이상이나 걸리는 녀주인공의 긴 독백을 처리할 녀배우는 석금성밖에 없었다. 그런데 석금성은 해산을 한달 앞둔 임신부여서 출연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신흥극장이라는 연극단체가 계속 존재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운명의 기로에서 못하겠다고 거절할수도 없었다.
석금성은 하는수없이 불편한 몸이였지만 번역극 《동백꽃아가씨》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였다. 그는 항라(꼬임비단천의 하나)로 만든 빳빳한 의상을 입었기때문에 관객들은 주인공이 임신부라는것을 몰랐다. 그는 화술과 연기, 체모가 구비된 명배우였기때문에 첫 공연에서부터 자신이 맡은 역형상과제를 훌륭히 수행하여 관객들의 절찬을 받군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공연도중 창조집단을 도와주던 극작가이며 연출가인 박승희가 무대에 나와 관객들에게 《손님 여러분! 공연도중에 막을 내리지 않으면 안될 긴급한 사정이 생겼습니다. 주인공이 마지막독백의 대사를 하고있을 때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는데 2층에서 연극을 관람하던 한 관객이 사과알을 무대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 사과알이 주인공의 배우에 떨어져 급소를 맞고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급히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이런 사정으로 하여 부득이 공연도중에 막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습니다. 손님 여러분, 량해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한편 이날의 공연에서 뜻하지 않게 급소를 맞고 병원에 실려간 석금성은 조산하였는데 그 조산아가 바로 오늘 우리가 잘 알고있는 작가 최로사이다.
이렇듯 일제의 강점하에서 눈물겨운 배우생활을 하던 석금성은 8. 15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일제를 대신하여 남조선에 기여든 미군이 모든 통수권을 거머쥐고 주인행세를 하고있는 조건에서 살아나갈 길은 여전히 막막하였다.
더우기 엎친데덮친격으로 남편이 공화국북반부로 갔다고 하여 경찰서에서는 극장에 석금성에게 주역을 맡기지 말것을 강박해나섰다. 이렇게 되여 겨우 생계를 부지해오던 석금성은 배우생활을 그만두지 않을수 없었다.
이 시기 숙명녀자고등중학교에 다니던 최로사는 어머니가 극장을 사직하자 이제는 자기가 가정을 떠메고 나가야한다는 결심밑에 어느 한 극단에 찾아가 배우로 받아줄것을 간청하였다.
극단에서는 최로사가 공화국북반부로 간 카프작가 최승일의 딸이라는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들도 해방전에 석금성과 함께 나라를 잃은 식민지민족의 설음을 나누며 수난속에서 연극과 영화에 출연하던 사람들인지라 곤경에 처한 그의 살림에 다소나마 보탬이 될가하여 계약금부터 먼저 주었다.
이날 계약금을 받아든 최로사는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를 도울수 있다는 기쁜 마음으로 돈을 내놓았다.
《너 이게 웬 돈이냐?》
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어머니는 그만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너 배우가 무엇인지 알기나 하니? 돈의 희생물이 되는 노리개야! 노리개! 그래 내가 배우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알기나 하니? 안된다! 안돼!》
어머니는 그 길로 딸이 받아온 돈을 극단에 돌려주고 계약을 취소해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한달이 지나 최로사는 어머니에게 공화국북반부로 갈 결심을 조용히 터놓았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되고있었는데 그이의 정치는 고목에도 꽃을 피우는 그런 정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일제통치하에서 착취와 압박을 받아오던 우리 인민의 마음속에 봄이 오고 꽃이 피는 애국애민의 정치를 하신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최로사는 여러날동안 생각하던 끝에 드디여 위대한 장군님께서 계시는 평양으로 갈것을 결심하였던것이다.
딸의 이야기를 듣고 난 어머니는 자신도 그런 생각을 하고있었다고 하면서 쾌히 수락하였다.
그 시기 석금성은 자녀들과 함께 북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운신 못하는 시아버지가 병환으로 누워있었기때문에 떠날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어머니와 자식들은 서울역에서 눈물로 헤여졌다.
공화국의 품에 안긴 최로사는 그처럼 소원하던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다가 전쟁시기에는 인민군대에 입대하였으며 적들과의 치렬한 싸움의 나날에 가사 《샘물터에서》를 창작하였다. 이 작품은 오늘도 사람들속에서 널리 애창되고있는 명곡의 하나로 되였다.
자녀들과 헤여지면서 석금성은 딸에게 배우나 작가는 되지 말고 상업전문학교 같은것을 졸업하여 살아나갈 생업의 토대를 마련하라고 하였다.
그것은 석금성자신이 착취사회에서 미모의 녀배우는 권력자들이나 유지들의 유흥의 희생물이 되여 종당에는 타락의 길을 걷는것을 일상적인것으로 보아왔기때문이였다.
그러나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령도를 받는 우리 공화국에서 배우는 신성한 예술의 창조자로서 국가적인 혜택과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며 보람있는 생활을 누리고있으며 더우기 작가는 인간정신의 기사로서 사람들의 고상한 정신세계를 그리는 인간학의 탐구자들이며 신성한 창작가들로 되고있다는것을 당시의 석금성으로서는 알수가 없었다.
그렇기때문에 최로사는 어머니가 그토록 만류하였지만 평양대극장에서 소개자로 활동하면서 시와 가사들을 창작하였다.
그는 여러차례에 걸쳐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을 모시고 공연하는 영광의 무대에서 소개자의 영예를 지니였다.
그리고 사상예술성이 높은 명가사들을 많이 창작하여 경애하는 장군님의 여러차례의 치하의 말씀을 받고 접견을 받는 최대의 영광을 지니였으며 영예의 김일성상계관인으로 자라났다.
또한 석금성의 아들 최호섭 역시 은혜로운 당의 품속에서 무용가로, 안무가로 근무하다가 금성학원에서 어린이들에게 민족무용을 배워주는 교육자로, 안무가로 창작사업에 열중하고있다.
하지만 이들의 어머니 석금성은 이 모든것에 대해 모르고있었다.
아마도 어머니가 오늘 이들의 예술적재능과 창작기량을 보았다면 놀랐을것이다.
석금성은 아들딸을 북으로 보낸 후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에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오려고 하였으나 그때는 자신이 병석에 누워있는 몸이라 떠날수가 없었다.
그때로부터 수십년세월이 흘러간 1990년대 초의 어느날 일본에 있는 친척을 찾아 도꾜로 갔다가 그는 뜻밖에도 평양에서 발행되는 신문과 잡지, 화보와 달력을 통하여 딸 최로사가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보살피심속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가 되였다는것과 아들은 무용창작가, 교육자로 보람있는 삶을 누리고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멀리 일본땅에 와서 수십년만에 자식들의 소식을 알게 된 그는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초상화를 우러러 큰절을 올리면서 아들딸을 작가로,
예술가로 키워주신 고마움에 거듭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그후 서울로 돌아온 석금성은 자식들을 만날 그날을 위하여, 하루빨리 조국이 통일되기를 간절히 빌고 빌다가 1995년 9월 5일에 사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