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적인 노래들을 지어부른 서도명창

 

김관준, 김종조부자

 

 

박사, 부교수 장영철

일제침략자들의 식민지통치로 하여 우리 인민이 최대의 민족적비운을 겪던 수난의 시기에 애국애족의 일념을 안고 세대를 이어 노래를 불러온 명창 부자가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김관준과 그의 아들 김종조였다.

이들이 활동한 20세기초부터 1940년대초에 이르는 시기는 조선을 불법강점한 일제침략자들이 력사상 류례없는 파쑈적식민지통치수법과 조선인민을 영구말살하기 위한 악랄한 민족동화정책을 실시하면서 항일혁명가요들을 비롯한 반일애국적인 노래들은 물론 고유한 민요들까지도 향토애, 민족애를 고취한다고 금곡딱지를 붙이며 무지하게 탄압하던 수난의 세월이였다.

그러므로 망국의 슬픔을 안고사는 겨레의 가슴속에 민족의 넋이 어린 향토적인 민요가락들과 함께 우리 인민의 굴함없는 반일투쟁정신과 일제의 야만적폭행 및 략탈행위를 단죄하는 노래들을 지어 대중들속에 가창보급하여온 이들의 음악활동은 일제시기에 진보적인 음악가들속에서 전개된 애국적인 민족음악창조보급활동의 한 고리로서 당대와 후세의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김관준은 1870년대말경에 평안남도 룡강군 안골에서 태여나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에 이르는 기간에 활동하였다.

가난한 빈농가의 장남으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하며 자랐고 남의 집 머슴살이도 하였다.

그가 나서자란 룡강은 예로부터 인민들의 로동과 생활정서를 구수하게 담은 룡강기나리룡강타령을 비롯한 우수한 민요들이 많이 나온 지방으로서 관서지방 민요고장의 하나로 이름이 났었다.

김관준은 어릴적부터 농군들이 부르는 구성진 노래들을 듣고 익히며 명랑하고 활달한 성격이 짙은 서도민요가락들에 심취되군하였다. 하지만 빈곤한 가정형편과 고용살이를 당하는 불우한 처지에서 소리공부를 해본다는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였다.

이러한 김관준의 희망과 재능을 보고 그에게 소리를 가르치며 이끌어준 사람은 계장화였다.

당시 룡강일대에서 명창으로 소문났던 계장화는 김관준이가 좋은 목청과 소리군의 기질을 타고났으나 가난과 종살이에 매여 소리 배울 생각을 못하는것을 보고 스스로 그를 맡아 서도소리의 창법과 민요가락들을 가르쳐주었으며 그가 명창으로 자랄수 있는 기초를 닦아주었다.

계장화의 지도밑에 김관준의 소리기량은 나날이 늘어갔으며 얼마후에는 안골과 린근마을들에 소리군으로 알려질 정도로 높아졌다. 특히 단오놀이, 추석놀이 등의 민속놀이들과 잔치집, 환갑집들에 불리워가 노래를 하며 관객과 교감하는 과정에 그의 기량과 형상력은 몰라보게 발전해갔다.

김관준은 25살되던 1900년대 초엽에 자기의 성악기량을 더욱 련마할 결심을 안고 평북도 녕변의 약산동대에 올랐다.

약초가 많고 약수가 난다하여 약산이라 부르는 이곳은 예로부터 소리공부에 뜻을 둔 사람들이 찾아와 백가지 약초와 약수, 맑은 공기를 마시며 목소리를 다듬고 세련시킨 후에야 명창으로 이름을 날렸다는 유명한 고장이였다. 그래서 관서를 비롯한 전국의 여러 곳에서 온 명창들과 가객들이 부르는 노래소리, 시소리가 사철 그칠줄모르는 산이라는데서 이곳을 가리켜 가산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김관준은 이러한 약산동대에서 약수와 맑은 공기를 마시며 근 1년간 목청과 창법을 더욱 세련시켰고 서도소리의 가창기교들을 련마하였다.

이후부터 김관준은 그의 노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사회적평가가 높아짐에 따라 직업적인 가수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고향 안골을 벗어나 룡강, 강서일대와 평양, 남포, 증산 등지에로 활동무대를 넓히면서 룡강기나리룡강타령,수심가를 비롯한 이름난 서도민요들을 주요가창종목으로 삼고 소리무대들을 펼쳐나갔다. 이 시기에 그는 배뱅이굿》을 부르면서부터 가창명수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배뱅이굿은 서도지방의 고유한 음조와 창법에 기초하여 창작된 판소리의 한 형태였다.

일부 사람들이 이 작품을 20세기초에 김관준이가 창작한것으로 잘못 알고있는것은 바로 김관준을 통하여 이 작품의 가창보급이 널리 성행하였던것과 관련된것이라고 보아진다.

미신행위에 빠지다못해 나중에는 거짓무당에게 속아 가산을 다 탕진하는 어리석은 량반가정의 몰락상과 무당들의 미신행위의 허황성을 풍자폭로한 배뱅이굿은 원래 김관준보다 앞선 세대 즉 계장화를 비롯한 전세대명창들의 활동시기인 19세기 말엽에 서도가수들속에서 오랜 구전설화에 기초하여 창조되였던 작품이다.

그러나 계장화 등이 활동하던 시기에 배뱅이굿은 아직 완결된 작품으로서의 체모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것으로서 널리 가창보급되지는 못하였다.

김관준은 계장화를 통하여 배뱅이굿을 전수받은 후 그 내용과 가락들을 다듬고 보충하면서 자기의 가창활동의 주요종목으로 삼았다.

그는 1910∼1920년대기간에 주로 평양, 남포와 같은 번화한 도시들을 활동무대로 삼고 가는 곳마다에서 배뱅이굿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가 한 난봉군청년이 박수무당(남자무당)으로 가장하고 배뱅이네 집 가산을 털어내는 굿판을 형용한 대목들을 세련된 가창기교와 재치있는 풍자적형상으로 엮어나갈 때면 온 장내가 들썩거리며 폭소의 절정을 이루군하였다. 특히 죽은 사람의 을 대신한다고 하는 넋두리소리에 무당의 춤가락을 곁들여가며 소리판을 벌려가는 그의 소리와 연기가 어찌도 진실하였던지 청중들은 진짜 박수무당이 굿판을 벌리는가고 의심할 정도였으며 무당들은 그의 소리를 듣고 혀를 차며 피하리만큼 실감이 컸다고 한다.

김관준의 가창활동을 통하여 미신행위를 풍자폭로한 배뱅이굿이 널리 알려지고 그에 대한 관중들의 관심이 커감에 따라 적지 않은 서도민요가수들이 그에게서 배뱅이굿》을 배워 서도일대의 여러곳에서 이른바 배뱅이소리판을 벌려나갔다. 그리하여 서도지방에 고유한 가락과 창법에 기초하여 판소리형식으로 창조된 배뱅이굿은 이 시기 평양의 김배뱅이(김관준의 아들 김종조), 최배뱅이(최순경) 배뱅이와 결부되여 불리우는 이름난 서도명창들에 의하여 서도일대에 널리 퍼져갔고 1930년대에 전곡이 레코드에 취입되여 전국에 알려지게 되였던것이다.

20세기 초엽 김관준의 음악활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것은 서도긴잡가 안중근가를 비롯한 반일애국적주제의 노래들을 창작보급한것이다.

안중근가의 가사는 원래 독립군출신의 한 애국지사가 지은것이였다.

어느날 김관준의 집으로 일제의 마수를 피해다니던 한 애국지사가 찾아왔다. 나라를 빼앗은 일제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안고 반일투쟁의 길에 나서서 구국운동도 해보고 실패의 쓰라림을 안고 땅을 치며 통탄도 하였던 그는 하얼빈역에서 일제의 침략괴수 이또 히로부미(이등박문)놈을 단호히 처단한 안중근의 애국적소행을 전해 듣고 그를 찬양한 안중근가의 가사를 지어가지고 명창으로 소문난 김관준을 찾아왔던것이다.

그런데 김관준과 인사말도 변변히 나누기도 전에 그를 추적하던 일제경찰의 습격이 뒤따르자 그는 이 가사를 그대만이 살릴수 있으니 꼭 노래로 성공시켜주시오.라는 부탁을 남기고는 이름도 밝히지 않고 뒤문으로 빠져 종적을 감추었다.

이렇게 되여 안중근가의 가사를 받은 김관준은 안중근의 반일애국투쟁의 구체적내용을 서사적으로 엮은 가사에 알맞게 노래를 긴잡가형식으로 창작하였다. 그는 서도지방 인민음악의 고유한 음조와 선률서술방법에 기초하면서 곡조의 구성을 잦은모리장단과 양산도장단을 배합하여 가사의 극적줄거리에 따라 통쾌한 감정과 애절한 정서가 흘러넘치도록 꾸며나감으로써 노래에 열렬한 애국심과 일제에 대한 증오감이 흘러넘치게 하였다.

김관준은 1920년을 전후하여 이 노래를 부르며 대중과 함께 망국의 서러움을 나누기도 하고 반일항쟁의 의지와 열정을 터치기도 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노래하는 애국애족적인 민요가수로 등장하였다.

그의 음악활동에서 안중근가의 가창은 매우 위험한 일이였다.

당시 일제가 이러한 노래들을 사상가라고 치부하면서 첫째가는 탄압대상으로 삼고 그 창작가와 가창자들을 무지막지하게 탄압하던 조건에서 안중근가를 공개적인 공연종목으로 할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 노래를 비롯하여 사상가들을 부를 때면 청중대상을 믿을만한 사람들로 택하여야 하였고 그것조차 문밖이나 주변에 파수군들까지 세워놓고 경찰의 눈을 피해가며 부르군하였다.

김관준은 일제경찰의 탄압과 박해속에서도 이러한 노래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반일정신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1920년대 말엽 운명을 앞두고 아들에게 이 노래를 가지고 사람들을 각성시켜달라.는 유언을 남겼었다.

20세기 초엽의 대표적인 서도명창의 한사람인 김관준이 지녔던 애국적열정과 음악창작 및 성악적기량은 아들에게로 그대로 물려져 김종조 역시 아버지에 못지 않는 뛰여난 서도명창으로, 창작가로 명성을 날렸다.

김종조는 1898년에 룡강군 안골에서 태여나 일찌기 아버지의 영향과 지도밑에 서도소리와 음악지식을 익히며 자라났다.

김관준은 아들이 커가자 그의 학식과 견문을 넓혀주기 위하여 평양숭실중학교에 보내여 공부하게 하였다.

김종조는 숭실중학교에서의 교육과정을 통하여 일정하게 학문과 식견을 넓힐수 있었으며 다른 한편 당시 평양일대에서 활동하던 애국문화운동가들의 영향을 받아 진보적인 사상과 견해를 가질수 있었다. 이것은 김종조가 자기의 가창활동에서 재치있는 즉흥성과 창작적능력을 발휘해가는데 기초로 되였으며 아울러 그의 모든 음악활동이 진보적이고 애국적인것으로 지향되도록 하는데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

김종조는 중학졸업후 1920∼1930년대기간에 평양에서 활동하면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애국적인 노래창작과 가창활동을 적극 벌려나갔다.

이 시기에 그는 수많은 서도민요가락들을 현실에 맞게 재창조하여 즐겨부르거나 전수보급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안중근가의 가창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의 사람들이 안중근가라 하면 제꺽 김종조를 꼽을 정도로 이 노래는 그의 애창곡으로 되였었다.

이등박문을 처단한 안중근의 애국적장거는 조선인민의 반일투쟁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일제가 그처럼 떠받들던 침략자의 두목을 일격에 황천객으로 만든것으로 하여 일제를 공포에 떨게 하였다. 그러므로 안중근의 이러한 애국적활동을 찬양한 노래가 사람들속에 보급전파되는것을 일제가 얼마나 두려워했겠는가에 대하여서는 충분히 짐작할수 있다.

일제경찰은 안중근가를 부르는 김종조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감시하였고 그를 여러차례 검거투옥하면서 탄압과 박해를 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경찰은 김종조의 안중근가를 듣기 위한 각계층 인민들의 은밀한 노력과 김종조의 입을 완전히 막아낼수는 없었다.

김종조는 일제경찰의 눈을 피해다니며 평양, 룡강, 남포 등지에서 이 노래를 불렀으며 안중근가를 듣자고 청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백성이든 부자든 가리지 않고 기꺼이 응하군하였다.

그래서 어떤 유지들은 일제경찰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그의 소리를 듣기 위하여 대동강복판에 배를 띄워놓고 안중근가를 불러달라고 청하였고 또 어떤 부자들은 대문과 방문 몇개를 거쳐서야 들어갈수 있는 세겹집이나 똬리집의 제일 으슥한 안방에 장소를 정한 다음 집주변과 대문밖에 파수군들을 세워놓고 안중근가를 들었다고 한다.

김종조는 노래를 할 때 소리를 크게 내지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중간소리로 부르군하였다.

그러나 노래의 감정과 발림이 어찌나 실감있었던지 그의 노래를 들으며 울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그가 부르는 안중근가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평양일대에서 영향력이 있다는 유지들이 그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아 그를 감싸돌고 옹호해나섰기때문에 일제경찰들도 김종조를 마구 잡아들이기를 꺼려하였다고 하며 그 화풀이로 그에게서 안중근가를 배워 부르던 김윤식(김종조의 제자)을 체포하여 3년씩이나 옥살이를 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있다.

김종조의 애국적인 창작활동은 그가 가사와 곡을 지어부른 서도긴잡가 기성팔경을 통하여서도 잘 알수 있다.

기성팔경이란 예로부터 자연의 아름다움이 그림과 같고 인간의 아름다움이 꽃과 같아 명승의 강산으로 일러온 평양을 기성강산이라고 부르면서 평양의 아름답고 뛰여난 자연경개들을 이름난 명승고적들과 결부하여 팔경으로 부른데서 나온 말이다.

김종조는 긴잡가 기성팔경에서 평양의 절승경개들을 소개하는것과 함께 조상전래의 우수한 문화유적들을 파괴략탈하는 일제의 날강도적행위를 폭로하면서 청년들이 나라를 찾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야 한다고 호소하였다.

노래의 가사는 첫부분에서 청년들이 평양에서 태여나 기성팔경을 모르는것은 옳지 않다는데 대하여 강조하고 부벽루의 보름달구경, 영명사의 종소리, 대동강가에 어리는 릉라도의 저녁연기(안개를 의미함) 등 평양의 아름다운 자연경개와 풍치들을 노래하면서 창작가가 의도한 기본주제(중간부분)로 넘어간다.

중간부분의 가사를 보면 아래와 같다.

 

애련당을 구경하러 대동문안 들어서서

어떤 로인한테 묻는 말이

여보시오 로인장님 애련당이 어디메요

그 로인이 아무 대답없이 아래우를 훑어보더니만

백수풍진 두눈에서 진주같은 눈물을 방울방울 떨구면서

 

불쌍하다 청년들아 너희들은 조선에 살면서

세상이야 어찌 되든지 꿈속에서 논단 말이냐

애련당은 일본가서 악독한 공기를

들이쉬고있는줄을 왜 모르느냐

 

너희는 부모재산 상속하여 쓸데 못쓸데 랑비말고

선진문명 받아들여 우리 조선 빛내이는

주인공이 되는것이 대장부의 할 일이로다

 

애련당은 원래 련광정옆에 있었는데 1930년대에 일제침략자들이 헐어서 통채로 일본으로 옮겨갔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건축양식의 특성이 두드러진 이 집을 하나하나 분해하듯이 털어냈는데 그때 작업에 동원되였던 한 로동자가 너무도 분통하여 조립식 나무토막 하나를 감춘것을 모르다보니 그 략탈자들이 일본에 옮겨 다시 조립할 때 없어진 토막부분을 맞추지 못하여 무척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러한 대목에 이어 마감부분에서는 보통문 송객정아 리별이 많다고 서러워말라이제 가며는 언제 올지 기약하기 어렵구나라고 정든 사람들과 리별하여 서북간도의 낯선 고장으로 류랑의 길을 떠나는 당대 인민들의 눈물겨운 신세를 통탄하면서 조선의 독립과 행복한 생활에 대한 지향을 백일청천에 떠오는 저 기럭아 만능평화를 실어다 우리 조선반도에다 가져다주렴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하면서 끝을 맺고있다. 가사에서 보는것처럼 기성팔경은 평양의 이름난 자연경개와 략탈당한 문화고적에 깃든 가슴아픈 사연 등을 사실그대로 반영하면서 청년들이 우리 조국을 찾고 빛내이는 주인공이 될것을 열렬히 호소하고있다.

김종조는 이 노래를 안중근가와 함께 자기의 주요가창종목으로 부르고 전수보급하면서 사람들속에 나서자란 고향산천에 대한 애착심과 조국애, 이 땅을 침략하고 강탈행위를 일삼는 일제에 대한 증오심과 반항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김종조는 일제의 식민지통치로 인한 민족수난의 시기에 향토적인 정서가 강한 민요와 잡가 등을 즐겨부르면서 도탄에 빠진 인민들의 가슴속에 민족의 넋을 심어주군하였다.

그는 미신타파를 위한 일종의 사회풍자적내용을 담은 서도판소리 배뱅이굿을 뛰여나게 잘 불러 당대의 사람들속에서 김종조라는 이름보다 김배뱅이라는 별호로 많이 불리웠다.

김종조는 자기의 높은 성악적재능과 기량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고 기쁨을 주는것을 락으로 여겼으며 노래를 통하여 당대사람들의 추억속에 깊은 자취를 남긴 명창이였다.

그가 풍치수려한 대동강기슭의 련광정이나 길가의 다락우에서 또는 장거리에서 민요나 잡가를 부를 때면 오가던 사람들이 끝없이 모여들어 시름많던 마음들을 한껏 풀어헤치고 한바탕 웃음보따리를 터치군 하였다.

그러다가도 그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망국노의 처지를 담은 신세타령을 즉흥적으로 엮어나갈 때면 솟구치는 오열을 참지 못하여 가슴들을 두드리고 땅을 치며 설음과 울분을 터치군하였다고 한다.

그가 안중근가를 부른 죄아닌 로 두번이나 옥살이를 할 때에도 곁의 수감자들은 물론 간수들까지 그에게 일을 하지 말고 노래만 불러달라고 청하군하였다는 이야기도 그의 뛰여난 소리재능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로 전해온다.

김종조는 가창활동에서 재치있는 즉흥성으로 하여 더욱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군하였다.

그는 기성민요들을 부르는데서 대상과 환경에 맞게 가사를 즉흥적으로 엮어갔을뿐아니라 그에 맞게 선률가락들도 자유자재로 변화시켜나감으로써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새로운 정서적감흥을 느끼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가 문학적재능과 음악적환상력이 매우 비상하였음을 알게 해주는 동시에 노래를 부르는데서 일종의 구속적인 틀에 매이지 않았으며 항상 대중의 립장에서 그들과 같이 호흡하고 교감할줄 아는 재능있는 인민창작가, 명가수였음을 말해주고있다.

김종조의 노래들은 해방전시기에 제작된 여러 레코드판들을 통하여 전해오는것이 적지 않다. 그중에는 기성팔경, 승지평양, 물레타령, 신제수심가, 공명가, 장한몽 등이 있으며 서도판소리 배뱅이굿 4 8면으로 전곡을 취입해넣은것도 있다.

김종조는 식민지음악예술인들모두가 그러했듯이 일제의 탄압과 박해로 하여 파란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1940년대초 일제가 패망을 앞두고 더욱 악랄하게 감행한 조선민족음악에 대한 무지한 탄압정책과 들의 류행가나 군가만을 부를것을 강요하는 강압책동에 항거하여 가창활동을 중단하고 골방에 들어앉아 두문불출하면서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살기도 하였다.

이때에 얻은 질병으로 하여 김종조는 그렇게도 소원하였던 서도소리들을 해방된 조국땅에서 마음껏 더 부르지 못하고 1948년까지 병상에 누워있다가 50살나이에 일찌기 사망하였다.

이와 같이 김관과 김종조는 20세기초중엽기간에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물려가며 반봉건적 및 반일애국적 주제의 노래들에 대한 창작과 가창보급을 통하여 대중을 계몽각성시켜온 민족적량심과 애국심이 강한 서도명창들이였다.

일제의 포악무도한 식민지통치로 하여 나라도 인민들도 망국의 비운속에 수난을 겪던 그 세월에 민족의 넋과 애국심을 반영한 우수한 노래들을 지어부르고 보급전파하여온 이들의 음악활동은 인민들의 가슴속에 반일의식과 민족의 얼을 심어주는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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